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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사랑의 頌歌
韓 吉 洙
날씨가 항상 맑으면 그 땅은 사막화가 된다. 바람도 불고 비도 가끔씩 와야 비옥한 땅이 된다.
밝고 명랑한 이 사회도 사랑이 무르익고 충만할 때가 있지만 때로는 사랑의 아픔이 없으면 메마르고 척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거룩한 선비들도 사랑을 알고 사랑을 하고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 글을 쓰고 시를 읊었기에 주옥같은 명문이 전해 와 우리들이 애송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시골한촌에서 우거한 탓인지 아리따운 여인에 대한 몽상이나 애틋한 감정이 비교적 더디고 유치해서 꺼내기조차 쑥스러운 내용들이
많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내재적인 감정이야 어찌 자라지 않을 수 있으랴!
초등학교에서는 한 반에 여학생이 20여명이 있었으나 철부지들의 쑥스러움이 앞을 가려 전연 어떤 감정의 표현도 없이 공책의 여백에다가 글로 쓰는 표현도 하지 못하고 순수하게 자랐다. 다만 <아무개가 아무개를 좋아 한다네> 하는 정도의 루머나 뜬금없는 낙서정도가 가끔 돌아다니기도 하였지만 촛불 앞의 잔잔한 바람에 지나지 아니하였기에 고요 그 자체가 유지되다가 흐지부지 되곤 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우리 반은 비교적 나이가 적은 B반인데 여학생이 한 30여명이 있었으나 그 흔한 노트한번 빌리는 일도 없고 돌려가면서 읽는 소설책 한권 빌리는 일도 없이 그냥 “내 떡 나 먹고 네 떡 너 먹기” 식의 개미가 바위를 자나가는 무관심의 연속이어서 어떤 스캔들도 없이 임자 없는 3년의 세월이 그냥 훌쩍 지나가 버렸으니 이건 허무함의 연속이었다고 말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나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때 길가에서 앞에 가고 있는 한반의 여학생들을 만나면 눈웃음으로 라도 인사를 나누는 게 아니라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뭐라고 말을 건넬 여지조차 없었으니 이건 완전히 숙맥들의 군상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우선 윗저고리 양어깨에 뻥을 넣고 바지는 면도날처럼 세우고 라이방을 쓰고 천하무적의 해병대인 냥 거리를 휩쓸고 다닌다. 우리야 아무리 흉내를 내어도 여학생이라고는 그림자조차 얼씬도 않는데 클럽을 만들어 행패를 부리는 어깨들, 일명 깡패들은 용케도 예쁜 여학생들을 꽁무니에 꿰차고 엉덩이를 흔들고 다녔으나 필자가 끼인 모임에서는 감히 그런 대열에 끼지도 못했고 생리적으로 구미에 맞지 아니하여 멀리서 구경이나 하면서 지냈다.
그러니 여복이나 염복이란 있을 수 없고 그저 멀리에 서서 남들이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구경이나 하고 있었으니 한심하다고 하여야 할 것인지? 아니면 멍청이라고 하여야 할 것인지?
초등학교에서는 필자의 선배이나 중학교는 후배인 외가로 형 되는 낙수라고 하는 학생은 이리농고에 다니면서 결혼을 하였다. 어느 토요일 고향집에 가면서 우연히 길가에서 만났는데 필자에게도 학생 신분일 때 빨리 결혼을 하라고 권유하고 있었다. 그 연유를 물어보았다.
“학생 신분이라면 가능성이 있는 세대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장래에 대하여는 아무도 모르는 미지수다. 그러므로 이때 결혼을 하여야 마음에 드는 신붓감을 취사선택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다 익은 뒤 말 하자면 학업을 마친 뒤 그 사람의 직업이 선망의 대상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이미 모든게 노출이 되었기에 장가가기가 힘들어 진다.”는 철학을 필자에게 강의를 했는데 일종의 개똥철학으로 들렸다.
그러다가 남들이 선망하는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늑한 전원도시 전주에서도 다가 산과 다가 공윈이 있는 中華山洞, 예수병원이 있고 기전여학교와 신흥고등학교가 있는 뒤편 소나무 숲속에 자리한 선친의 친구 분인 유 씨 집에 하숙을 정했다.
하숙을 하고 보니 맨 오른쪽 방 한 칸 부엌 한 칸에 전주여고 3학년과 신흥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남매가 자취를 하고 있었다.
여학생은 0양이라고 하는데 제 눈에 안경이어서 그랬는지 필자의 눈에는 아담한 키에 양쪽에 보조개가 있고 쌍 커플 눈 등 오랜 뒤에 혜성처럼 튕겨져 나온 영화배우 정윤희를 빼 닮은 상이었다. 이 남매가 오순도순 재미있게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고 있었다.
