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몇몇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글쎄요…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몬, 몬테 뭔가 있잖아요?”
“샤토… 뭐더라….”
이름은커녕 품종과 포도주 브랜드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포도주 문외한들도 기억해낸 이름은 ‘몬테스 알파’와 ‘1865’였다. 이 두 포도주는 ‘국민 포도주’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한국인이 많이 찾는 포도주다. 몬테스 알파는 나라식품(대표 윤영규)이 1997년 수입한 지 13년 만인 지난해 누적 판매 400만병을 돌파했다. 1865는 금양인터내셔널(대표 박재범·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의 장남)이 2003년 국내에 들여온 이후 올 3월 누적 판매 120만병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몬테스 알파’와 ‘1865’에 이어 뜨고 있는 차세대 주자는 어떤 포도주일까? 칠레 포도주 코노수르? 프랑스의 대중 포도주 무통카데? 스페인의 포도주 명가 ‘토레스’?
‘몬테스 알파’ ‘1865’의 성공 법칙
국내 포도주 수입 업체들이 ‘제2의 몬테스 알파’ ‘제2의 1865’를 만들기 위해 치열한 마케팅 전쟁을 벌이고 있다. 국내 수입 업체는 소규모 수입상까지 400개가 넘는다. 업체당 수입하는 포도주가 수백 종이다. 국내에 들여오는 포도주 종류가 수천 종이다 보니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과 EU(유럽연합) 간의 FTA(자유무역협정)가 4월 28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를 통과하면서 포도주 업계의 경쟁 구도는 더 복잡해지게 됐다.
칠레산 포도주는 FTA 발효 이후 단계적으로 관세가 철폐된 반면 한·EU FTA는 발효 즉시 원가에 붙는 15%의 포도주 관세가 철폐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칠레산 포도주가 FTA 효과로 가격 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앞으로는 가격이 인하된 유럽산 포도주와의 경쟁이 더 치열하게 됐다.
칠레산 포도주 시장을 견인해온 ‘몬테스 알파’와 ‘1865’도 차세대 주자들의 거센 도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동안 몬테스 알파와 1865가 국민 포도주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성공의 공식이 있다. 첫째는 중가 전략이다. 저가 포도주와 고가 포도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내 포도주 시장에서 틈새를 뚫고 중가인 4만원대로 승부를 본 것이다.
둘째는 이미지 메이킹이다. 몬테스 알파가 성공의 날개를 달게 된 것은 ‘CEO 포도주’라는 별칭 덕분이다. ‘이데이 노부유키 전 소니 사장이 마시는 포도주’ ‘이건희 삼성 회장이 즐기는 포도주’라는 소문과 함께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의 포도주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셋째는 마케팅의 승리다. 1865는 수입 업체인 금양이 만들어낸 스토리와 함께 큰 포도주다. ‘1865라는 이름은 골프 코스 18홀을 65타에 치라는 의미’라는 이야기와 함께 골프장을 집중 공략, ‘골프 포도주’라는 타이틀을 얻어냈다. 원래 1865는 이 포도주을 생산한 산 페드로의 설립 연도를 뜻한다.
넷째는 이름 덕분이다. 길고 복잡한 프랑스 포도주들은 몇 번을 들어도 기억하기 쉽지 않은 반면, 한 번만 들어도 귀에 쏙 들어오는 쉬운 이름도 한몫했다.
코노수르, 무통카데, 토레스?
포도주 전문가들은 이번 한·EU FTA의 최대 수혜국은 스페인이라고 말한다.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해 칠레 다음으로 수입량이 많은데, 가격이 더 인하되면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스페인 포도주의 대표 주자로 신동와인(대표 이종훈)이 수입하는 ‘토레스’가 있다. 토레스는 스페인에서 독보적인 최대 포도주 업체로 130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토레스는 지난해 국내 시장에서 12만병이 팔렸다. 토레스는 지난해 20만병이 팔린 칠레산 에라 주리즈, 25만병이 팔린 미국산 로버트 문다비와 함께 신동와인의 주력 ‘삼총사’다.
