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봉산 아래 능내리에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와 묘가 있으며
생가 앞 팔당호변엔
다산 생태공원이 있다.
공원 수변지역 연꽃단지엔
어마어마한 넓이에서
세파와 타협하지 않는 연꽃들이
건장하게 살고 있다.
난
동풍이 불 땐
가끔 이곳을 찾는다.
다산은 이곳에서 태어나
9 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부친을 따라
한양과 화순 예천 등에서도 살았으며
32세 때는 성균관에서 강의도 하였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여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간 생활하면서
600 여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사람은
항상 맑은 생각을 하고
엄숙한 용모를 하여야 하며
과묵한 말씨와
신중한 행동을 하여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자녀들에겐,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있어도 한양에서 버터야 한다" 라는
당부를 하고
이곳 남양주 능내리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곳 생태공원은
산과 물과 바람과 연꽃이
잘 어우러진 절경의 쉼터이다.
다산은 평소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형제들과
예봉산을 즐겨 올랐다고 한다.
다산은 당시 250여 년 전에
남한강과 예봉산의 산수를 즐겼으니
가히 내가 존경함에 흠이 없는
대인임엔 틀림이 없다.
다산의
파란(波瀾) 만장(萬丈) 한 인생에
삼가 존경을 보낸다.
기상청에서 발표하는
풍랑주의보는
바다의 파고가 3m일 때 발표한다.
1장(丈)이란
10척(尺) 즉 30.3cm 이다.
그러니
파란만장(波瀾萬丈) 을 풀이하면
거센 물결의 파도 높이가
30.3 km나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다산은
산전 수전 공중전 늪전보다 어려운
만장(30.3km) 높이의 파도를 이기고 살았으니
이곳 남양주지역의 유지(有志) 가 아니라
국가 유지가 된 것이다.
지역 유지가 되려면
군수. 인구 15만 이하의 시장.
초등학교 교장. 경찰서장.
지방 판.검사. 군부대장 (대령) 정도는 되어야 한다.
내가 사는
우리집 이름은
예소당(禮沼堂) 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살던 집의 이름은
여유당(與猶堂) 이다.
여유당이란
여유 있게 사는 집이란 뜻이 아니고
여(與) 는,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유(猶) 는,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이다. <쇳송.965>
첫댓글 좋은글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