임방(任埅.1640.인조 18∼1724.경종 4)
조선 숙종(肅宗) 때의 문신. 자 대중(大仲), 호는 수촌(水村), 본관은 풍천(豊川). 임의백(李義伯)의 아들. 일찍이 진사에 합격,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연구하고, 1671년(현종 12)에 창릉(昌陵) 참봉(參奉)으로 내외직을 거쳐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이르렀을 때 우암(尤庵)이 귀양 가고, 또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니, 벼슬을 버렸다.
1694년(숙종 20) 다시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가 되어 군자감정(軍資監正)⋅단양군수(丹陽郡守⋅사옹원(司饔院) 첨정(僉正)을 역임하고, 1702년(숙종 28) 63로 문과에 급제했다. 공조판서(工曹判書)⋅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1721년 건저(建儲)의 책을 찬정(撰定)할 때 유봉휘(劉鳳輝)가 무소(誣訴)를 올리고, 김일경(金一鏡)이 급서(急書)를 올려 정세가 일변한데다가 이듬해 봄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까지 있어서 여러 대신들은 물론이요, 구신(舊臣)들까지도 화를 입는 큰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이에 관련되어 함종(咸從)에 귀양 가서 다시 금천(金川)에 옮겨져 병사(病死)했다.
청렴정직하고, 의분을 참지 못하는 성질이라 남의 원망을 쌓은 일도 있어서 드디어 늙은 나이에 귀양까지 가게 되었으나 일상 <주역(周易)> <논어(論語)>를 탐독하고, 시를 읊으며 살았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자는 대중(大仲)이며 호는 수촌(水村) 또는 우졸옹(愚拙翁), 시호는 문희(文僖). 평안도관찰사 임의백(任義伯)의 아들이다. 1663년(현종 4)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재랑·장악원주부·호조정랑 등을 지냈다.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유배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단양군수⋅사옹원 첨정 등을 역임하였다.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영광군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임방이 세자시강원의 필선으로 임명을 받아 영광을 떠나게 되었는데 마침 전라병사 이석관(李碩寬)이 순무하는 길에 영광에 들렀다.
임방은 이미 군수의 직위에서 교체되었으므로 모든 마중 절차를 하나도 거행하지 않았다. 이석관이 군리(郡吏)를 잡아서 다스리니 임방이 노하여 병영(兵營)의 사람을 다스렸다. 또 이석관이 객사의 동헌에 들어가 머물려고 하자 임방이 자신이야말로 임금의 근시(近侍)로서 동헌에 머물러야 한다며 그를 몰아내었다.
이 일로 임방은 무신을 능멸하였다 하여 잠시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임방은 당시(唐詩)를 좋아하여 <가행육선(歌行六選)>, <당률집선(唐律輯選)>, <당아(唐雅)> 등의 시가집을 엮어 낼 정도로 풍류를 아는 인물이었으나 법률의 집행에 있어서는 빈틈없는 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여주에서 우거하던 임방은 밀양부사⋅대사성⋅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임방은 연잉군(延礽君, 뒤에 영조)의 세자책봉에 앞장섰다가 신임사화로 함종(咸從)에 유배되었고 금천(金川)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죽었다. 영조 즉위 후 복권되었다.
【임방 초상(任埅 肖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8호. 소재지 :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85 경기도박물관. 임방의 반신상은 1719~1720년경 당시 화원들이 제작한 기사계첩에 들어있는 초상화와 같으며 18세기 초반 문신초상화를 대표할만한 격조가 있다.
조선 중기 초상화의 특징인 의습처리, 좌안칠분면의 처리형식과 조선 후기 특징인 옷 주름의 음영처리 등을 보여주는 초상으로 조선 후기 초상화의 전초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저서】 <논어취분(論語聚分)> <수촌집(水村集)> <천예록(天倪錄)>
▲임방 초상
[출처] 조선 문신 임방(任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