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이 자신의 자전적 고백을 담은 책 [청춘은 맨발이다]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故김영애와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고백하며,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가 낙태를 한 적도 있다고도 서술했다.
또한 신성일은 낙태 사실은 엄앵란이 여태껏 몰랐던 사실이라고 말해 주변을 더욱 깜짝 놀라게 했다. 신성일의 이런 돌발 행동이 이어지자 여론은 "늙은 배우의 추악한 발악" 이라며 싸늘한 반응을 보냈다.
하지만 정작 신성일의 이런 말과 행동에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반백년을 그와 함께 살아온 부인 엄앵란이다. 천하의 바람둥이를 남편으로 맞아 속 끓고 애 닯던 그 세월을 그녀는 어떻게 견뎌낸 것일까.
엄앵란과 신성일은 최근 한 집에 같이 살고 있지 않다.
신성일이 따로 집을 얻어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항간에서는 신성일-엄앵란 부부의 불화설과 황혼이혼설이 돌기도 했지만, 엄앵란은 "그냥 서로에게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뿐이다. 때때로 보는게 더 좋을 때도 있다."며 공식적으로 신성일과 헤어질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허나 이렇게 별거까지 하는 것은 일반인의 상식에서 얼핏 이해하기 힘들다. 법적으로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 서로를 '놓아준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도 그럴것이 최근 신성일은 엄앵란 외에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다면서 "난 지금도 애인이 있는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했다. 신성일의 이런 뻔뻔한 모습을매일 보고 사노라니 차라리 나 같아도 따로 사는게 속이 편할 성 싶다.
당대의 미남배우 신성일은 충무로가 알아주는 대표적인 바람둥이였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여자들이 들끓었고, 그 역시 오는 여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기사 뚜렷한 이목구비와 탄탄한 몸매, 게다가 영화배우로서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지고있는 그에게 여자들이 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다만 문제는 신성일의 곁에 '공식적인' 부인인 엄앵란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성일은 엄앵란과의 결혼 이 후에도 시도 때도 없이 불륜을 저질렀다. 불륜을 저지르고 난 뒤에도 큰 죄책감 없이 엄앵란에게 돌아왔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일을 반복했다. 엄앵란은 그 시기를 "열 두번도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 시기"라고 회고했다.
그만큼 부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번에 신성일이 고백한 故 김영애와의 관계 또한 그랬다. 신성일은 엄앵란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김영애와 불륜 관계를 지속했다. 이 후, 다시 엄앵란에게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는 입버릇처럼 "김영애야 말로 내 진정한 사랑"이라는 말을 되뇌어 엄앵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게다가 1985년 김영애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엄앵란 앞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걸"이라고 말해 엄앵란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며 미남배우 신성일을 부군으로 맞이해 뭇 여성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엄앵란이었지만 실상 그녀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엄앵란은 끊임없이 남편의 불륜을 목격해야만 했고, 남편의 바람끼를 잠재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앵란이 신성일과 이혼하지 않은 것은 그녀 스스로 회고하듯 "옛날여자니까. 자식 보고 살아야 하는 옛날여자."였기 때문일터다.
신성일은 끊임없이 다른 예쁜 여자들을 찾아 사방팔방 날아다녔지만 '옛날여자' 엄앵란은 묵묵히 자식들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뒷바라지 하며 살림을 꾸려냈다.
때때로 이어지는 신성일의 폭력과 고부갈등, 시어머니의 손찌검이 뒤따랐지만 엄앵란은 신성일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 현대여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바보 같을 정도로' 참고 살았던 셈이다.
엄앵란은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바람끼 가득한 '철없는 남편' 때문에 여전한 속앓이를 하고 있다. 70 평생 알지 못했던 남편의 옛 여자의 낙태 소식을 들은 그녀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여자는 여자다. 강하고 씩씩해보여도 여린 마음이 없을 수 없다. 그녀는 아마 또 다시 회복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엄앵란의 모습을 보노라니 떠 오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엄앵란 만큼이나 나쁜 남편을 만나, 그 남편의 불륜 때문에 인생에 큰 상처를 입은사람. 배우 윤여정이 그이다.
