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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5월2일 토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수도회] 끼어듦과 맞아들임을 통한 삶의 성사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13,44-52
† 복음 요한 14,7-14
아타나시오 성인은 295년 무렵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하였다.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의 후계자가 된 아타나시오 주교는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하는 가운데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성인은 특히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수도
생활의 창시자인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 바오로 일행이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유다인들에게 설교한
뒤, 그다음 안식일에는 많은 이방인이 모여들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을 찬양한다. 바오로는 먼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그들이 거부하므로 이방인들에게 간 것이었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알게 되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로부터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이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독서도 바로 그런 모습을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먼저
유다인들의 회당에 가서 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새로
선포되는 복음을 가장 우선적으로 들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된 평화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바오로가 전하는 말에 이방인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에 시기심을 느끼고 마침내는 바오로 일행을 쫓아냅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은 이방인들을 향해 갑니다.
유다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시고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그분의 말씀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연 과학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또한 어떤 경우에는 성경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의 영향으로, 종종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신학적인 설명만 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요한 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많은 표징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의 영광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난 달 우리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도 그러한 믿음과 깨달음에 도달했는지요?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일입니다. 에페소서는 그것을 ‘신비’라고
말합니다(3,5-6 참조).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된다는 신비,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뜻합니다.
신비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에 따라 우리도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약속과 권고에 따라 우리는 늘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시고
협조자이신 파라클리토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끼어듦과 맞아들임을 통한 삶의 성사화
2015년 나해 5월2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요한 14,7-14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4,7)
"If you know me, then you will also know my Father."
끼어듦과 맞아들임을 통한 삶의 성사화
오늘 복음은 고별담화의 일부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일치된 자신을
계시하시고(14,4-11), 제자들과의 관계(14,12-14)를 밝히시면서, 지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확고한 믿음으로 무장시키려 하신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14,7)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일한 길’이심을 더욱 강조하고, 그분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강화시켜준다. ‘안다’란 표현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가 됨을 뜻한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14,7ㄴ)라고 말씀하신다. ‘알게 될 것이다’(7ㄱ절)는 미래
형태로서 일종의 약속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 약속이 ‘이제 이미’
예수님 자신 안에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따라서 아버지께로 가려면
지상에 현존하는 예수님을 보고서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일치하여 계시므로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분이 하시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14,10). 그분은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으니 믿으라고 권고하시면서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4,11) 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이 일들’은
아버지와 예수가 함께 일치하여 행하는 것들로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표징들을 가리킨다. 이 일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이요 증언이므로
예수님을 믿도록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근거가 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4,12) 이렇듯 믿는
제자들이 행하는 ‘일들’은 예수님 자신의 일이다. 곧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내 안의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떠나간
다음에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또한 그 일들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행하는 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일들은 단순한
기적들이 아닌 표징들로서 생명을 주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보여주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들’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죽음)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일들이 ‘끝없이’ 계속됨을 뜻한다.
오늘 복음의 말씀들은 우리의 만남에 대한 심오한 가르침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이른바 성부와 성자의 위격적인 일치 또는 상호내재는 우리를 신적인
만남에로 초대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배려라 할 수 있다. 만남의
상호내재의 차원을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며
살아간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만남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사랑에
기초한 당신의 체험 안에서 가르쳐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끼어들기
(타자의 내면으로 들어가기)와 열어주기(타자를 맞아들이기)를 만남의
기본 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의 삶, 곧 그들의 아픔과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전인격적인 삶에 끼어들어야 한다. 이것은 간섭이 아니라 서로
안에 사랑으로 머묾으로써 깊은 인격적 친교와 나눔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이 결코 아니요,
상대의 삶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며 유지되도록 돕는 것이다. 한편
‘타자를 맞아들이기 위한 열어주기’는 내편에서 형제자매들의 형제적
권고와 배려, 사랑어린 말과 몸짓이 들어와 자리 잡도록 ‘사랑의 빈터’
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명과 사랑이신
주님이 살아계시는 타자를 받아들여야 살 수 있는 존재이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목소리를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를 키우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서로의 인격이 서로
안에 자유로이 그리고 거침없이 자리 잡게 될 때 우리는 바로 그분과의
일치에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성사화’이다. 내
안에서, 형제자매 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도록 할 때 우리의
만남은 거룩한 친교가 될 것이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2015.05.0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사도 13,46)
유다인들은 선택된 민족이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구원의 복음도 제일 먼저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걷어 차 버렸습니다.
그래서 선민의 지위를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해 듣고 새로운 선민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매일같이 복음말씀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름만 하느님 백성이지
그 선민의 지위를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이들이 참으로 많지요?
오늘은 냉담교우들이 다시 선민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구원의 기쁜소식에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많은 이들에게 선민회복의 기회를 제공해주게 될 겁니다.
이렇게 선민회복자가 많아짐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5월을
가장 아름답고 제일 좋은 시절이라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행복한 삶 -영원한 생명-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5월2일 토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295-373) 기념일,
사도13,44-52 요한14,7-14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44-52
복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7-14
행복한 삶 -영원한 생명-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 주님을 믿는 이들의 의무이자 권리이고 책임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성인성녀들이 바로 행복한 삶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인보성체수도회 창립자 윤을수 신부님의 묘비명(墓碑銘)도 고난으로
점철됐던 생애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행복했던 삶을 요약합니다.
