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은율(隱律)의 걸음으로 치유하는 삶, 대원사 들머리에서
글 / 은율 장기주
세상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한계치에 다다를 때가 있다. 저마다의 욕망이 부딪히는 소리, 속도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비명, 그리고 내 안에서 끊임없이 웅성거리는 걱정의 말들. 그 번잡한 소음들이 삶의 골목마다 꽉 들어차 고조될 때,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숨겨진 삶의 율동을 찾아 홀연히 길을 떠난다. 나의 호(號)이기도 한 ‘은율(隱律)’의 걸음으로 대원사 들머리에 서는 순간, 신기하게도 세상의 거친 시계는 멈춰 서고, 태고의 시간을 간직한 자연의 시계가 비로소 흐르기 시작한다.
숲의 입구는 언제나 정답다. 푸른 숲이 아무런 대가 없이 아낌없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는 가슴 속 깊은 곳,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처까지 맑게 씻어내린다. 도시의 탁한 매연과 숨 가쁜 속도전에 지쳐 얕아질 대로 얕아졌던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어 본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깊은 숨을 들이켜는 이 행위 하나만으로도, 내 안에 굳어 있던 묵은 감정들과 날 선 방어기제들이 스르르 녹아내림을 느낀다. 남들의 시선에 맞추어 사느라 분주했던 허울을 벗어던지고, 이 고요한 숲길 위에서 나는 오랫동안 외면하고 지냈던 날것 그대로의 참된 나와 마주한다.
대원사로 향하는 산길은 결코 서두를 필요가 없는 길이다. 앞서가는 이를 추월할 필요도 없고, 늦었다고 재촉하는 이도 없다. 오직 나의 호흡과 보폭에만 집중하며 가다 멈춰 서기를 반복한다. 가만히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이름 모를 산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며 청아하고 다정한 환영의 노래를 건넨다.
조금 더 깊은 숲으로 들어서면, 이 이끼 낀 골짜기의 진짜 주인들이 고개를 내민다. 바스락, 발밑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소리에 고개를 숙이니 조그만 줄무늬 다람쥐 한 마리가 단풍잎 사이로 쏙 튀어나온다.
녀석은 제 몸집만 한 도토리를 두 볼 가득 미련하게 미어터지도록 집어넣고는,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나를 올려다본다. 그 까맣고 영롱한 눈망울 속에는 세상의 계산이나 경계심 대신, 그저 숲을 찾아온 손님을 향한 순수한 호기심만 가득하다. 가을이 깊어 가니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느라 이 작은 몸으로 얼마나 바삐 돌아다녔을까. 앙증맞은 앞발을 가슴에 모으고 코를 씰룩이는 다람쥐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너도 이 거친 계절을 참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낙엽 아래 숨겨둔 보물들은 넉넉하더냐." 말로 뱉지 못한 안부를 다정한 눈빛에 담아 건네어 본다. 다람쥐는 내 마음을 알아챘다는 듯 꼬리를 한 번 치켜세우더니, 이내 숲의 저편으로 경쾌하게 사라진다. 녀석이 떠난 자리를 보며 깊은 숲속 어딘가에 있을 고라니와 멧돼지 같은 또 다른 동무들의 안녕까지 함께 빌어본다.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도, 동물도, 한 포기의 풀도 모두 연결되어 있는 동무들이기에 그들의 안녕은 곧 나의 안녕이기도 하다.
다리가 묵직해질 즈음,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 아래 골똘히 앉아 생각을 고른다.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묵은 질문들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나는 지금 왜 이토록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쥐려고 하는 것은 정말 가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나의 발걸음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정답이 없는 삶의 화두들을 허공에 띄워 보내지만, 파란 하늘을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은 그저 소리 없이 미소 지을 뿐이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머무르려 해도 머무를 수 없는 구름의 침묵. 어쩌면 그 침묵이야말로 무언가를 소유하려 아등바등하지 말고, 계절의 변화처럼 그저 순리대로 흘러가라는 자연의 가장 명쾌하고도 엄숙한 답일지도 모른다.
다시 가벼워진 몸을 일으켜 길을 걷는다. 이끼가 폭신하게 앉은 바위에 걸터앉아 가만히 고개를 들어본다. 어느새 가을이 단풍의 빛깔만큼이나 깊어졌는지, 햇살의 무게가 사뭇 다르다. 붉게, 또 노랗게 물들어가는 단풍잎 사방으로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시게 번져오며 사방을 황홀하게 채운다. 그 빛은 마치 고생했다며 내 어깨를 토닥이는 따스한 손길 같다.
가을바람이 사그락거리며 밀려오는 고요한 산길, 나는 이 길의 끝에서 대자연이 아무런 조건 없이 건네는 깊고 거대한 위로를 두 손 가득 품는다. 세상에서 얻은 상처로 텅 비어버린 마음의 빈자리에 자연의 평온함과 맑은 기운, 그리고 비로소 되찾은 참된 나를 빽빽하게 채워 넣는다.
충만해진 마음을 안고 이제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갈 채비를 한다. 대원사로 가는 길은 단순히 사찰이라는 공간을 향한 물리적인 걸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음에 가려졌던 내 영혼의 소리를 듣고, 상처 입은 내면을 온전히 치유하고 돌아오는 가장 성스럽고도 아름다운 마음의 여정이었다. 이제 나는 세상의 어떤 소음 속에서도 내 안의 '은율'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