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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5일 월요일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었고, 2005년부터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오늘 전례 6월 25일에 아래의 미사를 드린다.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아 그 전 주일로 옮겨 지내는 곳에서는 한 대만 이 미사를 드린다. 또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기원 미사 전례문을 사용할 수 있다. 흰색 제의를 입는다. 모세는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서로 용서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이러한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줍니다.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하나 되게 하시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꿈을 꾸게 합니다. 가족들이 흩어져 두 세대가 지난 지금 이산가족들은 마지막 남은 희망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근심과 슬픔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뀔 그날이 언제 올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남북이 갈라져 전쟁을 한 뒤 대치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통일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이 다양합니다. 남북 간에 생기는 경제 성장의 차이, 서로가 가지고 있는 적대감, 군비 증강은 결코 우리 민족이 화해하고 일치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민족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통일의 그날이 오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습니다. 남북의 통일과 민족의 화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는 것입니다. 남북이 서로 용서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거창한 구호를 외치기보다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을 용서하고, 특히 어린이들과 청년들은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남북간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한 사람의 일생 만큼이나 지속되어온 남북간의 분단과 대립, 그로 인한 긴장과 고통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불과 작년 가을 국제회의 참석차 해외에 잠시 머무를때만 해도, 여기 저기 장거리 탄도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잔뜩 놀란 타관구 형제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저를 위로하고 기도해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런 우리나라에 주님께서 큰 자비를 베푸셔서 꿈에도 생각 못했던 대전환의 상황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남북 정상은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손잡고 함께 걷기 시작했습니다. 은둔형 지도자는 조심스레 세상 밖으로 걸어나왔습니다. 지구상 유일하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양국 정상은 마치 부자지간이나 형제지간처럼 만나서 웃고 환담하였으며, 그 모습에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크게 환호하였습니다.
워낙 돌발변수가 많은 관계로 앞으로 전개될 미래는 그 어떤 전문가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첫출발은 아주 좋았습니다만, 길고도 긴 여정이 분명 필요할 것입니다. 무한한 인내도 요구될 것입니다. 크게 양보하는 자세, 먼저 손 내미는 작업도 절실합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분단이 지속됨으로 인해, 남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멀어졌습니다. 언어는 물론이고, 사고방식, 가치체계, 교육제도, 문화, 종교 등등, 삶의 전반적 측면에서 동질감이 줄어들고 이질감이 커졌습니다.
남북간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서로 간에 벌어진 간극이 큰 것을 당연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이 서로의 다름과 어색함을 견뎌내기 위한 인내심이요, 기다림이요, 너그러움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큰 마음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범국가적•민족적 오랜 숙원 사업이니만큼, 손해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화해와 일치에로 나아가는 여정(旅程)에 더 열렬한 기도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런 기회에 남북 분단의 고착화를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줄로 여기고 있는 분들의 대대적인 회심을 기원합니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 평화와 공생으로 가는 큰 물줄기에 박수를 보내지는 못할망정, 더 이상 고추가루를 뿌린다거나 사사건건 트집잡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의 모든 남녀 수도자들은 정말이지 오랜 세월 간절히, 한 마음으로 남북간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평화 통일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왔습니다. 오랜 기도의 결실이 드디어 맺어진다고 생각하니 가끔씩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할때도 많습니다.
저희 수도회만 해도 통일을 대비해 북녘땅 청소년들을 위한 사목을 위한 기금 조성이란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너무 설레발을 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벌써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도로만 보던 평양과 개성, 신의주와 흥남에 그쪽 청소년들을 위한 돈보스코 기술학교를 짓는 꿈, 북쪽의 청소년들과 남쪽의 청소년들이 함께 어울려 정겹게 축구시합을 하는 꿈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어여삐보시고, 지속적으로 도와주시고 축복해주셔서, 꿈에 그리던 그날이 속히 오도록 함께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칼을 들고 주님께 다가가지 마십시오
유투브에 있는 ‘왕따를 구한 일진’이란 사연을 옮겨봅니다.
난 스무살의 남자야.
