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하나님의 믿음의 딸, 지선 자매님의 동의를 얻어
<< 지선 자매님의 고통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소개한것 입니다.
<< 지선 자매가 고통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를
<< 청년 여호수아 지체들과 함께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글을 게시판에 올리도록 쾌히 동의해 주신 지선 자매님에게
<<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
<<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 최선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
<< 하나님의 역전 드라마를 시작하려 합니다.
<<
<< 지선 자매님의 남은 삶을 통하여
<< 주님이 더 맑고 푸르게 나타나며
<<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증거들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 그리고, 더 좋은 치유와 회복케 하심이
<< 날마다 더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⑴] 만취운전 사고 피해로 온몸 중화상
<<
<< ◇필자 약력
<<
<<
<<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졸업
<< △2000년 7월30일 6중 추돌사고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음
<<
<<
<< 만취운전 6중 추돌사고(2000.7.30)
<< 앵커:“어젯밤 11시30분쯤 서울 한강로1가에서
<< 서울 후암동 마흔두살 김모씨가 만취 상태에서 갤로퍼를 몰다가
<< 마티즈 승용차 등 6대와 추돌했습니다.
<< 이 사고로 마티즈 승용차에 불이 나서 차에 타고 있던
<< 경기도 안양시 갈산동 23살 이모씨가
<< 온몸에 2도의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습니다.
<< 경찰 조사 결과 갤로퍼 승용차 운전자 김씨는 혈중 알코올 농도
<< 0.35%의 만취 상태였습니다”
<< 2000년 7월30일.
<<
<< 아무렇지도 않게 늘 남의 이야기로만 들어오던 뉴스속 ‘이모씨’가 되었습니다.
<< 그 뉴스속 이모씨의 실제는 뉴스처럼 그렇게 짧지도 간단하지도 않았습니다.
<< 돌이킬수 없는 3도의 중화상이 온몸에 남았고 죽음과의 싸움은
<< 그 ‘긴급 후송’으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 올해로 스물다섯살이 된 ‘이모씨’는 1978년 5월24일과
<< 2000년 7월30일 2개의 생일을 가지고 있는 저 이지선입니다.
<<
<<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에서,귀한 지면을 빌려 이제 겨우 시작한 제 길을,
<< 남보다 조금은 무거운 한 발자국이었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으로 뗀
<< 그 한 발자국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 그 엄청나고 무서운 불속에서 저를 건지신 하나님과
<< 자기 팔을 태우면서 동생을 구해낸 오빠의 용감함과 사랑에 감사하며
<< 이제 덤으로 사는 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
<< 공직에 계신 아버지와 사랑많은 어머니,많이도 싸우고 자랐지만
<< 유별나게 친했던 세살 많은 오빠와 저 이렇게 네 식구가 사는 우리 집은
<< 평범하지만 매우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 아빠의 전근지를 따라 부산 대전 대천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저는
<<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 대학생이 되면서 경기도 안양 평촌신도시로 이사했고
<< 학교가 가까웠던 오빠와 함께 작은 자동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 대학교 4학년이 돼서야 정말 하고 싶었던 공부를 찾았고
<<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 여름방학에도 도서관에 다니며 준비했습니다.
<<
<< 제게 두번째 생일이 된,하마터면 사망일이 될 뻔했던 2000년 7월30일은
<<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웠던 가족 여름여행을 다녀온
<<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 그날 주일예배를 마치고 오빠와 저는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 참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앉았지만
<< 오빠도 저도 왠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 그냥 집에 갈까 말까,저녁을 먹을까 말까,
<< 만나서 같이 먹을까 말까…별 것도 아닌 일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 시간만 흘렀습니다.
<<
<< 그리고 밤 10시10분 학교 후문에서 오빠를 만났습니다.
<<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날이면 늘 거기서,
<< 그 시간에 오빠를 만나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빠를 만나 차에 탔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 그러나 저는 그날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됐습니다
<< (그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아 오빠에게 들은 이야기를 대신 씁니다)
<<
<< 용산쯤 와서 신호등이 바뀌어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 오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뒤에서
<< “끼익” 하고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 그러자 오빠가 “어디서 사고나는가 보다”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 그 순간 이미 사고는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⑵] 오빠 도움으로 화염속 기적같이 생존
<<
<<
<<
<< 신호에 걸려 정지해 있던 우리 차에 술을 마시고
<< 이미 작은 사고를 내고 도망치던 갤로퍼 지프가 돌진해와서 충돌했습니다.
<< 우리 차는 그 충격으로 앞차를 추돌하고 튕겨져나와
<< 중앙선을 넘어 건너편에서 오던 차와 다시 충돌했습니다.
<< 그러면서 우리 차는 두바퀴 돌아 다시 그 갤로퍼에 쳐박혀버렸습니다.
<< 오빠가 정신을 차린 것은 차가 빙글빙글 돌고있을 때였습니다.
<< 머리 뒤쪽이 후끈하여 일어나 옆을 보니
<<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내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열려진 창문
<< (오빠는 늘 창문을 열고 다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으로
<<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빠져나와 조수석 쪽으로 돌아왔습니다.
<< 혹시 제가 그 옆으로 떨어졌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 그러나 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
<< 그때 무심코 오빠가 차 뒤쪽을 보니 흰 양말을 신은 제 다리가 보였다고 합니다.
<< 갤로퍼와 우리 차 사이에 다리가 걸쳐져 있었고
<< 이미 제 상체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 충돌과 함께 연료통이 터졌고 차가 몇 바퀴 돌면서 불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 저는 그 불 위로 떨어졌고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 오빠는 저를 꺼내려고 제 두 다리를 잡고 끌어당겼지만
<< 움직이지 않아 제 상체를 위로 띄우듯 당겨서 저를 끄집어냈다고 합니다.
<< 오빠는 불길에 휩싸인 저를 보고 급한 마음에 불을 끄려고 저를 껴안았습니다.
<< 그때 오빠 팔에도 불이 붙었고 순식간에 피부가 타서 벗겨졌습니다.
<< 그래서 오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불을 껐다고 합니다.
<< 불을 다 껐을 때쯤 한 택시기사 아저씨가 수건을 들고와 도와주었을 뿐
<< 사고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
<< 그때 “빨리 비켜요!차가 폭발해요!”라고 누군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 그리고 오빠가 바삐 저를 안고 몇 발자국 옮겼을 때 우리 차가 폭발했습니다.
