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도 네 살 짜리 늦둥이 막네 녀석과 함께 삼문동 강변 둔치
로 산보를 나선다.
거의 매일 밤 틈만 나면 삼문동 둑길을 빠르게 한바퀴 걷는 것이
요즈음 나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인데,
내가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자 어느새 녀석이 낌새를 알아채곤
현관문으로 먼저 쫓아 나가서 자기 신발부터 챙겨 들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오늘의 목표는 수정할 수밖에 없다.
청구아파트 뒤 솔밭을 지나 둑을 넘으면 녀석은 제 세상을 만난 듯 철
봉에 매달려 보고, 그네에도 올라타 보기도 하고,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다가 힘에 겨우면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 숨을 돌려 쉰
다.
그때는 나도 하릴없이 녀석의 옆에 앉아 하늘의 별도 한참을 올려다
보고, 용두목 철교를 힘차게 내달리는 기차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가 기차의 칸수를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두울, 셋… 문득 옛날 생각이 난다. 아아! 그 때가 언제였던가!
시오 여리 밖에서 눈을 크게 떠 가며, 기차 칸을 세던 때가…
꿈을 꾸듯 몽롱하게, 지나가 버린 기찻길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상을 꿈
꾸던 때가…
35여년 전의 어린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내가 기차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4,5학년 때였다. 1970년대 초반,
그때는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내가 살던 농촌 동네는 겨울철을
나기 위한 초가집 이엉 갈아 입히기가 끝날 때까지 거의 1년 내내
바빴고, 어린 우리들도 학교를 파한 뒤에는 일손을 도와야 했다.
가을 새 짚단이 나올 때까지 소에게 먹일 쇠풀을 비닐 비료 포대기로
한두 포대기 베다 놓고야 나가 놀 수 있던 시절이었다. 낫질이 익숙치
않아 왼손 가락이 성하게 남아 있을 때가 거의 없었다.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왔다. 지동 뒤편에 있던 광산에서 오포 소리가
울리면 점심을 대충 챙겨 먹고, 오후 내내 동네 친구,형들과 떼를 지어
소를 몰고 동네 인근 산과 들로 쇠풀을 뜯기러 다녔다.
커다란 밀짚모자를 눌러서고,5,10원 용돈이라도 생겨 만화가게에서
빌린 만화책 한두 권 옆구리에 끼고 집을 나설 때면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소를 풀어 놓고 멱을 감기도 하고, 심심하면 쇠똥을 뒤져서 쇠똥구리를
잡기도 했다. 고무신에 물을 받아다가 쇠똥구리가 있는 구멍에 물을
붓고 기다리면 어김없이 쇠똥구리가 기어 나왔는데, 그때는 그게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서로 뿔이 큰 놈을 잡아다가 싸움을 붙여가며 지내다
보면 기나긴 여름해도 잠깐이었다. 때로는 십 여리 떨어진 먼 산(오례 뒷산)까지 쇠풀을 뜯기러 가곤
했다. 그곳은 산이 높고 앞이 탁 트인 곳이어서 높은 곳에 올라
읍내 쪽을 바라보면 용두목 철교를 지나는 기차가 보였다.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 기차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지나가는
기차는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누군가 “기차다!” 라고 소리 치면 일제히
시선을 돌려 지나가는 기차의 칸수를 세기 시작했는데,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기차의 칸수를 정확하게 세기는 쉽지 않았다.
서로 자기가 센 수가 맞다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나란히 앉아 기차가 나오는 터널입구를 주시하며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 10여 칸이 넘는 길다란 기차를 처음부터 끝까
지 세고 나면 마치 개선장군이 된 것처럼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기차를 타보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 어느 누구도 기차를 가까운 곳에서 본 적이 없었음이
틀림없다. 어린 나이였지만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벅차 올랐다. 저 기차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을까?
저 기차가 달려가는 끝은 어디일까?
나는 언제 저 기차를 타고 떠날 수 있을까?…
기차를 타고 떠나고 싶었다.