하루는 필자가 학교에서 늦게 돌아와 보니 하숙생들은 물론 자취생도 모두들 저녁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맑은 하늘의 별을 헤아려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필자에게 왜 이리 늦었느냐, 친구들과 술 한 잔 하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필자의 늦은 사유를 이야기 했다.
“사실은 오늘 우리 법정대학주관으로 교내 모의재판이 있었는데 내용은 선남선녀가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이 행복한 가정에 풍파가 닥쳐왔다. 남편이 자기 처가 바람이 나서 이웃 집 청년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이웃 총각의 자백으로 승소하여 본 부인과 이혼하였다. 부인이 아무리 결백을 주장하여도 증거가 없다고 받아드리지 아니하자 부인이 자결을 하였다. 부인이 자결을 한 뒤에야 총각의 거짓자백임이 밝혀져 부인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으나 이 시점에서 자결을 한 이 부인의 명예훼손, 인격모독과 행복추구권 등을 어떻게 구제할 수가 있느냐 하는 기가 막힌 내용의 모의 재판현장이 있었다”는 말을 하였다.
이때 이 이야기를 듣던 0양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필자는 이 모의재판 이야기와 연관된 무슨 다른 사연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가 없었다. 필자가 무슨 실수를 했나 아니면 좋지 않은 언사나 표현을 했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아 필자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자리를 피 했다.
그 얼마 뒤 일요일이어서 시내에 가서 목욕을 하고 왔더니 아주머니 방에 그 집 딸로 기전여고 2학년, 1학년에 다니는 보연이, 영자가 같이 앉아 무언가를 먹으면서 나를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어가 보니 0양도 앉아서 나에게 목례를 하였다. 내용을 알고 보니 어제 토요일에 0양이 임실 갈담에 있는 자기 집에 갔다가 옥수수와 감자를 가지고 와서 큰 솥에 쩌서 먹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필자도 한쪽을 차지하여 옥수수 한 자루를 맛있게 뜯는 일을 거들었다. 이때 0양이 필자에게 며칠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사과 겸 해명을 하였다.
0양과 동생은 임실 강진면 갈담이라는 곳에 사는데 할아버지는 임실 읍내에서 한약국을 하시고 아버지가 그곳 강진면장으로 있으며 삼촌이 면 직원으로 근무 중이라고 했다. 그런 단란한 가정에도 아픔이 있었으니 바로 엄마가 오래 전에 작고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무에 바쁜 아버지가 늦게 집에 돌아오면 깜깜한 방에서 동생과 둘이 얼싸안고 목놓아 운 때가 많았다고 한다. 필자가 모의재판에 대하여 이야기 하던 날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고 홀로 사시는 아버지가 불쌍하여 그렇게 서럽게 울었으니 너그럽게 이해를 해 달라고 덧붙였다.
항상 밝고 명랑하여 구김살이 없던 0양의 가슴에 그런 그늘이 드리워져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측은하고 안타까워 0양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연민의 정이 엇으리라. 그러면서 에피소드로 끝을 맺었다. “우리 면내 각 가정에 세금고지서가 나오면 우리 아버지 형제를 만날 때 마다 면민들이 ‘세금은 기필코 내야 돼, 아니 기한 내 내야 돼’ 하는데 아버지 성함이 기필씨 이고 작은 아버지 성함은 기한씨 이기에 이를 빗대서 면민들이 농담을 한다는 이야기도 보탰다.
며칠 뒤 밤이 이슥할 때 까지 책을 보다가 바람을 쏘이려고 밖으로 나왔더니 달빛은 휘영청 밝았는데 주변은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이곳은 통행금지와도 무관한 이방지대이어서 마음의 여유가 넉넉한 곳이다. 이 때 시 한수가 나오려는 순간 문소리가 나더니 0양이 밖으로 나왔다. 전주 유 씨 재실 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침묵이 흐르는데 갑자기 0양이 말문을 열었다.
“달은 왜 밝지요?” “그야 보름달이니까 밝지요” 물끼 없는 답변을 하니
“그러면 보름은 왜 있지요?” “그건 달이 밝으라고 있지요” 계속되는 어깃장에도 “사람은 어디로 가고 있지요?” “내가 빨리 가서 알아보고 알려 줄게요”
“ 우리 같이 가고 있는데 언제 먼저 갔다 온다는 말이에요”
“ 내일이 일요일이니까 오후 3시경에 이 뒷산으로 올라와요 그러면 궁금한 것을 알려 줄게요” 하고 헤어져 다음 날 오후 정한 시간에 산마루에서 0양을 만나 들꽃으로 꽃목걸이를 만들어서 목에 걸어 주었더니 자기가 마리아 앤더슨이라며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장날 마다 잉어가 나오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두 사람이 남의 눈도 의식해야 함으로 자주 만 날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하나의 계책을 찾아냈다. 대단한 아이디어감은 아니지 마는 나름대로 생각해 낸 굿 아이디어이었다. 사랑의 세레나데를 글로 써서 0양이 아침에 학교에 가는 길에 다른 편지와 함께 내밀며 “이 편지좀 학교 근처에 있는 우체국에 가서 부쳐주세요.” 하면 수취인이 자기로 되어 있는 편지는 자연스럽게 개봉할 것이 아닌가. 이건 사랑의 메신저이면서 수혜자(?)라고 하여야 할 것인지, 참 묘한 꾀돌이의 구상이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겨울 방학이 시작 되었다. 남의 눈이 있으니까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먼발치에서 쳐다만 보는 것으로 인사에 대하고 헤어졌다. 대학의 겨울방학은 아예 새 학기의 시작일 때에 끝이 난다.
