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정체성을 회복하라
엡2:19, 딤전4:6-8
--------------드르니항교회 주일밤예배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2:19) 믿습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단7:18, 엡2:19)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용서 받은 죄인을 구원 받은 백성 삼아주시고, 죄악 많은 이 세상 가운데 살지만, 그것과 섞이지 않으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 삼아주심을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꼭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 2절)
우리 믿는 사람들을 일컬어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란 뜻입니다.
<거룩>이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하기우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별시킨 거룩한 무리가 된 우리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가르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도록 원하시는가? 구별되게 살도록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는 본받아 살아야 할 것과, 본받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1)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世代)>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時代)를 의미합니다.
한 세대를 구분하기를 30년으로 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출생하여 자기 자식을 낳기까지의 기간을 평균으로 30년을 잡는데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오래 살면 3대까지 볼 수 있는 것이 평균 수명입니다. (삼사대를 보게됨)
이렇게 세대를 구분하는 것은 인간적인 구분이고, 성경이 말하는 세대란 하나님 편에서 보는 세대입니다.
창세 이후로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쳐진 세대란 죄가 지배하는 세상, 또는 불의가 득세하여 악인이 번영을 누리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대란 연대적 구분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죄악 된 모습과 생활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세대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인가 사람의 편에 설 것인가?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서 그 하나를 택하게 되어있습니다.
성도는 사람들의 정의보다 우리 주님의 정의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대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막 8:38)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 보신 세대의 정의가 옳다고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임이 틀림없습니다.
이 말은 더 설명할 것이 없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업하면, 뛰어난 IT기술, 휴대폰과 초고속 인터넷입니다.
그러다보니 초등학교 학생부터 노인들에게 이르기까지 휴대폰과 인터넷 사용은 모든 가정과 직장생활에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휴대폰과 인터넷이 생활에 편리함을 주었지만, 그 부작용도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24시간 무차별로 들어오는 문자메시지와 스팸 메일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스미싱이나 성인물로 분류되는 음란 메시지들을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문명의 혜택으로 청소년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어느 하나인들 성과 무관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컴퓨터란 것이 그렇게 편리하고 유용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게임 중독이나 음란을 조장시키는 도구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아무리 세상이 발전해도 결국 이것이 타락한 세대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이란 것을 보게 됩니다.
딤전4:6-8에 보면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지금처럼 사람들의 의식 속에 건강을 우선하는 시대는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웰빙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 웰빙이라는 단어는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유행어가 아니고, 인간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인간이 누려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인간을 세우시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건강이라는 단어가 지금 우리의 시대에 중요하게, 그리고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이 활짝 열려져 엄청난 문명의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을 우리 자신이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값진 인생은 없으며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을 땅속에서 보화를 캐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그 만큼 인간의 자리는 고귀하다는 것이며 건강한 삶은 세상의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본문에서 건강의 복을 받는 자리는 금생과 내생에 주어지는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만 건강하게 사는 것으로 더 만족하지 않고 저 세상 곧 천국에서의 모습이 건강하게 사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더 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본문을 통해 금생과 내생에 건강하게 사는 삶을 가정과 사회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생활의 지혜를 찾아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2) 잘 양육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6).
요즘 성도들이 양육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나이 연륜, 직분에 상관 없이) 제가 어렸을적만 해도 사경회라는 것이 흔했지요. 이 교회 저 교회 쫓아다니면서 은혜를 받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경회나 부흥회가 거의 사라져갑니다. 세미나도 그렇구요. 교육받지 않고 양육 받지 않으니까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흔들려서 정체성까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헌신자가 봉사자가 사라집니다.
