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푸 3 - 스피아나다 광장을 걸어서 다리를 건너 올드 포트리아 요새로!
2024년 5월 6일 그리스 북부 데살로니키의 마케도니아 국제공항 에서 11시 15분에 아게안 항공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날아 12시 10분에 아테네 Athens 공항에 내려서 환승한
비행기는 14시 05분에 그리스 서북부에 있는 섬 코르푸 Corfu I. Kapodistrias 공항에 내립니다.
그리스어로 케르키라 Kerkira 라 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령해 다스린 연유로 이탈리아어로 코르푸
Corfu 로 불렸으니 케르키라로 되돌리고 싶지만 국제사회에서 통용된 이름이라 어쩌지 못하는 것인
데, 택시를 타고 스피아나다 광장 Spianada Square 동남쪽 카발레리 호텔 Cavalieri Hotel 에 도착합니다.
호텔은 고풍스러운 옛날 건물로 객실 발코니에서 바다와 해변에 광장과 성채까지 전망
하나는 일품인데... 케르키라 섬 (그리스어: Κέρκυρα) 은 그리스 이오니아 제도에
있으니 이탈리아어 표기에 따라 코르푸 섬 (이탈리아어: Corfù)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대에 이 섬은 페니키아인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일라어드의 저자 호메로스
가 쓴 오디세이아 (오딧세우스) 에는 왕이었던 알키누스와
그의 딸 나르시카가 등장하는데..... 1864년 그리스 왕국의 영토로 확정되었습니다.
15세기 베네치아 공화국령 시대에 코르푸 (이탈리아어: Corfu) 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니 케르키라 구(舊) 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
되어 있으며 기원전 8세기에 비잔틴의 도시로 15세기에 베네치아령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호텔을 나와 스피아나다 광장 Spianada Square 을 천천히 걸어서 다리를
건너 팔레오 플루리오 요새 올드 포트리스 Old Venetian fortress 로 들어 갑니다.
입장료가 6유로인 올드 포트리스 Old Venetian fortress 는 1558년 베네치아가 만든
요새로 두터운 성벽과 해자에 요새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들이 모두 갖춰져
있으며 거기다 멀리서 적국의 침입이 있나 늘 경계해야 하니 높은 전망대가 있습니다.
여기 케르키라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큰 함대를 소유한 폴리스 중 하나가 되었고,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는데..... 하지만 이후 아테네의 급성장으로
도시는 뒤쳐졌는데, 케르키라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되면서 역사상으로 유명해 집니다.
케르키라 와 코린토스 는 모자 도시의 관계였는데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기원전 436 ~ 433년간 코린토스
와 케르키라는 알바니아의 항구 도시인 두러스 (디라키움)의 에피담노스를 두고 싸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432년, 케르키라(코르푸) 가 동맹인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하자 코린토스
역시 동맹이던 라케다이몬 (스파르타) 에 지원을 요청하며
전 그리스 문명권이 둘로 나뉘어 싸우게 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지요!
기원전 410년, 아테네가 시칠리아 전역에서 대패하자 그전까지 아테네의 보급 기지 역할을 하던
케르키아는 중립을 선포하고는 전쟁에서 빠져나왔지만 기원전 377년에
스파르타 함대에 공격을 받은후 케르키라는 기원전 375년에 재차 아테네와 동맹을 맺게 됩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케르키라 섬은 기원전 305년에 디아도코이 중 한명인 카산드로스의 공격을 받았고,
간신히 방어했으나 그해 말에 스파르타의 공격을 받아 결국 굴복하는데..... 독립은 곧
회복되었지만 몇년 못가서 이번에는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의 왕인 아가토클레스에게 점령 됩니다.
요새인 성채를 둘러 보면서 코르푸와 코린트 사이에 갈등으로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생각하다가..... 문득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공포심이 일으키는 전쟁, ‘투키디데스의 함정’ 은 반복된다” 가 떠오릅니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이 하나 없어지는 것 같다.’ 이 말은 흘러간 노랫말
처럼 들린다. 21세기 과학· 기술 시대의 노년은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으로 찾아온다. 미래를 보고 질주하는 시대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역사를 대하는 우리 시대의 태도도 비슷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실에서 과거사의
기억은 뒷전으로 내몰린다. 하지만 망각된 역사는 쫓겨났던 뒷문으로 되돌아온다.
