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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80년대 군부쿠데타 이후로 침체되었던 부동산경기가 노태우대통령정부가 들어 서면서 조금씩 되살아 나고 있었다. 87년도 초에 건강상의 이유로 고향인 목포에 내려 왔으나 상반기에는 간염 치료하느라 2개월 가까이 링거주사를 맞으며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고 주로 집에서 요양하면서 친척 조카들 영어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몸도 성치 못한데 부동산자격증이 있으니 부동산사무실을 해보라는 형제들의 권유도 있었고, 88년도 초에는 거주요건이 풀려서(당시에는 1년 이상 거주하여야 부동산중개업 허가를 발급해 주었다.) 목포 역전파출소건너편 세명슈퍼건물 3층에 럭키공인중개사사무소라는 상호로 부동산사무실을 개업하였으나 건물주인이 목중고 후배라서 그 친구들(치과의사,가계수표 하는 친구,전문대 교수 등등)이 몇 명 놀러 왔었고, 3월말~6월말경까지는 서울 동생부동산일 보느라 서울과 양평,경기도 광주,수원,이천,용인,안산시등에 자주 출장 다녔으며, 그해 11월말 경에는 영암 독천지역에 처형(동서)들과 나다니다가 89년 봄부터는 해남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계곡면에 처형 당숙(나에게는 사돈) 되시는 어른이 계셨는데,주로 벌목이나 장례일등을 봐 주면서 해남지역 뿐만 아니라 강진지역까지 다니셔서 산주들을 많이 알고 계셨다.계곡면과 옥천면등의 물건(주로 임야)을 사돈어른께서 알려 주셔서 서울 친구들에게 사주면서 군청 입구의 이 모 법무사 사무실에 이전등기일로 들렸었는데 그곳에서 사무장을 잘 아는 분이 대흥사입구(삼산면 구림리)에 위치한 논을 팔러 왔었다.하천부지를 논으로 만들어서 벌다가 국가로부터(전라남도 지사 전석홍) 취득한 토지였는데 그분을 따라서 현장에를 가 보았더니 논에까지 농수로가 죽 설치되어 있었고, 농수로를 따라서 도로가 (넓지는 않지만 차량출입에는 문제가 없는) 개설되어 있었다. 면적은 1288평이었으며 평당 만원씩 팔겠다고 하여 서울동생과 반반씩 사게 되었다. 동생은 돈만 댔을 뿐 전체를 내 명의로 이전등기를 하였다. 그 당시에 동생과 나는 도회지에 살고 있어서 비싸지 않다고 생각하였지만
파신 분 입장에서는 지가가 전체적으로 쌌던 당시에 농토로서 좋지 않은 토지를 비싸게 팔고 농사짓기에 더욱 좋은 농토를 산 것으로 생각한 듯싶다.
할아버지께서 젊었을 때에 삼산면 구림리 마을(대흥사입구)과는 농토에 얽힌 사연이 있었다. 증조할아버지(양윤관)께서는 서당을 하시다가 한일합방후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는데 대흥사입구 위령비에 함자가 새겨져 있으며,증조할아버지부터 할아버지까지 3대에 걸쳐 효도를 하여 본가인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 843번지 집터 한 켠에는 지금도 효열비(제주양씨 3효 1열 비)가 세워져 있다.
양장희 할아버지께서는 젊어서 어두운 밤길에 혼자 다니시다가 도깨비와 여러번 씨름을 하는 등 담이 매우 세셨는데, 마을앞 논을 사시게 되어 대흥사입구에사는 매도인으로부터 논문서를 받아 들고 밤10시경에 구림리 마을을 나섰는데 1시간이 더 걸려서 산 고개(‘뛰받재’라고 불렀다)에 올라 섰는데 캄캄한 먹밤이라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건너편 산봉우리에 파란 불빛이 어둠속으로 강렬하게 빛나느데 분명 ‘큰짐승’(당시에는 호랑이를 그렇게 불렀다.)눈에서 나는 불빛임을 직감하고 부터는 경사진 산비탈을 조심조심 내려 오는데 중턱쯤 내려온 듯한데 뭐가 자꾸 뒤에서 돌맹이를 굴려서 할아버지의 뒷다리(종아리,장단지)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도깨비와는 여러 번 씨름을 해 보셨지만 캄캄한 밤에 호랑이를 뒤에 달고 비탈진 산길을 홀로 걷는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아무 죄가 없으니 해치지 마라.대신에 집에 가면 큰 개를 주겠다.”고 큰 짐승을 달래면서 산비탈을 내려 오셨는데 산비탈을 거의 내려 오면 논들이 펼쳐 지는데 산뿌리와 논과 사이에는 작은 고랑(구거,수로)이 흐르고 논들이 시작되는 입구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는데(내가 초등학교시절에 옆마을 뒤편으로해서 ‘용골’이라는 산골짜기에 친구들과 여름에 멱감으로 갈 때면 늘 물레방았 간옆으로 지나 갔는데 그 때에는 집은 다 허물어지고 돌담만 남아 있어 그 자리가 옛날에 물레방앗간이 서있던 자리라고 들 하였다.‘물레방앗간 터’에 대하여 지금 살아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다 알고 있다.)불이 훤히 켜진 방앗간은 혼자서 고춧가루를 빻고 있었고 할아버지께서는 그리로 피신하여 땀을 닦고 잠시 숨을 돌려 밤 2시경에야 집에 도착하셨는데 이웃 마을에서는 호랑이가 내려 와서 개를 물어 갔다며,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혀 난리가 난 것이었다.
