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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밀어내기
2주일 동안 사과나무집에서 지내보니 영진이만큼 속이 깊은 아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라와 내가 함께 놀고 있으면 언제나 관심을 보이고 잠깐이라도 참여한다.
라라의 방에는 화산폭발에 관한 책들과 사진들 그리고 비디오가 가장 많았다. 석훈은 나에게 화산섬들에 관한 새로운 책을 건넸다. 내가 물었다.
“라라가 화산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뭐에요? 사장님이 처음에 책을 보여주셨나요?”
“라라에게 그런 책을 읽어 준적은 없는데 아마도 영국에서 본 걸 테지요.”
“제 생각에는 …밤에 라라가 잠들기 전에 아빠가 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바쁘시니까 라라가 자기 전 그 시간이라도 같이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석훈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다면 라라의 유치원도 제가 데려다 주고 라라의 간식도 제가 직접 요리하는 게 좋겠군요.
선생님이 왜 고용되었는지 선생님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럼 전 이만
출근을 해야겠습니다. 라라…잘 부탁합니다.”
그는 오늘 조금 이상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나도 안다. 가정교사로서의 내 역할을 강조하고 싶은 거다. 하지만, 그도 역시 내가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알 터인데 그렇게 싸늘하게 응수를 하다니…
난 단지 라라에게 좀 더 다정한 아빠의 역할을 해달란 거였다. 하지만 그의 응수는 그건 ‘너의 잡(job)이다’ 라니…
그에게 왜 라라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왜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라라가 그걸 따질 수 없는 나이이니까.. 내가 대신 라라를 대신해서 따지고 싶었다.
오후에 기훈은 라라와 내가 노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직업이 사진작가라는 말을 듣고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돈이 있으니 남은 취미생활로 하는 걸 직업으로 가질 수 있단 말이지.’ 였다.
그의 사진을 본 적도 없으면서 은근히 난 그의 예술가적 재능마저 깎아내리고 있었다. 다라야, 이러지 말자. 너 이렇게 사람 미워하고 그런 인간 아니었잖아!
불행하게도 여유로운 그의 직업 덕분에 그와 난 집에서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았다. 기훈이 내게만 까칠하지 아이들에겐 무척이나 다정한 삼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석훈이 라라를 자기 서재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과 달리 기훈은 라라가 그의 방에 들어와서 온갖 물건을 헤집고 놀아도 개의치 않았다.
“혹시 라라가 기훈씨 딸은 아니죠?”
내가 단둘이 있을 때 기훈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 졌다.
“...결국 핏줄은 못 속이는 건가? 눈치 챘어? 어느 날 대문 앞에 쪽지랑 애기 바구니가 있더군.”
이럴 수가...
“정말이에요? 어쩐지...”
“뭐가 ‘어쩐지’ 야? 너 바보지?”
‘바보!’
요즘 초등학생들조차도 쓰지 않고, 유치원 애들 끼리나 서로 놀려먹을 때 쓴다는 단어, 바보.
서른한 살 여자가 성인남자한테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일이 흔할까?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그의 ‘바보’라는 말이 매우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정감이 간다고 할까?
라라가 그렇게 좋아하는 화산을 라라와 함께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영진이 내게 와서 물었다.
“정말 라바(lava)를 만들 수 있어요?”
“설마…그럴 순 없지만 다른 걸로도 충분히 드라마틱한 화산폭발의 효과를 낼 수 있어.
우선 소다, 플라스틱 병, 빨간 염료, 뜨거운 물이 필요해.”
라라와 함께 라라의 키와 맞먹는 모래더미를 쌓았다. 군데군데 구멍도 내고 꼭대기에는 소다가루와 염료가 들어 있는 플라스틱 병을 숨겨 두었다. 조심스레 뜨거운 물이 담긴 커피포트를 플라스틱 병 안에 붓자 병 안에 있던 소다가 끓어오르면서 이윽고 기운찬 빨간 거품들이 모래 산을 타고 흘러내렸다. 군데군데 옴폭 파인 구멍에도 빨간 거품이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라라는 손뼉을 치고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하산. 하산. 하산 폭발. 다라, 하산이 폭발했어.”