우리교회 말고, 교회에 조금 봉사하고 헌신하면 주인 행세를 합니다. 내가 목사를 위해서 얼마나 했는데,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했는데 하면서 자기 의를 높이려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행하시기바랍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전4:6)
인간의 일생에 가장 보호를 받아야 하는 시기는 어릴 때 그것도 4세 미만의 어린아이의 자리이며 그 시기가 일생동안의 건강과 생활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누리는 복이 바로 양육 받는 자리입니다. 이 시기에 잘 섭취한 영양이 일생을 건강하게 하는 기초석이 되며 이 시기에 부모와 가정에서 느끼면서 자랐던 축복된 마음의 정서가 자신의 일생을 밝게 열어가는 재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기의 양육 받는 자리를 기초라고 한다면 자라가면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양육 받는 것은 그 기초위에 튼튼한 골조 공사를 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전체의 삶이 조화를 이룰 때에 건강한 삶의 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건강한 삶 곧 금생과 내생에 유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양육 받는 자리는 믿음의 말씀과 신앙생활에 유익되는 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혼이 잘되는 건강의 자리가 있습니다. 인간을 무너지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약함의 자리는 육체의 문제가 아니고 영혼이 약해지는 자리입니다.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삶의 자리에 감사보다 원망이 나를 덮어 버리게 되고 이해와 관용의 자리보다는 미움과 분노 속에 나를 던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자신의 삶에 더 유익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요 그 자리가 건강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유익되게 하는 건강한 삶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건강한 성도의 삶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신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자기 삶을 자신 있게 살아가듯이 건강한 성도가 될 때 두려운 세상 곧 나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있을 때에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을 보여주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강한 성도의 삶을 사는 자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 자리가 말씀을 믿는 자리입니다. 그 누구도 이만하면 됐다 하며 세상을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자리가 건강을 해치는 자리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9:27)"고 했습니다. 이것이 양육받는 자리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고 명하시고 있습니다.
3) 잘 훈련받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7-8)
굵어진 나무를 수형을 잡기란 어렵습니다. 어려서부터 디모데처럼 신앙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습관은 중요합니다. 가끔 어린 아이를 기르는 부모들을 보면 한심합니다. 그냥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줍니다, 그건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세상에서 사회에서 적응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면 부모는 뭐라합니까? 우리 아이가 그럴리 없다는 믿음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은 바람 한 점 없는 온실이 아니며, 세상은 항상 내 입장을 변호해 주는 가정과 같은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은 한시도 잠잠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를 변호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약점을 짓밟고 대적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절실히 요구되어지는 것은 그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 곧 건강한 삶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잘 적응할 수 있는 훈련된 생활입니다. 훈련을 잘 받은 사람만이 위기관리 능력을 배양하여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황을 역전시키는 지혜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이 훈련을 받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마음가짐이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내일의 평안을 위해서 오늘의 고통을 이겨내는 자리를 말합니다. (군인들에게 있어서 훈련 때의 땀방울은 전쟁때의 핏방울과 같다고 합니다.) 사람 속에는 한 없이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훈련을 거부하는 자리에 자신을 세우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이 속삭임에 자신을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훈련을 강하게 잘 받은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 불확실한 현상이 나타날 때에 오히려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마음의 자리가 바로 건강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조그만 일에 늘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혼자만 고통스런 것이 아니고,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한 자리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먼저 육체의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육체가 건강해야 모든 생활을 열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는 마음의 자리에 감사와 평안함을 잃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엔 좋은 생활습관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올바른 생활습관은 모든 것을 교정시켜주며 회복시켜줍니다. 육체의 모든 고통은 거의가 잘못된 습관에 따른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훈련은 영적인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그 마음의 자리는 오직 영적인 훈련을 잘 받는 사람만이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영적 훈련은 경건의 훈련인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 생활이 살아있지 않으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했습니다. 훈련받는 사람은 훈련시키는 자에게 절대 복종합니다. 영적 훈련이 잘 될 때에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가 되며 세상을 이기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저는 가끔 공동묘지나 산에서 성도(聖徒)라는 묘비를 보면 마음이 뭉클합니다.
물론 직분을 적은 묘비가 대부분이지만 가장 좋은 말은 <성도>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체성 회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성도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고 권면합니다. 당시에는 어린아이나 여성은 보호 받아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에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한 성도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이깁니다. 건강한 성도가 되어 삶 속에 감사를 쌓아가도록 합시다.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선포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회복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0200705
지양구 목사(양주 내동교회)
첫댓글 흔들리는 정체성 회복을 위하여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