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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
요즘 봄 날씨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변덕스럽기가 봄 날씨 같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원래 봄이
그런 줄은 알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정도가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할 때처럼 멈췄다가 조금씩 어느 사이 바로 뒤에 와 있습니다. 문득 우리보다 더 혹독한 겨울을 보냈던
러시아가 떠 올랐습니다. 러시아 화가들 그림을 보면 가슴이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진동이
오래 남아서 좋습니다. 니콜라이 카사트킨 (Nikolai Alexeyevich Kasatkin / 1859~1930)의 작품 속 인물들도
보는 저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라이벌 여인들 Rival Ladies / 71cm x 106cm / 1890
눈 쌓인 길 위로 물 지게를 든 두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두 여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한 여인은 몹시 흥분한 듯한 얼굴이고 다른 여인은 그저 듣고만 있는데 수세에 몰린 느낌입니다.
말을 하는 여인은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지만 젊은 여인은 손을 앞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동네에 떠 도는
소문이 있었겠지요. 물을 길으러 가는 길에 소문의 발원지로 생각되는 여인을 딱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소문을 따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머리채를 잡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겠지요.
흰 눈으로 덮인 건물 위로 파란 하늘이 가뜩이나 추워 보이는데, 한 여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고
또 다른 여인은 차갑게 식고 있습니다.
아주머니들, 이제 그만 하시죠. 한 동네 살다 보면 별 일 다 있습니다.
카사트킨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작농이자 석판화가였던 아버지의 지도 아래 그는 처음으로 그림을
배웠습니다. 아버지의 재능이 아들에게 흘러가는 것을 보면 신기합니다. 가끔 아들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볼 때마다 기특합니다. 제법 이야기를 꾸미기 시작하더군요. 열 네 살이 되던 1873년, 카사트킨은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 (Moscow School of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 / 한글로 번역된 학교 이름을
아무리 검색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에 입학합니다.
노동자 가족 In the worker family / 75.5cm x 71.5cm / 1890~1900
노동으로 먹고 사는 가난한 집 저녁 풍경입니다. 탁자 위에 켜진 촛불 하나가 식구들을 비추고 있는데,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 앉았습니다. 아이에게 모든 시선이 모여 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관객을 보는 아이의 눈은 불안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아이에게 노래라도 시키는 것이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 어렸을 때 어른들이 저를 세워 놓고 노래를 부르라고 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 아이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과 자세를 보다가 혹시 어른들이 아이를 추궁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온 몸으로 사는 부모들과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그 것을 가르치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것이 부끄럽다고 가르치는 것은 자본주의 논리이고, 불편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논리가 되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10년 넘게 공부를 하는 동안 카사트킨을 지도한 선생님 중 한 명은 바실리 페로프였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화가 중 한 명입니다(http://blog.naver.com/dkseon00/140069297861). 페로프는
카사트킨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페로프 자신이 부르주아 계급의 비 도덕성에 대해 엄정한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카사트킨 역시 스승의 그 것을 배웠겠지요.
울타리 근처의 소녀 Girl near Fence / 97cm x 49cm / 1893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전에 사진을 찍자고 하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찍힌 사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진 속 저의 모습은 굳어 있습니다. 누군가를 정면으로 본다는 것은 적당한 뻔뻔함과
함께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아마 그림 속 소녀는 아직 그 것을 배우지 않았겠지요. 손에 든 나뭇잎이
그 것을 말해주고 있거든요. 살다 보면 언젠가는 관객을 향해 나뭇잎을 당당하게 들고 활짝 웃는 얼굴로 서는
날이 오겠지요. 그렇다고 그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학교에 재학 중이던 1878년에는 초상화로, 1882년에는 자연을 묘사한 드로잉으로 은메달을 수상합니다.
졸업하던 1883년에는 ‘교회 광장의 걸인들’이라는 작품으로 또 은메달을 수상하는데 요즘 말로 옮기면
이 때 학교 대표 화가 정도의 영예를 얻습니다. 메달이 꼭 실력의 우열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림에 대한 재능은 확실히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폐광에서 석탄 찾기 Seeking Coal at an Exhausted Mine / 80.3cm x 107cm / 1894
이제는 캘 것이 없는 노천 광산에 집에서 쓸 석탄을 줍기 위해 아이들과 여인들이 모였습니다. 거대한 자본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또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남아 있는 것들을 줍고 있습니다. 마차에 앉아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과 작은 몸으로 열심히
석탄을 줍는 아이의 등이 눈물겹습니다. 밀레의 작품 속 여인들은 이삭을 줍고 있었지만 그림 속 여인들은
석탄을 줍고 있습니다.
1891년부터 카사트킨은 매년 도네츠크 지역에 잇는 광산 지대를 찾아갑니다. 도네츠크는 1870년 러시아의
철도용 레일을 만들기 위해서 공장이 들어선 지역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 노동자와 광부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가 자주 보이는데 아마 이 무렵 여행의 결과였겠지요.
