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서점’이라고 하면 대학 신입생이었던 시절이 떠오른다. 작고 아담한 사랑방 같은 서점에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서 들어가면 그들은 『전태일 평전』이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혹은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등의 책을 사서 손에 쥐어주곤 했다. 그러면 그 다음 해엔 선배가 되어 후배들의 손에 책을 쥐어주는 것이다. 사회과학서점엔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대학마다 하나쯤은 있었던 사회과학서점이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남아있는 서점도 경영난에 허덕여 자리를 옮겨 다녀야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최초의 사회과학서점이라고 일컬어지는 건국대 앞 인서점의 심범석 대표를 만나 요즘 서점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람들은 그를 ‘인서점 아저씨’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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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점 아저씨' 심범석 대표.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예전에 ‘말’지를 들고 오면 걸렸어요. 문 앞에 놓고 공중전화로 ‘빨간 보자기로 싼 거 가지고 가라’고 해서 풀어보면 ‘말’지였어요. 1980년대였지요. 인쇄수준이 거의 등사기 수준이었고, 가운데를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만들었던 거 같아요. 판매도 감춰놓고 했어요.”
<민중의소리>와 함께 <월간 말>이 찍혀 있는 명함을 건네자마자 심 대표가 ‘말’지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인서점이 어떤 시대를 거쳐 왔는지 금방 알 수 있게 하는 말이었다. ‘최초의 사회과학서점’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언어의 소통공간이었던 사회과학서점 “1982년 5월 12일에 문을 열었어요. 원래는 그 전에 ‘다락방’이라는 이대 앞 서점이 있었어요. 우리보다 4, 5년 앞섰지요. 그런데 헌책방이어서 성격은 조금 달랐어요. 학생들의 사랑을 받은 서점이었는데, ‘다락방’을 사회과학서점으로 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길동에서 서점을 하다가 자주 오던 서울대 학생들이 서울대로 가자고 했는데, 자리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여기 왔더니 짜장면 집 자리가 나서 옮겨왔지요. 상황과 많이 맞물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길동에 서점을 내면서 수배학생들이 많이 왔어요.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사 등의 책들, ‘광장’이라는 잡지 등을 대학생들이 많이 보게 됐지요. 그러다가 ‘광민사’라는 최초의 사회과학 출판사가 생기게 되고, 우리도 자극을 받아 서점을 만들게 됐습니다.
처음 열었을 때는 사실 책이 없었어요. 창비, 문지, 광민사 등 몇 권 얇은 것밖에 없었습니다. 동녘 등이 생기며 자꾸 늘어난 거지요. 처음엔 일반 책들도 팔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간판이 ‘사람’서점이잖아요. 사회과학서점임을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인서점, 인서점 했었는데, 사람 人자였구나... 책도 몇 권 없었다는데 무슨 학생들이 그렇게 많이 왔을까. 심 대표가 이유를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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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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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같은 거 학생들이 가지고 와서 나누고 그랬습니다. 팜플렛, 쪽지. 언어의 소통공간이 됐었지요. 예를 들어 서울대와 고대 학생들이 두서너 명 들어오면 내가 안전하다는 신호를 해줍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고대생들이 서울대생들에게 얘기를 하고... 그런 기능이 사회과학서점에서 더 강했습니다. 쪽지 그런 것 놓고서 간다든지. 형사나 프락치들의 출입을 철저히 막고 이런 것들 때문에 명확하게 ‘어둠 속의 서점’이라고 할까 그런 의미로 당시에 소문이 많이 퍼졌고 83년쯤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게 됐습니다.”
고려대학교 앞에 있던 사회과학서점인 장백서원처럼 인서점도 여러 번 자리를 옮겼다고 들어서 그 과정을 물어봤더니 두 번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많이 옮기지는 않았다.
“두 번 옮겼어요. 96년에 옮기고 2005년에 옮겼습니다. 꼭 10년 만이었네요. 96년 당시에는 제가 그 과정을 잘 몰랐어요. ‘인서점을 사랑하는 모임’이 만들어져서 모금을 해서 옮겼는데 나중에 제가 그걸 알았지요.
어제가 두 번째 옮긴지 꼭 1년 된 날이었네요. 작년에는 96년과 상황이 약간 다른데, 96년에 모금했을 때는 건대 중심이 아니었어요. 서울대, 고대, 연대, 세종대, 건대, 시민단체 등이 폭넓게 참여해서 3천 5백 명 정도가 당시 5천 원씩 모금했습니다.