사실 난 내 은인이자 친구를 찾고 있어.
난 중학교 때 왕따였어.
일진 애들한테 괴롭힘 당한 건 아니야.
소위 말하는 일진은 아닌데, 나대는 애들한테 하루가 멀다 하고 맞고 다녔지.
내 꿈이 작곡가였는데 게네들이 내가 아끼는 음악 공책도 찢고 담배 사오라고 시키고 돈도 뺏고 …
(공학이었어) 진짜 극도의 괴롭힘을 당했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학교는 두려운 곳이 되어갔어.
자살도 생각해봤고 시도도 해봤어.
음악도 접었고 가난한 집안의 부모님이 돈 모아서 사주신 엠피쓰리도 뺏겼어.
진짜 마지막엔 칼 들고 나 괴롭히던 애들 찌르고 자살할까 생각하고 집에서 부엌용 식칼도 챙겨갔어.
그날이었어.
내가 찾고 있는 내 은인인 친구가 우리 반에 찾아왔어.
그 애는 솔직히 말하면 일진이야.
나 같은 왕따랑은 거리가 멀었지.
근데 그 애가 우리 반에 오더니 음악책을 빌리더라고.
“음악책 있는 사람!” 하면서 소리치는데 나랑 눈이 딱 마주쳤어.
그라고 나한테 음악책을 빌려갔지.
난 당연히 안 돌려줄 줄 알았는데 쉬는 시간에 책을 돌려주러 온 거야.
그러더니 나보고 음악 하냐고 물어보더라고.
내가 당시에 음악공책이 없어서 음악책에다 악보 그리고 좀 끄적끄적 해놨거든.
그래서 내가 했었는데 지금은 안 한다고 하니깐 개가 자기도 음악 한다고.
악보 그려져 있기에 물어 봤다고 하더라.
근데 신기한 건 그 뒤로 개가 우리 반에 자주 오는 거야.
그것도 나 만나러.
그래서인지 나 괴롭히던 애들이 내 주위에 얼씬도 안 하더라고.
물론 가방에서 칼은 꺼낸 적도 없지.
그러던 어느 날 애가 학교에 안 왔나봐 우리 반에 맨날 오더니 그날은 안 오더라고.
난 티는 안 냈지만 걔를 기다렸지 솔직히 그렇게 잘 노는 애가 나한테 관심 가져 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얘랑 있으면 괴롭힘 안 당하니까.
그런데 그날 사건이 터졌어.
걔가 안온 틈을 타서 다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이 새끼가 감을 잃었네 뭐네 하면서 침 뱉고 가위로 내 머리카락 자르고 발로 차고 점심시간 내내 괴롭힘을 당했고 난 이성을 잃었지 계속 가방 속 칼이 생각나더라고.
필사적으로 뛰어가서 가방에 칼을 꺼내 들려는 순간에 우리 반 문이 열렸어.
개가 온 거야 병원 갔다 지금 온 거였다고.
하여튼 개가 엄청 어이없는 표정 짓더니 나 때리던 애들을 무차별적으로 때리는 거야.
똑같이 침 뱉고 가위로 머리 자르고 교복 찢고.
다섯 명이서 나 괴롭혔는데 다섯 명이 애한테 맞다가 한명은 실신했고 네 명은 내가 항상 하고 있던 꼴처럼 됐어.
그리고 나한테 오더니 내 교복 찢어진 거 벗기고 자기 교복 주더라.
자기는 어차피 잘 안 입는다고.
근데 얘도 징계를 받았지 애 한명이 실신하고 네 명이 엄청 다쳤거든.
정학 먹었는데 정학 끝나고 학교 온 날 아침 조회시간에 운동장에서 교장이 표창장 주더라.
정학은 그 다섯 명의 부모가 항의를 심하게 해서 그런 거였고 결국 다섯 명 다 강제전학 처분을 받았어.
하여튼 그날 난 모든 걸 털어놨지.
사실 자기는 음악 하는 거 아니라고.
