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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자들을 보호하려는 롯
창 19:1-11
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2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1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창 19:1-11 / [썩어 빠진 소돔 사람들] 저녁 나절에 하나님의 두 심부름꾼이 소돔에 이르렀다.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하였다. 롯은 그들 앞에 엎드려 절하고는 2) 이렇게 여쭈었다. `어르신들, 괜찮으시다면 소인의 집에 들렀다 가시지요. 발도 좀 씻으시고 밤을 지내셨다가 아침에 길을 떠나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웬만하시면 그리하시지요' `고맙소만 우리는 그냥 길거리에서 밤을 지내야겠소. 걱정 마시오' 하고 그들이 대답하였다. 3) 롯이 계속해서 쉬었다 가시라 권하며 잡아 끌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롯의 집으로 들어갔다. 롯이 종들에게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굽는 등 저녁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저녁이 준비되자 그들은 저녁을 들었다. 4) 그런데 두 사람이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돔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이건 적게 든 사람이건 할 것없이 모두 몰려와 롯의 집을 둘러싸고 문을 두드리며 난리를 피웠다. 5) 소돔 사람들은 롯을 불러내어 시비하였다. `이봐, 자네 집에서 오늘 밤 묵는 사람들이 대체 누구야? 어디서 온 사람들이야? 이리 좀 끌어내. 손 좀 봐줘야겠어' 소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부름꾼을 끌어내라고 한 까닭은 그들을 성폭행하려는 심산에서였다. 6) 그러자 롯이 밖으로 나가 등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는 7) 성 사람들에게 애원하였다. `이것들 보시오. 내 말 좀 제발 들어보시오. 저분들은 우리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오. 그러니 제발 그러지들 마시오. 그렇게 못된 짓을 하려고는 하지 마시오. 아무나 붙들고 그러려고 하다니 될 말이오? 8) 대신 우리 집에는 아직도 남자를 모르는 딸아이가 둘이 있소.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데리고 나올 터이니 당신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우리 집에 찾아온 이 손님들에게만은 제발 손대지 마시오. 우리 집 손님이니 내가 잘 보살펴 드려야할 것 아니오' 9) 그러나 성 사람들은 막무가내였다. `당신은 상관 말아. 아니 그래 우리 땅에 들어와 몸붙여 사는 주제에 이제는 우리더러 이래라 저래라 명령까지 다 하는군 그래. 만약 우리가 하는 일을 막았다가는 저치들보다 당신을 아주 우습게 만들어 버리겠어. 당장 물러서!' 소돔 사람들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롯을 밀치고 롯의 집 대문을 부숴뜨리려고 하였다. 10) 그러자 집안에 있던 두 사람이 롯을 잡아당겨 집안으로 끌어들이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11) 그러고는 문밖에 서 있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러자 문밖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아무리 롯의 집 대문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두리번거리면서 집을 빙빙 돌뿐이었다.
