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 명시감상
땅 껍질
신대철
화악산 꼭대기 주목 군락지에
텐트 치고 한 달간
미군 레이더 기지 경비를 섰다.
대원들은 틈만 나면 주목 그늘에 벌렁 누웠다. 새도 바람도 햇빛도 푸르게 그늘지어 넘어갔다. 고향에서 온 구름이 내가 모르는 곳으로 하얗게 물결쳐 갔다. 그 물결을 타고 바둑판 이야기가 흘러 들었다. 몇 백년 된 주목을 자르라니! 나는 아름드리 주목 사이를 산책하는 듯 서성이다 미군들이 화악리 캠프로 내려가던 저녁, 서울 불빛을 보며 주목을 생각했다. 우리보다 더 빛을 어둠을 알고 우리보다 더 땅과 하늘을 알고 오래 지구를 버텨 줄 나무들. 정들인 생명붙이 나무들을 돌며 오늘은 이 나무 내일은 저 나무, 매일 바둑판 재목을 바꿨다. 마침내 술 기운으로 톱질하던 고참 대원은 ‘우린 군인이야, 미안해, 미안해요’ 하고 계속 중얼거렸다. 속살 불그레한 나이테 옆에서 남은 숨처럼 두근거리고 있었을 뿐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상부에서는 나무 아래 토막은 가져오고 나머지는 흔적없이 태우라고 했다. 철수하던 날, 대원들은 용담리로 내려갔고 나는 트럭을 인솔하여 화악산을 내려왔다. 가평 헌병대 검문에 재목이 발각되었지만 어디서 온 전화 한 통화에 하룻밤만에 풀려나왔다.
전역이 꿈이었던 고참 대원은
어디에서 꿈을 이루었을까?
안개 자욱한 날
숨통 터 주던 그 높은 숨결
쿵 하고 쓰러지던 그 높은 나무
땅 껍질
기억 속에 으스러져 박혀 있는
가로 42cm, 세로 45cm* 화악산
*바둑판 표준 규격.
----애지, 2024년 봄호에서
풀과 나무가 살지 않는 산은 불모지대이며,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갈 수가 없다. 풀과 나무는 산의 옷이고, 땅 껍질이며, 산의 육체와 정신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명체라고 할 수가 있다. 풀과 나무와 짐승들이 다 소중하듯이, 주목은 고산지대에서 살아가는 나무이며,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동안 고산지대를 고산지대로서 살아 숨쉬게 하는 나무라고 할 수가 있다.
전쟁이란 영토와 금은보화와 제국의 패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싸움이며, 이 사생결단식의 싸움은 반자연적이고 반생물학적인 싸움이라고 할 수가 있다. 전쟁이란 타인의 생명을 빼앗고 그의 영토와 재산을 약탈하는 싸움이기 때문에, 그 전쟁의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화악산은 한국전쟁의 피비린내로 물들어 있는 산이며, 휴전협정 이후에도 ‘미군 레이더 기지’가 있을 만큼의 군사적 요충지대라고 할 수가 있다.
신대철 시인의 [땅 껍질]은 참회록이며, 국방의무를 담당하고 있는 병사로서의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천연기념물인 주목을 무참하게 베어낸 속죄의식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신대철 시인의 [땅 껍질]은 주목나무이고, 전쟁의 목적이 아닌 인간의 기호놀이를 위해서 “우리보다 더 빛을 어둠을 알고 우리보다 더 땅과 하늘을 알고 오래 지구를 버텨 줄 나무들”을 베어버렸던 것이다. 비록,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가는 주목나무를 향해 “우린 군인이야, 미안해, 미안해요”라고 용서를 빌었지만, “오늘은 이 나무 내일은 저 나무, 매일 바둑판 재목을” 위해 그 울울창창한 주목나무를 베어버렸던 것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나무는 신성한 나무이며, 그 어느 누구도 주목나무의 가지를 꺾거나 그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주목나무는 ‘성스러운 기피’이며, ‘이유불문의 금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금기(터부)의 대상은 거룩하고 신성한 대상이 되고, 다른 한편, 금기의 대상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욕망이 두려움보다 더 크면 금기를 범하게 되고, 두려움이 욕망보다 더 크면 그는 그 대상을 숭배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그의 {토템과 금기}에서 역설한 바가 있지만, 금기(터부)는 종교보다도, 신들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고, 이 금기는 우리 인간들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욕망이 두려움보다 더 크고 금기를 깨뜨리면 일시적인 쾌락이 따르지만, 그러나 그 금기를 깨뜨린 죄의식은 그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전역이 꿈이었던 고참 대원은/ 어디에서 꿈을 이루었을까?”가 그것이고, “안개 자욱한 날/ 숨통 터 주던 그 높은 숨결/ 쿵 하고 쓰러지던 그 높은 나무”가 그것이다. 더없이 젊고 국방의무에 충실하고 있을 때, 상부로부터 반자연적이고 불법적인 명령이 하달되어 왔던 것이다. 화악산 고산지대에 군락을 이루고 있었던 주목나무를 베고, “나무 아래 토막은 가져오고 나머지는 흔적도 없이 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주목나무를 베는 것도 죄를 짓는 것이고,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도 죄를 짓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 이중의 난제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상부의 명령에 따르게 되고, “우린 군인이야, 미안해, 미안해요”라고 용서를 빌었지만, 그러나 화악산의 옷을 벗기고 그 [땅 껍질]을 찢어발긴 죄는 그의 정신과 육체를 괴롭힌다.