“그래, 다라야. 화.산.이 폭발했어. 그리고 물 아직 뜨거우니까 좀 이따가 만져보자. 와, 저기 봐.
빨간 모래네.”
“와아, 모래가 빨개!!”
두어 번의 폭발을 더 보여 준 후에야 라라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서진이가 나와서 한마디 했다.
“그런 건 과학책에 다 나와 있어. 잘난 척 하지 마.”
영진이 나 대신 나섰다.
“라라 지금 잘 놀고 있었거든? 분위기 깨지 마.”
내가 애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소다의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서진이가 설명해 줄 수 있겠어? 라라가 이해하기
쉽게.”
“웃겨. 내가 왜? 그건 너가 할 일이지.”
영진이 핸드폰으로 빨간 모래를 만져보는 라라의 사진을 찍었다. 빨갛게 물든 양손을 활짝 펴고 있는 라라의 얼굴엔 순도 100% 기쁨이 담겨 있었다. 라라에게 앞으로도 더 많은 재미와 기쁨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진이 핸드폰에 저장된 다른 라라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는데 한 여학생의 사진이 화면에 보였다. 체육관 앞에 서 있던 여자아이였다. 영진이 당황해서 핸드폰을 치웠다.
“누구야? 여자친구?”
“그래도 그렇다고 말하면 안 돼요.”
“왜?”
“선생님이 알면 아버지도 알게 될 거니까.”
“여자친구를 허락 안 하시는 구나?”
“…”
“너가 아빠랑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였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설교와 대화의 차이를 몰라요.”
저녁에 거실 구석에서 오래된 턴테이블을 발견했다.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안 쓰는 물건이라고 해서 난 그걸 라라의 미술도구로 이용하기로 했다.
동그란 LP크기에 맞춰 하얀 종이들을 동그랗게 자르고 가운데 구멍을 뚫고 판위에 끼웠다. 전기를 꼽고 스위치를 누르니 판이 돌면서 하얀 종이도 따라 돌기 시작했다.
라라가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붓으로 물감을 묻혀 돌아가는 종이 위에 올려놓자 자연스럽게 써클모양의 색들이 칠해졌다. 라라가 손을 내밀었다. 여러 색깔의 붓들이 돌면서 자연스레 그림이 그려졌다. 기훈이 나타났다. 라라가 기훈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쌈촌 내가 했져.”
“와아, 멋있는데. 빨간색 노란색이 섞이니까 초록색이 됐구나?”
잠시 후 기훈이 내게 와서 말했다.
“왜 함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
“어, 그 LP 테이블요? 그거 아줌마가 안 쓴다고 해서요.”
“아줌마가 안 쓰면 나도 안 쓰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앞으로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
“알았어요. 우선 어떤 게 기훈씨 물건인지부터 확인을 해야겠군요?”
난 의자에 앉으려다가 그에게 물었다.
“여기다 엉덩이 좀 대도 되나요? 이 의자도 기훈씨 거예요?”
그가 ‘쳇’ 하는 표정으로 가버렸다. 그와 나 사이의 이런 작은 말다툼은 빈번하게 발생했다.
한번은 욕실에서 나오는데 그가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네?”
“일부러 그렇게 벗고 다니는 거냐고?”
기가 막혔다. 난 욕실에서 목욕 가운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나온 죄밖에 없었다.
“제가 뭘요? 제가 수건만 달랑 걸치고 나온 것도 아니고 목욕가운 입었잖아요. 같이 이 층 쓰는데
그럼 어쩌라고요? 방을 아래층 방으로 바꿔 주시던가요.”
“아래층에서 그러고 다니시려고?”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요. 딱히 절 싫어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어요? 아니면 성격이 원래 좀
문제가 있으신 건가?”
“나 성격 좋아. 단지 너…”
“저 뭐요?”
“너 얼굴이 맘에 안 들어.”
“하...제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요? 저 호감 형이라는 소리 꽤 듣거든요? 제가 별명이 뭐냐면 보이 ...
관두죠.”
“별명이 뭐? 보이 킬러?”
“아아.. 저처럼 우아하게 생긴 스타일은 안 좋아 하시는 구나. 좀 싼티 나게 생긴 여자 좋아하죠?”
“너무 닮았어. 아주 옛날에 날 버린 여자랑.”
