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1
-제4회 한용운문학상 대상작-
애호박 미륵 / 최경순
담장 밑 구덩이 파고
똥거름 한 바가지 퍼 붓고
부처 사리 몇 알 묻어 놓으니
뙤약볕 쏟아질 때 쯤 출산이다
금 줄 친 담쟁이넝쿨 비집고
방긋 웃는 노란 별 꽃 밑동에
까까머리 동자승
그늘에 앉아 오롱조롱 땀을 식힌다
매미는 속 다 까발리고 볼기로
목탁 소리를 내며 한 여름 내내
구애를 했건만 불순한 불심인 듯
보람도 없이 또, 7년을 기다리라 하네
울화통에 참선에 든
플라타너스 멱살을 잡고서
귀때기 떨어져라 불경스럽게
불경을 읊어 대니 다 덧없음이요
그러거나 말거나
귀때기 닫은 소나기
돗바늘처럼 사선으로 꽂으며
아슬하게 거미줄만 탄다
면벽하고
묵언 수행 중인 동자승
머리 위 후드득 떨어진 빗방울
그 생김이 불두(佛頭)와 같다
잎사귀로, 꽃잎으로, 씨앗으로,
몸뚱이로 다 내어 준 동자승
그대가 미륵이다
수제비 / 최경순
비상을 꿈꾸는 인어는 날개가 없다
추락은 자명한 일
툭, 툭, 살점을 떼어낸다
손끝에서 미끄러지듯 물 등을 타고
가마우지가 물속을 읽어 내듯
연신 자맥질이다
인어는 물 등 위에서 잠방잠방
사내는 꿈을 꾸다가
뜨거운 물의 아가미에 갇혔다
물의 뼈가 물살을 일으키며
인어를 껴안고 잠수 중이다
비로소, 몸이 달궈진 다음에야
떠오르는 인어, 날개가 돋았다
드디어 그녀는
숟갈 타고 비상한다
소래포구를 먹다 / 최경순
돛 띄워 항해하던 갈매기 가족
소래포구 선착장에 닻을 내렸다
월곶 로터리 지나 소래로 닿는
철 뚝방 위 행상 막걸리 한 사발 천 원
주둥이에 빨간 루주 바르고 꼬리치는 멸치의 유혹, 욕정이 주책이다
울대 핥는 갈증에 망설임은 사치다
취기에 풍류를 읊는 갈매기
포구의 상징인 꽃게 조형물과
칼국수의 만남은 보글보글 끓는 시원한 맛에 말문이 막힌다
부리로 끼니를 쪼아 대는데
면발이 탱글탱글 면치기 좋은 날
양푼에 한 가득 담은 푸짐한 바다 속
가리비를 들춰 흑진주를 보는데
관자의 흔적만 표식처럼 남아있었다
가리비 속 터지게 빡빡 긁어 나눠 먹고
새우 뿔 잡고 등껍질 벗긴 흰 속살도 나눠 먹으니 뱃속 바다가 출렁인다
배가 부른 갈매기 가족
비행은커녕 뒤뚱뒤뚱 광대처럼 어물전을 훔쳐보는데 무리 속으로 뒤엉켜서 생선 출석체크는 뒷전이고
매의 눈으로 본 터닝 포인트는
오징어튀김이다
수평선에 걸터앉은 노을
부리나케 지우고 있는 땅거미
만삭으로 둥지로 날아오르는데
양날개에 힘이 솟구친다
숫눈길 / 최경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새해가 밝았습니다
무심코 하늘 위 올려봅니다
콧잔등 치켜세우고
아스라한 하늘 계곡서
바람의 등을 타고 춤추듯
포물선을 그리며 눈웃음 짓던 꽃,
내 입술로 다가와 함박꽃이
되더니 이내 눈 녹듯 사라집니다
온 세상을 담아낸 소복한 함박꽃,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길 위
첫 발자국을 찍습니다
소복한 함박꽃 속을 밟으니
마음이 부풉니다
첫 발자국의 설렘은
미지의 시작입니다
보폭이 넓지도 좁지도
않게 찍겠습니다
누군가 내 발자국을 따라
길을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집니다
발자국이 자꾸만 지워집니다
그렇다고 다시금 돌아가
발자국을 찍을 순 없습니다
지워진 숫눈길 위 누군가는 또,
설렘의 흔적을 남기겠지요
희망을 꿈꾸며
봄이 오고 있었다
최경순[최에스텔]
차갑게 식은 슬픔이
창문 밖에 어른거렸다
젖은 날개로 봄을 그리는 아기 새들
고개 들어
쨍쨍하게 푸른 하늘을 보다
인사를 남기듯 날개 파닥이며
한 바퀴 맴돌다 날아간다
어둠 차오르는 빈방
창문에 쓴 낙서를 읽고
유리창에 갇힌 하늘을 닦으며
어둠을 걷어낸다
날아간 새들이 돌아오는 길에
향기로운 바람 따라서
봄이 오고 있을까
한해의 갈등과 시련을 지우고
깊은 어둠으로 묻혀가는 겨울
깜깜한 창밖에서 봄빛이 걸어온다
