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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全國의 風景 돌아보기. 首都圈. 京畿南部(水原 華城)
水原 華城 -사적 제3호
水原市 八達區 長安洞에 있는 水原 華城은 華城留守府 市街地를 둘러싼 城郭으로 正祖 13년(1789) 父親 思悼世子의
陵을 楊州 拜峰山에서 水原 華(花)山으로 移葬하고 부근 住民들을 八達山 아래 水原으로 옮기면서 築城했다.
黨爭이 극심한 政勢를 刷新하고 강력한 王道政治를 실현하려는 正祖의 원대한 構想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新都市일 뿐만 아니라 壬辰倭亂을 겪으며 必要性을 切感한 首都 漢陽의 남쪽 防禦基地로서 필요한 國防問題까지
고려한 水原 華城은 孝心을 基盤으로 首都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政治∙國防∙行政的目的까지 모두 충족시키려고 한
水原 華城은 正祖 18년(1794)에 着工하여 2년만인 1796년에 완공했다. 길이 5.74㎞, 4개의 城門을 비롯하여 望樓인
空心墩, 砲樓, 要衝地에 세운 閣樓, 군사지휘소인 將臺 등을 두루 갖추었다. 華城은 地形을 살려 쌓은 朝鮮의 築城傳統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防禦施設을 도입한 城郭이다. 實學者 茶山 丁若鏞이 朝鮮과 中國의 築城方式을 總網羅하여 城郭의
규모와 防禦施設, 材料를 계획하고, 擧重機와 수레 游衡車를 발명하여 工事費도 節約했다. <華城城役儀軌>에는
築城過程, 圖面, 築城機械의 그림, 材料의 규격과 數量까지 收錄했다. 華城은 城郭뿐만 아니라 18世紀末에 건설한
城郭都市이며 計劃新都市라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으며, 漢陽과 三南地方을 연결하는 交通의 中心地이면서,
經濟的으로 富强한 都市를 만들려고 했던 正祖의 뜻과 實學精神이 反映되었다.
華城은 1997년 UNESCO 世界文化遺産에 登載되었다.
(01) 水原 華城 -10.10.09
水原 華城은 서쪽으로 八達山을 끼고, 동쪽으로 낮은 丘陵의 平地를 따라 쌓은 平山城이다
(02) 水原 八達門 -보물 제402호 -14.07.28
水原 華城의 남쪽문으로 正祖 5년(1795)에 完工했으며, 正祖와 當代 國王들이 顯隆園(思悼世子陵)을 參拜하려 갈 때
八達門을 通過했으며 築城當時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門樓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건물로 多包樣式의
우진각지붕이며, 외부에는 半圓形의 甕城을 쌓았다. 이 옹성은 考證을 거쳐 1975년 復元했으며, 左右로 城壁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道路를 開設하면서 철거해 城門만 남아있다. 水原 華城안의 건물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朝鮮後期의 城門 建築形態를 고루 갖추고 있다. 左右에는 敵臺 등 城門防禦에서 核心役割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甕: 독 옹)
*敵臺: 城門 양 옆에 外部로 突出시켜 甕城과 城門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四角形의 臺.
(03) 水原 八達門 (보물 제402호) 안쪽 -14.07.28
(04) 水原 華城 城壁外部 -14.07.28
(05) 八達門에서 西將臺로 올라가는 길
(06) 水原 華城 內部와 女牆 -14.07.28
女牆은 ‘성가퀴’라고도 하며 城壁 위에서 敵의 공격으로부터 隱身할 수 있는 防牌役割을 한다. 垜口로 끊어진
女牆의 한 구간을 垜 또는 堞이라고 하며, 1垜에는 3개의 銃眼을 설치했으며, 가운데는 近銃眼, 양쪽에는 遠銃眼을
설치했다. (*牆: 담 장 *垜: 살 받이 타)
(07) 西南暗門과 西南舖舍
暗門은 城郭의 후미진 곳에 敵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門으로 사람의 출입이나 軍需品調達을 위한 門이며 華城에는 '
5개소의 暗門을 설치했다. 西南暗門은 甬道의 출입문으로 5개소의 암문 중에서 유일하게 舖舍를 설치했다.