그의 뜻밖의 고백에 할 말이 없었다.
“앞으로 그렇게 짧은 목욕 가운 입고 돌아다니지 마. 여기가 너 집도 아니고 여긴 너 직장이잖아.
안 그래?”
입주 가정교사니 내게 이곳이 직장이자 집이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이런 걸 보고 '트집'이라고 하는 거다.
“목욕 가운 입은 여자한테 흥분하는 스타일이시구나?”
그가 인상을 썼다. 난 가볍게 말했다.
“어우, 앞으론 절대 안 입어야지. 약간 변태...”
“뭐라고?”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이 기훈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라는 것은 충주 아줌마에게 들었다. 당연히 제사는 올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기훈은 엄마의 유골함이 모셔져 있는 절에 다녀온다고 들었다. 석훈이 그래서 아침부터 저기압이었나 싶었다.
저녁에 기훈이 들어왔고 기훈과 라라 할아버지는 주방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석훈은 그런 두 사람을 힐긋 보고 서재로 들어갔다. 아..그 놈의 서재.
밤에 정원에서 줄넘기를 했다. 하루에 백 개씩 해서 1주일에 2킬로를 빼는 게 목표였다.
“하나, 둘, 셋… 열다섯. 아!”
꼭 이십 번을 못 넘기고 주저앉게 되고 만다.
“이게 왜 안 되지? 미치겠네.”
“내가 미치겠어. 좀 꺼져 줄래?”
기훈이었다. 기훈이 정원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방에서 라라 할아버지랑 마시더니 혼자서 2차를 하는 거다.
“미안해요. 있는 줄 몰랐어요.”
그가 다가와서 내 줄넘기를 빼앗았다.
“일단 살을 좀 빼고 줄넘기를 해야지 않겠어? 그 몸무게를 넘기려니 되겠냐?”
그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다. 그가 지금 몹시 심경이 안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어서 복잡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싶다면 뭐 나도 받아줄 용의는 있었다.
“나 그렇게 안 뚱뚱하거든요?”
“체중계 없어? 너 내가 런던에서 만났을 때보다 적어도 삼 킬로는 더 찐 거 같은데?”
그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가 동시에 런던의 호텔방을 떠올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그와 내가 키스를 나눈 그 순간을.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여자친구 없어요? 매일 해만 지면 집에 들어오시고.”
“너…”
그가 내 얼굴에 바싹 다가왔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꼬리치지 마.”
그가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맥이 빠지다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 꼬리 없거든? 내가 개냐? 고양이냐? 꼬리를 치게?”
난 분노의 줄넘기를 했다. 오십 개를 무난히 성공했다.
다음날 석훈은 자신의 한 달 스케줄을 내게 알려주었다. 우린 정원 테라스에 앉아 서 미팅을 했다. 그는 사랑고등학교 교장과 수학 특별반 선생님에다 무슨 교육연구위원장까지 맡고 있었다. 게다가 사랑유치원을 오픈하는 일까지. 그가 라라와 보낼 시간이 거의 없는 게 당연하다.
석훈은 이번 주 금요일에 학교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대하니까 아이들을 준비해달라고 말했다.
아이들을 준비하다니? 무슨 장기자랑이라도 준비해야 하나? 난 정말 심각하게 아이들이 손님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건 마치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 같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석훈은 자녀들의 숫자만 좀 모자랐을 뿐이지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그 무뚝뚝한 대령 같은 이미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마리아 수녀?
“영진이 말입니다. 선생님!”
그가 한 톤을 높였다. 아무래도 내가 멍을 때리고 있었나 보다.
“네?”
“혹시 여자애를 만나고 다니진 않던가요? 알고 계신 거 없습니까?”
영진이한테 먼저 시간을 주자. 내가 고자질하는 게 돼버리는 건 싫다.
“모르겠는데요. 근데 영진이 여자친구가 있으면 안 되는 건가요?”
“정다라씨는 고등학교 때 남자친구 있었나요?”
“저요? 아..아니요”
물론 거짓말이지만 석훈에게 내 첫사랑을 고백하는 자리는 아니니까..
“그렇게 보입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정다라씨는 정도를 넘지 않는 그런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현명함과 세심함도 있고.”