만화책 속에서만 보던 세상, 그 거대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뺑뺑이(추첨)를 돌렸다. 하필이면 집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중학교에 배정되었다. 시오리가 넘는 길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다. 사춘기가 시작되고…아동산 팔각정을
자주 올랐다.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며 또 떠나고 싶었다.
출가는 추구고 가출은 회피라고 했던가…
그러나 정작 떠날 용기가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기차를 타고 처음 서울로 갔다.
차비가 많이 든다고 밀양에서 서울까지 열 시간 이상 완행기차를
타고서야 서울에 도착했다.
1호선 전철도 처음 타보고…사람…사람…사람…
선생님도 학생들도 그곳에선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꼭 다시 오고 싶었다.
영화 ‘고래사냥’을 보고 대학생활을 해보고 싶었다.
그것도 반드시 서울에서… 대학생활, 그 자유분방함이 좋았다.
캠퍼스 안에 만발한 벚꽃에 취하고 알코올에 취하고…
서울과 밀양을 기차를 타고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5시간 정도 걸리는 특급열차 청룡.
그러나 야간열차는 6시간 정도 걸렸다. 혼자 타는 밤차는 정말
지겨웠으나 서울행 기차는 언제나 밤차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헤어져 낮 기차를 타고 떠나 올 수는 없었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떠나기만 하던 내가 남는 자가 되어 그 때를 다시 생각해 본다.
보내는 자, 남아 있는 자의 기분을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 동안 쉴새 없이 기차를 타고, 떠나고, 내렸다가 또 떠났다.
꿈을 찾아 떠났다. 때로는 떠나는 기차를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떠나기도 했다.
심지어는 달리는 기차 위에 자신이 타고 있는 사실도 모른 채
사는 때도 있었다.
부초처럼 떠다니면서도 언제나 그 뿌리는 이 곳 밀양 땅에 박아두고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고, 꿋꿋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나름대로 살만하게 되었고, 의미 있게 살아 보고 싶었다.
고향으로 돌아 오고 싶었다. 고향 밀양땅에 돌아온 지 어느덧 8년째 접어 들었다.
지금은 떠나가는 기차를 보고 길을 떠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제는 나만의 목적지를 향해 항해를 떠날 조그만 배 한 척을
준비해 보고 싶을 뿐이다.
|
출처: 오토피아 원문보기 글쓴이: 오토피아
첫댓글 이곳에 글쓰기가 잘안되어 브로그를 만들어 쓰고 이곳으로 다시 옮겨 왔습니다. 남의 글 보기만 하고 그냥 있자니 미안해서 ...써놓고 보니 좀 그렇네요. 공감할 사람이 좀 있을래나...ㅎㅎㅎ
추억을 제대로 끄집어 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넉넉한 시절은 아니였는데 ... 지나오면 왜그리 그리운건지...순수함 그것만이 가득해서 그랬을까?? 그리운얼굴들도 하나둘 떠나고 십년 몇십년만에 겨우 잠시 얼굴 한번 보고 지나가는 ... 삶에 스스로들 묶여서 어쩔수 없는거니..
광산이 지동 뒷편이었던가요...., 그시절 광산의 오포(대포)소리에 점심을 먹어려 집으로 가곤 한 기억이 살아 납니다.오토피아님의 글을 보노라면 많은 시간과 나날들이 순간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떠오릅니다. 소중한 삶 순탄하게 항해하시기 바랍니다.
오포소리란 단어 참 오랫만에 듣습니다....옛날 솔밭뒤 둑에서 같이 놀든 친구는 멀리(영원히 멀리) 가고 없는데? 아!
ㅠㅠ.........
오토피아님의 글에서 저의 유년의 시절도 함께 묻어 있음을 느낍니다. 살아온 날이 얼마지 않지만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게 아닌지..어려웠던 시절..지금 그때를추억할수 있음은 분명 충실하신 분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듭니다.
단아하게 추억의 느낌을 일구어주셧네요. 읽고 또 읽고....그 시절의 꿈으로 마음을 내어봅니다.
내가 살아왔던 지난 날들을 한번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잊고 지냈던 일, 잊고 싶었던 일,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일...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이제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을 일깨워준 작은 메세지였습니다. 올려주신 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