처음에 눈 마주쳤을 때는 그냥 눈 마주쳐서 빌려달라고 했던 건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교복이 찢어지고 슬리퍼 자국도 있고.
그래서 왕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도가 지나친 거 같아서 며칠 붙어 있어 봤다고.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했고 내가 음악 하는 거 같기에 자기도 음악 한다고 거짓말 한 거고...
난 고등학교를 예고로 진학해서 열심히 음악하고 장학금도 받고 지금 여기까지 왔네.
원하는 대학에도 들어갔고 방학 때는 학교에서 외국도 보내준대.
아 진짜 보고 싶다 친구야.
연락해 010-5877-
뒷자리는 옛날 너네 집 비번이야.
진짜 고맙고 넌 내 은인이다 고맙다 친구야.
미움이라는 칼을 지니고 살아가던 한 아이가 일진이라는 한 친구를 만나니 자신의 칼을 꺼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만약 그렇게 보호해주는 친구가 있는 데도 미움으로 칼을 꺼내들었다면 그 일진 친구는 더 이상 도와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이용해 복수를 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대신 복수해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가 그분의 힘을 빌려 복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내 안의 미움의 칼을 빼 들고 있다면 아직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결코 내 미움의 칼을 빼들고 휘두르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보호를 계속 받고 싶다면 미움은 가방 깊숙이 숨겨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볼 때, 일곱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에 관한 말씀은 바로 위의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해야 주님께서 들어주시는데, ‘한 마음’으로 청한다는 말은 이 ‘두 사람’이 서로 미움의 칼을 겨누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기도해봐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서로 간에 미움의 칼을 빼 들고 스스로를 지키려하고 있다는 말은 더 이상 주님의 도우심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없애려 하면서까지, 스스로 제사를 드려가면서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왕권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떠나신 것과 같고, 골리앗까지 이기게 해 주셨는데도 스스로의 힘을 측량하기 위해 병적조사를 하여 주님께서 7만 명을 죽여 버리신 것과 같으며, 자신의 지혜로 돈을 모으기 위해 수많은 정략결혼을 하여 이방 아내의 신을 섬긴 솔로몬 때문에
남북이 분열되게 된 것과 같습니다.
미움은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하느님을 스스로 거부하는 행위이고 그런 상태에서 하는 기도는 모두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미움으로 서로 갈라진 사람들이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혼자 헤엄쳐 30명을 구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구소련의 촉망받는 수영선수 샤바르시 카라페트얀입니다.
1976년까지 세계기록11개. 월드챔피언쉽 우승17회.
유럽챔피언쉽 우승13회. USSR챔피언쉽 우승7회를 기록하였습니다.
1976년 9월16일 어떤 한번하기 기계결합으로 중심을 잃은 버스가 10m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때 그 주변에서 달리기를 하던 샤바르시가 그 현장을 보고 바로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혼자서30명을 구조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용기는 혹독한 대가를 가져왔습니다.
구조과정에서 생긴 상처로 폐렴과 패혈증 46일간 의식불명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그 후로 샤바르시는 깨어났지만 두 번 다시 수영경기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사고 며칠후 전차사고는 크게 보도됐지만 보도된 기사에선 샤바르시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언론들은 진실을 은폐하고 영웅이 된 것은 지켜보기만 했던 구조대원들이었습니다.
2년 후 퇴직을 앞둔 한 검사가 양심선언으로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진실이 밝혀지자 소련국민들은 샤바르시를 국민영웅으로 추대했고 격려와 감사의 편지들이 전국각지에서 쏟아졌습니다.
비록 원하던 올림픽 메달은 얻지 못했지만 소련정부가 국민영웅에게만 주는 특별한 메달을 받습니다.
누군가 샤바르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장 괴로웠던 건 무엇이었나요?”
“물속에 뛰어드는 것 외에는 인명구조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실수할까봐 두려웠어요.
물속은 어두웠고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한번은 사람대신 의자를 끌고나왔는데 한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아직도 악몽에 시달려요...
수영을 그만둔 건 아쉽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사람들을 살린 게 너무 기쁩니다.”