舖舍는 성밖의 危險을 성안에 알리는 역할 하는 施設로 깃발을 휘두르거나 大砲射擊으로 危急信號를 전달한다.
西南暗門 위에 건립한 넓이 한 칸의 西南舖舍는 常住하는 軍士를 위해 온돌을 깔고 四面에 板門을 설치했다.
(*舖: 펼 포 *甬: 길 용)
(08) 甬道
용도는 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通路로 西南暗門과 東雉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甬: 길 용)
(09) 西舖樓
舖樓는 城壁밖으로 튀어나온 雉城위에 건축한 木造建物로, 軍士들이 觀測∙警戒하는 곳이다. 西舖樓는 水原 華城의
5個 舖樓 中 하나로 正祖 20년(1796) 建立했으며 西暗門이 敵에게 發見∙攻擊에 對備해 설치했다. (*雉: 꿩 치)
(10) 西暗門
水原 華城에 있는 5개의 暗門 중의 하나로, 西將臺 남쪽 조금 아래에 있는 西暗門은 城을 쌓은 것이 꺾여 있고
벽돌로 만든 虹霓門은 북쪽을 향하고 있어 밖에서 보면 門이 있는지 잘 모른다. 門은 山허리에 있고 길은 城위로
났기 때문에 門안쪽은 저절로 네모난 구덩이가 되었으며 돌層階를 북쪽에 설치하여 아래 위로 드러난 길과
숨겨진 길을 통하게 했다. (*虹” 무지개 홍 *霓: 무지개 예)
(11) 西暗門 外部의 虹霓門과 華城 體城壁外部
(12) 孝園의 鐘
‘孝園의 鐘’은 모든 이에게 孝心을 심어주고, 家族의 健康과 나라의 平安을 祈願하는 水原市民의 念願을 담아
만든 鐘으로, 1991년 水原市가 조성한 높이 3.54m, 지름 2.15m, 무게 12.5톤의 鐘이다.
八達山頂上에 19평의 철근 콘크리트造의 鐘閣에 세워 安置했다.
(13) 華城 西將臺(華城將臺) -12.05.12
八達山 頂上에 있는 將帥의 指揮所 西將臺는, 정면 3칸∙측면 3칸의 重層樓閣으로 上層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이다. 이곳은 城 內外를 모두 한눈에 볼 수 있어 華城一帶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百里 안쪽의 모든
\動靜을 파악할 수 있다. 正祖 18년(1794)에 建立했으며 正祖 御筆의 <華城將臺> 扁額을 걸었다.
*水原 華城에는 西將臺와 東將臺가 있으며 西將臺는 ‘華城將臺’라고도 하는데 아마도 八達山頂上에 있어
華城全體를 指揮∙統制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華城 西將臺는 北漢山城 東將臺와 모습이 비슷하다. (*孤山 생각)
(14) [華城將臺] 扁額 -正祖 御筆
正祖御筆 扁額은 20세기 초에 사라져 1971년 西將臺를 重建하면서 새로 편액한 것이다.
上樑文은 당시 右議政이던 樊巖 蔡濟恭(1720-179)이 썼다. (*樊: 새장 번)
(15) 西將臺에서 보이는 水原市內와 廣敎山
북동쪽(사진 왼쪽)으로 白雲山(567m)-廣敎山(582m)-兄弟峰(448m)과 水原市 北部地域이 보인다.
(16) 西將臺 앞에 있는 里程標
맨 위에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아래로 北極點 5,867km를 비롯해 런던, 파리, 뉴욕 등
세계 주요도시의 방향과 거리, 南極點 14,113km 등 世界 主要地點의 방향과 거리를 표기했다.
(17) 西弩臺
弩臺는 城에서 多連發 활 쇠뇌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華城에는 西弩臺와 東北弩臺 등 두 군데가 있다.
八達山頂上 西將臺 뒤쪽에 있는 西弩臺는 四方을 觀測할 수 있으며 평면은 正八角形이며 벽돌로 築造했다.