"어머니 품에서 땅에 묻힐 때까지 나는 웃으며 행복에 넘쳐 살았다고 전해
주!“
어제의 유쾌하고 행복했던 하루의 여운이 지금도 계속됨을 느낍니다.
성모성월 5월 첫날 서울 베네딕도 수녀원 월피정날인 어제는 오전
9:20분부터 12:20분까지 무려 3시간 동안 수녀님들의 고백성사를 주었고,
보속은 모두 똗같았습니다.
"오늘은 5월 성모성월의 첫날, 참 아름답고 좋은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을 사랑하며, 오늘 하루 행복하게 사십시오.
바로 이것이 보속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보속도 없다 생각되니 보속을 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도 행복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 때 행복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우리 영혼
(시편42,2)'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필립보의 소원은 우리 모두의 갈망의 표현입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때 아쉬움도 부러움도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다음 주님의 응답 말씀은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향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세례성사 받은 후 주님과 함께 지내기 몇 년입니까? 또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들어와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을 모시기 몇 년입니까?
도대체 이렇게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지냈는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바로 여기 예수님의 행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 예수님과 제자들인 우리 역시 하나입니다.
바로 여기 우리 행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동시에 아버지와 하나되어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사도행전의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되어 기쁨에 넘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행복한 삶의 모범입니다. 끊임없는 박해의
현실에도 좌절함 없이 두 제자는 다음 주님 말씀을 확신하며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었고, 주님의 말씀은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합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내 쫓김 당하면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바로 이것이 행복한 삶의 증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어 오늘 하루도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 끝마다 모두 보았네."(시편98,3ㄷㄹ).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성 아타나시아 주교 학자 기념일
2015년 나해 5월2일 토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44-52
복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7-14
처음 사제서품을 받을 때입니다. 신자 분들이 ‘신부님!’하고 부르면 참
어색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아직 제가 사제라는
생각을 많이 못했기 때문입니다. 24년이 지난 지금은 당연히 제가
사제라고 생각은 하지만 처음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의 순수함과 열정은
많이 식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교구의 사제가 800명이 훌쩍 넘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 없다고 하듯이 신부님들 중에도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 때문에 사목의 현장을 떠나야 했고, 어떤 분은 정신적인
어려움 때문에 치료를 받기도 했고, 어떤 분은 신자 분들과의 갈등으로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10년이 훨씬 넘어야 본당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젊은 신부님들에게는 어려움입니다.
지금은 스마트 폰이 있어서 문자를 보내고 받는 것이 쉽지만 처음 사제가
되었을 때문 그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김 수환 추기경님께서는 교구
사제들의 축일이면 전화를 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의 축일 축하 전화는
제게는 놀라움이었고, 감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신부님은 추기경님의
전화를 믿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한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이 추기경이면 나는 교황입니다.’ 추기경님께서 전화를
하실 줄 몰랐기 때문에 얼떨결에 응답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되고, 사람들이 다투고, 분노와 미움이 자라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말을 조심하게 하기 위해서
‘치아’라는 창살을 만들어 놓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입술로 덮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무시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자녀에게 말을 거칠게
하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말의 힘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시기와
질투에 가득차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비난의
말을 하였습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말입니다. 인격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악의 세력으로부터 나오는 말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한 말로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민족들에게 퍼져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기쁨을 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였고, 말씀의
힘으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말씀이 진리였으며, 말씀은
빛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은 어떤 말인지 생각합니다.
욕망을 채우려는 말이었는지, 시기와 질투를 나타내는 말이었는지, 비난과
험담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말이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생명을 살리고, 신뢰를 주고, 평화를 주고, 참된 진리를
알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끈을 놓아야 할 때
2015년 나해 5월2일 토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복음: 요한 14,7-14
< 끈을 놓아야 할 때 >
어느 날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로 향하는 강의 지류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얼음덩어리 위에는 양 한 마리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커다란 독수리 한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톱으로 양을 움켜쥐고는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폭포가 점점 가까워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폭포소리가 우렁차게 들리자 독수리는 옆을 한번
쳐다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강한 날개를 한번 펴서 창공을
날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얼음은 폭포에 다다랐고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날개만 푸득 거릴 뿐 날아오르지 못했습니다. 양털 깊이
박힌 발톱이 이미 얼음에 얼어붙은 것입니다. 결국 독수리는 양의 사체와
함께 폭포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때’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성격은 매우 칼 같습니다. 유다인들이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방인들에게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립니다.
매몰차게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먼지는 본래 인간의 육체를 만들 때 사용한 재료입니다. 하늘과 반대되는
상징이고 하늘에 하느님이 산다면 먼지를 먹으며 사는 동물은 뱀입니다.
즉, 먼지인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면 뱀의 운명을, 하늘에서 오는 성령의
뜻에 따라 살면 예수님이나 성모님처럼 이 육체를 가지고도 천국에서 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행위는 “너희는 흙에
불과하니 뱀의 운명이 되도록 내버려 두겠다. 그러나 나의 책임은 아니다.