“땅 껍질/ 기억 속에 으스러져 박혀 있는/ 가로 42cm, 세로 45cm 화악산”의 바둑판은 신대철 시인의 정신과 육체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심리적인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다. 금기의 대상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고, 거룩하고 신성한 것은 매혹과 공포가 주조를 이루게 된다. 매혹은 삶의 황홀이고, 공포는 삶의 두려움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가는 주목나무, 살아서도 죽지 않고 죽어서도 살아가는 주목나무, 땅과 하늘이 맞닿은 고산지대에서도 울울창창한 주목나무 앞에서 어느 누가 경의를 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기호놀이를 위해서 그 나무들을 베어버릴 수가 있었단 말인가? 금기의 대상은 금기를 깨뜨린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사로잡고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의 정신과 육체를 갈갈이 찢어놓는다. 이것이 인과응보이고, 억압의 심급을 통해서 그 억압의 대상이 되살아 나는 무서운 복수극이기도 한 것이다.
[땅 껍질]은 신대철 시인의 악몽이고 가위눌림이며, 그의 “기억 속에 으스러져 박혀 있는” “바둑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신대철 시인은 주목나무가 되고, 주목나무는 땅 껍질이 되고, 땅 껍질은 바둑판, 즉, 그의 심리적인 영원한 상처가 된다. 신대철 시인의 [땅 껍질]은 참회록이며, 이 참회록의 시간은 그의 일생내내 계속 되풀이 된다. 참회록의 역사는 세계적이고 보편적이며, 이 타산지석의 교훈을 통해서 울울창창한 주목나무들이 자라고, 우리 인간들의 역사는 더욱더 건강하고 튼튼해진다.
시는 이 세상의 주목나무이고, 땅 껍질이며,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이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서정시인들로 살아가게 한다. 자기 반성과 성찰, 쓰디쓴 자기 고백과 참회----. 시는 고산지대의 주목나무이고, 그 어떤 오염도 참지를 못한다.
한국전쟁은 동서, 양 진영의 식민지 쟁탈전이고, 미군은 우리 한국인들을 그들의 총알받이로 삼은 침략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미군을 위해 조국의 산과 들을 바치고, 미군을 위해서 “레이더 기지”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수많은 주목나무들을 베어버려야만 했던 대한민국의 병사들----, 대한민국은 미군(미국)을 위한 바둑판(장기판)이고, 우리 한국인들은 그 바둑판의 병사들로서 수없이 내부총질을 하며, 그 어떤 영문도 모른 채 수없이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아아, 대한민국이여!
아아, 영원히 멀고 먼 대한독립만세여!
애지 봄호 표지
첫댓글 신대철 시인님의 땅껍질 잘 감상하였습니다
가슴이 저미어오는 시...
미군을 위해서 “레이더 기지”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수많은 주목나무들을 베어버려야만 했던 대한민국의 병사들----, 대한민국은 미군(미국)을 위한 바둑판(장기판)이고, 우리 한국인들은 그 바둑판의 병사들로서 수없이 내부총질을 하며, 그 어떤 영문도 모른 채 수없이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아아, 대한민국이여!
아아, 영원히 멀고 먼 대한독립만세여!
반경환주간님의 평도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