(*弩: 쇠 뇌 노)
(18) 西三雉
雉는 城壁의 일정한 거리마다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敵의 접근을 早期에 觀測하고 성벽에 접근한 적을 正面과
側面에서 攻擊할 수 있는 施設物로, 水原 華城에는 10개소의 雉가 있다. 雉는 꿩처럼 자기 몸을 잘 숨기고, 주변을
잘 살펴보기 때문에 그 뜻을 따 雉城이라고 한다. (雉(*꿩 치)
(19) 西北角樓
角樓는 城郭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서 周邊을 觀測하고, 휴식할 수 있으며, 非常時에는 各方面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西北角樓는 華城의 4개 角樓의 하나로, 숙지산(△124m) 자락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서
華西門 일대의 軍士를 지휘하는 곳으로, 1층은 宿直하는 軍士를 위해 온돌을 깔아
(20) 水原 華西門(보물 제403호)
화서문은 華城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이며,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築臺 위의 1층 樓閣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축대의 가운데에 虹霓門과
문 앞쪽에는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甕城에는 女牆이 있다. 甕城의 북쪽에는 空心墩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으며, 한국의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 구조도 특이하다. (*墩: 돈대 돈)
(21) 水原 西北空心墩 -보물 제1710호
空心墩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哨所구실을 하던 곳이다. 正祖 20년(1796)에 건립한 서북공심돈은
華城 서북측 성벽을 突出시켜 南側面의 일부만 城壁에 접하고 나머지 3면이 돌출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3층 구조로 下部 雉城은 方形의 石材로, 1∙2층 外壁과 3층 下部는 전돌로 쌓았다. 1∙2층 각 면에는 6개의 銃眼이
있으며, 3층에는 女墻을 쌓고 4개의 총안을 설치했다. 3층 鋪樓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벽면 위쪽의
판문에는 箭眼을 설치다. 雉城의 북측면과 서측면에는 각각 2개소의 懸眼을 두어 접근하는 敵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下部는 성벽의 石材를 오목하게 ‘∪’形으로 架工하여 상부 전돌 현안과 연결했다. 水原 西北空心墩은 現存
城郭에서는 華城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재료의 柔軟性과 機能性이 우수하며, 雉城의 석재 쌓기 機法과 上部
空心墩의 전돌 築造技法, 懸眼과 銃眼, 箭眼 등의 중요한 시설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懸眼: 성벽의 위에서 아래로 군데군데 낸 홈. 성벽을 기어오르는 敵兵에게 끓는 물을 쏟아 붓기 위해 만들었다.
(22) 北西砲樓
水原華城의 5개 砲樓 중 하나로, 華西門과 長安門 사이에 있는 北西砲樓는 正祖 20년(1796) 完工했다.
砲樓는 城壁接近을 방지하기 위해 火砲射擊 施設로 雉城의 發展된 형태이다.
지붕을 이은 모양이 特異해 城 안쪽은 맞배지붕, 바깥쪽은 우진각지붕이다.
(23) 紅夷砲 -길이 215cm, 口徑 10cm, 重量 1,800kg
紅夷砲는 중국 明나라 末부터 淸나라 때까지 사용한 유럽식 火砲로, 砲口쪽에서 火藥과 砲彈을 裝塡해 發射하는
砲口裝塡式 火砲이다. 射程距離 700m에 이르는 威力的인 火器로, 城郭이나 砲樓 등에 배치하거나 城郭 攻擊用으로
사용했다. (*夷: 오랑캐 이 *塡: 메울 전)
(24) 長安門
華城의 北門으로 건립한 重層樓門으로, 虹霓門 위에 정면 5칸∙측면 2칸 2층 樓閣을 올리고 바깥 쪽은 半圓形甕城을
갖추었다. 長安門은 朝鮮時代의 일반적인 城門形態로, 規模나 構造는 서울 崇禮門과 매우 비슷하며 새로운 것은
甕城, 敵臺와 같은 防禦施設을 갖추었다. 1920年代 水原市 市街地計劃事業으로 左右城壁이 헐리고, 6·25戰爭 때
樓閣이 燒失되어 1978년 門樓는 復元되었다.
(25) 華城의 北水門, 華虹門
水原市 八達區 梅香洞에는 水原川이 南北으로 흐르는데 華城의 연결부분에는 水門을 설치해 북쪽에는 北水門,
남쪽에는 南水門을 두었다. 正祖 19년(1795) 完工한 北水門에는 [華虹門]이라는 扁額을 걸었는데, ‘華’는 華城을,
‘虹’은 수문이 무지개처럼 생겼다고 붙은 이름이며, 壯快한 물보라가 水門으로 넘쳐나는 모습을 ‘華虹觀漲’으로
水原八景의 하나이다. 華虹門은 7개의 무지개모양 水門을 설치했는데 7개 수문의 크기가 각각 다르다.