작년에는 전체가 건대만은 아니지만 건대 중심이고 다른 곳은 개인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청년건대’ 중심으로 작년에 1억 1천만 원을 모금했어요. 원래 5천만 원 목표로 3천만 원 정도 생각하고, 이러면 일단 옮길 수 있겠다 했는데 막상 달 반 만에 1억 원을 넘어섰습니다.“
1억 1천만 원! 매우 뜻밖의 거금이다. 그러면서 지금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학교 앞에 있던 장백서원이 생각나서 말을 꺼냈더니, 장백서원이 어려웠을 때 ‘인서점 아저씨’도 관여했었다고 한다. 심 대표와 심 대표의 딸이 장백서원에 가서 일하다가 심 대표는 빠지고 딸이 계속 일했었다고.
“원래 고대 총학생회와 교지 편집부에서 운영했었는데 그대로 됐으면 장백이 살았어야 하는데 제가 억울합니다. 고대는 인간적인 분위기가 강하잖아요. 그런데 과학적이고 냉철한 성격의 운영방식이 안 맞았던 거지요. 사회과학 토대는 고대가 딱 맞는데... 장백도 고대 쪽에 맞는 게 아니고 다른 게 있었어요. 문을 닫은 ‘황토’라고. 고대생들이 그렇게 바랐는데도 좋은 서점이 생기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학생 때도 몰랐던 이야기를 졸업한지 십 년이 넘어서 인서점 아저씨한테서 듣다니 흥미진진하면서도 안타깝다. 사회과학서점의 몰락. 인문학의 위기. 이런 것이 대학가에 두드러진 경향으로 나타난 것이 90년대 중반 이후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며 경영난의 시점에 대해 물어봤다.
“96년 문 닫을 그 무렵에 이미 출판운동 전체가 위기에 직면했지요. 출판인들이 모여서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의논하던 시기였습니다.
노태우 정권의 유화책이랄까. 『자본론』 출판해도 안 잡아가고, 『태백산맥』, 『세계철학사』, 『전태일 평전』 도 잡아가지 않았지요. 그런데 젊은 청년학생들의 저항정신은 밟을수록 일어나는 게 금서의 효과랄까요? 은폐, 신비로움 이런 것들이 사라진 시기였지요. 그리고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희망을 안고 있던 이념서적이 무력화됐습니다.
한편 우리 민주화는 상당부분 위력을 발휘하게 되고, 민주노총, 전교조 등의 현실적 힘이 강력해지니까 반대로 오히려 저항운동의 뿌리는 삭아지고 허명만 남는 뿌리 없는 운동이 되고 말았죠.”
아직까지도 국가보안법은 ‘이적표현물’을 소지하고 배포했다며 인간의 사상을 재단하고 있는데, 엄혹했던 군사독재정권 시절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분명 곤혹스러웠던 순간들이 많았을 것이다.
“86년에 건대에서 10.28 건대항쟁이 있었어요. 그것과 관련해서 잡혀갔었는데, 경찰 얘기가 김일성이가 직접 인서점 아저씨를 시켜가지고 10.28 일으키도록 지도를 했다, 이래서 잡혀서 조사를 받은 적 있었어요. 근거가 없으니까 박종철 학생이 죽고 6월 항쟁이 터져서 안타깝지만, 제가 나왔죠.
또 ‘김일성 회고록’과 관계돼서 잡혀 가고 홍제동 대공분실에 며칠 있었어요.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닌데 원본을 가지고 왔던 사람이 김영환이라고 간첩이었대요. 그 사람이 가지고 와서 제가 출판사를 소개했고, 그거 출판해서 우리 집에서 보관을 했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았지만, 근거가 없는 것들 때문에 수십 번 잡혀갔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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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새로운 시도, 독서모임 ‘글나루’ 말을 쉽게 평소처럼 하지만, 당시에는 생활을 얼마나 뒤흔드는 사건들이었을까. 이런 험한 고난을 거치며 살아남았었기에 전성기 140여 개 사회과학서점들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줄어든 지금에도 끈질기게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인서점은 요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이름은 ‘글나루’. 인서점 문화사랑방에서는 ‘독서모임’이라고 말하지만, 어느 네티즌은 ‘강제독서운동’이라고 표현했다. 회원으로 가입해서 매달 2만 5천 원씩 내면, 두 권의 책을 보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 권은 독자의 맘대로 선택할 수 있지만, 나머지 한 권은 인서점 아저씨가 추천하는 책을 받게 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 네티즌은 ‘강제독서운동’이라고 표현했나보다.