기훈이 정원에서 라라와 나무판자로 새집을 만들고 있다가 석훈의 이 말에 ‘푸앗’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100 % 비웃음이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사장님처럼 생각이 깊은 분들이 관찰력도 있고 확실히 보는 눈이
남 다르신 거 같아요.”
석훈은 희미하게 웃었고 기훈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영진이처럼 공부 잘하고 잘 생긴 남자애가 여자친구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죠.”
“선생님과 영진이가 여자친구를 사귀는 건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만약 영진이가 김수영이라는 여자애를 만나고 있다면 제게 알려주세요.”
“김수영요? 다른 여자친구는 괜찮고 김수영이라는 여자아이만 안 되는 건가요?”
“…얘기가 깁니다만 영진이가 약속을 했습니다. 다시는 그 여자앨 만나지 않기로요.”
“예.”
“그리고 라라의 체중이 일주일 동안 1킬로가 늘었더군요. 혹시 간식을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아닌지 봐주시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몇 가지 어린이 영화는 보여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되네요. 그리고 서진이는 ..서진이 담임선생님 말씀이 성적은 올랐는데 여전히 친구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고 하더군요.”
“서진이는 병문 중학교가 아닌 전에 다니던 사랑중학교 친구들하고만 다녀요.”
“그런가요?”
“네, 영진이한테 들었어요. 그런 얘길 나눌 정도로 서진이랑은 아직 친해지지 못했거든요.”
“서진이랑 억지로 잘 지내시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진이가 …많이 예민한 편이라서
힘드실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지? 그냥 서진이를 내버려 둬라?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아니면 서진이를 위해서?
“제가 서진에게 어떤 방식으로라도 도움을 주기를 바라시는 거죠?”
“...?”
“그렇다면 서진이가 아빠 등 뒤에 더 이상 숨지 않도록 해주세요. 제가 정해놓은 규칙은 아무리
사장님이라 해도 서진의 할아버지라고 해도 함부로 어길 수 없도록 해주세요. 서진이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서진에게 옳은 소리를 하는 한 명의
어른이고 싶어요. 그게 최소한의 저의 역할이란 생각도 들고요.”
“처음에 사실 전 서진이에게 정다라씨가 같은 여자로서의 공감대같은 것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수학문제처럼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군요.”
“일단 시간이 필요할 거에요.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아이들이 보기보다 강하고 의연해요. 아이들이
제가 떠난 후에 '그 여자, 잠깐 있었던 어떤 여잔데 그래도 우리한테 진심은 있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요."
기훈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또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가 라라와 함께 만든 새집을 색칠할 페인트를 찾으러 안으로 들어갔다. 기훈과 라라가 집안으로 들어갔기에 난 라라에 대한 말을 꺼냈다.
“그리고 …저 외람되지만 제 생각엔 사장님께서 라라와 좀 더 시간을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석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선생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시나요?”
“네?”
“전 라라의 친아빠입니다. 라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굳이 말로 안 해도 제 핏속에 흐르고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실 거라 생각됩니다.”
“네. 알아요. 단지 전 ..사랑을 보여주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사랑은 너무 추상적인
단어잖아요. 말로 행동으로 구체화하지 않으면 그게 사랑인지 뭔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가요? 말과 행동이 없으면 그건 사랑이 아닌가요?”
“사랑..이 맞지만 상대방은 느낄 수 없는 사랑이죠. 몰래 혼자 하는 짝사랑도 상대방이 아는
사랑인데 사장님의 이건... 외사랑 이죠.”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군요. 오늘은 이만하죠.”
그가 일어났다.
다음날 아침에 라라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들어오는데 석훈이 막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석훈의 얼굴에 피가 보였다.
“사장님! 피가 …얼굴에 피.”
그가 당황했다.
“아침에 면도를 했는데...”
“저 가방에 반창고 있어요.”
그에게 아주 작은 사이즈의 반창고를 내밀었다. 그가 얼굴 어디에 붙여야 할지 모를 것 같아 난 직접 나서서 그의 얼굴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 옷, 그 때 그 옷이군요.”
그가 내 하얀 블라우스의 얼룩을 가리켰다.
“네?”
“영국에서.. 제가 커피 쏟았던 자국 같은데요?”
