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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묵상글 ( 연중 제 7주일. - 용서하시는 하느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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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연중 제 7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하시는 하느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사랑의 절정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이고, 아드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시간 그 큰 사랑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우리도 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용서와 이해가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저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 죄가 무엇이든지 용서를 간청할 때마다 하느님은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결코 지칠 줄 모르고 용서해 주십니다. 용서를 청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우리가 망설이는 것이지 그분은 언제나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도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은 용서해 주시고 더 많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적인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6-17).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 하시며 먼저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실 때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 하셨습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사람들이 자기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죽기까지 용서하는 사랑을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스테파노도 반대자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이 용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얻어야 할 구원은 바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가 무슨 선행, 무슨 공로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참으로 용서는 사랑의 고귀한 표현입니다. 용서는 우리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각박한 사회, 미움과 분열의 골이 깊어가는 이 시대에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역, 계층간, 부모와 자식간, 부부간, 형제간 등 상처 난 곳곳에 이해와 양보의 덕이 필요합니다. 그 뿌리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듯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재빨리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험담하기에 앞서 내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잘못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쉽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에 앞서 내 자신을 먼저 용서하고 또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그러해야 합니다. 참사랑은 항구합니다.
“국물이 뜨거울 땐 국물 속의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듯이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편의 단점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물이 식을 땐 국물 속의 기름이 떠오르듯이 사랑이 식을 땐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에게 부족함이 보이거들랑 ‘지금은 사랑할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6). 우리를 비방하고 아픔을 주는 사람까지도 포용하고 웃으며 인사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였던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첫째편지 3장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도 그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이지 않던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김인호).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혹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용서 청하고 자비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왜 그리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이 가득하신 하느님, 불완전한 저희는 살면서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릅니다. 제가 저지른 실수를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만큼 저 역시 다른 사람의 실수 앞에서 너그러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예수의 데레사 성녀),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요한). 이니 더 많이 사랑하게 하소서.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깎아내리는 데 쉽게 휩쓸리지 않는 용기를 주시고 사랑이 미움을 이겼다는 확신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별중에 가장 힘든 이별은? 생이별
사랑중에 가장 힘든 사랑은? 원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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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연중 제 7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김 신부님 강론이 없는 날입니다
2. 17. 강론 말미에 예고하셨습니다.
내일과 모레 강론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글피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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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연중 제 7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7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적대감으로 인한 원수 관계를 만드는 미움과 분노는 어디에서 오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자리잡게 해야 하는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서에서는 적대감을 지닌 원수의 관계를 가족 관계 안에서까지도 심한 증오로써 서로 대립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카인과 아벨(창세 4,1-16), 사라와 하갈(창세 16,1-7), 야곱과 에사오(창세 27-29장), 요셉과 그의 형제들(창세 37,4), 한나와 프린나(1사무 1,6)의 관계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다윗과 사울 간의 투쟁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개인적인 적대감의 모습을 가장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 대한 적대감을 일으켜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만든 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에 인한 것이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1사무 18,10;19,9-17). 바로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은 사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질투와 교만을 불러 일으키게 하여 다윗을 죽이려는 증오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뱀이 하와안에 자리잡은 질투와 교만의 마음을 불러 일으켜 하느님과 같이 되고 싶은 빗나간 욕망을 드러내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창세 3,1-7).
성서는 바로 미움과 분노 그리고 빗나간 욕망의 근본 뿌리는 질투와 교만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투와 교만의 포장을 벗겨 더 깊은 근원으로 들어가면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심어준 그분을 닮은 순수 감성, 순수 의지, 순수 사랑 등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악령을 보내어 질투와 교만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것은 그 유혹에 굴복하여 미움과 분노 그리고 그릇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 1독서 레위기에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이 거룩하시기에 그분의 모상을 닮은 인간도 거룩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거룩함으로 초대하는 희망과 자유의 메시지입니다.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로 이를 더 구체화 시킵니다.
