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교통공사의 팬이 그저 '축구에 목말라' 2015년 케이리그 클래식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이 열리는 구덕운동장을 찾았다. 구덕운동장은 부산 교통공사의 '나와바리'임에도 아이파크가 슬금슬금 눈독을 들이는 터라 요즘 부쩍 신경 쓰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날 구덕운동장에 여자친구를 '반 강제적으로' 끌고 가다시피 했는데, 축구 보러 가자는 권유에 바로 튀어나온 답은 이랬다.
"어느 나라랑 하는데?"
'축구 = 국가대표'라는 인식이 DNA에 박혀 있는 이 나라 풍토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여자친구는 이날 경기에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변화를 보여 주었다. 경기장에 가기 전부터 "다른 나라랑 하는 경기도 아닌데 왜 가야 하냐", "작년에 내 친구가 '축빠 남친' 따라갔다 '핵노잼'에 질려 잠만 자고 왔다 하더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던 여자친구가 경기장의 열기에 휩쓸려 정신 없이 빠져들던 풍경이야말로 내겐 최고의 볼거리였다!
부산 아이파크와 수원FC의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을 앞두고 부산 교육감배 유소년 축구 결승전이 먼저 열렸다. 대동중 대 동양중의 경기에서 제1 부심이 무척 눈길을 끌어 사진에 담았다.
어떡하든 강등만은 피하려고 하는 아이파크 팬의 간절함을 담은 문구가 씁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때는 케이리그 클래식 최고이자 최다 여성팬을 보유한 걸로 유명한 아이파크의 아마조네스 '이지스'가 지금은 팀 성적만큼이나 초라한 규모로 줄어든 걸 볼 수 있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인원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열정만은 참으로 놀라웠다. 그 열정에 끌렸는지 내 여자친구도 경기 후반에는 이들과 합류해서 함께 애원과 비탄과 절규로 가득한 목소리를 높였다.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1 대 0으로 승리한 기세를 안고 수원에서 부산까지 원정을 감행한 몇백 명의 수원FC 팬들은 이날 자신들의 노고를 승리와 더불어 케이리그 클래식 승격으로 충분히 보답받았지 싶다.
경기 전날까지 '이정협 출전'이라는 헛된 술책을 부리던 감독 최영준은 빌을 선발 출전케 하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빌의 선발 출전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후반에 뜬금없이 측면 수비수 유지노를 투입한 것이나, 추가 시간에 정석화를 내보낸 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선수 선발은 감독만이 누리는 '깜짝쇼'에 불과한지 최영준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이날 중원에서 고군분투한 주세종과 더불어 아이파크의 수훈 선수는 바로 이범영이었다.
광주와의 원정 경기에서 '땅파기'라는 희대의 퍼포먼스를 펼친 게 아마 그의 선수 생활에서 가장 큰 흠으로 두고두고 남을 듯하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염원으로 삭발 투혼까지 불살랐던 그의 비장함만은 절대 깎아내릴 수 없을 것이다. 통한의 패배를 당하자 물병과 욕설로 얼룩진 서포터즈석 앞으로 선수들의 선두에 서서 이끄는 것으로도 그 비장함을 다시 한 번 훌륭하게 증명해 냈다.
그때 "범영이 넌 잘했다!"라는 말이 선수들에게 퍼붓는 욕설 가운데 당당히 자리 잡은 것도 아마 그의 처절한 투혼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싶다.
경기를 마친 뒤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경기장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아이파크 선수들 가운데 처음 등장한 건 웨슬리였다. 그때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 가득히 눈물에 젖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수들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려고 모였던 팬들마저 그 모습에 마음이 아렸는지 박수와 환호성으로 웨슬리를 맞았다.
이후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은 채 단체 사과를 요구하던 강경한 팬들을 뚫고 버스에서 내려 혼자 쓸쓸히 어딘가로 걸음을 재촉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때 어느 중년의 팬이 그를 쫓아가 악수를 나누며 떠나보내는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다.
본부석 맞은편 일반 관람석에서도 서포터즈 못지 않게 경기에 몰입하며 탄식과 비명과 애원을 담은 목소리를 쏟아내는 장면이 흔하게 펼쳐졌다.
부산 교통공사 팬 입장에선 본부석을 가득 메운 관중도 부러웠지만 맞은편 관중석 풍경은 질투가 날 만큼 나를 짓눌렀다. 케이리그 클래식 팀과 갖는 FA컵을 제외하곤 부산 교통공사의 경기에서 저 자리에 관중이 앉아 있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게 못내 가슴 아팠다.
전반전은 본부석 맞은편에서 관람했는데, 아이파크 팬들의 열정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고 '필이 꽂힌' 여자친구가 자꾸만 서포터즈 자리로 가자고 보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에 따라야만 했다. 이후 내 여자친구는 나를 내팽개치고(!) 이지스와 어우러지며 광기 어린 장면을 유감없이 펼쳐보였다.
자칭 '청순 소심녀'라고 할 만큼 수줍음과 낯가림이 심한 여자애가 저렇게 돌변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자파가 추가골로 축포를 터뜨리자 광란의 열기에 휩싸인 수원FC 원정석 풍경이다.
이때 성난 아이파크 팬들이 퍼붓는 욕설의 강도가 워낙 심해서 음을 소거해야만 했다.
경기가 끝난 뒤 같은 공간 위에서 슬픔과 환희로 극명하게 엇갈리는 장면을 담았다.
경기가 끝나기 전부터 이미 아이파크 서포터즈들은 "그따위로 축구 하려면 나가 D져라, 아이파크 나가 D져라" 하는 노랫말로 극렬하게 치솟는 분노를 마구 쏟아부었다.
