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은 식민통치보다 더 큰 비극인 민족 분단의 시작이었다.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미국과 소련은 책상에 펼쳐놓은 지도 위에 붉은 줄을 찍 그으며 3‧8선을 경계로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각각 왜군의 무장 해제와 안전한 철수를 책임지기로 했다. 미군보다 먼저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은 3‧8선의 위치도 몰라 춘천과 강릉까지 남하했다가 미군의 지적을 받고 서둘러 3‧8선 이북으로 철수하기도 했다. 당초 연합국은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지만, 한국인들의 결사반대에 부딪혀 합의를 취소하기도 했다. 그런데 함께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좌익세력이 어느 날 각중에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비극적인 분단의 싹이 텄다. 이 장에서는 소련 태생의 고려인 2세 정상진(1918~2013)의 증언을 통해 ‘8‧15 해방과 분단’의 실상을 밝혀놓았다. 이제 이름도 생경한 정상진의 증언을 함께 따라가 보자.
정상진은 소련 해군 육전대(해병대) 특무상사로 대일전에 참전했다. 소련군을 따라 북한에 진주한 정상진은 군정 요원으로 북한의 공산화 과정에도 참여했다. 그는 소련군 대위 김성주(훗날 김일성으로 개명)가 원산에 상륙할 때 항구까지 마중을 나가기도 했다. 김성주는 6‧25전쟁이 끝난 뒤 자신이 1930년대 중반부터 해방 직전까지 항일무장투쟁을 했다고 조작했는데, 실은 그 시기의 대부분을 소련군 병영에서 편하게 지냈다. 김성주와 함께 소련군의 같은 부대에 있다가 귀국한 인사들은 그가 백두혈통 신화를 창작하고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처형되었다. 정상진은 북한정권 수립 후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 등을 역임했는데, 1950년대 중반 김일성이 소련파를 숙청할 때 소련 국적을 가진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1957년 소련으로 탈출했다. 말년에는 북한 민주화운동에 진력했다.
정상진은 1944년 8월 소련군 태평양함대 정보처에 자원입대했다가 1945년 3월 해군육전대 특무상사로 편입되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왜국과 맺은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8월 11일 60명의 육전대원들과 함께 북한에 상륙한 정상진 특무상사는 소련군 장교가 북한 주민들에게 위무연설을 할 때마다 이를 통역하기도 했다. 소련군은 북한을 해방시키러 왔다고 선전했지만, 모든 보급품을 현지에서 조달하도록 훈령을 받은 소련군은 왜군보다 악랄하게 살인과 약탈과 강간을 저질렀다. 정상진의 부대는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청진항에서 왜국과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참전한 조선인으로는 그가 유일했다.
김성주는 정권을 장악한 후 그가 창건한 조선인민혁명군 산하 오백룡부대가 치열한 격전 끝에 웅기를 왜군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조작했다. 그리고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최초로 해방시킨 도시라 하여 웅기를 선봉으로 개칭했다. 당시 김성주나 그의 부하 오백룡은 소련 하바롭스크 인근 웨트스코에 마을에 주둔 중인 소련군 제88정찰여단 막사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오백룡을 비롯하여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1950년대 중반 모두 처형되었다.
1945년 9월 18일, 원산시 교육부 차장으로 있던 정상진은 내일 원산항으로 나가 귀국하는 김일성(1912~1994) 장군을 영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배에서 내린 사람은 장군이 아니라 소련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젊은 장교였다. 그는 김일성 장군을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는 정상진에게 다가와 ‘내가 김성주입니다’ 하고 인사했다. 정상진은 소련군 정치부로 찾아가 ‘일행 중에 김일성 장군은 없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정상진에게 김일성 장군을 맞이하라고 명령했던 소련군 장교는 씩 웃으면서, ‘김성주 대위가 바로 김일성 장군일세.’라고 말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가운데 가장 우수했던 정보부대가 어디서 김일성의 전설을 들었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김성주라는 본명을 사용하다가 훗날 김일성으로 개명했다.
나는 1993년 실록 대하소설 「비밀결사 白衣社」(全3권)를 집필했는데, 이영신(MBC 드라마 《제3공화국》 작가) 선생으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설적인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김일성은 실존인물이 아니었다. 왜국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하여 만주국을 설립하자 만주 땅에는 독립투쟁을 벌일 대규모 부대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규모 부대만 관동군을 피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주재소를 비롯한 왜국의 관공서를 공격했다. 독립군들은 왜 군경을 교란시키기 위해 공격을 퍼붓고 도망치면서 ‘김일성 장군 부대’라는 삐라를 남겼다. 이렇게 신출귀몰하는 활동을 펼치자 국경 인근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물론 왜군들도 주목하는 김일성 신화가 탄생했던 것이다. 소련군 정보부는 그 신화적 인물의 이름을 도용하여 김성주를 개명했던 것이다.
6‧25전쟁 중 김일성에게 원수(元帥) 칭호를 부여한 것은 소련 공산당서기장 스탈린이었다. 김일성이 주체사상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55년 10월 22일 노동당 정치위원회 회의석상에서였다. 이처럼 김일성의 모든 상징은 법률적 뒷받침이나 국민적 동의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1947년 4월, 정상진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문예총은 김일성 우상화를 주도한 선전기관이었다. 소련군정은 정상진처럼 우수한 고려인 인재들을 데려다 각 부서의 2인자로 기용했다. 이들은 매사를 소련군정에 보고했고, 군정은 이들을 통해 북한을 다스렸다. 이후 정상진은 문화선전성 제1부상 등 여러 고위직을 역임하다가 숙청되었다. 공직에서 숙청되어 자택에 연금되어 있던 정상진은 김일성에게 소련으로 돌아가겠다는 청원서를 냈고, 죽일 수도 없고 살려두기에는 께름칙하던 참인 김일성은 1957년 10월 정상진을 비롯한 고려인들을 곱게 소련으로 보내주었다.
첫댓글 정상진같은 인물이 김일성 같은 인물을 만든 것이구나
그리고 남북 분단의 아픔을 겪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