이는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 자라나도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그 맑고 깨끗함을 보존하듯이 우리 마음에 교만과 질투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지라도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영은 연꽃과 같아 거기에 물들지 않고 거룩하고 순수하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진흙으로 인하여 연꽃의 깨끗함과 맑음이 더 드러나게 해 주듯이 교만과 질투로 자리잡은 악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영은 그 거룩함과 순수함으로 더 밝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영이 계시고 우리가 거룩한 성전임을 확실히 깨닫고 믿고 있으면 우리를 유혹하는 어떤 악도 오히려 더 거룩함을 드러나게 해주는 복된 악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마음의 자리잡은 악을 어떻게 사라지게 하고 거룩한 영을 드러내게 하는지를 다음과 같은 영적인 처방전을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흥분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근심도 분심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자비심과 깊은 사려가 있는 곳에 경박도 고집도 없습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방과 성찬용 잔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미 최초로 첫영성체를 한 사람들 중에 하느님을 배반하게 될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주님의 살과 피를 일상적으로 먹는 양식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올바로 회개하지도 않고 주님의 심판과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준비없이 주님의 성체를 받아 먹었던 사람이었다.
올바른 믿음이 없이 성찬에 참여한 사람은 교회에서 오래 견뎌내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유다와 마찬가지로 곧 만찬이 열리는 방을 떠나 어두운 죄악에 빠져든다. 성서에서는 예수께서 성찬식이 열리던 방에서 이별의 말씀을 하시는 동안 심적으로 매우 동요되셨던 것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 속으로 방금 당신께서 세우신 성체성사 안에서 앞으로 수백 년 동안 당신에게 저질러질 악마의 모든 모독과 독성을 내다 보셨던 것이다.
밤이 늦은 시간에 주님께서는 만찬이 열렸던 방을 떠나셔서 올리브 산에 오르시었고 쓰라린 수난의 길을 가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만인을 사랑하셨기에 나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노동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는 성찬식이 봉헌되는 방으로부터 대담하게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고난에 빠졌을 때는 성찬식장, 곧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도와 주시는 교회로 언제나 피신하려고 한다.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집의 주인과 종이 서로 친하게 지내게 하시기 위해 몸소 제자들을 그 곳으로 인도하신 그 피난처에 대해 제자들이 얼마나 기뻐했던가! 제자들이 자기 자신을 감히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그 집에 모여 서로 의논하며 서로를 격려할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그들을 뒤쫓고 있었을 때 낮과 밤의 모든 시간을 그 곳에서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사도들은 모든 이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실 줄 아셨던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늘 만나 봐었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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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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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연중 제 7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 <말씀전례>는 ‘거룩함과 완전한 사랑’ 곧 ‘성덕과 완덕’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고 하시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하십니다.
(이러한 ‘성덕’과 ‘완덕’에 대한 말씀은 <루카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로, <요한복음>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먼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그렇다면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함은 대체 어쩌란 말씀일까요? 무관심하거나 피하거나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곧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말씀은 악에 물들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지, 결코 악에 무관심해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도피요, 자기기만이요, 비겁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물론 우리는 약한지라, 때로는 피해 달아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선조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에게서 겉옷을 벗어던지고 달아났던 것처럼(창세 39,6-23 참조) 달아나는 것이 상책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단지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과 복수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나아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니, 악은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혹은 그것에 물드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일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함은 ‘맞대응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같은 방법으로 응하지 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악으로 맞대응하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과 맞서 대응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불을 불로 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불은 물로 꺼야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것이, 오히려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보복심이나 복수심을 몰아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만이 진정으로 악과 맞서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니라,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더 필요한 대상임을 깨우쳐주십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수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서가 아니라, 미움이 아름다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우리 자신이 더러워지지 않으려고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곧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실, 자비를 베풀면 자신의 영혼이 해를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타인도 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손수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참조),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참조), 말입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비록 악에서는 떠났을지라도, 선을 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을 행할 때, 진정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덕의 최고정점인 ‘완덕’으로 이끄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본문을 해설하면서, 덕의 아홉 단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덕의 <첫 단계>는 불의로 시작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 단계>는 자기가 당한대로 되갚지 않는 것이요, <셋째 단계>는 해를 입히는 이에게 똑같은 식으로 대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요, <넷째 단계>는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당하는 것이요, <다섯째 단계>는 악행자가 빼앗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이요, <여섯째 단계>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요, <일곱째 단계>는 그런 이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이요, <여덟째 단계>는 그런 이에게 선을 베풀기까지 하는 것이요, <아홉째 단계>는 원수를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결국, 완전한 사랑(완덕)이란, 결코 흠 없는 무결점의 상태나 죄 없는 완벽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하기에 자신의 약함과 결함을 통하여 흘러든 자비로우신 분의 사랑에 유대를 맺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밝힌 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신”(1코린 3,16) 까닭에 기능한 일입니다. 결국, 거룩한 영이신 성령에 따라 사는 이가 성화를 입고 완덕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성화가 아버지의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데살 4,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고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나의 용서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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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연중 제 7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넷플렉스에서 ‘몸짱 100’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몸매와 건강을 자랑하는 100명을 초대해서 게임을 하는 프로입니다. 체조선수, 권투선수, 레슬링선수, 특수부대 군인, 보디빌더, 치어리더, 소방관, 야구선수와 같이 각 분야에서 최고의 몸과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초대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게임은 ‘매달리기’였습니다. 강한 사람들끼리 모여서인지 다들 매달리기에 자신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강한 사람들 사이에도 더 강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20분가량 매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1분을 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희 때는 대학시험의 한 과목으로 ‘체력장’이 있었습니다. 턱거리, 윗몸일으키기, 오래달리기와 같은 종목이 있었습니다. 저도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배당 점수가 20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몸짱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아프지 않고 맡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이 건강한 몸을 위해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셨고,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짱’은 아니셨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다른 2명은 아직 살아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 성인과 성녀들 중에도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아픈 몸까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헌하였습니다. 평생 수녀원 밖으로 나간 적이 없지만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은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해 져야 한다.”입니다. “하느님께서 완벽하시니 여러분도 완벽해져야 한다.”입니다. 거룩함과 완벽함의 기준은 ‘몸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짱은 아니셨고, 성인과 성녀들도 몸짱으로 성인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함과 완벽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4가지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기꺼이 도와주는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수오지심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기 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양지심의 마음입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하는 시비지심의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완벽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을 구할 수 있는 재물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존경하는 명예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박노해 시인의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어린이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마음, 완벽한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슬픔 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을 보았습니다.
“폭설이 쏟아져 내리는 이스탄불 밤거리에서/ 커다란 구두 통을 멘 아이를 만났다./ 야곱은 집도 나라도 말글도 빼앗긴 채/ 하카리에서 강제이주당한 쿠르드 소년이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일도 공치고 밥도 굶었다며/ 진눈깨비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작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선 채로 젖은 구두를 닦은 뒤/ 뭐가 젤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야곱은 전구 알같이 커진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빅맥, 빅맥이요!/ 눈부신 맥도날드 유리창을 가리킨다./ 학교도 못 가고 날마다 이 거리를 헤매면서/ 유리창 밖에서 얼마나 빅맥이 먹고 싶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맥도날드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곱은 커다란 햄버거를 굶주린 사자새끼처럼/ 덥석 물어 삼키다 말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물었다./ 세입쯤 먹었을까/ 야곱은 남은 햄버거를 슬쩍 감추더니/ 다 먹었다며 그만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창 밖에는 흰 눈을 머리에 쓴/ 대여섯 살 소녀와 아이들이 유리에 바짝 붙어/ 뚫어져라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곱은 앞으로 만날 때마다/ 아홉 번 공짜로 구두를 닦아주겠다며/ 까만 새끼손가락을 걸며 환하게 웃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길 건너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아, 나는 그만 보고 말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몰래 남긴 햄버거를/ 손으로 떼어 어린 동생들에게/ 한입 한입 넣어주는 야곱의 모습을/ 이스탄불의 풍요와 여행자들의 낭만이 흐르는/ 눈 내리는 까페 거리의 어둑한 뒷골목에서/ 나라 뺏긴 쿠르드의 눈물과 가난과 의지와 희망을 영성체처럼/ 한입 한입 떼어 지성스레 넣어주는/ 쿠르드의 어린 사제 야곱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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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연중 제 7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생 때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을 미술 시간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빛의 파면을 자유롭게 담아낸 입체파 화가의 놀라운 작품이라고 선생님께서는 설명하셨고, 이 작품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친구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장난삼아 우스꽝스럽게 그려놓아도 ‘피카소’라는 이름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했다.
