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을 훌쩍 넘긴 러시아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의 진행 상황에 관해 국내 언론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성적인(?) 전문가 시각이 31일 중앙일보의 '고발한다' 오피니언 코너에 등장했다. '김영준이 고발한다'의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 전쟁 진다? 서방 '희망사항' 아닌가"라는 글이다.
필자 김영준은 국방대 안전보장대학원 교수로, 영국 런던대에서 석사, 미국 캔자스대에서 박사(국제정치사 전공) 학위를 받고 미 국방부 산하 연구기관(FMSO)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겉보기에는 반러시아적 시각을 갖고 있을 법한 국방 전문가로 여겨지는데, '고발' 내용은 딴판이다. 그래서 더욱 신뢰를 얻지 않을까 싶다.
김영준 국방대 교수의 글이 실린 중앙일보 웹페이지/캡처
김 교수는 "국내·외 언론과 전문가들은 '러시아 군은 이번 전쟁으로 기존에 경쟁국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전쟁 수행 능력이 떨어진다. 이번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는 지배적인 의견을 피력했지만, 이런 주장이 공허해 보인다"며 "침략자는 국제적 비난을 받고 전쟁에서 결국 패배해야 한다는, 무의미한 도덕적 담론 같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현실의 전쟁을 이렇게 도덕적 잣대로만 판단하면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석이 어려워진다"고도 했다.
그의 분석 기준은 무엇보다도 '현실과 도덕적 당위'를 냉정하게 구분하는 데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침략자 푸틴과 러시아가 패배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성과 희망적 사고는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방해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특히 러시아의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시각, 즉 전제부터 잘못됐다고 꼬집었다. 이전부터 장기전에 능한 러시아를 현대전 특유의 단기 승전 공식에 대입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다른 나라(서방)와 차별되는 러시아의 전쟁 수행 문화 전통을 들었다. 전략사상가 알렉산더 스베친이 말하는 '지연전'(War of Attrition) 전통이다. 과거 러시아가 나폴레옹 등 외부 침략을 받았을 때, 광활한 영토와 자원, 혹독한 겨울과 우기 등을 무기로 구사했던 방식이다. 장기전(지연전)으로 군사와 국민 모두가 지쳐, 여론과 전쟁 의지가 동시에 꺾이는 시점에 결정적 타격을 가해 승리를 거뒀다는 것.
러시아군의 해상 발사 미사일 공격/사진출처: 러시아 국방부
김 교수는 러시아가 방어 입장이 아닐 때도 이같은 전략을 구사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당시 스탈린은 소련과 동유럽 공산 국가들의 안보적 이익을 위해,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유럽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 뒤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높아지도록 전쟁을 끌어(정전 협정 지연 등) 궁극적으로는 자국의 국익을 추구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번에도 러시아가 처음부터 장기전을 계획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장기전에 익숙한 국가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의 이같은 주장은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서방의 첨단 무기를 충분히 받은 뒤 반격에 나선다는 우크라이나군 전략과도 맥이 닿아 있다. 우크라이나군 전략가들도 러시아(소련)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니, 추구하는 전쟁 수행 방향이 별로 다를 바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양측 모두 같은 전략, 즉 장기전 태세로 맞선다면, 누가 더 유리할까? 한마디로 시간은 누구의 편일까? 우크라이나는 시간을 끌면서 서방 측이 약속한 첨단 무기들을 제공받아 무장하기를 원한다. 그 사이에 서방 무기들을 운영할 수 있는 요원들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도 가능하다. 관건은 식량및 에너지난에 시달리는 유럽(나토) 지원국들이 언제까지 지리한 소련식 장기전, 혹은 소모전을 견뎌낼 수 있을지 여부다. 러시아의 장기전 상대를 궁극적으로는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유럽 지원국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미국이 제공한 다연장발사시스템 하이마스(HIMARS)로 러시아군을 공격하는 우크라이나군/사진출처:우크라이나 합참 페북
김 교수는 이같은 관점에서 서방측으로부터 가혹한(?) 경제제재를 당한 러시아의 타격은 별로 없는 대신, 러시아의 보복조치에 따른 에너지난으로 유럽 각국의 집권 세력은 정권 교체 위기를 겪고 있다고 '현실'을 파악했다. 그러면서 "전쟁 당사국들의 역사, 문화 등을 바탕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이번 사태를 이해해야 한다"며 "CNN, 뉴욕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월스리트 저널, BBC 등의 보도는 그들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영미권의 언론과 싱크탱크 리포트를 참고하되, 냉정하게 현실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러시아는 이 전쟁에 실패하지 않았고, 푸틴 대통령 또한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주길 기대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