소돔 땅에 하나님의 두 천사가 도착합니다. 롯은 하나님의 두 천사를 영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법을 다하여 하나님의 두 천사를 보호합니다.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1-3) 우리의 신앙은 신앙의 대상을 분명히 아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본문은 저녁 때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중근동 지역은 기후적인 영향으로 해가 중천에 있는 낮보다는 밤에 사람들이 모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두움은 인간의 이성은 감추고 동물적인 본성을 드러내기에도 좋은 시간인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자 하나님의 두 천사가 온 것입니다. 소돔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은 풍습에 따라 하나님의 두 천사를 영접하게 됩니다. 그의 삼촌이었던 아브라함과 비교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아브라함(18:3)과 롯(19:2)이 동일하게 내 주여라고 영접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주여(Lord)라고 부르면서 세 사람 모두에 대하여서 단수형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롯은 그저 하나님의 두 천사인 나그네에게 선생들(lord)로 불렀습니다. 이는 영적 깊이의 차이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에게 발을 씻기고, 고운 가루와 좋은 송아지로 대접하는데, 반면에 롯은 평범하게 무교병으로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다(4-11) 여기서 성경의 관심은 구원 받을 몇 사람이 멸망당할 한 성읍보다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지금까지 소돔성은 롯이 지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가장 약자인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와 자식 없는 늙은이와 이방인이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의 눈에는 그 약자인 사람들은 성적 쾌락의 대상일 뿐입니다. 소돔성의 만연한 부패를 보여줍니다. 이는 예부터 이스라엘에게 내려오던 손님의 권리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동성 간의 동침에 관한 법(레 18:22)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롯은 어리석은 제안을 합니다. 이방인을 보호하고자 자신의 두 딸을 넘겨줍니다. 이것은 죄로 죄를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두 천사가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 롯과 그의 가정을 지켜줍니다. 결과적으로 롯은 하나님의 언약에 이르지 못했고 그와 그의 두 딸은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롯의 자손들은 약속의 땅의 경계에 살았고,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축복의 언저리에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적용: 세상(악, 죄, 세속, 사탄)과의 타협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교회의 일을 이루고자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한 적이 없는지 되돌아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큰 부와 재물을 누리며 호사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그와 친해지려 하고, 그의 곁에 머물러 그에게 잘 보여서 작은 유익이라도 얻으려고 하지만, 그가 여호와 앞에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있건만(창 13:13), 온갖 연줄과 인맥을 동원하여 그 사람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며, 그것이 이뤄지면 마치 일생의 꿈을 이룬 것처럼 기뻐합니다. 그 사람의 큰 재물과 부유함만이 보일 뿐, 그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라는 사실은 관심조차 없습니다.
< 설 교 >
하나님이 없는 사회
세월이 바뀌어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도 빨리 변하기 때문에 도무지 따라 잡을 수가 없습니다. 50대 이상은 농경문화에서 태어나서 공업화사회를 휙 지나서 지금은 정보화 사회, 혹은 인터넷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다 같은 젊은이가 아닙니다. 30대가 다르고 20대가 다르며 10대가 다릅니다. 심지어 쌍둥이도 세대 차를 느낀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30대는 공업화시대에 태어나서 정보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10대는 정보화 사회, 컴퓨터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요즘 초등학생들은 컴퓨터와 게임기를 아주 쉽게 손에 익히고 사용하는 세대들입니다.
세월이 바뀌고 사회문명이 바뀌니까 사람도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었고 삶의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젊은이와 기성세대는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기성세대는 머리로 생각을 하고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먼저 생각하는데, 젊은 세대는 느낌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옳고 그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 좋게 다가오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세대차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우리나라가 가장 심각하답니다. 같은 대한민국 사람인데도 나이가 다르면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 다른 문화권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타국에 선교사를 보내는 심정으로 우리 젊은이들에게 선교사를 보내야 할 상황입니다. 그중에서 특히 심각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의 세대가 하나님을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땅을 파고 씨앗을 심고 뿌려 그것을 가꾸며 살았습니다. 씨를 뿌리고 나면 그것이 싹이 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씨앗이 싹이 나게 하는데 농부가 할 역할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따스한 날씨와 비를 주셔서 싹이 나게 하시기를 기다려야 했고 그래서 하늘을 봐야만 했습니다. 곡식이 자라는 데에도 날씨가 좋아야만 잘 자라며, 이삭이 팰 때에도 바람이 불지 않아야 쭉정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을 날씨가 좋아야 곡식이 많이 생산됩니다. 때문에, 농부는 일년 내내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늘을 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무식한 사람도 세상을 움직이고 생명을 살리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알고 살았습니다. 젊은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는데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임신이 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신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사람들은 하늘을 볼 기회도 없거니와 하늘을 봐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신문이 와 있고, 거기에 일기예보가 나오니 하늘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수입된 농산물이 시장마다 넘쳐나니 하나님이 음식을 주신다는 생각은 옛날에 이미 잊었습니다. 농부들도 비닐하우스를 지어놓고 겨울도 따뜻하게 해서 농사를 짓고 물이 없으면 지하수를 퍼내어 주면되니까, 하늘을 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젊은이가 아이를 기다리다가 임신이 되지 않으면 병원에 가서 체외수정을 해서 얻을 수도 있고 요즈음에는 나와 똑같은 아이를 복제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점점 필요 없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부모가 교회가라고 하면, 저더러 죽을 데 가라는 것처럼 극구 싫어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하나님을 밀어놓고 사는 시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 없는 사회의 모습을 한번 들여다봅시다.