가운데 수문이 左右의 水門보다 넓고 크게 설치해 雨量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華虹門 동쪽 언덕에는
화려한 建築美를 자랑하는 訪華隨柳亭이 있다. (*漲: 넘칠 장)
(26) 水原川
水原 廣敎山에서 發源해 廣敎貯水池를 거쳐 水原市 남쪽 都心을 가로질러 黃口池川으로 흘러 드는 地方2級河川이다.
길이 2.72km이며 1996년부터 河川 生態系復元事業으로 自然河川으로 많이 탈바꿈했다.
(27) 水原 訪花隨柳亭 -보물 제1709호
正祖 18년(1794) 建立한 華城의 東北角樓인 訪花隨柳亭은 戰時用 建物이나 亭子의 機能을 고려해 石材, 木材,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해 造成한 건물이다. 수원 방화수류정은 宋나라 程明道의 詩 ‘雲淡風輕近午天(운담풍경근오천)/
訪花隨柳過前川(방화수류과전천)’에서 따왔으며, 扁額은 朝鮮後期의 文臣∙書藝家 松下 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다. 平面은 “ㄱ”자형을 基本으로 북쪽과 동쪽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造營해 四方을 볼 수 있게 했으며,
獻宗 14년(1848) 重修, 日帝强占期 이후 여러차례 부분적으로 修理했다. 朝鮮時代 亭子建築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독특한 平面과 지붕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建築技術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隨: 따를 수 *淡: 맑을 담)
(28) 龍淵(龍池)
訪花隨柳亭 밖 주변의 아름다운 景觀을 살려 연못을 파고 ‘天圓地方’의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남쪽언덕 위의
訪花隨柳亭과 용머리바위, 섬의 꽃과 나무사이로 떠오르는 보름달이 水面 위로 비추는 아름다운 情趣를
‘龍池待月’이라고 하며 水原八景의 하나로 꼽았다. 龍淵은 예전에 가뭄이 들면 祈雨祭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29) 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보물 제14호
彰聖寺터에 있는 眞覺國師의 행적을 알리는 塔碑로, 碑文을 새긴 碑身은 磨滅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碑文에는 眞覺國師가 13세에 入門해 여러 절을 다니며 修行하고 榮州 浮石寺를 重修하는 등 小白山에서
76세에 入寂하기까지의 行跡읗 실었다. 入寂 다음 해인 祐王 12년(1386) 廣敎山 彰聖寺 境內에 碑를 세웠다.
簡略化된 高麗後期 石碑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漆谷 僊鳳寺 大覺國師碑(보물 제251호)와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보물 제229호), 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하다. 글씨는 高麗前期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高麗後期의 글씨가 退步했음을 보여준다. 碑文은 牧隱 李穡이 짓고 僧侶인
惠岑이 刻字했다. (*磨: 갈 마 *寂: 고요할 적 *跡: 발자취 적 *彰: 드러날 창 *漆: 옻 칠 *僊: 춤출 선 *隱: 숨을 은'
\ *穡: 거둘 색 *岑: 봉우리 잠)
(30) 華城 東暗門
正祖 20년(1796)에 完工한 東暗門은 東將臺의 서쪽 116步에 있으며, 구조는 門 위에 벽돌을 깔고 五星池와
커다란 둥근 담장을 설치했다.
(31) 華城 東將臺(鍊武臺)
華城의 동쪽 東暗門과 東北空心墩 사이에 있는 將臺로 武藝를 修鍊해 ‘鍊武臺’라고도 한다, 地形이 높은 곳은
아니지만 四方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丘陵인 仙巖山의 要地이다. 3층의 臺에서는
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했다. 建物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합각기와 지붕이며, 주변에는 터를 넓게
잡아 東西 80보, 南北 240보의 操鍊場을 만들었다. 성벽 밖으로 돌출된 弩臺는 쇠뇌를 쏘는 군사인 弩手가 머물던
곳이다. (*弩: 쇠뇌 노)
(32) 영롱담[玲瓏墻]
기와로 꽃무늬를 새긴 담장으로, ‘마치 구슬이 울릴 듯한 꽃무늬의 담’이라고 영롱담[玲瓏墻]이라고 한다.