나에게 붙어있었다면 나와 함께 천국으로 갈 수 있었겠지만, 이제 먼지에
불과한 너희들을 털어버리겠다.”라는 무언의 경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파견하시는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이
있다면 옷의 먼지를 털어버리며 경고하고 오라고 가르치십니다. 왠지
하느님께서도 우리들이 끝까지 먼지로 남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매몰차게
털어버리실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가 상대의 애정을 구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십자가가 그 자비와 정의를 동시에 드러내는 가장 완전한 상징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당신 아드님을 죽게 만드셨다면, 그분은 또한 우리를
그렇게 먼지처럼 털어버리실 수도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사랑을
알아달라고 질질 끌려 다니는 분이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참 사랑을 한
사람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애정을
갈구하며 자신에게도 보상을 요구했던 사람들은 아쉬워서 좀처럼
돌아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집착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엔 집착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더라도 가차 없을 것입니다. 바로 떠날 수
있을 만큼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했기에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삯을 바라며 인간관계를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났다면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너무 늦거나 너무 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사랑에
충실한 사람만이 그 때를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당나귀가 계속 절벽으로 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꼬리라도
잡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잡고 있으면 자신의 힘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후에는 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꽉 잡고 있지 않았다면 미리 놓아버렸기 때문에 늘
후회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놓아야 할 때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최선을
다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 한 사람은 어쩔 수 없는
한계까지 간 것을 자신이 알기에 후회도 없습니다. 그러나 쉽게
놓아버리거나 자신을 망칠 때까지 끝까지 잡고 있는 행위는 자신의
내면적 문제로 균형감각을 잃은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
2015년 나해 5월2일 토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44-52
복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7-14
몇 년 전에 어떤 일로 큰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 그렇다고 누군가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기에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의 도움을 청할 뿐이었지요.
그리고 며칠 뒤, 그날 역시 밖으로 나가 묵주기도를 하고 사제관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에 힘이 들어 잠시 쉴 겸 공원벤치에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공원 광장에서 운동을 하시는 분,
서로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 서로 사진을 찍는 친구들 등등...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밝게 웃으면서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 그들 모두가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것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운동하고, 데이트하고, 즐기는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당신들은 모르실거에요.’
그리고 저 역시 지금의 이 문제들이 없는 상태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평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매일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행복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어렵고 힘든 그 순간에 비로소 행복의 순간이
그리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 당시의 문제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해결되었지요. 그리고 제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매 순간 기쁘게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행복을 느끼려고 노력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미사를 봉헌하는 그 순간, 맛있는 식사를
하는 순간,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눕는 그 순간 등등의 상황에서 “아~~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느끼면서
주님께서 함께 해주고 계심도 깨닫게 되네요.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청을 드립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를 그분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본성에 속하는 신성을 충분히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직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드러나는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곤 하지요.
“하느님 봤어? 그분과 대화해 봤어? 보지도 못하고 대화도 하지 못했는데
하느님이 어디에 있어?”
그러나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매일이 바로 행복의 순간이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평범한 매일 안에서도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신성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을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믿음을 통해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 없음이지요. 그 믿음 없음이 예수님을 보고도 하느님을 보게 해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 사도처럼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합니다. 그
혜안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행복하다.”
아름다운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쉬웠다. 하지만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은 어렵다(성 프란치스코).
세잎클로버의 꽃말은 '행복'. 행복은 쉽게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십자가의 성 요한)
모든 것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맛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지식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이 아직 맛보지 않은 어떤 것을 찾으려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하고,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려면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한다.
모든 것에서 모든 것에게로 가려면
모든 것을 떠나 모든 것에게로 가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이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주님이라는 모든 것에 함께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것만으로는 그분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을 때, 진짜 모든 것인 주님과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신 모든 아타나시오 분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청주] 다 이루어 주겠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5월2일 토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14,7-14)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44-52
복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7-14
다 이루어 주겠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의 특산물은 복숭아입니다. 복숭아나무는 추위에
약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겨울을 준비합니다. 짚으로
나무를 감싸주는 이도 있고 페인트를 발라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동해의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기온의 탓도 있지만 나무 둘레의 땅을 파고
퇴비 등 밑거름을 주는 대신 비료 등 웃거름을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무의 뿌리는 거름을 향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밑거름이 충분하면 뿌리를
땅속 깊게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웃거름에 의지하게 되면 뿌리가 겉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니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뿌리를 제대로 내려야 합니다. 밑거름이 풍성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을
잃어버립니다. 기도는 신앙인의 호흡입니다. 호흡을 멈추면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회피하는 것은 신앙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으려고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내 바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바람을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묵해야 합니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침묵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깊은 침묵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눈과 입은 닫고 가슴과 귀를 열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책에서 하느님을 탐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발견하는 것은 기도 안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들으십시오.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를 배우듯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잘 하려거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따라서 많이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혹 구해도 얻지 못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청했는지 짚어보십시오. 분명
주님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이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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