이를 누구보다 분명하게 의식했던 사람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를 쓴 투키디데스 이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사마천 (司馬遷) 의 ‘사기 (史記)’ 는 전설 속 황제에서 부터 한무제 (漢武帝)
까지 2000년의 역사를 기록한‘역사서의 만리장성’ 이다. 사마천은 황제에서
자객까지, 온갖 인간들의 이야기로 긴 시간을 채워 넣었다. ‘사기’ 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또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사마천은 죄 없는 장수를 두둔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에게는 궁형을
선택하는 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거세의 치욕을 견디며 사마천이 살아남은 이유는
오직 하나,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는 것” (‘사기’ 태사공자서) 이었다.
죄인 아닌 죄인, 사내 아닌 사내로 육체적 고통과 치욕을 참으며......
‘사기’ 를 써내려간 사마천의 삶을 박경리는 아홉행 짧은 시에 담았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 긴 낮 밤을 /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天刑)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 당하고/
인생을 거세 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마흔 다섯에 한쪽 가슴을 잘라내고 타향의 외딴 방에 자신을 유폐한채
글쓰기에 몰두한 작가에게 ‘토지’ 는 또 하나의 ‘사기’ 가 아니었을까.
투키디데스는 사마천 보다 300여년 앞서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았다. 그 역시 불명예를 안고 살았지만,
사마천의 경우처럼 처절한 상황은 아니었다. 투키디데스는 서른 즈음 장군으로
선출되었지만 패전의 책임을 지고 아테나이에서 추방된 뒤 이국에서 전쟁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런 개인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마천과 투키디데스가 역사를 쓴 목적은 똑같다.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역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듣기에 재미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어난
일들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 똑같거나 비슷하게 다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분명한 것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내가 쓴 것들을 유용하게 판단한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이 역사는 눈앞의 경연을 위한 작품이 아니라 영원한 재산으로서 엮은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근거로 투키디데스는 한 시대 전쟁의 기록이 ‘영원한 재산’이 되리라고 믿었을까?
2500년전 그리스에서 벌어진 전쟁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도 ‘유용’ 할까?
그리스 문명의 역사는 세 차례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설로 남은
트로이아 전쟁은 원정에 함께 참여한 그리스인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심어 주었다.
두 차례 페르시아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뒤 그들은 ‘50년’ 번영기를 누렸다. 하지만 번영의 끝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전쟁,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그리스인들과
아테나이인들 사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 일어났던 것이다. 트로이아 전쟁과
페르시아 전쟁이 그리스인들에게 ‘승리의 서사’ 였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몰락의 서사’ 였다.
전쟁 발발 동시에 투키디데스는 그 의의를 간파했다. 이 전쟁은 두 적대국의 분쟁이 아니라 그리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휘말린 ‘세계 대전’ 이었고 27년 동안 이어진 장기 전쟁이었다. 10년
트로이아 전쟁이나 “두 번의 해전과 두 번의 육상 전투” 로 끝난 페르시아 전쟁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사회를 내부로 부터 해체했다. 외부 적들과의 전쟁은
국내 당파들의 내분을 초래했고 그 결과는 전쟁 보다 더 참혹했다. 형제와 형제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죽고 죽이면서, 숨어 있던 잔인한 ‘인간의 본성’ 이 드러난 것이다.