<< 이 모든 일은 불과 1∼2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 정말 모든 일이,엄청난 일이 ‘순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
<< 그리고 잠시 정신이 든 저는 오빠에게
<< “오빠,지금이 몇 년이야? 2000년이야?”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 아마도 꿈이라고 생각되었나 봅니다.
<< 무의식적으로 저는 꿈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리고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말을 했다고 합니다. “
<< 오빠,나 이렇게 어떻게 살아. 나 죽여줘”
<<
<< 착한 오빠는 제가 아파서 고통받을 때마다 아마 이 말을 되뇌었을 것입니다.
<< 자신이 괜한 짓을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었을 것이고
<< 그래서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든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 오빠의 슬픈 눈에서,어쩔 때는 눈물을 참기 위해 웃는 그 슬픈 웃음에서
<< 그런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 얼마전 오빠와 함께 TV를 보는데
<< 뮤직비디오에서 애인이 타고 있던 차에 불이 나자
<< 밖에 있던 여자가 어찌할 바를 몰라 울부짖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 그걸 보던 오빠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 “저렇게 밖에서 보고만 있어야 되는건데 괜히 꺼내어 가지고
<< 이 고생을 시킨다.
<< 그렇지? 네가 발을 내밀고 있어서 그랬지.으이구∼”하고 말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요즘에는 살맛 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 백번 잘 꺼냈지!”라고 대답했지요.
<< 오빠가 참 좋아했습니다.
<< 처음엔 저를 구해낸 것이 실수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 우리 하나님께서 계속 보여주실 것입니다.
<< 이미 제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실 것으로 믿습니다.
<< 이전의 저였으면 믿지 못할,다 이해하지 못할 평안을
<< 맛보게 하시는 분,이 모습이라도 ‘행복’을 느끼게 하시는 분,
<< 이전보다 더 크고 풍성한 것들을 알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는
<<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합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⑶] 중환자실서 지옥같은 죽음과 사투
<<
<<
<<
<< 앰뷸런스가 오고 저와 오빠는 사고 장소와 가까운
<< 용산 중앙대부속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습니다.
<< 우리가 용산 전쟁기념관 옆 신호대기선에 선지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 더 이상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주일 밤에
<< 집으로 향하던 남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
<< 응급실로 들어갔습니다. 의사들이 달려들었지만 별 방도가 없었습니다.
<< 잠시 기절했던 저는 갑자기 일어나 뜨겁다며 치료해달라고 소리를 지르다
<<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 의사들이 오빠의 팔을 치료하려고 하자
<< 오빠는 자기는 괜찮다며 동생을 봐달라고 했지만
<< 의사들은 동생은 지금 화상이 문제가 아니라 맥박조차 잡히지 않는다며
<< 이곳에서는 더 이상 해줄 게 없어 화상전문병원으로 옮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 제게 산소호흡기가 부착되고 우리는 다시 앰뷸런스를 타고
<< 한강성심병원으로 향했습니다.
<<
<< 앰뷸런스 안에서 오빠는 끝도 없이 주기도문만 외웠습니다.
<<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오빠는 한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저를 안고
<<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습니다.
<< 오빠는 주기도문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다
<< 제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 “지선아 잘가. 너는 너무나 좋은 딸이었고 동생이었어.
<< 누구보다도 예쁘고 착하게 살았고 평생 널 잊지 않을게.
<<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조금만 기다려.
<< 지선아,잘가” 오빠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했을 때
<< 저는 신음소리를 그쳤습니다.
<<
<<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습니다.
<< 그러나 여기에서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 호흡조차 잡히지 않았고 뒤통수는 다 찢어져 살이 너덜거렸으며
<< 이미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 응급실에 살이 탄 냄새가 진동했고 얼굴도 새카맣게 타서
<<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 의사가 오빠에게 치료실로 가라고 했습니다.
<< 그리고 마지막일지 모르니 동생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라고 했습니다.
<< 오빠가 다시 인사를 하자 저는 부르르 떨던 다리를 멈추었습니다.
<< 나중에 들으니 오빠의 인사를 받는 듯했다고 합니다.
<<
<< 잠시후 아빠와 엄마가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 아빠가 “지선아,아빠다. 아빠가 왔어.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자
<< 의식이 없다던 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고 합니다.
<< 엄마는 어찌해야 할지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 저를 보고 서 있을 수도 없었고
<< 딸의 살이 탄 냄새를 맡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 그 날 어찌할 바를 몰랐던,정말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상황에서
<< 엄마는 응급실 바닥에서 그냥 굴렀습니다.
<< 너무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 엄마는 “우리 지선이 교통사고 났어. 지선이 죽는대”라며
<< 가깝게 지내는 권사님께 전화를 했고 곧 이모 삼촌 목사님 전도사님 권사님,
<< 그리고 집사님들이 병원으로 달려오셨습니다.
<<
<< 아빠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며 가망이 없어보이는 저를 위해 애쓰셨습니다.
<< 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아빠는 의식이 있다며 의사를 설득했습니다.
<< 그래서 제 머리를 깎고 찢어진 뒤통수를 꿰매는 등
<< 응급치료를 하고 온몸을 붕대로 감았습니다.
<< 그렇게 겨우 CT촬영을 할 수 있었고
<< 다행히 뇌는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새벽 4시 폐에 가스가 차서 그것을 빼내는 호스를 옆구리에 박고
<< 저는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 그러나 의사는 아직 살았다고 할 수 없으며
<< 아주 위험한 상태니 계속 지켜보자고 말했습니다.
<< 그렇게 저는 지옥같은 죽음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⑷] 이 때를 위한 믿음이라
<<
<<
<<
<< 새벽 6시. 사고소식을 듣고 전가화 목사님이 달려오셨습니다.
<< 중환자실에 들어오셔서 엉망이 돼버린 저와 함께 기도를 하신 후
<<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 목사님은 한 20분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앉아 계셨습니다.
<< 사선을 넘는 고난을 겪으셨던 목사님께서도
<<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차마 엄마를 위로할 수도
<< 지선이가 괜찮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
<< 그러나 목사님께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 ‘이 때를 위한 믿음이라,이 사건을 위한 믿음이라’.