“내가 발로 그려도 저 정도는 그리겠다.”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으니 이렇게 생각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훌륭한 화가의 그림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우리가 피카소를 만나서 “왜 이 따위로 그렸습니까?”, “나는 도대체 당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고 따질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잘 모르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면서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일을 보기에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고통과 시련을 왜 만들어서 사람을 힘들게 하시는지, 왜 내가 청하는 기도는 다 외면받고 있는 것인지, 전지전능하시면 나 하나 부자 만들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그래서 계속해서 불평불만입니다.
“왜 이따위로 세상을 끌고 가십니까? 나는 당신의 그 모습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런 불평불만이 과연 맞을까요? 완벽하지도 않고 전지전능하지도 않기에 우리는 함부로 주님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고 계신다는 굳은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묵상과 기도로 또 그밖에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은 불평불만보다는 감사의 기도를 더 많이 바칩니다. 주님을 아는 자기 수준이 높아져서 주님을 이해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면 이천 걸음을 가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힘든 일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우리 수준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주님도 모욕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하느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직 수준이 낮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나의 수준은 어떤가요? 완전한 하느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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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미소를 지어 준 것뿐이지만, 그 미소는 밤을 산산이 흩어지게 하고 그날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날로 만들어 주었다(스콧 피츠제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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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연중 제 7주일. 키엣 대주교님.
복수의 미덕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연 어떤 사람이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입니까? 사람들은 보통 성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인은 세상 일에 초월하고 기도만하는 수행자라고 생각하기에 존경은 하지만 나는 성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선인과 악인, 의인을 구별하지 않고 그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유덕하고 거룩한 사람은 미움을 품지 않고 항상 사랑 가운데 사는 사람이며, 나와 가까운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거룩한 사람들을 배척하는 사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서로 배척하며 편을 가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 신분에 따라, 이념에 따라 서로를 구분짓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항하며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아이의 싸움이 가족의 싸움이 되고 한 마디 욕을 하면 다른 사람은 두세마디의 욕으로 갚아줘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시리아 내전, 21세기 가장 큰 지진이라는 참혹한 불행 앞에서도 이념으로 갈라 선 세계, 그들의 세계에는 성인은 없습니다. 세상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갈등과 분쟁,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갈등을 악화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과 분쟁을 끝내고 증오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사랑’뿐입니다. 적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복수의 미덕’만이 증오를 중화시키고 갈등을 종식시킬 것입니다. 갈등은 한쪽이 패해서 피하거나 양보할 때만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는다는 것’은 약해서, 패배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카톨릭 신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비난과 저주를 받으면서도 왜 복수하지 않죠?” 그러자 신자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아요. 그들이 혀가 있다면 우리도 혀가 있기에 그들이 욕하면 우리도 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때리면 우리도 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한다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받은데로 돌려준다고해서 갈등과 증오가 해결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비록 피해를 입어도 참는다면 저희가 사는 이 작은 세상만큼은 미움을 해소하고, 정의의 덕목을 밝히고 작은 평화를 이루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에 합당하도록 당신이 원하시는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2. 증오심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편안했습니까? 아니면 불안해서 안절 부절하고 후회스러웠습니까?