어떤 특징이 있고 어떤 결말이 보게 되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합니다.
1. 헛된 일로 분주합니다(4)
본문에 보면 소돔성 사람들이 밤중에 롯의 집으로 몰려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천사를 알아보고 자기들의 장래문제를 도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남에 집에 온 손님을 만나겠다고 밤중에 그 야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본질적인 것이 아닌 엉뚱하고 헛된 일에 사람들이 관심이 집중되고 거기에만 몰두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속에서 솟아오르는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해서 뭔가를 찾을까 해서 헛된 일에 분주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관광과 레저에 몰두합니다. TV를 켜면, 여행에 관한 정보가 쏟아져 나옵니다. 세계 오지란 오지는 다 뒤져서, 여기 이런 것도 있다고 정보를 줍니다. 1월 1일이면 해돋이 구경한다고 동해안으로 우르르 몰리고, 어디 구경거리가 있다 하면 우르르 몰려갑니다. 지난해 팔린 신차 중에 RV라고 하는 차들이 40%이상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Recreation Vehicle은 찝차 형 차량들을 말하는데, 놀러다는데 편리한 차량을 말합니다. 관광, 피서, 가을단풍구경, 게다가 이제 주 5일제가 실시되기 때문에 한주간의 일도 주말에 놀러가기 위해 일하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관광에는 시골사람들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시골사람들도 관광 계에 들어서 일년에 한 두 차례씩은 명승지로 해외로 나들이를 떠납니다. 게다가 각종 프로 스포츠가 연중 열리고 있는데 야구, 농구, 올림픽, 월드컵 축구경기, PGA 골프대회, 윔블던 테니스대회 등 많은 스포츠가 구경거리에 목마른 사람들을 위하여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제 놀러가기 위해서 일할 정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먹는 문제입니다. 사람이 먹어야 살지만 먹는 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한국은 먹자판 문화가 너무 거셉니다. 모처럼 휴식을 위해 관광지나 휴가지에 가면 모두가 먹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장소가 어디건 간에 바리바리 싸가지고 가서 우선 먹는 것부터 집중합니다. 어디에 무슨 특별한 음식이 있다 하면 그것을 먹기 위해 백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무슨 음식이 몸에 좋다하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도 믿고 사먹습니다. 생기는 것은 음식점이고 식당과 여관과 술집의 종업원이 돈을 하도 잘 버니까 직장도 사표내고 서비스업으로 이직하여 생산직 인력난이 심각해졌습니다.
이것저것 좋다는 것 다 먹어보아도 별것 아니자, 이제는 다 질려서 꽁보리밥이나 칼국수가 인기 있는 메뉴가 되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없어 내일은 또 다른 메뉴를 찾게 됩니다.
술은 얼마나 많이 마시는지, 술로 젊음을 망치고 술로 가정을 망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최고급 위스키와 포도주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가 되었답니다. 술로 마시고 담배로 날려 버린 것들을 아껴서 교육을 위해 투자하고 연구에 투자하고 봉사에 사용한다면 훨씬 멋진 일을 해 낼 수 있을 텐데, 먹어버리느라고 정작 해야 할 일을 망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고 탄식하였는데, 오늘 이 시대에 적합한 지적의 말씀입니다.