<<
<< “10년이 넘게 하나님을 믿어온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하고
<<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간의 신앙생활과 지금 가진 믿음이
<< 이 어려운 때를 이겨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 이 말씀을 들을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어려움들이
<< 우리를 기다리고 있鄕嗤?우리 가족은 그럴 때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 기도했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었으며
<<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
<< 제가 교회를 처음 다니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 친구가 전도를 해서 아파트 상가에 있는 교회를 다녔는데
<< 가족 모두가 다니지 않는 상황에서 매주 열심히 나가기란
<<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가벼운 병인 줄로만 알고 입원하셨던 외할머니가
<< 폐암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됐습니다.
<< 의사도 손쓸 수 없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 옆에서 간호하시던 이모할머니의 권유로
<<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 그렇게 시작된 믿음생활이었습니다.
<<
<< 할머니는 많이 아주 많이 아팠습니다.
<< 이미 병원에서도 포기한 상태로 퇴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러나 좋아졌다가 나빠졌다를 반복했지만
<< 6개월이 최고라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 할머니는 2년을 우리와 함께 더 계셨습니다.
<<
<< 실로암…아주 오래된 찬양이지요.
<< 제가 처음 들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 할머니는 실로암 찬양을 좋아하셨습니다.
<< 그래서 많이 불렀었지요.
<< 그리고 기도원에서 잘은 못치지만 할머니 앞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 이 찬양을 불러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 그날 정말 앙상하게 뼈밖에 안 남은 우리 할머니는
<< “우리 지선이 많이 예뻐졌네”라고 말씀하셨고
<< 그것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습니다.
<< 그리고 다음날 할머니는 고단한 삶을 뒤로하고
<< 정말 평안한 얼굴로 하나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 그때는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어린 마음에 ‘왜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할머니를 데려가셨는지…’
<< 원망스러웠습니다.
<<
<<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지난주 교회에서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 많이 울었습니다.
<<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그리워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 너무나 감사해서…너무나 감사해서 눈물이 줄줄 흘러 주체할 수 없을 만큼
<< 많이 울었습니다.
<< 할머니는 정말 많이 아팠지만 우리 가족 모두의 실로암이었습니다.
<<
<< 실로암 그 연못에서 눈을 씻어 주님의 이름으로 소경이 눈을 떴던 것처럼
<<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우리 모두는 할머니의 고난을 통해
<<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새로운 참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너무 아팠지만 우리 가족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고 떠난
<< 할머니의 삶은 그 누구의 삶보다 귀한 것임을 압니다.
<<
<< 기도합니다. 부족한 저도,제 고난도 누군가에게 실로암이 되게 해달라고….
<<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그 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도구로…
<< 저도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볼 수 있게 하는
<< 주님의 실로암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⑸] 끔찍한 현실에 죽음도 결심
<<
<<
<<
<< 사고가 난뒤 며칠 동안은
<< 전혀 기억이 없는데
<<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 정신이 돌아올 무렵의 기억인 것 같습니다.
<<
<< 어디선가 ‘웅’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빙글빙글 도는 것 같기도 하고,
<< 보이진 않지만 누군지 모를 여러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습니다.
<< 우습지만 저는 외계인에게 잡혀서 우주선을 타고
<< 실험을 당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
<< “이게 뭐지? 꿈인가? 자고 있나? 이게 뭐지?”
<<
<< 그러다가 “누가 구급차좀 불러주세요! 지선아 괜찮아,괜찮을 거야”라는
<< 너무나 다급하게 울부짖는 오빠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습니다.
<< 시끄럽고 정신없는 사고 현장의 소리가…. 그 끔찍한 소리만이
<< 제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습니다.
<<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꿈이 아닌 일이,
<< 내게 뭔가 아주 큰일이 일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 “사고구나. 사고가 났구나. 내가 다친 건가봐” 그때 그 기분은
<<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운 그 기분. 무섭다는 말
<< 한마디로는 표현이 안되는 느낌…. 공포였습니다.
<<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지나온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
<< 그리고 부끄럽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죽으려고 했습니다.
<<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르고 정신도 혼미할 때였는데
<< 어떻게 그런 못된 생각까지 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산소호흡기로 목을 눌러 산소가 들어오지 못 하게 해보았지만
<<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될리가 없었지요.
<< 그래서 몸에 어떤 줄이 달려 있길래 그걸 뽑으면 죽게 될까 싶어서
<< 발가락으로 당겨서 뺀 것이 나중에 알고보니
<< 겨우 소변을 받아내는 줄이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지요.
<<
<< 이렇게 내 힘으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자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
<< 뒤에 가사는 생각지도 않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싶다고
<< 그렇게 천국으로,하나님께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 부르고 또 부르며 정신이 있는 동안은 계속 불렀습니다.
<< 너무 무서워서,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가고 싶다고
<<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
<<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 아마도 제가 찬양을 하고 있을 때 믿음의 집 식구들과 시온성가대,
<< 또 사랑하는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가,뿌려진 눈물이,
<< 안타까운 마음들이 하늘 보좌를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
<< 그래서 저는 끊임없이 불렀던 찬양 가사처럼 고통 가운데 주님을 만나
<< 이렇게 살아서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고,전하고,증거하며
<<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라고 하나님은 제게 그런 계획이 있으셨나 봅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⑹] 병원서 생존 어려운 환자로 분류
<<
<<
<<
<< 사고후 며칠간 저는 의식이 있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 타버린 몸이 부어오르기 시작해 눈,코,입까지 부어올라
<< 정말 쳐다보기 어려울 만큼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
<< 그러던 어느날 면회시간에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 그때는 온몸이 부어올라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 움직이지 못하게 손발을 묶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 엄마가 발을 묶은 끈을 풀어주어 발로 글씨를 썼습니다.
<<
<< “여기 어디?” “병원이야,중환자실이야. 지선이가 다쳤어…”
<< “언제 만나?” 엄마와의 첫 대화는 그랬습니다.
<<
<< 그전에 친척 한 분이 중환자실에 계셨던 적이 있어서
<< 중환자실은 면회가 제한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하루에 세 번,
<< 30분씩 만날 수 있었습니다.
<< 면회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정작 엄마를 만나는 시간은
<< 너무 짧아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 중환자실에서 있는 동안
<< 화상 치료만큼이나 힘들었습니다.
<<
<< 또 가족에게는 제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 저는 사고 당시 눈에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었습니다.