“인서점을 살리는 과정에서 이제는 생존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함께 논의하며 시작하게 됐습니다. 사실은 82년에 열고부터 약간은 해오던 것이에요. 일종의 통신서점으로 제 3자에게 보내는 거였어요. 서울의 학생이 지방의 친구나 애인한테 사랑의 선물을 보내는 거였죠. 그때부터 운영해 왔는데 그것을 살려가지고 온라인통신판매를 회원제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어제(9월 13일)로 2회 발송했습니다.
틀은 인서점 아저씨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 해 왔으니까 젊은 학생들에게 추천할 권한이 있다 해서 세계 인식에 관한 책, 직접 쓴 서평과 함께 회원이 세계 인식에 대응할 수 있는 자기 변화를 할 수 있는 책이 하나고, 회원이 자기 전문성을 위해 고르는 것 하나인데, 인서점이 10권의 추천도서를 골라 놓으면 고를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가 원하는 다른 책이 있으면 주문할 수 있어요.
추천도서로 자기계발 책 1권, 세계 인식 책 1권을 올리는데, 별도로 책을 주문하지 않으면 그냥 그 두 권을 보냅니다. 1회 때는 50명이 목표였는데 47명한테 보냈고, 이번에는 63명 발송했습니다.”
삶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사회과학서적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 달라는 요구에 심 대표는 마지막 말에 걸맞지 않는 장광설을 쏟아냈다. 소위 ‘이념서적’과 ‘사회과학서적’에 대한 심 대표의 평소 생각이었다.
“예전에는 창비, 실천문학, 문지 이런 것을 다 사회과학 책으로 쳤었지요. 그러면 지금은? 그런 문제서부터 이념서적을 사회과학서적이라고 생각하느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이 이념서적으로 몰아쳤던 것을 너나 할 것 없이 다 사회과학서적으로 받아 안았지요. 그러나 이념서적을 사회과학서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를 칭송하면 사회과학이고 아니면 아닌 것, 이건 아닙니다. 80년대 이념의 기둥이었던 민족, 민중, 민주, 이 세 이념에 따르는 것은 모두 지금도 사회과학서적이라고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사고의 편협성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 이념을 함께 보면 우리의 삶을 더 좋게 만드는 것 아니에요? 환경문제, 신자유주의, 미제국주의, 한미FTA 이런 것에 관한 책 다 사회과학서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그러고 보면 대학가의 사회과학서적은 지금도 생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청년들은 우리의 좋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갖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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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점 아저씨'가 한반도 모양의 조형물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정말 사고의 편협성을 버려야겠다. 오랜 시간 무심코 이념서적과 사회과학서적을 조금은 동일시했던 것이 사실이어서 뜨끔했다. 삶을 더 좋게 만드는 책이 사회과학서적이라... 넓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청년학생들에 대한 한없는 긍정은 계속 이어졌다. 한없는 긍정은 곧 평생을 같이 한 학생들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리라.
“지금 청년들 보면 한미FTA, 평택 미군기지 문제, 용산 미군기지 부지 문제 등에 많은 관심 가지고 있잖아요. 인간의 행복이 더 증진할수록 행복은 소수가 아니라 여럿이 갖는다는 청년의 이상과 맞아떨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더 바람직한 사회과학서적이 쏟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사서 보는 것만 보는 게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청년들은 희망적이에요. 청년들은 민족, 민중, 민주라는 세 이념에 따라 좀 더 행복하고 여럿이서 함께 살아가는 관점에서 보잖아요.”
덧붙여서 심 대표는 지금까지 발송한 책들의 출판사에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고맙게도 출판사들이 책값을 할인해 줘서 독자회원들에게 발송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런 미덕이 이어지길 바란다.
지금 인서점은 과거보다도 깔끔한 모습이다. 그리고 사회과학서적 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과 어학 관련 책들도 함께 판매하고 있어서 입구만 보면 여느 서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인해 사회과학서점으로서의 인서점이 묻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흐름과 함께 한 지난 시절을 기억하는 수많은 학생과 독자들이 있으므로. 또한 인서점 아저씨의 학생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 있으므로. 그리고 인서점 아저씨의 말을 따르자면, 청년학생들에게는 희망이 있으므로.
끝으로 1982년 개점 당시 간판에 새겨져 있었다는 글을 소개한다.
“인간은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 무서운 지식을 제어 했을 때,
우리는, 그 제어하는 만큼의 인간으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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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앞 인서점.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 독서모임 ‘글나루’에 대해 궁금한 점은
‘인서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벗님의 사진과 인서점의 오래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어찌나 편안하던지요. 아벗님의 그 넉넉하고 인자한 웃음이 함께 하고 있어서인가봐요. 언제나 우리들 곁에 그 모습으로 남아 우리들 가는 길에 빛이 그리고 친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