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턴이 없는 삶(2)
룻1:6~14
위 그림에서 엘리멜렉의 발자취를 보자.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서 출발하여 모압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죽었다. 방향을 잘 못 잡은 것이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이 죽자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 유턴한 삶이다.
맏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모압으로 돌아갔다. 역시 유턴한 삶이다.
오르바는 처음에는 방향을 잘 잡았는데 왜 중도에서 유턴했을까? 시어머니는 늙었고 빈털터리가 아니던가. 따라가봤자 고생길이 훤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친정으로 돌아가면 집이 있고, 부모님이 있고, 형제와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불확실한’ 시어머니(베들레헴)보다는 ‘확실한’ 친정(모압)을 선택했다. 현실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믿는 사람도, 목사도 대부분 그렇게 선택한다.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목사들이 귀신을 섬기는 신사에 고개를 숙였던 것이 그렇다. 룻의 발자취는 16절에 나온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룻의 발자취는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직진했다. 그녀의 삶과 신앙에는 유턴이란 것이 없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맏며느리 오르바의 반응이 14절에 나온다.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작별 인사를 했다는 뜻이다. 오르바는 시어머니가 돌아가라고 했을 때 “이게 웬 떡이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얼른 작별 키스를 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룻의 결정은 16절~17절에 나온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요즘 며느리들은 “나를 따르라”고 하는 시어머니를 싫어한다. 그 대신 간섭하지 않는 시어머니를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룻은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하나님께서 내게 천벌을 내리셔도 좋다”고 말했다. 이 말 한마디가 시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을까? 이 감동은 훗날 나오미가 룻에게 최선을 다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큰 감동은 사람을 충분히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절下)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감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