“어, 얼룩이 있는 걸 깜박했어요.”
갑자기 기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이 영국에서 알던 사이였어?”
기훈이 팔짱을 끼고 석훈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훈은 기훈의 말에 대꾸도 없이 집을 나섰다. 이제까지 이 집에서 석훈과 기훈이 세 단어 이상을 주고받는 것을 보지 못했다. 기훈이 또 뭐라고 잔소리를 할 게 뻔해서 난 얼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기훈이 내 팔을 잡고 배란다로 끌고나갔다.
“왜 이래요?”
그는 내 팔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놔요. 아파요!”
“둘이 영국에서부터 알던 사이라 이거지?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라라 가정교사로 친할머니 같은
역할을 해줄 그런 분을 뽑을 계획이라더니 갑자기 너를 뽑았지.”
“어휴….”
한숨만 나왔다. 기훈에게 구구절절하게 석훈과의 우연한 만남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한번 들어보자. 형이랑 무슨 사이였어?”
“...조심한다고 했는데...알았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죠. 실은… 우린 영국에서 서로 첫눈에
반했어요. 전 석훈씨가 애가 셋 딸린 홀아비라 해도 상관없었어요. 그이 옆에서 라라 가정교사
역할이라도 하면서 함께 있고 싶었어요. 우선 애들이 나와 친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까
우리 사이는 비밀로 하기로 했구요.”
그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랬구나. 어쩐지...”
“뭐가 ‘그랬구나. 어쩐지’ 에요? 이런 말이 믿겨요? 바보같이.”
그의 화가 난 표정을 보자 통쾌했다.
“아니, 이 집 식구들은 진짜 사장님이 무슨 장동건이라도 되는 줄 아나? 왜 모든 여자가
사장님한테 달라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서진이도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그래도 여전히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고.”
“서진이? 애들한테 도대체 뭘 들킨 거야?”
“들킨 거 없어요!”
“다 필요 없고! 제대로 말해.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형은 라라 외가집에 가는 것 말고
영국에서 할 일이 없었어.”
그를 계속 놀리고 싶었다.
“뭐 그리 심각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형이랑…잤어?”
오 마이 갓! 이 남자가 상상했던 게 그거란 말이지? 자기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의 형과 호텔에...
이건 정말 최악이다. 애초에 기훈과 순간적인 치기로 그렇게 호텔방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그 일이 사사건건 내 발목을 붙잡고 그로 인해 내 이미지가 기훈에게는 ‘그런 여자’로 그렇게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순간 확 잤다고 말해서 그의 머리 꼭대기에서 연기가 나는 걸 보고 싶었지만 석훈을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그런 사생활도 다 보고 해야 해요? 라라 삼촌한테?”
내가 그를 지나쳐서 들어가려 하자 기훈이 다시 내 팔을 잡았다.
“내가 지난번에 경고했지? 만약 라라를 이용하는 거라면.”
“아, 맞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 그런 꿍꿍이가 있었지? 여기 안주인 자리 차지하면 만날
잔소리하시는 무서운 시아버지에, 성질 더러운 시동생에, 애들도 셋씩 줄줄이 사탕인데
그런 팔자 늘어진 자릴 꽤 찰 꿍꿍이. 라라 돌보느라 깜박 잊고 있었네.”
기훈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내가 너무 솔직했나?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래요. 사장님 참 멋있는 분이고 좋은 분이라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남자대 여자로서는... 정말 아니네요.”
“그 말이 진심이길 바래. 그러니까 앞으로 형한테 그렇게 아양 좀 떨지마. 아주 역겨우니까.”
“얼굴에 반창고 붙여주고 있었다고요!!”
“그러니까 그 반창고를 왜 니가 붙여 주냐고?”
“아, 예. 예. 뭐든 손대기 전에 미리 기훈씨한테 허락받아야 하는 걸 까먹었네요.”
오후에 서진이를 학교에서 태우고 서울 쪽으로 차를 돌렸다.
“어디가? 여기 집에 가는 길 아니잖아?”
“갈 데가 있어.”
“너 죽었어.”
서진이가 급하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빠! 어, 나. 아냐. 급한 일이야. 선생님이 나 납치해. 지금 집으로 안 가고 날 이상한 데로
데리고 가고 있다구!”