헛된 일에 분주한 일중에 또 하나가 목욕입니다. 서울이고 지방이고 목욕탕이 대형화되고 호화판 되다가 못해 이제 찜질방 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찜질방에 가서 하루 종일 보내며 땀을 흘리고 나서 출출해지면, 이제는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을 합니다. 호화판 목욕탕들이 하도 많아서, 정말 몸을 씻는 동네 목욕탕은 장사가 안 됩니다. 시골에도 서울보다 더 호화판인 목욕탕들이 줄을 이어 생겨납니다.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이 저 로마제국처럼, 목욕탕 문화 때문에 망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이 헛된 일을 위해서 바쁘고 헛된 일을 위해 분주합니다. 대학생은 공부하는 것 보다 술 마시고 미팅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정치인은 국민들이 편하게 일하고 살아갈 수 있는 정책을 만들고 법을 만들기보다 정권욕에 매여서 매일같이 정치싸움이나 하고 있고,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이기보다 새 정권의 눈치나 보면서 자기부서 이익 챙기는데 바쁘게 움직입니다.
시39:6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들은 지금 허망한 짓을 하고 있다. 이들이 정말 허망한 일에 바쁘다, 바쁘게 돌아다니며 돈을 벌고 권력을 잡으려 하지만 그것을 장차 누가 가질지는 아무도 모르며 그것을 가졌다 해도 그 나중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고백하여야 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소망은 오직 주께 있나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다.
2.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5)
소돔성의 사람들이 왜 밤중에 롯의 집에 몰려왔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이 손님을 극진히 접대하는 것 같이 롯도 손님 접대의 예절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거절하면서 "거리에서 하룻밤을 묵겠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간청하여 겨우 그분들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롯이 그분들을 위해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있을 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5)
본문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죄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적으로 몹시 타락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젊은이 노인 할것 없이, 소돔 성의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상대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말을 직역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알게 하라" 라는 말입니다. 알다 라는 히브리어 "야다"는 성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표현중 하나입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창 4:1)에서 "동침하매"라는 말도 "야다"입니다. 즉, 소돔의 남자들이 그 나그네들을 상대로 성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손님들을 붙잡아서 억지로 동성애를 벌이겠다고 야단이었던 것입니다.
남자들끼리의 동성애를 지칭하는 말이 소도미(Sodomy) 인데, ‘소돔’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다 못한 롯이, "나에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딸 둘이 있으니 그를 줄 테니 손님들에게는 악한 짓을 행하지 말라"고 까지 했으나 그들은 막무가 내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소돔 성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죄를 죄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회는 인간이 가장 높은 줄로 알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의 지식, 인간의 과학, 법률, 문화, 그것이 절대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옿은 줄로 생각할 뿐이지 절대적인 가치가 있어서 그것에 맞으면 옳고 그것에 맞지 않으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남들이 하면 나도 해도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없는 사회의 맹점입니다. 아무리 나쁜 일이라 할지라도 남들이 다 하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가 얼마나 수치스럽고 더러운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고 모두가 따라했습니다. 남들이 다 하니까 좋은 것 아니냐는 판단이 없는 시대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리수라는 사람이 남자로 태어났는데 여자가 되고 싶어서 성전환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꽤 예쁜 여자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게 정상입니까? 그는 정신이 비정상적인 환자이고 하나님의 정하신 법도를 어긴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스타라고 여기고 있으며 2002년도의 최고의 여성으로 뽑혔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사회도 점점 기준이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회는 사람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게 되어있고 사람이 절대화 될 때 형편없는 죄에 빠져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사람이 주인이 된 사회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옳다고 여기게 되어있고, 많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도 옳은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회는 자연히 타락할 수밖에 없고 음란해질 수밖에 없고, 포악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공산주의가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인민재판이라는 다수라는 무기로 반대하는 입을 막아버리고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생각으로 지주, 자본가를 없애버리고 공동 분배하는 사회를 만들면 행복하리라는 왜곡된 생각으로 수천만을 죽였고, 동정심이 없고 진실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도 끝내 망하고 말았으며, 역사를 크게 후퇴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회는 악한 길로 가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없애버린 사회는 결국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김 두환 드라마가 인기절정인 것도 심각한 사회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야인시대를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의리도 원칙도 없는 우리 사회나 정치권을 보면서, 주먹 한방으로 형님 동생이 정해지고, 싸움에서 지면 그대로 굴복하고 형님으로 모시는 그런 깡패의 세계가 오늘의 추잡한 정치권보다 훨씬 멋지고 사내답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게다가 독립군 대장이었던 김 좌진 장군의 아들이, 일본에 대항하여 종로를 지키겠다고 나섰으니 김 두환이가 정말 멋지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드라마는 실제보다 훨씬 더 멋지고 극적으로 꾸민 것이기 때문에, 드라마에 빠지면 큰 일납니다.
