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池州 인왕원仁王院 연승緣勝 선사
어떤 스님이 물었다.
“농가에서 격양가擊壤歌를 부를 때는 어떠합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승려 집안에도 스스로 본분의 일이 있다.”
“승려 집의 본분의 일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농가에서 격양가를 부를 때는 어떠합니까?”
“말귀가 어디에 있는가?”
여산廬山 귀종사歸宗寺 의유義柔 선사[제13세 주지]
처음에 상당하여 자리에 앉으니, 유나가 대중에게 말했다.
“법연에 계신 여러 용상 대덕들이여, 제1의를 관찰하시오.”
이에 대사가 말했다.
“제1의라고 하면 어떻게 관찰할 수 있으랴? 이렇게 말하면 허물이
어디에 떨어지는가? 관찰하는 것인가? 아니면 관찰하기를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덕 높은 상좌들은 함께 증명해 보라. 초심의 후학들은
돌이켜 묻는 말이라거나 뒤집은 말이라 하지 말라.
의심이 있거든 물어라.”
어떤 스님이 물었다.
“부처님들께서 세상에 나타나시어 설법으로 사람들을 제도하시면
천지가 감동했는데, 화상께서 세상에 나타나실 때에는
어떤 상서로움이 있었습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인간과 하늘의 대중 앞에서 잠꼬대는 해서 무엇 하리오.”
“여러 관원들이 다 모였고, 대중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세상을 벗어나는 한마디의 일입니까?”
“대중이 증명한다.”
“향 연기가 일어나는 곳에서 스님께서는 법상에 오르셨는데,
종승의 일은 어떠합니까?”
“교승敎乘도 그렇게 이해한다.”
“우담발화가 피면 사람들이 모두 보는데,
본래 무심無心인 일을 통달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부질없는 말이다.”
“그러면 남방 혜능에게 따로 깊고 깊은 뜻이 있어서
마음을 마음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니면 모르겠습니다.”
“일은 모름지기 총림을 배불린다.”
“옛날의 금봉金峰과 오늘의 귀종歸宗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그대가 증명해 주어서 고맙다.”
“지장智藏의 한 화살은 곧장 귀종을 쏘았는데,
귀종의 한 화살은 누구를 쏘시렵니까?”
“우리 지장 선사를 비방하지 말라.”
“오늘날 대장군[知軍]이 몸소 법회를 증명해 주시니,
스님께서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시렵니까?”
“내가 무엇이라 하면 되겠는가?”
또 말했다.
“한 번 묻고 한 번 대답하는 것으로는 요달할 기약이 없다.
불법은 그러한 도리가 아니다. 대중이여, 오늘의 일은 원래
나의 본심이 아니다. 진실로 말하건대 이렇게 산에 머무는 것이
어찌 뜻이 있겠으며, 이미 성불했다는 것도 또한 무심無心이리니,
이는 오로지 장군께서 청하시기 때문이며, 대중의 정성스런 마음
때문이리라. 이미 여기에 도달하였다면, 또 무엇을 설해야 되겠는가?
알겠는가? 만약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면,
옛사람도 말하기를, ‘서로 만나서 불러 보고 싶으나
맥맥(脈脈:할 듯할 듯함)히 말을 못한다’고 한 것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만일 이를 안다면 갚지 못한 은혜를 충분히 갚고 무위無爲의 덕화를
족히 돕는다 하겠지만, 만일 알지 못한다면
그저 말하기를 ‘저 장로는 개당하고서 옛사람의 말이나 들춘다’고 하지 말라.
이 성대한 일은하늘의 높음과 바다의 깊음으로도 비유할 수 없으며,
더구나 황풍(皇風:국왕의 덕화)을 찬탄해서 청정한 무리로 회향하지도
못하리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옛사람도 말하기를 ‘내가 기도한 지
오래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지금의 황제이겠는가. 오래 섰었다. 안녕.”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공왕空王의 사당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신神이 없지는 않다.”
“어떤 것이 사당 안의 사람입니까?”
“아까부터 부질없이 말하지는 않았다.”
“신령스런 거북의 징조가 나타나기 전에는 어떠합니까?”
“길하던가, 흉하던가?”
“그 근원을 통달치 못했으니, 스님께서 방편을 베풀어 주십시오.”
“통달했다.”
“통달한 뒤에는 어떠합니까?”
“끝내 그렇게 묻지는 말라.”
“오랫동안 대승의 마음을 내었다가
중간에 이 뜻을 잊었다 하니, 어떤 것이 이 뜻입니까?”
“또 중간에 잊었다고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