서진이가 잠시 조용해지더니 톤이 낮아졌다.
“어. 알았어.”
그리곤 전화를 끊고 날 힘껏 노려보았다.
“도대체 아빠한테 무슨 사탕발림을 한 거야? 몸이라도 팔았니?”
‘끼익!’
난 차를 한쪽에 급하게 세우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말도 안 하고 맘대로 어딜 가려고 했던 건 미리 말하면 너가 절대로 이 차를 안 탈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너가 나한테 ‘몸이라도 팔았니?’하고 말한 건 나를 모욕하기 위해서
한 말 같은데 사실 그 말은 너희 아빠를 모욕하는 말이야. 너희 아빠가 분별없이 이 여자
저 여자랑 자고 그러시는 분이 아니란 걸 딸인 너가 더 모른다니 답답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 하면서 누워서 침 뱉지 말고…화가 나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열까지 세고
그런 다음 말을 했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지금 가는 곳은 청양보육원이란 곳이야. “
“아주 뻔 하네. 내가 거기 가서 불쌍한 애들 보면 갑자기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천사라도
될 줄 아니? 어쩌면 그렇게 신파야? 나도 학교 봉사활동으로 다 해 본 거거든?”
막상 고아원에 차를 세우니 서진이는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청양 보육원은 큰 형부가 먼저 인연을 맺은 고아원이었다. 연말에만 찾아가서 생색내듯 했던 게 항상 미안했는데 다행히도 고아원 운영자들은 우릴 그래도 너그럽게 반겨주었다. 보육원 주방을 담당하시는 아줌마가 우릴 반겨주었다.
“어머 웬일이래. 저 배추들을 언제다 버무리나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나?
일하러 온 거 맞죠?”
“네, 마침 아줌마 텔레파시가 딱 왔죠. 잠깐만요, 먼저 애들 좀 보고 와서 도울게요.”
“아휴, 예쁜 여학생도 데려왔네.”
서진이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병문 중학교 삼 학년 김서진이라고 합니다. 제가 방해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싶습니다.”
말이나 못하면…
예의 바른 서진의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서진이는 나한테만 막말을 하는가 보다. 정말 내가 싫거나 아니면 훌륭한 연기자가 될 소질이 다분한 거다.
우린 먼저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난 서진에게 갓난아기를 안겨주었다.
“아기랑 눈도 맞추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많이 안아주기만 해도 좋은 거야.”
“냄새나.” 라고 하면서도 서진이는 아기를 떨어뜨릴까 봐 조심스레 안았다.
난 주방으로 가서 김치를 담갔다. 허리가 너무 아프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일이 마무리됐다. 너무 서진이를 혼자 내버려 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집에 가기 위해 서진이를 찾아 아이들의 방으로 가보았다. 서진이가 중학생 여자아이와 얘기를 하고 것이 보였다.
‘도대체 나 없을 때 서진이는 어떤 모습일까?’
숨어서 서진이와 여자아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진이가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너네 집 좋다. 방도 내 방보다 넓은데? 넌 좋겠다. 여기서 친구들끼리 함께 공부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고아원이라도 있을 거 다 있네?”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좋겠다고. 잔소리하는 부모도 없고 치고 박고 싸울 형제도 없어서.”
도대체 서진이는 저 아이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네 좋아요. 언니는 안됐어요. 부모님이 계셔서. 근데 저 지금 공부해야 돼요.”
여자아이가 책에 얼굴을 묻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여자아이의 책으로 떨어졌다. 서진이가 한동안 그 모습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 방을 나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여자아이의 이름은 강주니였다. 7년 전에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친척들도 주니를 맡기를 꺼려 이곳에 들어오게 된 아이라고 했다. 난 서진에게 너무나 실망했지만 한편으론 서진이도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한 말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어색했거나 뭔가 위로를 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서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 아이를 울린 것이 마음에 걸렸을 거다. 서진이가 다음에 갈 때는 주니를 어떻게 대할지가 무척 궁금해졌다.
첫댓글 소재가 다양해서 새롭네요.. 재이있어요
'시야가 넓다'거나 '소재가 다양' 하다고 생각해주시는 분들께 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집중적인 로맨스의
전개도 있으니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