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은 단순한 먹거리 구호가 아니다. 몸과 흙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이 오래된
사유는, 우리가 어디에 뿌리내리고 어떤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가가 곧 우리의 살과 피, 그리고 정신을
빚는다는 깨달음이다. 흙은 말이 없으되 사람을 키우고, 사람은 그 흙을 떠나서는 온전할 수 없다.
설 명절을 앞두고 제주에서 옥돔을 옥두어로 속여 팔았다는 기사를 읽으며 나는 문득 이 말을 떠올렸다.
제주 바다에서 잡히는 ‘옥돔’은 눈 밑의 은백색 반점과 노란 세로띠, 주황빛 등지느러미로 제 고장을 증명
한다. 반면 ‘옥두어’는 비슷해 보여도 그 무늬와 빛깔에서 다르다. 같은 농어목이라 하나, 바다의 결이 다르면
생김도, 맛도, 값도 달라진다. 그런데 그 차이를 속이고 값을 바꾸는 순간, 우리는 단지 상표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흙과 몸의 인연을 끊어버리는 셈이 된다.
나는 한때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 서해안, 로스앤젤레스에 가까운 Long Beach 외항에서 잠시 대기
하던 날이었다. 무료함을 달래려 낚싯대를 드리웠다. 미끼를 던지자마자 입질이 왔다. 낚싯줄을 감아 올리니
제법 묵직했다. 수면 위로 끌려 올라온 것은 뱃살이 노르스름한 참조기였다. 손바닥보다 큰 놈이었는데, 두어 번
퍼덕이더니 이내 힘이 풀려 축 늘어졌다.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만약 이 조기가 우리 남해나 서해에서 물렸다면 저토록 쉽게 기운을 놓았을까.
익숙한 조류와 염도, 제 몸을 길러낸 바다의 냄새 속이었다면 끝까지 발버둥치지 않았을까. 바다는 하나로 이어져
있어도, 그 물결의 결은 저마다 다르다. 고기가 제 바다에서 더 강한 것은, 사람이 제 땅에서 더 단단한 것과 닮았다.
우리가 올림픽 무대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때면 사람들은 정신력과 훈련을 말한다. 물론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정신과 훈련 또한 어디에 뿌리내렸는가와 무관하지 않다. 사계절이 뚜렷한 땅에서, 뜨거운 여름과
매서운 겨울을 견디며 자란 몸은 자연스레 강인함을 배운다. 좁은 국토에서 치열하게 부딪치며 살아온 경험은 경쟁
의 감각을 벼린다. 흙이 몸을 만들고, 환경이 기질을 빚는다.
그래서 원산지 표시는 단지 행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몸과 땅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제주 바람을 맞고 자란
생선은 그 바람의 맛을 품고, 남도의 햇볕을 받은 쌀은 그 햇볕의 기운을 담는다. 사람은 그것을 먹고 자라 그 땅의
사람이 된다. 속임은 그 순환을 끊고, 신뢰를 무너뜨린다.
신토불이는 배타적 구호가 아니라 관계의 선언이다. 내가 선 자리의 흙을 알고, 그 흙이 길러낸 것을 귀히 여길 때
우리는 비로소 제 몸을 존중하게 된다. 몸을 사랑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오늘 내가 딛고 선 땅을 돌아보고, 그 땅이
준 것을 정직하게 나누는 데 있다.
흙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흙을 잊을 뿐이다. 몸과 땅이 둘이 아님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제 자리
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온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