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동안 아둘람온라인공동체에 모든 것을 걸었었다. 행복하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는 꿰이커이다. 그래서 말의 향연이 힘들었다. 내 생각은 한 마디로 ‘무엇을 어떻게 믿든 무슨 상관인가? 행동이 중요하지’ 이다. 그러나 행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빛’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퀘이커이다.
일체의 기도, 찬송, 설교 없이 단순히 둘러앉아서 1 시간 동안 침묵을 하는 것이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훈련이 되면 침묵이 어느 거룩한 목사의 설교 보다도 더 효율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침묵에는 불편한 침묵도 있다. 그러나 퀘이커의 침묵은 자신을 가장 자유롭게 만드는 침묵이다.
아둘람은 개독의 시대에 기독으로 생명을 삶을 건지는 귀한 그물이다. 아둘람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길과 빛을 찾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에는 맞지 않아도 3년 동안 열심히 했던 것이다. 덕분에 아둘람을 통하여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사람을 믿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가 믿지 않아도 잘 계시기 때문이다.
20여 년간 귀국 할 때마다 퀘이커 모임에 나가서 인간적 관계가 깊어서 귀국해서 퀘이커에 나가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귀국 직후 아둘람을 잠시 쉬고 퀘이커에 나갔을 때 나이 먹은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거나 요양원에 가있고 가끔 새로 사람들을 목회적으로 돌보아줄 사람도 없어서 문 닫기 직전의 상황이라 나를 반기면서 퀘이커를 위해서 일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었기 때문이다. 이제 살고 봐야겠다.
내가 살고 봐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퀘이커를 살리고 보아야 하겠다는 말이다. 내가 퀘이커에 가서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잘 되고 있는 아둘람보다 잘 안되고 있는 퀘이커에 참여해야 하겠다는 뜻인 것이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하게된 계기가 있다. 아둘람에서 한 회원의 돌출행동과 편협한 막무가내 때문에 회원들이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을 제어할 사람이 가장 연장자인 나 말고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지쳤다.
그래서 아둘람은 누구 한 사람이 있어서 문제가 될 수는 있어도 없어서 문제가 될 일은 전혀 없기 때문에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고 떠나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