한 사람도 한 사람을 살리는 것만큼 더 기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물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친다면 그는 맨 마지막에나 구원의 손길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 앞에서 심판 받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 잘못을 타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 곧 미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도움만을 바랐다면 주님은 그들을 계속 에덴동산에 살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자신 안에 미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명이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 두 명이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기도하다가 미운 사람이 생각이 나거든 기도를 멈추십시오.
어차피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니니 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 미움의 칼을 집어넣으십시오.
그래야 주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필요하면 칼은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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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토리노의 성 막시모 주교 St. Maximus of turin
San Massimo di Torino Vescovo
Born: c.380 at Rhaetia
Died: c.466 (m. c. 423)
Canonized:Pre-Congregation
Massimo = grandissimo, dal latino
막시모는 라틴어로
"가장 큰"이란 뜻이다.
교회사가 젠다니우스의 "교회 저술가들의 책" 속에 언급된 막시모는
토리노의 주교이며, 많은 책들의 저자이고, 뛰어난 설교가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특히 그는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51년, 그는 밀라노 시노드에 참석하여, 저 유명한 "교의 편지"에 서명도 하였다.
또한 그는 465년의 로마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
브루노 브루니가 편찬한 전집에 의하면,
그의 설교문이 116개, 6개의 논문 그리고 주일 강론이 118개나 남아 있었다고 한다.
교우들의 일상생활에도 특히 관심이 많았던 그는,신자들의 일상 임무 중에 가장 우선하는 것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위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시편을 외우라고 권하고,
또한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빠트리지 말것이며,
식사 전후에 감사기도를 바치고,
모든 일을 하기 전후에 십자성호를 그으라고 명했던 최초의 주교로 공경받는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굴리엘모(St. Gulielmus Abbas)
신분:은수자, 아빠스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1085-1142년 성인과 같은이름 : 굴리엘무스
1085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Piemonte) 지방 베르첼리(Vercelli)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굴리엘무스
(또는 굴리엘모)는 어릴 때 양친을 여의고 경건한 친척의 집에서 자랐다. 그는 14세 때에 일생 동안 고행의 생활을 할 뜻을 하느님께 약속하고 성 야고보 (Jacobus, 7월 25일) 사도의 묘지가 있는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를 순례하였다.
그 후 팔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한 그는 이탈리아에 돌아와서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수도 규칙에 따라 온전히 세속을 떠나 적막 속에서 기도와 고행에 매진하는 은수자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몬테 비르지니아노(Monte Virginiano) 산을 동정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몬테 비르지네 (Monte Virgine)라고 개칭하고 성모님께 봉헌한 성당을 건축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경건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던 그는 1142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굴리엘모는 '의지와 보호'란 뜻이다. 유럽에서 최초로 번성한 수도원은 5세기에 창립된 성 베네딕토 수도회인데 하느님께서는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수도 정신이 헤이해진 경향이 보이자 성 로베르토, 성 베르나르도, 성 브루노 등 수도원 개혁자들과 또는 새로운 수도원의 창립자들을 보내시어 그들로 하여금 수도 생활의 쇄신을 도모하게 하셨다. 베네딕토회 은수자 수도원을 창립한 성 굴리엘모도 역시 이러한 일에 선택되신 분들 중의 한 분이시다. 그는 1085년 이탈리아의 비에몬드에서 가까운 베르첼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적에 일찍이도 양친을 여의어 경건한 친척 손에서 자라 신심에 비상한 열심을 표시했다.
그 일면을 본다면 겨우 14세로서 일생동안 고행의 생활을 할 뜻을 하느님께 약속하고 나이도 아직 어린 몸으로 멀리 성 야고보 사도의 묘지가 있는 스페인의 콤포스텔라까지 순례의 길을 떠났다는 사실로 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순례 도중 그는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실행해 쇠로 된 허리띠를 매고 맨발로 걸으며 음식물은 모두 자비심이 많은 사람에게 구걸했다. 이탈리아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소경이 된 어느 농부를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하느님께 기도하자 그 즉시 농부는 눈을 떴다고 한다.
