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역사 / 임보
원시인이 막대로
물고기나 과일을 그렸을 때는
땅이 책이었다
고대인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는
나무껍질이나 댓조각이
책의 구실을 했다
그러다가 종이가 만들어지자
너도 나도 책을 손에 쥐게 되면서
세상이 천지개벽 급격히 달라졌다
많은 책을 독파한 자가 힘을 얻었고
장서량이 곧 국력의 상징이 되었으며
신문들이 세계를 주물렀다
그러나 종이의 시대도 한때
전자기기인 PC가 등장하면서
필기도구들과 함께 이들도 밀려나고 있다
바야흐로 이젠 빛이 지배하는 시대
종이책 대신 전자책이 만들어진다
도서관이 머잖아 박물관으로 바뀔 판이다
종이의 시대 / 임보
인간이 언어를 만들어 의사를 소통하고
문자를 만들어 언어를 저장하면서
지상의 패자가 되었다
종이가 등장하면서
종이는 언어의 집이 되고,
수레가 되고, 곳간이 되고, 무기가 되어
세상을 주름잡았다
황제의 칙서며, 비밀협정서며
혁명군의 공약이며, 선언문
지상의 모든 포고문
법전과 실록, 신문.....
아니,
청춘들의 연서, 감미로운 수많은 시편들
삼국지나 천일야화 등의 신나는 얘기들
철학 과학 의학 천문학 고고학 등의
빛나는 전문서적들.....
그들이 2천 년 동안 이 지상에
이처럼 놀라운 문명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들도 인제 한물갔다
pc와 스마트 폰이 등장하면서
언어들이 기계 속에 저장되고
순식간에 천만리를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종이의 시대를 밀치고 빛의 시대가 도래했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한 권의 책,
향긋한 잉크 냄새를 풍기는 신간 시집,
몰락한 귀족의 후예처럼 안쓰럽기도 하다
- 임보 시집 <벽오동 심은 까닭> 2017
옥판선지(玉板宣紙) / 임보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쉬안청[宣城] 닝궈[寧國] 등지는
예로부터 종이의 산지로 유명하다
선지(宣紙)는 이곳에서 생산된 종이를 이르는 말
옥판(玉板)은 석 장을 합쳐 만든 3층지라는데
빛이 희고 결이 고우며 광택이 있어
고급 서화용지로 애용되어 오고 있다
내게는 50년쯤 된 옥판선지가 한 묶음 있다
젊은 날 물정도 모르고 서화를 익힌다고
인사동 주변을 어정거리며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귀동냥으로 ‘옥판선지’ 이름을 듣고
일본에 계신 선친께 보내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중국산 종이를 일본의 아버지께 보내 달라다니…
지금 돌이켜 보면
선친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내가 뒤늦게
어리광을 부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민망키도 하다
얼마나 지났던가
한 묶음의 옥판선지가 나를 찾아왔다
고매원(古梅園)*의 날씬한 붓이며 먹과 함께…
그런데
그 귀한 종이에
차마 내 먹물을 묻힐 수 없어서
몇 십 년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저 종이가 언제 주인을 만나게 될지…
몇 겹으로 두툼하게 포장된 옥판선지가
지금도 내 서가의 시렁 위에 올라앉아 있다
* 고매원(古梅園)
16세기 창립 이래 먹과 붓 등 서예용품을 생산하고 있는
일본 나라(奈良)의 저명한 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