지난해인가부터 ‘친구’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등 조폭 영화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요즘의 TV드라마도 걸핏하면 주먹질 장면들뿐입니다. 바야흐로 조폭 문화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폭력을 우상시하고 있습니다. 학교에도 폭력서클이 있고, 고등학생들 중에 깡패가 되는 것이 희망인 아이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사회가 그쪽으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거기에 동류가 되지 않고 순하게 사는 사람들은 이제 병신취급 당할 것이고, 폭력이 죄라는 생각은 이제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그러니까 그건 괜찮다 이것이 사회가 타락하는 방식입니다. 야인시대가 인기를 얻을수록 그래서 걱정이 됩니다.
근래에 들어서 우리 사회가 하나님을 더 멀리 밀어내고 있습니다. 정부가 앞장서서 우상숭배나 조장하고 미신풍습을 전통예술 이라는 이름으로 부추기며 복권이라는 이름으로 도박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 정부아래서 사는 시민들을 보십시오! 한달에 단 100여 만 원을 버는 사람이 카드를 발급받아서 한번에 수 십 만원을 써 버리고, 그것을 갚기 위해 강도짓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달월급은 백 여 만원인데, 하룻밤 술값은 적어서 수십 만 원이고 많으면 백만 원도 넘는답니다. 뭔가 죄를 짓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규모 없는 생활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결국 범죄와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밀어내면 옳고 그름을 분별 못하게 되고, 허무와 죄악과 멸망이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3. 의로운 사람들을 박해합니다(9)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이놈이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 도다." 손님을 상대하겠다고 덤벼드는 소돔 성 남자들을 자기 한 몸으로 막아보려고 몸부림치는 롯에게 그네들이 한 말입니다. 네놈이 뭐냐? 네가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 썩 물러서라는 겁니다.
오늘의 시대는 하나님을 밀어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가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하고, 어리비리 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수가 찬성하면, 그게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착하고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평가하며 틀렸다고 밀쳐냅니다. 그리고 적당히 죄를 지으며 요령 있게 사는 사람을 지혜 있다고 칭찬합니다. 착한 사람들은 왕따 당하고 의인은 버림을 당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등진 사회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부정, 비리, 불법이 늘고 있으며 악한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은 생각해 낸다는 것이 악이요, 열심히 한다는 것이 허망한 일 뿐입니다. 그들은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도 모릅니다. 남들이 하면 다 옳은 일인 줄 압니다. 다수가 하는 일이면 정당화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존재합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의 말씀만이 인간의 삶과 진리의 기준입니다. 천 만 명이 부르짖어도 바다가 산이 되지 않고,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우겨도 물이 50도에서 끓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위해서 자연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삶의 원리와 원칙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기준과 그들의 기준, 우리들의 행동원리와 그들의 원리, 우리들의 목표와 그들의 목표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다 눈을 감아 버리고 하나님을 외면할 지라도 우리는 눈만 뜨면 보이는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아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지키며 살아가야 할 진리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 그 말씀이 원칙이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 삶이요 내게 복이 되며, 말씀을 떠나는 것이 악이요, 멸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인도해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살수록, 사명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하나님이 없는 사회에서도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갑시다.
하나의 말씀만 기준으로 삼아 살아갑시다. 그리고 이런 삶을 자녀와 이웃에게 가르치고 보여주며 살아가는 성도, 어두운 사회에 밝은 등대가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