<< 얼굴이 까맣게 타버렸는데 눈 안에서 렌즈가 녹아버린 것은 아닐까?
<< 정말 그렇다면 이젠 지선이가 살아도 앞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 온 가족이 걱정했습니다.
<<
<< 몸이 퉁퉁 부어있었기 때문에 렌즈가 녹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 며칠이 흘렀습니다.
<<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지 4일째 되던 날 부기가 조금 가라앉으면서
<< 전혀 녹지 않은 렌즈를 꺼낼 수 있었고
<< 그것을 간호사가 엄마에게 알려주셨습니다.
<< 하나님께 중요한 제 눈을 지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
<< 심한 화상의 경우 대개 1주일이 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합니다.
<<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병원에서는 저를 살 가망이 없는 환자로
<< 분류하여 간호 스테이션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에 두었습니다.
<< 제가 2층 중환자실에 있던 40일간 그 침대에 있었던 환자 중에
<< 살아서 나온 사람은 저 하나였습니다.
<<
<< 1주일이 생사의 고비라는 그동안 폐에 차 있던 가스를 제거하는 관도
<< 빼내었습니다.
<< 그리고 어느날 의사 선생님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 “이제 숨쉴 수 있지? 혼자서 숨쉴 수 있지?”라고 물으셨고
<<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목안 깊숙이 박혀있던 산소 튜브를 뽑아내었습니다.
<< 그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
<< 이제는 엄마와 말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저는 다 나은 것 같았습니다.
<<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살기 위한,살아남기 위한 싸움의 시작에
<< 불과하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었습니다.
<<
<< 매일 아침 지옥같은 화상치료실에서의 치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 타버린 피부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조차 금방 해주지 않았을 만큼
<< 여전히 저는 살 가망이 희박한 환자였습니다.
<< 그러나 저를 위해 눈물로,금식으로 기도해주셨던
<< 정말 많은 분들의 사랑의 힘이 있었고
<<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 그래서 저는 지금 이곳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며
<< 제게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글로 전하고 있습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⑺] 극심한 수술고통…찬양으로 극복
<<
<<
<<
<< 저는 계속 헛것을 보았습니다.
<< 누워있는 그곳이 병원으로 제대로 보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 수술을 하면 안 아프게 될 줄 알고,
<< 또 수술을 하면 이제 중환자실을 나가게 될 줄 알고,
<< 그렇게 기다리던 첫번째 수술을 받았습니다.
<< 그 수술은 타버린 피부와 죽은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이었습니다.
<< 애타는 마음으로 뭔가 더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부모님은
<< 수술실 앞에서 의사의 입으로부터 설사 살게 되더라도
<< 사람 꼴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손가락도 다 절단해야 한다는,
<< 너무나 냉정한 현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 엄마는 기절했고, 저는 고통가운데 소리를 지르며
<< 비린내가 진동하는 몸으로 수술실에서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
<<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 죽은 조직을 걷어내니 치료는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 매일 아침 제가 받아야 했던 화상치료는 감겨있는 붕대가
<< 잘 떼어지도록 물로 적시고, 가위로 서걱서걱 잘라내고,
<< 모든 상처부위를 소독 물로 씻어냅니다.
<< 약이 잘 발라지도록 물기를 또 닦아냅니다.
<<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 그 위에 다시 약을 바르고 붕대를 다시 감는 것으로 치료가 끝이 납니다.
<< 말은 이렇게 몇 줄의 설명으로 끝나지만,
<< 피부의 55%가 없었던 그 당시 제가 느꼈던 고통은
<< 아주 오랫동안 눈물 없이는 떠올릴 수 없는,
<< 생각만으로도 모든 세포가 벌벌 떨리는, 그런 기억입니다.
<< 그 곳은 정말 생지옥이었습니다.
<< 어이없게 다친 사람들이,
<<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는,
<< 실제로 마약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강한 진통제를 맞고도,
<< 그냥 차라리 거기서 딱 미쳐버렸으면, 차라리 정신을 잃어버렸으면 하는
<< 그런 곳이었습니다.
<< 저는 매일 아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돼지의 마음이 이럴 꺼야’라고
<<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그럴 때마다 철저히 혼자가 되는 시간마다 저를 지켜준 것은
<< 찬양이었습니다.
<< 저는 매일 아침 죽어야 했지만 그 죽음과 같은 시간을 기다리며
<< 마음을 졸이며 끊임없이 찬양을 들었습니다.
<<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찬양 속엔 살아서 역사하시는
<< 하나님의 생명의 힘이 있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놀라지 말라”.
<<
<<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 그곳에서 저는 단 한번도
<< 소리 질러 본 적이 없습니다.
<< 치료를 하던 치료사들이 “지선이가 베스트”라며 칭찬을 할 정도로
<< 저는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 발가벗겨져, 피부도 없이 그곳에 누워, 소리마저 질러버린다면
<< 정말 저조차도 제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
<< 엄마가 하라는 대로 저는 매일 치료 받는 동안 기도했습니다.
<< “지금 하는 치료가 감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소독일 뿐이지만,
<<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믿음으로 몸을 담구었던 것처럼,
<< 이것이 헛되지 않게 하시고, 저를 하나님께서 치료하시옵소서”.
<<
<< 아팠던 이야기를 하자면 이 지면을 다 써도 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나 제 모든 고통은 하나님만 기억하시길 원합니다.
<<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뿌려졌던 눈물과 피와 고통의 기억들은
<< 나를 구원하실 여호와 하나님만 기억하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 다만 제가 경험했던 그 곳은 ‘끝이 있는 지옥’이었음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 끝이 있는 지옥은 차라리 축복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이 삶이 끝나 천국에 갈 때에
<<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떨어지게 될 그곳은
<< ‘끝이 없는 고통의 지옥’이라는 것을
<< 더욱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하기 원합니다.
<<
<<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은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 한걸음에 달려오시는 김순호 목사님의 사랑이었습니다.
<< 밤새 헛것을 보고, 1시간 조차 잠들지 못한 제게 목사님은 아침마다
<< 시편의 말씀을 읽어주셨습니다.
<<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 위로였고 선포였습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⑻] “살아야 겠다”…악착같이 먹어
<<
<<
<<
<< 시간이 얼마간 지나고 치료실에서 뒤통수를 꿰매었던 부분의 실을
<< 뽑아내느라고 저를 일으켜 앉혔는데
<< 그때 제 눈으로 제 다리의 상처를 보게 됐습니다.