높이 165cm로 鍊武臺의 王을 保護하기위한 뒷담장에 밑부분을 紋石臺로 築臺를 쌓고, 위에 영롱담을 쌓아
아름다움을 더했다. (*玲: 옥소리 영 *瓏: 옥소리 롱/농 *墻: 담 장)
(33) 東北空心墩
공심돈은 敵의 動向을 살피기 위한 望樓와 같은 것으로 水原華城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華城에는 西·南·東北空心墩이
있다. 동북공심돈은 正祖 20년(1796) 높이 5.42m, 둘레 38m로 건립했으나 6∙25戰爭 때 파괴되어 1975년애 復元했다.
형태는 커다란 둥근 圓모습으로 華城에서 가장 특징 있는 건물의 하나이다. 동북공심돈 내부는 소라처럼 생긴
螺旋形의 벽돌계단을 통해 꼭대기에 오르게 되어 있어 일명 ‘소라각’이라고 부른다. 最上層에서는 華城 전체모습을
眺望할 수 있다. (*螺: 소라 나 *旋: 돌 선 *眺: 바라볼 조)
(34) 華城 烽墩
華城烽墩은 일반적인 烽燧臺가 주변을 山頂上에 별도의 施設로 만든 것과 달리 城壁과 맞물려 벽돌로 만든
우리나라 城郭樣式에서는 보기 드문 施設物로 外觀이 마치 藝術作品처럼 精巧하고 壯麗하게 건립한 水原華城의
代表的인 施設의 하나이다. 華城烽墩은 四方警戒와 偵察任務를 수행하며, 낮에는 煙氣, 밤에는 횃불로 信號를
보내면, 龍仁의 石城山烽火와 西海岸의 興天臺烽火가 應答한다. 興天臺烽火는 華城烽墩과 너무 멀어
正祖 20년(1796) 華城의 서쪽 30리의 棲鳳山에 間烽을 두어 전달하도록 했다. (*棲: 깃들일 서)
*烽火信號體系
烽燧는 밤에는 횃불, 낮에는 煙氣로 전하는 軍事信號體系로, 다섯 개의 횃불구멍을 통해 狀況을 전달하는데
남쪽 첫 번째 횃불구멍부터 平常時에는 밤낮으로 烽燧 1개, 적이 國境近處에 나타나면 봉수 2개, 國境線에
도달하면 봉수 3개, 국경선을 侵犯하면 봉수 4개, 적과 戰鬪가 벌어지면 봉수 5개를 올렸다.
*烽燧路線
世宗 5년(1423) 漢陽 木覓山(南山)에 5개소의 烽火臺를 설치해 各地에서 오는 봉수를 받았다. (*覓: 찾을 멱)
=第1路; 咸鏡道 慶興 西水羅 牛巖烽燧~咸鏡道∼江原道∼楊州 峨嵯山烽燧
=제2로; 釜山 多大浦 應峰烽燧~慶尙道∼忠淸道∼廣州 天臨山烽燧
=제3로; 平安道 江界 滿浦鎭 餘屯臺烽燧~平安道∼黃海道∼毋岳 東烽燧
=제4로; 平安道 義州 古靜州烽燧~平安道海岸∼黃海道海岸∼毋岳 西烽燧
=제5로; 全羅道 麗水防踏鎭 突山島烽燧~全羅道∼忠淸道∼陽川 開花山烽燧
(*峨: 높을 아 *嵯: 우뚝 솟을 차 *靜: 고요할 정 *突: 갑자기 돌)
(35) 城神祠
城神祠는 華城을 지켜주는 華城城神의 位牌를 모신 祠堂으로, 正祖 20년(1796) 正祖의 命으로 건립했으며
祭祀는 매년 봄과 가을 孟朔(계절이 시작되는 달: 음력 봄; 정월, 가을; 칠월)의 초하룻날에 제사를 지냈다.
日帝强占期에 훼손되어 2009년 重建했다. 華城行宮에서 西將臺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2-8-2) 全國의 風景 돌아보기. 首都圈. 京畿南部(水原 華城行宮)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