3. ‘완벽한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우리는 보통 사소하고 작은 일에 서운해하고 화를 내곤합니다. 하루에 한번, 사소한 일부터 참고, 상대방을 용서해주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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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연중 제 7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소망이자 우리의 평생과제
-성인聖人이 되는 것-
“사랑밖엔 길이 없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밤12시 30분쯤 일어나 보니 방금 보낸 감동적인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톡에 적힌 시간을 보니 제가 일어나는 시간에 이 형제는 하루의 일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서 보낸 메시지입니다.
-“하루의 병원 진료 끝내고, 오후 교구 신부님이 집에서 돌보고 계신 파킨슨에 알츠하이머 앓고 있는 어머님 잇몸 체크(핸드 스케일링) 해 드리고 왔어요. 원룸 오피스텔 환자용 침대에 누워 계세요. 벌써 몇 년 되셨는데 2년전부터 급격히 악화되셔서 힘든 간병을 하고 계시죠. 어머님에 대한 사랑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극진하신 분입니다.
내일 주일은 여주 라파엘의 집이 진료가요. 주말과 주일에도 하느님께서 주신 저의 달란트를 누군가를 위해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네요. 이제 신부님은 기상할 시간에 저는 오늘을 마감하며,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서야할 내일 진료를 위해 잠들려 합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수행자요 구도자처럼 성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어느 치과의사의 일화입니다. 이분이 보낸 어제 메시지도 잊지 못합니다.
-“저도 개원하고 27-8년 동안 넘도록 제대로 휴가를 간적이 없네요. 오래 전 여름 휴가 시즌에 진료차 오셨던 젊은 수사님 두분이 ‘원장님은 휴가 안가세요?’ 라고 묻기에 제가 ‘천국에서 세상으로 휴가를 왔는데 무슨 휴가를 또 갑니까?’라고 했더니 무척 놀라는 표정을 짓더군요. 사실 그때는 약간 놀리노라 그랬는데...”-
천국에서 세상으로 휴가 나온 삶이라 하니 진리같은 유머가 참 기발하고 놀랍습니다. 문득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 시가 생각납니다. 읽을 때 마다 늘 새롭고 좋아 다시 인용하여 나눕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성인들처럼 아름다운 세상 살라고 천국에서 세상 휴가 나온, 소풍 나온 우리들입니다. 과연 세상 휴가 끝내는 날,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겠는지요. 각자 성인이 되라고 불림 받은 우리들이요 세상에 파견된 우리들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각자 고유의 참나의 성인입니다.
그러니 이런 성인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각자의 거룩한 의무요 책임이요 권리입니다. 참행복도 참기쁨도 참자유도 참평화도 성인이 될 때 있습니다. 그래서 믿은 이들 삶의 여정은 날로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어 가는 하닮의 여정, 또는 날로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 되어 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성인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이유에 의미요 보람입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주님의 신뢰와 기대는 얼마나 간절하고 원대한지요! 우리만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사람, 모세를 통해, 또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속내를 드러내신 하느님이십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이자 우리의 평생과제는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요 한마디로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19,2)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6,36).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소망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참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평생과제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자비로운 사람이 즉 성인이 되는 것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이요 현실적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시며,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하며, 동포에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지 말라 하시며 결정적 결론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이다” 도장을 찍듯한 말씀이 이웃 사랑이 주님의 명령임을 확실히 드러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성인입니다.
은총과 더불어 평생 분투의 노력과 훈련을 다해야 하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새삼스레 깨닫는 사실은 사랑 역시 항구하고 한결같은 훈련이란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속내도 똑같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로 포문을 열 듯 구체적 사랑 실천을 명령하시는 주님이십니다.
1.“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져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천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사랑이요 악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비겁한 무저항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으로 무장한 적극적 사랑의 저항입니다. 참으로 내적으로 강한 용기 있는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영웅적 사랑의 실천 역시 의식적 훈련입니다.