아이파크 팀원이 본부석에 인사할 때 팬들의 따듯한 격려의 말과 위로의 박수도 있었지만 냉대와 야유의 함성 역시 빠지지 않고 곁들여 있었다.
선수들이 다가오기 전부터 이미 "꼴 보기 싫으니까 오지 마"라며 격한 반응을 분출하던 서포터즈석이지만 그래도 외면하고 갈 수 없는 노릇이었던 듯, 아이파크 팀원이 서포터즈들에게 다가갔지만 돌아온 건 격렬한 욕설과 물병 세례였다. 극소수의 팬이 박수로 힘을 불어주려고 했지만 분노와 적개심이 미친 듯 뿜어나오는 상황 앞에서 이내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팬들의 격앙한 반응에 겁먹은 듯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관중석만 애처롭게 바라보다 이내 축 처진 몸짓으로 돌아서는 선수들의 모습이 애잔하게 눈에 들어왔다.
쏟아지는 물병과 욕설 세례에도 굴하지 않고 초연한 태도로 관중석을 마주하던 이범영도 결국 등을 보이고 돌아서야만 했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서글퍼 보였는지,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내 눈은 잠시 슬픔에 젖어들었다.
서포터즈석의 반응과 사뭇 대조적으로 선수 대기실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관중석에서 "힘내라", "끝까지 함께한다"는 성원의 목소리와 박수가 쏟아지는 이색적 풍경을 그려냈다.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려고 내미는 손길 사이사이에는 사인 요청까지 잇따를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도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이 여지없이 흘러나와 귀를 더렵혔다.
참다못한 어느 초로의 팬이 "여기까지 와서 그러고 싶냐? 그만 좀 해라!"며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그 더러운 욕설은 그칠 줄 몰랐다.
분노로 똘똘 뭉친 듯한 강성 팬들과 한목소리로 "나가 D져라, 아이파크 나가 D져라"를 부르짖던 내 여자친구에게 다가가서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다그쳤지만 쉬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선수들이 일부러 진 건 아니잖아,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걸 어떡하란 말이냐!"
이런 내 말에 곧바로 되받아친 여자친구의 답이 걸작이었다.
"프로는 결과로 말하는 것이지, 열심히 했냐 아니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그만 할 말을 잃어 잠시 멈칫했지만 그래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 일부 강경 팬들이 보이는 과격한 행동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아무리 그래도 물병 투척에다 더러운 욕설까지 내뱉는 건 지나치잖아!"
"팬들이 오죽했으면 그러겠냐!"
"네가 언제부터 아이파크 팬이었다고 이러시냐?"
"축구 경기는 너(오빠한테 너가 뭐냐!) 혼자 보러 가라"며 내 등을 떠밀던 애 입에서 '팬'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다.
"오늘부터 아이파크 팬 할 거다!"
어이구, 그 '팬질' 얼마나 갈지 내가 똑똑히 지켜보겠다!!!
한쪽은 비탄과 분노에 휩싸여 폭발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선 기쁨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장내 아나운서가 "좋은 모습"을 언급하자 어느 팬이 절규하듯 "좋은 모습은 미리 보여야지"라고 꼬집던 말이 역설적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역대 케이리그 클래식 최고의 골키퍼 '신의손'이 팀원과 떨어져 계속 트랙 위를 이리저리 배회하는 모습이 꽤 이채로워 눈길을 사로잡았다. 깊은 고뇌에 빠진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 서성이던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상념들이 오갔는지 궁금하다.
이 글 쓰기 전부터 상당히 취한 상태였는데, 쓰면서도 계속 술을 들이켰더니 이젠 더 이상 적기 어려운 지경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글에서 경기장 밖 상황까지 다룬다면 지나치게 글이 길어질 거라는 우려 때문에 이쯤에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이날 경기 주심을 맡은 우상일이나 다른 심판(김종혁 등)이 경기장 밖에 모여 있던 모습, 경기장 밖을 빠져나오는 아이파크 선수들에게 힘을 북돋워주는 지지의 목소리,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고 벌이는 흥분한 팬들의 '사과 요구' 등 여러 가지 경기장 밖 풍경을 담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물론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 기약 없는 약속으로 끝날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말이다... 흐흐~
이상, 술이 엉망으로 취한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늘어놓은 '2015년 12월 5일 구덕운동장 풍경'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첫댓글 여자친구 ㅋㅋㅋ
글 잘읽었습니다 현장감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공놀이가 뭐라고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진짜 현장감 최고네요 잘보고갑니다
현장감 있는 글이네요 참 잘읽었습니다
여자친구랑 직관 부럽..
잘읽었습니다~
글 정말 잘 쓰시네요.
요즘 네이버 해외축구에서
현지 가쉽 모아놓고 날로먹는 박문성 보다 훨씬요.
감사합니다.
동영상이 열리지 않아 볼 수는 없지만 쓰신 글만으로도 현장의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게 하네요 ㅎㅎ
여자친구...
여자친구....
여자친구....
부럽다
여자친구...
2016 시즌 부천에서 뵙겠습니다^.^
글 되게 재밌음ㅋㅋㅋ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수원
옛날에 싸월에도 부산교공 직관 후기 쓰셨던 분이시군요.
오잉... 옛날에도 여친분 구덕운동장에 데리고 다니시드만... 여친이 바뀌셨나요... ㅠ
잘봤습니다 경기장을 다녀온듯 하네요~
현장감 ㅎㅎ
인상적인 표현들이 많네요. '이후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은 채 단체 사과를 요구하던 강경한 팬들을 뚫고 버스에서 내려 혼자 쓸쓸히 어딘가로 걸음을 재촉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때 어느 중년의 팬이 그를 쫓아가 악수를 나누며 떠나보내는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다'. 짠합니다..ㅜㅜ 신의손 코치님도 그렇고..
내가 직관한듯 생생하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