<< 붉은 생살과 피,그리고 생닭에서나 봤던 노란 지방덩어리와 하얀 뼈까지….
<<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 그저 “나는 살지 못하겠구나…”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
<< 다음날 밥을 먹이시는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 엄마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시켜야 할 것 같았습니다.
<< 더 이상 무언가를 먹는다는 게 의미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
<< 엄마는 그럴수록 더 먹어야 한다고,다음부터는
<< 절대로 상처를 보지 않기로 약속하자고 하셨습니다.
<< 그리고는 한 숟갈 한 숟갈 떠먹일 때마다 기도를 하셨습니다.
<<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에 살을 입히시고 가죽을 덮으시고
<< 생기의 영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이것이 지선이의 살이 되게 하시고
<< 피부가 되게 하시옵소서”
<<
<< 저는 열심히 먹었습니다.
<< 제가 거기서 그런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 면회시간이 끝난 뒤에도 계속 먹어야 한다고,
<< 많이 먹어야 빨리 살이 차올라서 이곳을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 바쁜 간호사님들의 온갖 눈치를 받았지만 저는 죽을 힘을 다해 먹었습니다.
<<
<< 밤마다 양 옆 침대에 누운 다른 환자들이 혼수상태에 빠지고,
<< 긴급상황이 벌어지고,죽어 나가는 상황에서도,
<< 커튼 뒤로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그 순간에도 저는 계속 먹었습니다.
<< 마음이 약해질 수 없었습니다.
<< 나는 살아서 나가야 했습니다.
<<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 그것이 저를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 중환자실 문앞에 와서 기도하고 가시는 수많은 분들의 눈물과 기도에
<< 보답하는 길이었습니다.
<<
<< 실제로 빠른 속도로 살이 차올랐고
<< 그곳에서 두번째 수술인 피부이식 수술(양팔,오른쪽배,허벅지)을 받고
<< 36일만에 중환자실에서 준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 36일동안 그 중환자실에서 18명의 환자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데
<< 저를 살아서 그곳을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사명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 제가 전우라고 부르는그분들(중환자실은 실제로 전쟁터였습니다)을
<< 생각해서라도 저는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내기 원합니다.
<<
<< 머리부터 온몸이 미라처럼 붕대로 감긴 저는
<< 그곳에서 더 이상 여자도,사람도 아니었습니다.
<< 누구보다 보호받아야 할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 오히려 거기 누워 바쁜 의료진을 이해해줘야 하는 웃지 못할
<<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 그토록 감염 위험 때문에 가족과 만나는 면회시간도 제한시키면서
<< 너무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병실 안에는 벌레가 날아다녔습니다.
<<
<< 이미 그때부터 제 눈은 감기지 않았었고 피부가 없는 얼굴에서
<< 계속 진물이 흘러서 눈은 언제나 뿌옇게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 그러던 어느날 날아다니던 벌레가 내 눈에 내려앉았고
<< 정말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저는,눈 한번 깜짝 할 수 없는 저는
<< 누군가 와서 쫓아주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 벌레 하나 쫓을 수 없는 나…. 많이 비참했습니다.
<< 7개월 뒤 눈을 감을 수 있게 되기까지 저는
<< 아주 오랫동안 날아다니는 벌레만 나타나면 벌레를 쫓아달라고
<< 소리를 지르곤 하였습니다.
<<
<< 9월21일 세번째 이식수술을 위해 피부를 얇게 떼어내고
<< 붙일 부분을 고르게 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 저는 제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마취에서 깨어나
<< “엄마 아파∼ 아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 그렇게 이를 악물고 참던 저도 별 수 없었습니다.
<< 찬양 테이프를 틀어달라고 했습니다.
<<
<< ‘왕이신 하나님 높임을 받으소서’라는 찬양이 나오고
<< 울부짖던 제 소리도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 울면서 따라 불렀습니다.
<< 나를 지키실 분,나를 건지실 단 한 분. 만왕의 왕 되신,
<< 천지의 주재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⑼] ‘양쪽 손 절단’말듣고 깜짝 놀라
<<
<<
<<
<< 사고 후 두달만인 9월28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일반 병실로 옮겼습니다.
<< 여전히 많은 상처가 있었고 얼굴은 그대로 피부없이 나오긴 했지만
<< 이제 오랜 시간 그렇게 그리워했던 가족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 마음껏 찬양을 들으며 기도받을 수 있고 예배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
<<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누울 곳도 제대로 없었는데
<< 네 식구가 3일동안 한 병실에서 잤습니다.
<< 너무 좋아서,너무 감사해서 제가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
<< 얼굴에 피부이식을 받기 위해 성형외과로 옮겼지만
<< 계속적인 의료 분쟁 사태로 의사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고
<< 어쩌다 그렇게 어렵게 만난 의사는 자신의 피곤함을
<< 저와 가족에게 퍼부어댔습니다.
<< 이미 바닥이었던 우리를 땅속 끝까지 밀어넣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
<< 그래서 병원을 옮겼으나 의료파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 병원에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수술은 계속 미뤄졌고
<< 이식했던 상처들까지 다시 녹아버려 더 큰 상처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 파업이 끝나고 의사들은 돌아왔지만 얼굴을 덮을 만한 피부가
<< 여유롭지 못하다며 수술은 또 다시 기약없이 연기됐습니다.
<<
<< 12월7일 병원을 옮긴 지 두달만에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 양손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모두 한마디 정도를 절단하기로 한다는
<< ‘절단동의서’를 쓰고 말입니다.
<< 그때 오빠가 들고 온 종이에 지장을 찍으면서도
<< 저는 그게 절단동의서인줄 몰랐습니다.
<<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간호사가 “양손 절단동의서 확인하셨죠?”라고
<< 하는 말을 듣고 엄마에게 놀라 물었습니다.
<< 그때까지 오른쪽 손가락만 절단하는 줄 알았거든요.
<<
<< “왼쪽도 하는 거야?”“응”
<<
<< 그리고 잠시 후 하나님께서 제 입술에 어떤 말을 주셨는지 아세요?
<< “엄마,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해야지”
<< 제 마음은 처음부터 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 그것은 세상은 줄 수도,알 수도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었습니다.