1878년 처음 은메달을 수상한 때부터 카사트킨은 출판협회에서 만든 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합니다. 1891년,
그 유명한 방랑파의 멤버가 되는데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가입이었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
시대를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 초기까지라고 한다면 이 시기 그의 그림 주제는 일상의 장면들을 묘사한
것으로 이야기가 담긴 것들이었습니다. 1890년 대 중반부터 카사트킨의 작품에 변화가 오는데, 산업 현장들을
주제로 방향을 돌린 최초의 러시아 화가 그룹 중 한 명이 되죠. 그의 작품에 적갈색과 청색이 많이 등장했고
붓 터치에는 힘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광부 65.4cm x 45cm / 1894
작품의 원제목을 찾아 다녔지만 영어로 표기된 것은 없고 일어로 된 것이 있었습니다. 아마 탄을 캐고 난 뒤
대충 세수를 한 모습입니다. 얼굴과 손에 남아 있는 석탄 흔적과 달리 얼굴은 아주 맑습니다.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그녀의 얼굴을 밝게 했을까요? 노동의 고단함 보다는 건강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미소가
참 곱습니다. 자세는 또 얼마나 당당합니까? 이런 미소와 눈매가 시간이 흘러 이데올로기를 품게 되면 웃음은
사라지고 굳게 다문 입술과 부릅뜬 눈으로 등장하죠.
1894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카사트킨은 자신이 졸업한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의 선생님이 됩니다.
모교에 선생님으로 부임하는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정말 부럽습니다. 선전 문구를 흉내내면 ‘기쁨
두 배’가 아닐까 싶습니다. 1890년부터 카사트킨은 모스크바 미술애호가 협회를 비롯 여러 곳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합니다. 이 때 톨스토이와 친분을 쌓게 되고 자주 톨스토이가 있는 농장을 방문, 많은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지방법원의 복도에서 In the Corridor of the District Court / 1897
재판정 복도에 재판을 앞둔 두 사람이 군인들 감시를 받으며 앉아 있는데, 면회를 온 아내는 남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말았습니다. 여인의 손과 허리를 잡은 남편의 표정은 참담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여인의 자세를 보면 재판 결과가 예상 되었던 모양입니다. 왼쪽의 두 사람은 애써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인을 바라보는 군인의 표정은 복잡합니다. 강하게 여인을 제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심정적으로는 동정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이 앉아 있는 의자는 복도의 어둠 속으로 녹아
들었고 그 어둠 위로 날카로운 칼이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살아만 돌아 오세요.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은 참을 수 있습니다.
여인의 울먹임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은메달을 수상합니다. 카사트킨의 자료를 읽다가 웃음이
났는데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는 화가’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카사트킨은 여행을 아주 많이 한 화가
입니다. 자주 러시아 전역을 여행했는데 그 범위와 연대를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카서스와
우랄 산맥을 비롯 파리와 베를린 그리고 1901년부터는 매년 이탈리아를 찾았습니다. 그 외에고 터키와 영국,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으니까 대단한 에너지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누구? Who? / 1897
이 작품은 한참을 드려다 봤습니다. 그림 속 남자와 여인의 관계를 설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부부라고 가정하면 상상이 너무 천박스럽게 흐릅니다.
지금 이야기 하면 사실 이 아이는 당신 아이가 아니에요. 사실은 ---- 아이에요.
누구라고?
부끄러운 제 상상력의 한계이기도 하지요. 또 다른 설정으로 여인의 남편을 잡기 위해서 집을 찾은
군인이라고 보면 이야기 하나가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당신 남편 어디 있어?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어제 저녁 친구가 와서 같이 나간 뒤로 소식이 없어요?
누구라고?
이야기 만들기 릴레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저 남자, 조금 있으면 눈이 튀어 나올 것 같습니다.
1905년 1월 9일, 열악한 근무 환경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러시아 황제가 있는 동궁 앞에 모여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곧 이어 군인들의 발포가 이어졌고 수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렸습니다. ‘피의 일요일’이었고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시작이었죠. 이 사건을 통해 혁명에 눈을 뜬
카사트킨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 선두에 서게 됩니다.
작품 제작연도 1901
답답한 일이 생겼습니다. 카사트킨의 작품은 분명한데 작품과 관련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목도,
작품의 크기도 없이 달랑 그림이 떠 있었습니다. 그림 소개 하면서 처음 맞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굵은 붓터치 사이로 떠 오르는 여인의 눈빛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조금 피곤하고 지친듯한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니 얼굴에 떠 오르는 것은 체념 같아 보입니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건다고 했던가요?
이제 남은 것은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살아야겠다는 앙상한 결심뿐일 수도 있습니다. 가끔 삶은 우리를
이렇게 저렇게 쥐고 흔들지요. 결심마저 없다면 우리는 아마 세상 밖 어딘가로 팽개쳐졌겠지요.
1917년 10월, 마침내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납니다. 카사트킨은 거리에 화실을 차리고 이 혁명 성공을 위한
축제의 디자인에 참여합니다. 1924년, 영국 내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묘사하기 위해 영국과 웨일즈를 찾기도
합니다. 화가와 혁명가가 동시에 그 몸 안에 있었겠지요. 1929년,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 생애 처음으로
모스크바에서 개인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아마 그에 대한 세상의 축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카사트킨은 19세기 비평적 사실주의와 혁명 러시아의 예술을 연결하는 고리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 예술의 속성 중의 하나라고 보면 예술가도 혁명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요, 카사트킨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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