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경이로움이었다.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순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짧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순은 마치 자기를 보아달라는 듯,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보랏빛 순 줄기는 이미 여러 개의 여린 이파리를 달고 있었다. 오보록 달린 이파리들은 하나하나 줄무늬가 선명했다. 컴컴한 어둠속에서 빛을 찾은 듯, 새상 구경을 하는 순에 이끌려 나는 박스의 윗부분을 열저젖혔다. 그리고는 연이어 탄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보랏빛 순들이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종이박스 안에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세상을 처음 접한 그 순수한 눈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박스 윗부분에 막혀 더 이상 키가 자라지 못한 순은 몸을 꺾어 옆으로 뻗어 있었다. 그 뚝기에 나는 전율이 일었다. 고구마가 무덕진 좁은 공간에서 조금이라도 틈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순이 자라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라기 시작한 것일까. 순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순들은 그동안 참아왔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어둠이 걷히고 신선한 공기를 마주하자 순들이 숨을 크게 들이쉬는지 갑자기 박스 안은 생기로 가득했다.
문득, 그동안 답답했을 고구마에 마음이 쓰였다. 꽉 막힌 박스 안에서 오로지 숨을 쉴 곳이라고는 옆으로 뚫려있던 작은 구멍밖에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둘, 세상 구경을 하겠다고 고구마의 속살을 비집고 나온 순들은 여리지만 올찬 기운을 품고 있었다.
무릇 생명이란 이런 것일까. 아무리 척박한 곳일지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본능, 생명에 깃들어 있는 거룩함이 우릿함으로 다가왔다. 고구마는 분명 자신의 처지를 알았을 터이다. 그런데도 쑥쓱 순을 뽑아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게 분명하다. 도대체 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건 생명이 가진 경이로움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박스 안은 고구마에 들어 있는 영양 외에는 순이 자라기 위한 영양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구마는 순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자양분을 내주며 말라갔을 것이다. 마르면서도 순으로 거듭 타어나고자 하는 종족본능의 염원이라니...그건 어쩌면 생명이 가진 고귀한 자기희생이 아닐까 싶다.
고구마는 자신의 몸에서 자라는 순에 영양분을 빼앗겨서인지 말라가고 있었다. 겉 부분은 쭈굴쭈굴 푸석했다. 아마 머지않아 더는 내어줄 게 없을지도 모를 고구마다. 하지만 아랑곳없다는 듯, 매욱하리만치 고구마는 안간힘으로 생명을 키워내고 있었다. 땅속에서라면 고구마순은 고구마의 자양분 없이도 쑥쑥 자랄 터이지만, 공기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는 생명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생에 대한 본능은 식물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사람도 자식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치 않는다. 자의든 타의든 새싹을 키우고자 하는 열망은 자신의 몸을 모두 내어주면서까지 멈추지 않는다. 친정어머니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당신 몸의 물기가 빠져 기운이 약해지는 것도 마다치 않고, 끊임없이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어머니이기에 가능한 일일 터이다.
지난달, 조카 딸 돌잔치가 있어 친정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돌잔치에 극구 가지 않겠다고 했다. 젊은 사람들 일색인 자리에 노인이 끼면 흉측하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평생 시골에서 일만 하신 분이라, 얼굴이 햇볕에 그을려 까만 데다 주름살도 많다. 도시 노인들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이는 어머니는 퍼석퍼석한 머릿결하며 북두갈고리 같은 손 등, 당신의 모습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 듯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평소에도 사람들 모이는 곳은 꺼려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난해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건강에 자신을 잃어가더니, 급기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민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어머니를 설득해서 나는 어머니께 화장을 해드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 얼굴을 매만지고 머리를 손질해드리는데 가슴이 씀벅씀벅 아려왔다. 스킨을 발라드리자 눈이 따갑다며 뜨지도 못하셨다. 녹내장과 백내장이 겹쳐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진 탓이었다. 눈이 시려서 평소에도 바람만 불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고 했다. 그러니 순한 스킨조차 어머니의 얼굴은 받아들이질 못한 것이다.
로션도 마찬가지였다. 거칠어진 피부는 로션을 거부했다. 얼굴에서 따로 뭉치는 로션을 다독이며 겨우 발랐다. 물기가 다 말라버린 어머니의 얼굴은 피부가 가진 기능조차 잃어버린 채 메말라 가고 있었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는 당신의 얼굴에 화장한 게 언제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했다. 가벼운 스킨이나 로션조차 받지 않는 얼굴은 어머니의 시드런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디 겉으로 드러난 얼굴뿐이겠는가. 고된 노동으로 몸은 사득다리가 되어버린긴 지 오래다. 구멍 뚫린 뼈에 바람이 들어 겨울밤이면 시리고 아프다고 하신다. 어머니의 육체는 속이 텅 비어버린 고목이나 다를 바 없다. 어머니가 그렇게 된 건 자식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 때문이다. 어머니가 내어준 피와 살은 우리를 살찌우고 험한 세상에서 견디어 낼 힘이 되어 주었다.
기름진 땅을 가지지도 않고, 여유로운 주위 환경도 없이 박토를 일구어 우리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에게 믿을 거라고는 오로지 당신의 몸뿐이었다. 몸을 부려야만 살 수 있었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어머니는 당신의 온몸을 비틀어 물기를 짜내 우리의 마른 입을 축여주고 고픈 배를 채워주었다. 당신의 몸이 서서히 말라가고 모든 기능을 상실해가는 것에는 아랑곳없이 모성이라는 본능 앞에 어머니는 그저 충실할 뿐이었다.
그 모성 본능은 생영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인지 어머니의 희생은 요즘도 변함이 없다.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도 흙에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사신다. 자식들에게 깨끗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주고 싶은 열망은 어머니의 뼈를 더욱 엉성하게 만들 것이다. 또바기 같은 사랑 앞에 그저 가슴이 먹먹해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