<<
<< 뼈까지 완전히 타버려서 도저히 살릴 방법이 없기 때문에
<<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마지막 결정을 들은 날 밤
<<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 손가락은 짧아지더라도 손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 당시 팔에 이식한 피부가 땅겨 제 힘으로는
<<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 그래서 의수보다 못한 손이 되지 않게,부끄러운 손이 되지 않게,
<< 제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
<< 지금 제 왼손은 새끼손가락을 제외하곤 거의 정상입니다.
<< 왼손은 오른손보다 손가락도 조금길게 남았고 많이 상하지 않아서
<< 저는 이제 왼손잡이가 되었습니다.
<< 왼손이 오른손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 그리고 오른손도 왼손처럼 편하게 될 줄 믿습니다.
<< 주님께서 이 부끄러운 손을 기쁘게 사용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
<< 저는 교회에서 이 부끄러운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 이 손으로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악수도 하고 손을 흔들며 인사도 합니다.
<< 그리고 엄지로만 치고 있지만 이 손으로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는
<< 글을 씁니다.
<<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불쌍한 손이지만 하나님은
<< 제게 이 손이 부끄럽지 않다는 마음을 주십니다.
<< 하나님은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 하나님은 제 손을 부끄러운 손이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⑽] 거울엔 낯선 내 얼굴이 비치고…
<<
<<
<<
<< 14시간의 긴 수술끝에 손가락을 절단하고
<< 얼굴에 인조피부를 이식했지만 인조피부는 녹아버렸습니다.
<< 그래서 진통제 주사 3대로 겨우 버텨가며 하루 네번 피부 없는 얼굴에
<< 피부 대신 덮어놓은 거즈를 뜯어내고 새 것으로 바꾸는,
<< 지금도 상상조차 하기 싫은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 그리고 그 진통제조차 마약 중독의 의혹(?)을 받아가며 눈치를 보고
<< 또 보며 사용해야 했습니다.
<<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 그때 그 병원의 의사는 내게 피부의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 나같은 화상환자를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수술해야 할지도 몰랐던 듯합니다.
<<
<< 결국 2001년 2월 언제 끝날지 모르던,늘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 계속 뒷걸음질만 치던 것같은 광야생활을 끝내고
<<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병원을 옮겨
<< 드디어 얼굴에 피부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7개월만에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고,세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고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
<< 예정대로였다면 몸의 피부이식을 끝내고
<< 사고 후 2개월 정도였으면 얼굴피부 이식수술을 받고
<< 새 얼굴을 가졌을 것입니다.
<< 그러나 여러 문제로 저는
<< 7개월만에 새 얼굴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
<< 어느 날 사고가 제게 일어났고 저는 얼굴 전체를 잃었습니다.
<< 저는 방에 있는 거울을 치웠고 목을 들 수 없게 돼
<< 거울조차 보기 힘들었지만 저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 그러나 밤에 유리창에서,밥을 먹다가 숟가락에서 저는
<< 문득문득 저를 보곤 했었습니다.
<< 오래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
<< 몇 달이 지나면서 멀리서나마 거울에 비친 저를 바라보게 됐습니다.
<< 태어나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 그 어색함을 이기기 위해,마음과 생각을 지키기 위해 낯선 나에게
<<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습니다.
<<
<< “안녕∼ 이지선”
<<
<< 거울 속의 새 지선이도 인사를 했습니다.
<< 그렇게 조금씩 더 가까이 내게 익숙해지며 새로운 나와 친해져 갔습니다.
<<
<< 이제 다시 얼굴 수술을 하지 못해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돌던
<< 광야생활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때는 이유를 다 알 수 없었던,
<< 그러나 한 순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던 2001년의 겨울
<< 그 광야…. 매일 만나를 주셨지만 정작 예비하신 그 땅에는
<< 데려가 주시지 않았던 그때를 저는 광야라고 칭합니다.
<<
<< 저는 그 광야의 의미를 다 알지 못했습니다.
<< 그래서 늘 기도했었습니다.
<< 섭섭한 마음에 제게 광야의 의미를 설명해달라고,
<< 하나님이 나를 고치실 것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제게
<< 그 광야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 하나님을 증거할 때 온전히 감사한 마음으로 증거할 수 있도록
<< 내 모든 그리고 아주 작은 섭섭한 마음이라도 없앨 수 있게 제게 알려달라고,
<< 그 안에서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고 기도했습니다.
<<
<< 그런데 어느날 집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 “과연 사고 후 석달 만에 새 얼굴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면…
<< 그렇게 옛날 네 얼굴에 대한 모든 기억이 생생할 그 때,
<< 언제나 거울을 보면 당연히 보이던 네 모습이 여전히 머리에 남았을 그 때…
<< 거울로 너무나 달라진 새 얼굴을 보게 된다면…
<< 지금처럼 이럴 수 있었겠니? 감사할 수 있었겠니?”
<<
<< 7개월의 광야생활동안 하나님은 이전의 나를
<< 완전히 지울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 지울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 광야에서 훈련되지 못했다면 이 모습으로라도 살게 하신
<<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원망부터 하며
<< ‘하나님 왜요?’ 라는 질문만 퍼부었을
<< 나약한 제 자신만이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
<< 이제는 모든 섭섭함을 떨쳐내 버렸습니다.
<< 감사할 수밖에 없게 하시는,제게 늘 감사의 조건과 환경을 허락하시는,
<< 그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내 영혼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이런 모습이라도,지금 모습으로도,행복할 수밖에 없게 하시는
<< 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⑾] “하얀 눈보며 살아 있음을 감사”
<<
<<
<<
<<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돼버렸지만…
<< 가고 싶은 교회도,성가대도,학교도 맘대로 갈 수 없지만…
<< 그렇게 모든 걸 잃은 것같지만…나약함 가운데,상처투성이 몸 가운데
<< 짧아진 손가락에도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고
<< 소망을 주시며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주십니다.
<< 제가 기도했던 모습은 아니지만…하나님은 삶을 누리게 하시며
<< 큰 일보다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 저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
<< 며칠 전부터 산책을 시작했어요.
<< 병원 로비에서 뛰기도 하고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밀기도 하고
<< 거의 한달만에 밖에 나갔어요.
<< 병원 나무에 걸린 크고 아름다운 트리 장식도 보았고
<< 흰눈이 펑펑 내리는 것도 봤어요.