프랑스 보르도 포도주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무통카데는 대유와인의 대표 상품. 2만원대로 지난해 12만여병이 팔렸다. 대유와인(대표 이경희)은 이 밖에도 ‘1865’에 도전하는 포도주로 ‘페폴리’를 내세우고 있다. ‘골퍼들의 로망인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페블리치 골프장이 선택한 포도주’라는 스토리를 내세워 1865를 밀어내고 페폴리를 대한민국 대표 ‘골프 포도주’로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대표적인 포도주 시장인 할인점과 백화점에서 가장 잘 팔린 포도주는 무엇일까? 신세계 이마트에서는 2009년 첫선을 보여 돌풍을 일으켰던 칠레포도주 G7 시리즈가 2010년에도 1위를 차지했다. G7은 신세계가 포도주 시장 공략을 위해 설립한 신세계L&B의 직수입 포도주다. 가격 파괴를 선언하며 내놓은 간판 포도주로 단돈 6900원. 침체된 포도주 시장에 저가 포도주 바람을 일으키며 출시되자마자 한 달에 2만병이 넘게 팔려 화제가 됐다.
롯데마트에서 지난해 가장 잘 팔린 포도주는 ‘연인을 위한 포도주’로 알려진 칠레산 ‘아모르’다. 홈플러스의 지난해 베스트셀러는 이탈리아산 인기 포도주인 3만원대의 ‘빌라M’이었다. 달콤한 스파클링 포도주로 국내 수입 백포도주 중 가장 잘 팔리는 브랜드 중 하나인 빌라M은 2009년에도 홈플러스 ‘넘버1’이었다
롯데백화점의 경우는 롯데주류BG가 수입한 초저가 포도주인 그란 티에라 레드가 지난해 가장 많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1만원도 안 되는 그란 티에라 레드는 스페인산으로 저가 포도주의 약진 속에 칠레산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신세계백화점에서는 지난해 포르탕 드 카베르네 소비뇽(프랑스, 1만원대)이 가장 많이 팔렸고 역시 프랑스 포도주인 샤토 라투르, 샤토 지스쿠르가 뒤를 이었다.
제2의 몬테스 알파·제2의 1865는 많이 있다
그렇다면 몬테스 알파와 1865를 이을 차세대 대표 포도주는? 포도주 업계 전문가들은 판매량이나 숫자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김혁 포도프라자 관장은 “포도주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다양성이다. 수천, 수만 종류의 포도주 중에서 다양성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들이 같은 포도주만 마시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포도주 문화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대표 포도주, 국민 포도주가 반드시 좋은 포도주라고 할 수는 없다. 비슷한 가격대에 품질은 더 좋은 포도주는 얼마든지 있다. 자꾸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즐겨야 한다. 그래야 수입 업체들도 더 좋은 포도주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우리나라 포도주 시장도 발전하게 된다”고 말했다.
‘와인 & 와이너리’ 저자이면서, 국내 첫 포도주 전공 MBA인 송점종씨는 “브랜드에 포커스를 맞춰 대표 포도주를 꼽는 것은 무리가 있다. 몬테스 알파나 1865가 잘 팔리기는 하지만 비싸고 오래된 명품 포도주가 많이 있다.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 브랜드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포도 품종을 선호하느냐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송씨는 “포도 품종별로 트렌드 변화를 이야기한다면 과거엔 카베르네 소비뇽 같은 고전 품종이 세계를 평정했다. 그 다음은 부드러운 멜롯에서 섬세한 피노누아로 넘어왔다가 2006~2007년엔 프랑스 론 지방의 시라(Syrah) 품종이 인기를 끌었다. 국가별로도 대표 품종이 있다. 미국은 진판델, 칠레는 카르메네르, 아르헨티나는 말벡, 호주는 시라즈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뉴질랜드의 소비뇽 블랑 품종이 백포도주 시장을 점령했다”고 말했다.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이란 책을 낼 만큼 포도주 애호가인 이원복 교수(덕성여대)는 “사실 포도주가 거품이 많았다. 멋도 맛도 모르고 비싼 것만 찾아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요가 줄면서 거품이 가셨다. 프랑스나 미국 등 주요 포도주 수요 국가에서는 대부분 10~20달러짜리를 마신다. 비싸봤자 30달러다. 몬테스 알파나 1865도 가격이 더 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도 이제 1만5000~3만원대의 대중적인 포도주 중심으로 수요층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