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송씨시조(延安宋氏), 송경(宋卿)
득관유래
우리나라 송씨의 연원은 신라 말엽 당(唐)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宋柱殷)공이 귀화하면서 비롯 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고려조에 들어와 여산송씨(礪 山宋氏)와 은진송씨(恩鎭宋氏)가 먼저 득관하고 이어서 공민왕 때 김용의 난을 평정하고 홍건족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나라에 큰 공을 세우면서 지밀직사사를 지낸 송경(宋卿)공이 황해도 연안에 근거를 두고 살면서 송도 조정에 출사하였기 때문에 연고지의 지명을 붙여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이라는 군호를 받게 됨으로써 연안송씨로 득관하게 된 것이다.
황해도 연안에는 시조(宋卿)의 둘째 손자 운용(雲龍. 중낭장)의 묘소가 있으며 그의 후손들이 600여년간 번성 하면서 세거하고 있다.
연안의 연혁을 살펴보면 고조선시대에는 진번, 고구려 때는 동음홀, 통일신라 때는 해고군, 고려 초부터 염주라고 칭해 오다가 충선왕 2년(1310년)에 연안부(延安府)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불리어 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연안 도호부, 갑오경장(1894년) 이후로는 연안군, 일제시대 때부터 연백군으로 불리어 오다가 북한에서는 1954년부터 다시 연안군으로 호칭하고 있다.
시조사적(始祖史蹟)
고려사 열전에 의하민 판밀직사사 송경이 홍언박(洪彦博)에게 말하기를 ‘‘창생들은 공이 재상 되기를 바란지 오래 인데 이제 수상이 되어 어찌 한가지 일도 여망에 화협함이 없는가, 지난해에 파천함에 종사가 적에게 함몰되고 주상께서 몽진하여 천하의 웃음을 산 것은 공이 일직 도모하지 아니 하였기 때문이오, 이제 공의 아들이 부병을 장악하고, 사위는 헌사의 장이 되어 부귀가 극에 달하였는데 어찌 국가를 걱정하지 아니하는가” 하니 (그때 홍언박의 사위 유연이 감찰대부가 되었으므로 그렇게 말 한 것임) 홍연박이 이를 꺼려서 공민왕 11년 임인(1362년) 8월에 판밀직사사 송경을 파면하고 혼도금대채의저마직포를 하사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같은 해에 중신 김용의 반란을 평정, 서울(開京)을 수복한 공으로 12년 계묘(1363년) 3월에 찬성사 송경을 이등공신 봉 연안군하고, 13년 갑진(1364년) 춘정월에 기해년(1359년)에 홍건족(두목 모거경)을 격퇴한 공으로 일등공신으로 도형벽상(圖形壁上)하고 지밀직사사가 되었으며 부모처자들은 초삼등 봉관작하였고, 14년 을사 (1365년) 6월에 연안부원군에 봉군하고 숙의(肅毅)의 시호를 내렸다고 고려사에 실려있다.
송경공의 최종 관작은 추성익대보리동덕좌명공신(推誠翼戴輔理同德佐命功臣)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사사중찬겸 판전 리사사(都僉議使司中贊兼 判典理使司) 상장군(上將軍)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이다.
이와 같은 공의 공적을 받들어 후손들은 송경공을 연안송씨의 시조로 모셔오고 있으며 1989년도부터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구산서원 후원에 제단을 조성하고, 매년 음력 3월 첫째 일요일에 전국 각처에 산재하여 살고 있는 후손들이 모여 시제를 지내고 있다.
[출처] 연안송씨시조(延安宋氏), 송경(宋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