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3)
필리피서 2장 2절이 그리스도인의 내적 화합을 권면한 것이라면, 필리피서 2장 3절은
외적 태도와 행동의 화합을 강조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이기심이나 허영심을 따르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한다.
이기적 야심이나 허영심 및 교만은 일치와 화합을 방해하고 당파심과 경쟁심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기심'으로 번역된 '에리테이안'(eritheian)의 원형 '에리테이아'(eritheia)는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욕구', '천박한 이기주의', 또는 '당파심'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필리피서 1장 17절에도 나온 단어이다.
이러한 태도는 필리피서 2장 1절의 '성령 안에서 친교'와 대조된다.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는 일은 천박한 이기심을 내세우지 않으며, 당파를 만들어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허영심'으로 번역된 '케노독시안'(kenodoksian)의 원형
'케노독시아'(kenodoksia)는 '오류'라는 뜻을 가진 '케노스'(kenos)와 '생각하다'는
뜻을 가진 '도케오'(dokeo)의 합성어에서 나온 말로서, '공허한 견해', '잘못된 견해'
라는 뜻이 있다.
이 단어가 70인역(LXX)에서는 우상 숭배의 허무성을 가리키는데(잠언14,14)
사용되었다. '케노독시아'에 빠진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구함으로써 자만심에 빠지고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이기심'과 '허영심'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느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공허한 생각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천박한 이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이기심이나 허영심'에 반대되는 태도가 '오히려'로 번역된 접속사 '알라'(alla)로
시작되는 후반절에 나온다.
여기서 '겸손한 마음으로'에 해당하는 '타페이노프로쉬네'(tapeinophrosyne)는
성경에서 '겸손한 생각을 가짐','자신의 도덕적 무가치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뜻이 있다.
겸손은 그리스도교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미덕이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구원하시며(1열왕18,23; 시편119,67), 비천한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시편113, 4~6; 시편18,28).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겸손과 비천은 자신을 현실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 완전하심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낮추는 태도이며, 스스로 낮아진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한편, '남을 낫게'에 해당하는 '휘페레콘타스'(hyperechontas)의 원형 '휘페레코'
(hyperecho)는 '~위에'라는 전치사 '휘페르'(hyper)와 '가지다','소유하다'라는
뜻의 동사 '에코'(echo)의 합성어로서 기본적으로 '위에 높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위나 권세가 '뛰어나다','탁월하다','능가하다'라는 뜻으로 주로 쓰인다.
그리고 '여기십시오'에 해당하는 '헤구메노이'(hegumenoi)는 '헤게오마이'
(hegeomai)의 명령 분사형이다.
'헤게오마이'는 원래 '계산하다','셈에 넣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헤게이스타이'
(hegeisthai)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생각하다','여기다'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라는 명령은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뛰어나겠지'
라는 식의 막연한 추측에 그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매사에 신중하게 검토하고 판단해
보아 상대방의 뛰어난 점을 발견했을 때 그 점을 구체적으로 인정해 주고, 그 사람을
높여 주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태도가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할 참된 겸손의 모습이다.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분수와
한계를 아는 데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러한 자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자는 진실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