그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부근 일애에 높아져 그는 이를 귀찮게 생각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피하기 위해 광야에 들어가 그곳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며 즐겁게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으나 이전부터의 희망이었던 팔레스티나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성지에 도착해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의 말구유, 나자렛에 있는 검소한 성가정의 가옥 등 주님의 수많은 지취들, 그중에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구원의 대사업을 완수하신 골고타의 언덕을 직접 눈으로 보고 묵상해 그의 신앙은 더욱더 견고해지고 수덕에 대한 열심은 점점 더 증가 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산적을 만났다.
모든 것을 잃고 가혹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 재난도 성지에서 얻은 거룩한 감동과 기쁨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굴리엘모는 더 한층 하느님께 직접 계시를 받고 성 베네딕토의 규율하에 온전히 세속을 떠나 적막 속에서 기도와 고행에 매진하는 은수자 수도원을 창립하기로 했다.
그는 이것을 위해 남부 이탈리아의 아베리노 시에서 가까운 몬테 비르지니아노라는 산 위에 이미 제자가 된 수명의 사제들과 각각 조그마한 초막을 장만하는 동시에 이교의 시인 비르지니오를 따라 지은 산 이름을 동정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몬테비르지네(Monte Virgine) 라고 개칭하고 성모님께 봉헌한 성당에 건축했다.
굴리엘모와 그의 동료들의 경건하고도 엄격한 생활은 시작됐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 혹은 그 성스러운 생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누구나 감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수도원의 평판이 널리 퍼짐에 따라 입회자도 점점 늘어나 굴리엘모는 여러 차례 다른 깊은 산이나 광야 들에 수도원을 세워 열심한 수도자들을 돌봐주었다. 당시 시칠리아의 사람들은 신앙에 냉랭하고 향락을 즐겨 영적 상태는 매우 한심했다. 그래서 그들의 왕 로제리오 2세는 예의를 갖추고 굴리엘모를 초대해 신앙 생활의 쇄신에 대해 의뢰했다.
그의 노력은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를 언짢게 여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인을 죄에 떨어뜨리려고 미모의 창녀를 보내 그의 정결을 빼앗으려고 했다. 굴리엘모는 처음부터 그를 쳐다보지 않았으나 창녀의 유혹이 점점 심해져 그는 타고 있는 장작불 위에 누워 버렸다. 창녀는 대경 실색했다. 그뿐 아니라 불 속에서 나온 그의 몸에 티끌 만한 상처도 없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자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통회하여 다시는 죄의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완덕의 절정에 도달하고 여러 가지의 기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굴리엘모는 1142년 6월 25일 본 고향, 천국을 향해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성스러운 유해는 손수 건립한 굴레도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빌리암(William)
신분 :은수자, 수도원장
활동지역 :베르첼리(Vercelli)
활동연도: 1085-1142년
같은이름 :굴리엘모,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이탈리아의 베르첼리에서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난
성 빌리암은 불행하게도 아기 때에 고아가 되어 친척들에 의하여 자랐다. 그는 14세 때에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순례여행을 떠났다가 몬테 솔리콜리(Monte Solicoli)에서 은수자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예루살렘 순례를 계획하였으나 강도들의 습격을 받은 후 이를 포기하고는 몬테 베르질리아노(Monte Vergiliano)에서 은수자로 지냈다.
이때부터 그를 존경하는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몬테 베르지네(Monte Vergine)의 은수자들'로 알려진 수도자들이다. 그 후 그와 그의 친구인 마테라(Matera)의 성 요한(Joannes, 6월 20일)이 이끄는 수도원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회원들이 반대하자 그는 몬테 라체노(Monte Laceno)로 가서 공동체를 세우는 등 여러 지역에 그가 세운 은둔소가 남아 있다. 그는 나폴리(Napoli)의 로제르 1세(Roger I)의 고문으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윌리엄으로도 불린다.
첫댓글 아멘. 용서는 또 다른 사랑의 표현 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의 평화 가득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