<<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 살아있어서 흰눈도 보게 하시고 추운 겨울을 다시 맞게 하시니”(2001년 1월11일).
<<
<< 얼굴에 피부 대신 거즈를 덮고 있던 시절,끝이 없을 것같은
<< 병원생활을 하던 2001년 겨울 제가 처음으로 2개의 엄지 손가락으로
<< 병실에서 쓴 글입니다.
<< 그 해 생애 최고로 아름다운 눈을 볼 수 있었습니다.
<< 모두 잠든 밤,밖에 나가서 쐰 차가운 바람 속에서 저는 살아있음을 느끼며
<< 무한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
<< 또한 저희 가족에겐 광야와도 같았던 그곳 구로병원에서 만나게 해주셨던
<< 병원 목사님과 사모님은 하나님이 저희 가족에게 보내주신 사랑이고
<< 위로였음을 기억합니다.
<< 이 지면을 빌려 두 분께 정말 가슴 깊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 하나님은 늘 견딜 만한 힘을 주셨고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
<< 그해 2월 제게는 너무 귀한 의사 선생님인 오석준 원장님을 만나
<< 다시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 드디어 얼굴에 피부이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 이식한 피부를 고정시키느라 수백개의 스테이플러가 박혔었지만
<< 그걸 떼어내는 아픔 이후로는 더 이상 치료는
<< 제게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 이제 더 이상 치료 카트 바퀴가 구르는 소리만 들리면
<< 나를 치료하러 오는 소리인 줄 알고 초긴장하며 떨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 2001년 3월7일 저는 드디어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 이 글은 퇴원하던 날,
<< ‘가출소녀 이지선,7개월만에 컴백홈∼!’이라는 제목으로 썼던 글입니다.
<<
<< “지난 여름밤 돌아오려던 집에 계절이 3번째 바뀌고서야
<< 이렇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현관에 들어서며 사진 한장 찍고
<< 그리고 이제 환자복이 아닌 제 옷을 입고 침대가 아닌 의자에 앉아
<< 글을 씁니다.
<< 전도사님이 오셔서 예배도 드렸습니다.
<< 제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가출 안해본 사람은 잘 모를 거예요.
<< 그리고 방금 전 너무너무 멋진 화분 하나가 배달되었어요.
<< 퇴원을 축하한다고 시온성가대 지휘자님께서 보내주셨더군요.
<< 너무너무 감사해요. 매주 거르지 않고 병원에 꼭 와주시고.
<< 정말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하나님 사랑은 절대 그렇지가 않네요.
<<
<< 저는 알아요. 제가 이렇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 제가 잘 참아서가 아니란 걸요.
<< 모두의 사랑과 눈물어린 기도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걸 알아요.
<< 감사해요.
<< 아직 모두 끝난 게 아니지만 이렇게 행복한 날 맞게 하시고
<< 더 기쁜 날을 소망하게 하신 주님. 온몸에 남은 상처,
<< 짧아진 여덟개의 손가락. 이 모든 것은 주님이 날 사랑하신 증거,
<< 하나님이 다녀가신 흔적임에 감사합니다.
<<
<< 거울 보기 겁나는 얼굴. 10년후에 제가 사고 얘기를 하면 “전혀 몰랐어요.
<< 화상당하셨었어요?
<< 이 얼굴이?”라고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치유받길 소망해요.
<< 10년후에요.
<< 얼굴만이라도요.
<< 덤으로 사는 인생.
<< 처음부터 버렸던 욕심,이제 와서 주섬주섬 담고 불행해지지 않도록
<< 기도할 거예요.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2001년 3월7일)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⑿] 이식피부 당겨 찢어질듯한 고통
<<
<<
<<
<< 이식한 피부는
<< 자꾸만 작아지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래서 처음 이식했을 때의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없어져가고
<< 당겨져서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갖게 합니다.
<< 퇴원하고 집에 돌아와서 살이 당기는 찢어질 듯한 고통에 아침마다
<<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 제 스스로 ‘고달픈 나의 인생’이라고 할 정도로 집으로 돌아와서
<< 느끼게 된 기쁨만큼이나 이겨내야 할 현실은 참으로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 이식받은 피부가 가려워서 잠도 푹 잘 수 없었습니다.
<< 목과 턱은 완전히 당겨져 내려가서 흘러내리는 침 때문에
<< 입에는 늘 손수건을 물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아서 밥먹을 때는 수건을 깔고
<< 먹어야 했고 당겨지는 피부를 늘이기 위해 매일 물리치료와
<< 운동을 해야 했습니다.
<< 운동을 하지 않으면 관절과 근육이 굳어버리기 때문에
<< 게을리할 수 없었습니다.
<< 늘 동생이 손을 못쓰게 될까봐 걱정하는 오빠랑 매일 싸우고 울며
<< 달래고 애원하기를 반복하며 운동을 했습니다.
<<
<< 현실은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 제겐 소망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 애원하고 매달렸을 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
<< 어느날 저녁 저는 안경을 끼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 안경없이 보았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 그렇게 웃다가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 이제는 더 이상 평범한 스물네살짜리 여대생이 아니라는 것을
<<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이전과는 다른 꿈을 꾸어야 합니다.
<< 영화 같은 사랑 얘기에 가슴 들뜨기엔…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 그날 밤 저는 엄마에게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 그리고 교회에 엎드려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
<< “하나님 저 어떡하실 거예요.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 하나님 살아계시잖아요.
<< 전지전능하시잖아요.
<< 저 좀 도와주세요.
<< 저 좀 도와주세요”
<<
<< 그 다음날 주일 예배때 저는 찬양을 하다가 속이 상했습니다.
<< 저 무대 위 성가대 자리가 아닌 여기 이 자리에서 남에게 보일까 봐
<< 모자를 눌러쓰고 가면을 쓰고 흐르는 침 때문에 수건을 입에 물고 앉아 있는
<< 현실이 혹시나 꿈은 아닐까.
<< 내가 아주 긴 악몽을 꾸는 건 아닐까
<< 생각했습니다.
<< 이 말도 안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 속이 상했습니다.
<<
<< 찬양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 그동안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고 뭐고 저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 “하나님. 제게 들려주세요. 이제 저 어쩔 건지 말씀 좀 해주세요”
<<
<< 찬양이 끝나고 목사님 설교가 끝났습니다.