2.“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이런 공평무사하신, 대자대비하신 주님을 닮아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성인이, 참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좋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좋아하기는 힘들어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싫어도 하느님을 닮은 마음은 연민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내 눈에 원수와 박해자이지 그만의 고통도 클 것이며 하느님만이 아시는 그만의 까닭이 있을 것이기에 깊은 연민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말씀이 우리의 말문을 완전 닫아 버립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들도 한다.”
바로 이것이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우리들의 의로움입니다. 동문이나 동호회 사랑같은 유유상종의 끼리끼리 사랑을 완전히 넘어서라는 주님의 참 강력한 말씀입니다. 이래야 편애와 차별이 없는 완전한 사랑, 완전한 의로움, 보편적 사랑, 깨어 있는 사랑, 용기있는 사랑, 부단한 자기초월의 사랑입니다. 이 또한 의식적 훈련의 사랑이겠습니다.
이런 사랑 실천의 자리는 바로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공동체는 하느님의 성전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 공동체에 속한 사람 하나하나의 형제자매들이니 이들을 소중히 여겨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중 하나라도 파괴하거나 다치게 하는 자는 본의 아니게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거나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그리스도 중심,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임을 환기시킵니다.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이요 공동체의 중심인 그리스도께, 하느님께 날로 깊이 뿌리 내려가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샘인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사랑이 밑빠진 독에 물붓듯 끊임없는 아가페 사랑의 실천을 가능하게 합니다. 참으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거룩한 성전 공동체로 날로 성장 성숙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 날로 당신 사랑을 닮아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즉 아름다운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시편10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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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연중 제 7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늘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사랑하여라.’입니다. 특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마음에 그리고 머리에 새겨 넣었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우리는 ‘사랑하여라.’라는 말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말인지도 세상살이 안에서 알게 됩니다.
여러 해 전 한 자매님과 신앙적인 상담을 했습니다. 그 자매님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기형이 있었습니다. 한쪽 귀가 다른 쪽 귀에 비해 작았고 오그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학창 시절 작은 귀 때문에 많은 놀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놀림과 이상하게 보는 시선은 그 자매님을 더욱 작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저와 이야기하는 중간에는 그분은 자기 머리카락으로 귀를 연신 가렸습니다. 보일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그 귀 때문에 예쁜 귀걸이도 한번 못 해봤다고 하셨습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원수는 누구일까요? 물론 놀림과 따돌림 그리고 수많은 눈빛이 원수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상처와 아픔은 시작됐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원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말들에 작아져 버린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시간과 공을 들여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그런 아픔 속에서 살아온 그 자매님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몇 달이나 지났을까요? 그분은 제 앞에 예쁜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작아진 내면이 치유되었고 그분을 놀림감으로 만들었던 많은 사람도 그 순간 용서받았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온전한 모양으로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그 쓰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왜 배가 고플까요? 배가 안 고프면 얼마나 편할까요? 중간마다 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배가 안 고프면 안 먹어도 된다는 뜻이고 그럼 화장실도 안 가도 될 텐데요.
배고픈 이유는 음식이 필요하다는 신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음식에서 기쁨을 맛보기도 합니다. 맛있는 것을 맛보는 즐거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땀은 왜 날까요? 그것 역시 필요해서입니다. 땀으로 우리는 체온을 유지합니다. 특히 체온이 상승할 때 우리는 땀을 흘립니다. 왜냐하면 너무 놓은 체온은 우리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다는 모르지만 땀을 흘리는 다른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눈물은 왜 날까요? 아이들은 눈물을 아주 잘 흘립니다. 슬프거나, 서럽거나, 배고프거나, 아프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눈물을 참습니다. 안 아픈 척, 괜찮은 척합니다.
하느님께서 눈물을 흘리도록 우리를 만들어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실컷 울고 나면 무엇인가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픔으로 가슴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실컷 울어보신 적이 언제이십니까? 눈치 보지 않고 울어본 적이 언제이십니까?
기회가 된다면 울어보세요. 눈물을 흘려보세요. 그 안에도 하느님의 선물이 숨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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