역병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고통이 늘어났다. “내분 때문에 수많은 고통이 도시들을 덮쳤으니,
우연적 상황들의 변화가 제각각인 탓에 겉보기에 더함과 덜함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인간의 본성이
똑같은 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앞으로도 항상 일어날 것이다.” 비극의 목격자 투키디데스의 경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이런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학’ 에서 “역사 보다 시문학
이 더 철학적” 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시문학은 일어날 법한
일들을 다루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지만,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들의 기록이기에 보편적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면, 투키디데스는 분명 단순한 역사가가 아니라 정치 철학자이다. 그는 개별 사건들을
관찰하면서 그 안에 숨겨진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개별 사건들 배후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찾아내고 변화하는 사건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그의 서술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가 ‘영원한 재산’ 일 수 있다면, 그것이 과거 사실의 기록을 넘어 역사
의 논리에 대한 연구라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투키디데스가 남긴 ‘영원한 재산’
이 정말 유용한지 판단하려면, 우리는 전쟁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레이엄 앨리슨의 ‘투키디데스 함정 프로젝트’ 만큼 흥미진진한
것은 없다. 앨리슨은 하버드대에서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서 지난 500년 동안의 16개
역사적 사례들을 분석한 결과 그중 12차례의 전쟁이 투키디데스가 찾아낸 ‘위험한
역사적 패턴’을 반복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패턴을 ‘투키디데스의 함정’ 이라고 불렀다.
“아테나이인들이 강대해지면서 스파르타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는 말로 투키디데스가 요약한 상황이 12차례 전쟁의 기본 패턴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러니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유용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투키디데스의 함정’ 에 대한 통찰이 투키디데스의 전쟁사에 담긴 진실의 전부
일까? 앨리슨 교수의 연구는 이 역사서의 유용성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관심
을 일깨웠지만 ‘함정’ 이야기는 그 안에 담긴 수많은 통찰과 경고의 일부일 뿐이다.
시라쿠사왕 아가토클레스는 자신의 딸 라나사의 결혼 지참금으로 코르푸 섬을 사위인 에피로스 국왕
피로스 1세 (로마와 싸운, 한니발이 존경한 그 장군) 에게 주었고, 기원전 255년에 그의
아들이자 에피로스의 마지막 왕인 알렉산드로스 2세가 죽자 케르키라 (코르푸) 는 다시 독립합니다.
하지만 기원전 229년, 북쪽의 일리리아 인들과 그리스 연합군 (케르키라, 아이톨리아 동맹,
아카이아 동맹) 군이 대결한 팍소스 해전에서 그리스가 지면서 섬은
일리리아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몬테그라스 - 알바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일리리아 인의 지배도 몇년 가지 못하였고, 케르키라 섬은 이후 동방으로 진출하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어 로마 해군 기지로 쓰이다가 마케도니아 전쟁 후로는 로마령 마케도니아 속주에 포함됩니다.
이 섬은 기원전 31년에는 2차 삼두정치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해군 기지로
쓰였으며 로마 제국의 성립과 함께 팍스 로마나를 누리던 케르키라는 동로마 제국에
배당되었고 동로마가 동쪽의 아랍, 북쪽의 불가르 문제에 치중하는 동안에는 평화를 누렸습니다.
동로마 제국기 시기에 에피로스 남부의 항구 도시인 니코폴리스에 가려져 주목을
받지 못하던 케르키라 섬은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다시 기록에 등장하게 됩니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노르만 기사 몇 명이 모험을 감행해 기적적으로 동로마 비잔틴령인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하게 되는데, 이후 노르만 장군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다며 동진해 1081년부터
1085년까지 섬을 지배했고, 1147년부터 1154년 까지는 시칠리아 왕국의 로제르 2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 쇠퇴하자 1197년부터 1207년까지 제노바 공화국이 이 섬을 지배했고, 1207년
부터는 그들을 격퇴한 경쟁자 베네치아 공화국이 코르푸를 지배하였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하였고 1214년, 섬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 국가 중 하나인 이피로스 전제 군주국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고 1259년에 케르키라 섬은 공주의 혼인 예물인 지참금으로서 시칠리아
왕국의 만프레디 (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시칠리아는
1186년부터 독일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1267년에 그가 죽고 1268년 에는 시칠리아 왕국이 프랑스 앙주
가문의 샤를에게 넘어가자 케르키라섬 역시 앙주의 영토가 되었는데.....
1282년에 동로마 제국과 만프레디의 사위인 페드로의 사주로 일어난 '시칠리아의 만종' 반란으로
앙주의 영토는 시칠리아를 상실하고 남부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으로 불리며 시칠리아는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이 차지.) 만이 남았지만...... 케르키라는 여전히 프랑스 앙주가의 영토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