<< 목사님이 단상에서 내려와 제 옆자리에 앉으셨습니다.
<< 그리고 저를 두 팔로 감싸안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
<< “지선아. 내 사랑하는 딸아. 내 너를 세상 가운데 세우리라.
<< 아프고 병든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하리라”
<<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 저는 상했던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전에 함께 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할
<< 시온성가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
<< 저는 종교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시고 감독까지 하는 기독교 영화입니다.
<< 주인공의 실수로 조기 종영 위기를 맞았던 이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주인공이 언제까지 고난을 받을지 아직은 모릅니다.
<< 그러나 곧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그녀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 푸른 초장에 누이실 것을 믿습니다.
<< 분명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은 영화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믿습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⒀] 이식피부서 눈썹 자라 온가족 감격
<<
<<
<<
<< 상황은 나빴지만 저는 날마다 좋아졌습니다.
<< 기대한 것만큼 아주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 하나님은 제가 낙심하고 울고 있을 때에도 일하시는 분이셨습니다.
<< 다물어지지 않던 입이 다물어졌고
<< 드디어는 입에 수건을 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 입술이 닿지 않아 ‘오빠’라는 발음을 하지 못해 늘 ‘오까’라고 불러서
<< 생긴 오빠의 애칭은 그야말로 애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 이식한 피부를 뚫고 눈썹이 하나 난 것을 보고
<< 온 식구가 감격해서 울었습니다.
<< 가려워서 먹던 약도 점점 줄게 되고
<< 밤에 괴로워서 주무시던 아빠를 깨워 부르는 날도 적어졌습니다.
<<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손도 움직이고
<< 단추도 채울 수 있게 되고 혼자서 옷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 “제가 이만큼 고생했다”고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고
<< 다른 사람들을 울리기 위해서라든가 동정을 받기 위해서 쓰는 것은
<< 더더욱 아닙니다.
<<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 누구도 살 수 있을 거라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렇게 살리셨고
<< 또 사랑하셨음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 부디 제 이야기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
<<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저를 세우시고 사랑받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저는 아직,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 하나님은 제가 받은 은혜를 글로 쓰게 하셨고 나누게 하셨습니다.
<<
<< 제 글에 감동받았다고 하시는 많은 분들의 글 앞에서 저는
<< 아주 많이 부끄러워지지만 정말 일하시는 분은
<< 하나님이심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 저를 통해,제 이야기를 통해,단 한명의 영혼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 단 한명이라도 고통스러운 현실속에서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
<< 전환할 수 있게 된다면 제 아픔과 고난은 충분히 의미있고
<< 가치있는 것이 됩니다.
<<
<<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린도후서 1장 4,5절)라는 말씀처럼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 고난이 위로가 되고 사랑이 되고
<< 희망이 되길 원합니다.
<<
<< 세상의 눈으로만 보면 동정거리밖에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를 통해 제 이야기가 하나님 안에서
<< 정말 가장 값진 것으로 쓰임받으리라 믿습니다.
<<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 제 상처와 제 외모의 부족함과 짧은 손가락이
<< 그저 장애로만 남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에 감사드립니다.
<<
<<
<<
<< [나의 길 나의 신앙―이지선 (14·끝)] ‘험한세상의 다리’ 되신 하나님
<<
<<
<<
<< 땅겨진 목 피부 때문에 저는 턱도 없어졌고
<< 등도 굽어져 척추엔 압박 골절이 생겼고
<< 고개를 들고 앞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 그래서 2001년 7월과 8월 두차례에 걸쳐 목부분에 피부이식을 받았지만
<< 퇴원을 하기도 전에 저는 다시 피부가 땅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
<< 물론 수술하기 전보다는 훨씬 좋아졌지만 고생했던 만큼
<< 그리고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 이렇게 얇은 피부를 떼어서는 열 번을 수술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습니다.
<< 실제로 병원에서 목을 펴기 위해 수차례씩 같은 수술을 받는 분들을
<< 보아왔습니다.
<<
<<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고자 했고 미국과 일본의 병원 문을
<<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 알아보던 중,미국측병원의 어마어마한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도 했지만
<< 하나님께서는 일본에서 너무 귀한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 그래서 정말 기대하는 마음으로 일본행을 택했습니다.
<<
<< 저는 지금 일본 도쿄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 처음엔 치료를 위해서 온 줄 알았습니다.
<< 미국과 일본을 놓고 제가 기도하고 선택한 것인 줄로 착각했었습니다.
<< 그러나 이곳에서 중앙영광교회 이용규 목사님을 통해 신앙 훈련을 받으며
<< 그 안에서 공급해주시는 영적인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고
<< 하나님께서 저를 굳이 일본으로 보내신 크신 이유를 깨닫게 됐습니다.
<<
<< 요셉을 노예로 팔리게 해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처럼
<< 다니엘을 포로로 잡히게해 페르시아로 보내셨던 것처럼
<< 제게 화상과 치료 그리고 수술은 그저 구실로써,1차적인 목적으로
<< 저를 일본으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
<< 일본에 와서 3번의 수술을 받았고 저는
<< 드디어 편하게 목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이전보다 훨씬 편해지고 좋아진 모습도
<< 더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이지만,특히 이곳에서 더욱 깊고 풍성하게
<< 느끼게 된 하나님과의 만남은 정말이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고
<< 기쁨입니다.
<<
<< 지금은 일본어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있고
<< 내년 10월 학기에는 심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 상담심리학을 공부해서 아픔이 있는 분들을
<< 예수님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치료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 저는 저를 잃음으로 더 많은 사람을
<< 가슴으로 안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고난이 아니면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 누구나 나름의 크고 작은 아픔을 안고 사는
<< 이 세상에서 그런 아픔을 나누고
<< 또 그것이 치유받아야 할 아픔이라면
<< 치유받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
<< 상담자가 가져야 할 첫번째 조건은 내담자와의 ‘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주는 것,
<< 이제 저는 적어도 이제까지 머리로 하던 것들을
<< 마음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진정으로 감사드릴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또한 일본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저를 쓰시겠다면
<<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
<<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더 멀지만,여전히 수술이 필요한 부분들이 많지만
<< 저는 기쁨으로 가려고 합니다.
<< 지금까지 더 험할 때도 지켜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 저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실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지금,여기,제 안에,제 모습 속에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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