모두 다 알다시피 윤여정의 전 남편은 '기인' 조영남이다. 음악다방 '세시봉'에서 처음 만남을 가져 사랑을 속삭인 조영남과 윤여정은 1973년 결혼에 골인해 미국으로 건너간 대한민국 대표 잉꼬부부였다. 당시 윤여정은 [새엄마][장희빈] 등의 출연으로 아주 잘나가는 청춘스타였지만 남편 조영남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정도로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3년 뒤인 1986년, 윤여정은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초라하게 귀국했다. 재주 많은 조영남이 좋아서 20대 청춘을 올인했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얼마 되지도 않는위자료와 아직 어린 두 아들 뿐이었다. 조영남은 윤여정에게 "니가 못생겨서 싫다"며 새로운 여자인 백은실과 딴 살림을 차렸고 이는 윤여정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조영남의 불륜 사실을 안 윤여정은 그 즉시 조영남과 이혼에 합의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함께 살기엔 윤여정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허나 조영남과 헤어진 뒤 윤여정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만 했다. 망가진 피부와 깡마른 몸매, 비음 섞인 목소리의 여배우를 써 주는 방송국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야말로 벼랑 끝까지 내몰린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조영남은 언론 인터뷰에서 "내 전재산은 이혼하면서 윤여정에게 다 줬다." "두 아들 학비는 지금까지 내가 대고 있다" "윤여정의 결벽증이 너무 심해서 내가 이혼 당한거다." 등의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쏟아냈다. 조영남의 이런 발언들은 윤여정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의 생각없는 언행이 윤여정을 두 번 죽인 셈이 된 것이다 이처럼 윤여정은 수많은 오해와 모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투쟁처럼 살아가야 했다. 윤여정이 목숨을 걸고 두 아이와 전쟁같은 인생을 살던 때에
조영남은 후처인 백은실과 동거하다 떠들썩한 결혼식을 올릴만큼 풍요롭고 여유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윤여정이 엑스트라와 조연으로 연예계를 전전하던 시절, 조영남은 '화개장터'를 발표하며 돈 방석에 올라 앉았고 곧이어 [자니윤쇼]의 보조 MC로 폭발적 인기몰이를 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자식을 버린 나쁜 남편이 TV에서 웃고 떠들며 잘 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윤여정의 마음은 얼마나 아리고 쓰라렸을까.
지금의 윤여정은 다행히 그 모질고 힘든 시기를 거쳐 이제는 당당한 '여배우'로서 멋진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허나 여전히 그녀에게 조영남과 함께 했던 13년의 세월은 지울수도, 씻을 수도 없는 아픈 상처다. [무릎팍 도사]에서 강호동이 "그렇게 조영남씨와의 결혼 생활은 추억이 되시고..."라고 하자 윤여정은 정색을 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나 추억이지 사실 추억도 뭣도 아니죠. 당시에는 아주 처절하고 지독하고 뭐 그랬으니까. 이혼을 하면서 내 인생의 많은 정리를 했죠."
50~60년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엄앵란과 70년대 충무로 대표 청춘스타 윤여정.
하지만 그녀들은 '나쁜 남편'들의 못 말리는 바람끼 탓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던 불쌍한 여성들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엄앵란은 참고 인내하며 지금껏 신성일의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것이고, 윤여정은 조영남에게 벗어나 당당히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일터다.
부부는 서로간의 존중과 신뢰가 바탕이 될 때에만 '아름다워' 질 수 있다. 신성일의 노추와 조영남의 기행을 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나쁜 남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미우나 고우나 평생을 내 곁을 지키며 살아갈 사람은 옆에 앉아있는 부인밖에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