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발생한 ‘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다. 126일간 이어진 이 인질극에서 게릴라들은 점차 인질들에게 동화되는 현상을 보였고, 사건이 종결된 후 인질들 역시 자신들을 붙잡아두었던 게릴라들에 대해 온정적인 발언을 했다. 앤 패칫은 뉴스에서 이 사건을 접한 후 이 인질극이 마치 오페라 같다고 생각했고, 인질범들과 인질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준 오페라 가수의 존재를 상상하며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국내에는 2006년 처음 출간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원고를 보완하고 다듬어 보다 완성도 높은 새로운 판본을 출간하게 되었다.
남미 어느 나라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질극과, 그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아름다운 음악에 관한 소설 『벨칸토』는 펜/포크너 상과 오렌지상을 동시에 수상하고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또한 미국에서만 100만부 이상 팔리는 등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앤 패칫을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2018년에는 [어바웃 어 보이]의 폴 웨이츠 감독 연출, 줄리앤 무어와 와타나베 켄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녀는 노래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의 목숨을 지키는 사람처럼.
남미 어느 나라의 부통령 저택에서 일본인 사업가 호소카와의 생일 파티가 열린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이 나라에서는 일본 기업의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호소카와를 초대했고, 보통 이런 초대에 응하지 않는 호소카와는 자신이 좋아하는 오페라 가수 록산 코스가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 때문에 이 초대를 수락한다. 록산 코스의 노래가 울려퍼지며 파티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갑자기 모든 조명이 꺼지고,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난입한다.
테러리스트들은 이 파티에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통령을 납치해 구속된 동료들의 석방을 얻어내고자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파티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대통령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대통령은 평소 즐겨 보던 드라마를 시청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 불참을 통보해왔던 것이다. 결국 테러리스트들은 대통령 대신, 파티에 참석한 각국의 유력 인사들과 소프라노 록산 코스를 인질로 잡고 있기로 결정한다.
마침 이 나라에 휴가를 와 있던 적십자 직원 메스너가 테러 집단과 정부 사이의 중재를 맡는다. 호소카와와 이 자리에 함께 온 통역사 겐이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테러리스트들과 메스너 사이의 통역뿐 아니라 여러 국적을 가진 인질들 간의 통역을 맡게 된다. 처음에는 공포에 떨던 인질들은 하루하루가 지나며 차츰 이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하고, 테러리스트들 역시 불필요하게 인질을 위협하거나 총을 들이대지 않는다.
장군들이 메스너를 통해 요구 사항을 정부에 전달하고 메스너가 음식과 필요한 물건을 전달해주는 지루한 일상이 계속 이어지자, 록산 코스는 더이상 노래 연습을 쉴 수 없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제 테러 집단과 인질들은 매일 아침 록산 코스의 노래로 하루를 시작한다. 록산 코스의 노래를 듣는 동안에는 이 집에 있는 누구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녀의 노래와 음악, 그 광채만을 생각할 뿐이다. 매일매일 계속되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테러리스트들과 인질들은 서로의 존재에 점차 익숙해지고, 불가능할 것 같은 평화로운 공존을 하루하루 이어나간다.
아름다운 노래가 불러온 희망과 평온,
그리고 망각과 현실 회피
소설 『벨칸토』는 소프라노 록산 코스와 통역사 겐 두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테러리스트들은 스페인어와 케추아어를 사용하고, 인질들은 스페인어, 일본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모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통역사 겐은 이리저리 오가며 통역을 한다. 그 내용은 때로 협상이나 사건과 관련된 중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마음과 같은 굉장히 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결국 겐은 이성적이고 실제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을 전부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된다.
한편 록산 코스는 감정적인 측면에서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담당한다. 소설 속에서 인질극은 록산 코스가 노래를 부르기 전과 후, 두 시기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묘사된다. 록산 코스가 노래를 부르기 전, 부통령의 저택과 인질들을 지배하는 것은 테러 집단의 장군들이다. 인질들은 노골적으로 협박을 당하지 않을 때조차 늘 죽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록산 코스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제 록산 코스가 인질과 테러리스트 모두의 마음을 지배하며 이곳의 주인이 된 것이다. 록산 코스의 노래는 인질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테러리스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이 사건에 연루된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엮는다. 소설의 제목 ‘벨칸토’는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으로, 성악가가 발휘할 수 있는 기교를 총동원해 노래하는 창법을 뜻하기도 한다. 결국 록산 코스는 감정적인 측면에서 인질들과 테러리스트들 사이에 다리를 놓았지만, 아름다운 노래로 의도치 않게 사람들의 눈을 가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록산과 겐 외에도 소설에는 다양한 국적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파티의 주인공인 호소카와 회장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예술에 조예가 깊어 록산 코스를 경외하다 결국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는 러시아 사업가, 먼저 풀려난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프랑스 외교관, 노래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테러 집단의 소년 병사, 겐에게 몰래 스페인어와 영어를 배우다 결국 겐과 사랑에 빠지는 소녀 병사 등 여러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촘촘하고 생생하게 그려진다.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인 양 입체적으로 묘사된 등장인물들 덕에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이 이야기는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인질극이 벌어지는 동안 이 나라의 대기는 ‘가루아garua’의 지배를 받는다. 옅은 안개보다는 습하고 보슬비보다는 물기를 적게 머금은 이 습기는 인질들이 억류된 도시의 하늘을 뒤덮고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가루아의 계절에 밖을 내다보면 보이는 것은 오로지 가루아뿐이어서, 인질들은 마치 시간의 흐름이 중단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가루아가 걷히면 날씨는 한순간에 맑아질 것이다. 모두의 눈앞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사라지고 날씨가 청명해지면 록산 코스의 노래가 부린 마법도 사라지고 이 인질극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끝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결말이 찾아오고 막이 내리는 오페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