제자리에 안주하는 건 아무나 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먹어야 살고 잠을 자야 사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움이 없다면 죽는다. 그래서 갇힌 사람의 꿈은 훨씬 크다. 날개는 새들만이 가진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사람이 가진 날개는 무한대다.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우주를 정복하고 떠난 사랑도 멈추게 하는 능력을 가진게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은 움직인다. 쉬지 않고 움직여야 비로소 편안을 가진다. 한마디로 움직여야 살고 살기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이다. 늙었다는 것은 삶을 얼마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계의 변화를 읽으며 보낸 세월이 70년을 넘었다는 것으로 이때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이나 제약이 따르고 변화를 함께하지 못하여 불안하다.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아져서 방안에 갇혀살다시피 한다. 이게 삶이다. 이때는 새가 부럽다. 창문밖은 항상 봄인데 나가지 못하니 아기새가 된듯 허공을 그리며 날기를 원한다. 최경순 시인은 바로 이때를 맞이하였다. 어둠이 차오르는 빈방에 홀로 앉아 낙서로 어둠을 걷어낸다. 유리창에 갇힌 하늘과 새들의 날개짓, 날아간 새들이 돌아올 대면 새로운 소식을 전해줄까 하는 기대감에 젖어 보내는 하루하루, 사계절의 변하듯 사람의 심경도 변하는 것이면 꽃을 그리고 잎을 보듬으며 가지를 뻗었다가 쉬어가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는게 아쉽다.그러나 갈등을 걷고 깊은 어둠으로 겨울이 묻혀가면 새봄은 반드시 온다. 그때까지는 다소곳이 기다리면 된다. 깜깜한 창밖에서 봄빛이 걸어오는 느낌이 오면 걸어나가 반기면 새 삶이 오는 것이다. [이오장]
관계학 계론/
최경순
오랜 절친인 선배와의
깊은 오해로 경계선을 긋고 말았다
인과응보의 길에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미늘 같은 낮달이
맑은 하늘에 투영되니 평온하다
비록 삭풍은 메타세콰이어 우듬지를 흔들고 있지만
마지막 잎새 떨군 우듬지에
까치 떠난 초라한 빈 둥지에 눈이 갔다
웬 비둘기 한 마리 잎새처럼 처연하다
작침(鵲枕)을 품는 건지
탁란을 품는 건지
둥지 속 비둘기가 비웃듯
물끄러미 내려 보다 눈이 마주 쳤다
각인하는 듯 한 저 눈빛,
가끔은 포즈를 취하며 날 응시 한다
나를 읽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까치 떠난 빈 둥지에 왜 왔을까?
의문이 의문을 낳는다
난, 공짜 공기가 좋아서 내 것 인냥 소주 마시듯 마음껏 마시고
훌훌 날려 버리려 하늘에 대고 메아리를 소환했을 뿐인데
경계의 대상으로 오인한 걸까
아님, 측은지심 동질감 때문일까
너와 나 대 자연과 함께 사는 세상이거늘, 값어치가 있냐고 비둘기에게 눈치껏 물어 볼 심산이었다
인간과 새의 경계선은 분명히 있다
나와 선배의 경계선이 생겼듯이
삶의 방식에 대한 경계선,
소통 부재에 대한 경계선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침: 까치 베개. 까치가 집을 지을 때 풀이나 나뭇가지 사이에 집어넣는 작은 돌. 그 돌을 품에 가지고 다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된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