“아버님,잘 다녀 왔습니다.” 서당을 하시고 독립운동을 하셨던 증조할아버지(양윤관)께 인사를 드리자 “그래, 이 밤중에 어떻게 왔단 말이냐?” “뛰받재로 넘어 왔습니다.” “아니, 날이 저물었으면 읍에서 자고 다음날 날이 밝으면 올 일이지,한듬산이 어떤 산인데 캄캄한 밤에 혼자서 큰 산을 넘어 왔단 말이냐?”라고 하시며 주무시다가 깨셔서 꾸중을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어른들이 흔히 하는 욕설중에는 ‘염병할 놈’,‘문둥이 같은 놈’,‘호랑이 물어 갈 놈’,‘벼락맞을 놈’,‘개 같은 놈’,‘오사(五死)할 놈’등, 학교에 오고 가는 중에 이런 거친 욕설을 허공에다가 외쳐대는 동네 분들이 있었다.(특히 부인들이 그랬다) 1년 내내 뙤약볕에 땀 흘리며 가꾸어 놓은 고구마 밭이나 배추 밭,무우 밭,목화 밭, 유자가 노랗게 주렁주렁 열린 유자나무등을 어른들의 노고에 대하여 깊은 생각 없이 작난으로 생각하고(가벼운 마음으로) 저지른 동네청소년들이나 또는 학생들이 저지른 비행일 뿐인데...
실제로 그 시절에는 아침 일찍 들이나 개(바다를 그렇게 불렀다)에 나갔다가 온데간데없이 며칠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으면 도깨비에게 홀려 가서 바닷가 뻘밭에 앉혀져 있거나 또는 호랑이에게 물려 가서 다 뜯어 먹히고 옷가지와 신발짝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간혹 벼락 맞아 죽는 경우가 간혹 발생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동네에서는 우리집안이 효도하는 집안이라서 호랑이도 해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그래서 호랑이를 영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이렇게 할아버지때부터 삼산면 구림리와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고 또한 1990년경에는 해남이 옥천면과 삼산면 그리고 마산면 일대를 편입하여 시로 승격된다는 얘기도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구림리일대는 도시계획이 잡혀서 상가지역으로 발전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에 동생과 600여만원씩 부담하여 그 하천부지 논을 사 놓고 있던 중, 3년쯤 지나서 서울 동생으로부터 그 논을 팔아 달라는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타인과 공동 소유가 되면 토지를 분할하는 문제등 어려움이 수반될 것이어서 평당2만원씩 계산하여(당초의 2배 가격으로) 동생에게 대금을 보내고 마무리하였다.(전체가 나의 명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등기수속은 할 필요가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해남읍이 시가 되기는 요원한 일이고 그 마을 나이드신 어른께 경작을 맡겨서 벼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매년 일반미로 다섯 가마씩 받아서 쌀을 사먹을 필요가 없었는데, 자녀 둘을 서울의 유명사립대학에 입학시키고 나니 등록금,집세(원룸,기숙사비),책값,옷값,식대등 생활비를 감당키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해남읍에 가서 부동산업소를 들려서 평당 2만원씩만 받고 팔고자 하였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 마을 어른이 벌고 있어서 다른 사람은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아이들 학비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700만원에(손해를 보고.하지만 일반미를 받아다가 식량을 했으므로 손해라고 할 수만은 없다.) 경작하시던 어른께 팔 수밖에 없었다.지금도 친구들과 두륜산에 갈 때 그 인근을 지나치면 아쉬운 마음이 들곤 하지만 세상에 영원히 내 소유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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