그래도 좀 일찍 서둘러 2월 말경에 하숙집에 왔더니 0양의 방이 썰렁한 감이 들어서 저 끝집은 아직 오지 아니했느냐고 물으니 이 기막힌 이야기 좀 들어 보소, 0양은 2월 초에 졸업을 해서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 동생은 하숙집을 구해 어디론가 다른 집으로 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 참 낭패로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10년 적선이 나무아미타불이 된 격이 되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필자에게 눈치 빠른 보연이 영자가 입을 연다. 언니가 짐을 모두 쌓아 놓고서도 밖에서는 빨리 가자고 성화인데도 언니가 문밖만 주시하고 한참을 뜸을 드리고 앉았다가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랑의 이야기는 끝이 나는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의 송가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한명숙 가수의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사랑의 송가]를 듣고 싶다 . 아니 직접 부르고 싶다.
그 몇 년 뒤에 필자가 서울시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정말 우연히 0양의 동생을 길가에서 만났다. 자기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에 다니는데 미국에 유학가려고 서류 준비 중이라 바쁘다고 했다.
자기 누나인 0양은 졸업 후에 집안의 성화로 바로 결혼을 했는데 육군 중위와 혼인을 해서 남매를 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기가 막힌 말은 중위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기에 자기가 가정 교사역으로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에 갔다 왔는데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나 현재 이혼하여 누나는 혼자서 자녀 두 명을 기르고 있는데 전 남편이 돌봐주지를 아니해서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0양은 필자가 가슴에 간직한 아름다운 우상이었는데 그렇게 함부로 내동댕이쳐진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차라리 이 동생을 만나지 말거나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아니했으면 황홀한 추억으로 영원히 간직할 수도 있었으련마는 너무나 아쉬웠다.
그러면서 동생은 도리어 필자를 원망하고 있었다. 자기도 한집에 살면서 누나와 필자가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속으로 응원을 많이 하였는데 필자가 너무나 소극적이어서 일이 잘못 전개되어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0양의 처지가 참으로 안 됐고 너무나 불쌍했다. 그러나 나도 가정이 있는데 더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냥 잊고 지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얼마 뒤에 뜻밖에 0양이 필자를 찾아왔다. 10여년 만에 만나는 0양인데 많이 변했다. 두 아이를 기르느라 세파에 찌들고 풍파에 밀리다 보니 그리 된 것 같았다. 토요일 오후이어서 퇴근 하려는데 홀연히 나타났기에 우선 요기부터 시키고 다방에 가서 궁금한 이야기보따리를 끄르기 시작했다. 0양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스트레스를 받기에 별로 듣고 싶지도 아니했다. 그래도 자난 날의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었다.
현재 안양 어디에 산다는데 살림형편이야 물어 보고 싶지도 아니했다. 지난 꿈같던 이야기만 나누는데도 시간은 사정없이 빨리 지나갔다. 우리 마을 구의동까지 같이 와서 중국음식으로 저녁식사를 마쳤는데 그 당시의 교통편은 안양까지는 먼 거리였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시간은 달아나고 10시 통금시간이 촉박하였다. 우리 마을에는 여관시설도 없어서 강을 건너 천호동으로 안내하여 그곳에 유하도록 하고서 호주머니를 털어서 여비에 보태 쓰도록 한 뒤 통금 시간이 되었기에 필자는 지나는 백차를 얻어 타고서 강을 건너 집에 도착한 일이 있다.
이렇게 되면 필자의 행동을 의심하는 눈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지금 흔히 하고 있는 남녀 간의 악수조차 한 일이 없고 손금을 봐준답시고 손목한번 잡아 본 일이 없는 숙맥이어서 0양의 손은커녕 손톱도 건드리지 아니했다는 걸 명명백백히 밝히면서 다시 [사랑의 송가]나 부르고 싶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지금은 그대의 맘 변 했나
영원토록 변치 말자던 님의 말이/지금은 이슬같이 사라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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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운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