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70
10월6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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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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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보다 큰 기도, 보다 성숙한 기도, 보다 한 차원 높은 기도를 바칩시다!>
청원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깊이 있게 묵상하고, 그 진의(眞意)를 명확하게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무작정 글자 그대로 믿고 죽기 살기로 청원 기도에만 전념한 많은 사람이 얼마나 큰 실망과 좌절을 맛보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청원 기도와 관련된 예수님의 권고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떼쓰고 어거지 쓰고, 떼써봤지만, 아무런 기도의 응답이나 효험도 없이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아버지께 간절히 청한 것은 시시한 것, 가벼운 것, 들어주셔도 좋고 안 들어주셔도 좋은 그런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 처지에서 볼 때 정말 중요한 것들, 때로 살고 죽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잠까지 설쳐가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간절히 매달렸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사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끝까지 붙들어보려던 관계는 파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깊은 신뢰심을 갖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매달렸으며, 청하여라, 주실 것이라는 청원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목숨을 다해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무자비하다 못해 참담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다며, 하느님이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시다며 어찌 이리 끔찍한 현실에 맞닥트리게 하시는지, 정말이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의도는 사실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기적의 요술방망이를 지닌 마술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지닌 끝도 없는 이기적 욕구들을 끝없이 채워주시는 해결사도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청하는 참으로 사소한 바람도 즐겨 들어주시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그릇들 더 크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신앙을 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우리의 한도 끝도 없는 이기적인 기도들을 들어 주지 않으십니다.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아들이 청하는 것이 위험하고 해로운 것, 죽음으로 가는 길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간절히 청할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인 성령을 청할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사실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안에 벌어지는 모든 희로애락, 흥망성쇠를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공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실패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건강과 젊음에 행복해하지만 언젠가 주실 병고와 죽음도 기꺼이 수용합니다.
오늘 내가 진정으로 청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기도의 대상이 너무 허무맹랑하거나 얼토당토않은 것, 이 지상에서 불가능한 것이라면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보다는 불완전한 이 지상에 완전하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더 큰 선을 위해, 더 아름다운 세상의 건설을 위해, 더 참된 가치의 추구와 실현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이타적인 삶, 좀 더 내어주는 삶, 좀 더 인내하며 함께 가는 삶을 살도록 청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보다 큰 기도, 보다 성숙한 기도, 보다 한 차원 높은 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덤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는 수많은 작은 청들도 곁들여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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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fVvi_DkT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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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이것’이 없으면 ‘성령’도 없는 것>
영화 ‘케빈에 대하여 ’(2012)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에바는 자유로운 여행가입니다. 그러다 프랭클린을 만나 아이를 갖게 됩니다. 아직 아이를 원치 않았던 에바는 태어날 아이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에바는 케빈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케빈은 엄마의 감정을 봅니다. 케빈은 엄마의 마음을 계속 아프게 합니다. 엄마는 결국 자신 안에 있던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맙니다.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엄마의 감정을 먹지 못했던 케빈은 성장하면서 계속 타인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되어갑니다. 어느 날 가정에 너무도 소홀한 프랭클린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에바와 이혼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케빈은 엄마를 놓아줄 마음이 없습니다. 케빈은 자신의 아버지 프랭클린과 여동생 실리아를 활로 쏴 죽인 후 학교 체육관의 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활로 학교 친구들을 대량 살해하고 체포됩니다.
재판 동안 에바는 모든 재산을 뺏기고 폐인처럼 생활합니다. 과거 사건을 아는 남자에게 협박당하기도 하고 피해자 유족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2년이 지나 케빈의 나이가 18세가 가까워져 소년교도소에서 성인 교도소로 이송될 케빈을 만나게 됩니다. 에바는 케빈에게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묻습니다.
“왜 그랬니?”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르겠어.”
에바는 원하지 않게 어머니가 되었지만, 케빈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주지 못했습니다. “감정!”
사랑은 감정입니다. 격리 원숭이가 젖병을 단 차가운 철사 원숭이보다는 젖병이 없어도 수건이 감긴 원숭이 모형을 어미로 여긴 것과 같습니다. 젖을 주는 일은 희생입니다. 하지만 새끼는 따듯한 감정을 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친구가 밤에 찾아와 빵 세 개만 꾸어달라고 친구를 괴롭힙니다. 그 빵 세 덩이는 세속-육신-마귀가 죽는 것을 통해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좋은 감정은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질 때, 육체에 대한 욕망이 사라질 때, 교만이 꺾일 때 생겨납니다. 에바는 아이에게 무언가는 주고 싶은데 세속-육신-마귀를 꺾을 무언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무언가를 우리는 “성령”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는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와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것은 “사랑, 기쁨, 평화”(갈라 5,22)의 열매를 맺는 성령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상대에게 희생해도 상대는 내가 사랑한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 기분을 좋게 만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내가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할 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원인인 삼구를 없애시고 좋은 감정이 생겨나게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친구에게 줄 빵 세 덩이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가 아버지에게 한 이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듯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자녀들은 부모의 따듯하고 다정한 감정을 원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차갑게 젖병만 물려주며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감정 없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그 대가는 부모와 함께 치러야 합니다.
배우자를 만나고 자녀를 만나고 친구를 만날 때 내가 건네줄 따듯한 빵 세 개가 준비되었는지 살펴봅시다. 다정할 수 없다면 안 만나는 편이 좋습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그 감정은 성령에 의해 생깁니다. 성령은 우리가 기도할 때 오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람을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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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영화 ‘반지의 제왕’이 있습니다. 영화는 3부작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편은 ‘반지원정대’ 2편은 ‘두개의 탑’ 3편은 ‘왕의 귀환’입니다. 이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과 주제가 비슷합니다. 영신수련의 주제는 ‘하느님의 영광’, ‘두 개의 깃발’,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절대반지를 향한 주인공 ‘호빗’의 긴 여정입니다. 영신수련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절대반지는 ‘성공, 명예, 권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헌신, 겸손, 나눔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의 탑을 멀리하고 선의 탑을 선택해야 합니다. 인생은 선과 악의 대결입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악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왕의 귀환으로 결국 선이 승리합니다.
신앙의 여정도 그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처절한 실패이고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났습니다. 원망에서 감사함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선택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선택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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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5-13: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한밤중에 온 식구와 잠자리에 든 벗을 깨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잠자리에 든 친구는 친구의 끈질긴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깨워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는가?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벗(요한 15,13 참조)이시기 때문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하신다. 여기서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든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히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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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 청하였으나 받지 못한 경험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 탓을 돌리다가 ‘그럼 나는 주님께 전적인 신뢰를 드리며 청하였던가?’ 하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오늘 복음은 청하는 자와 청을 들어주는 자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한밤중에 빵 세 개가 필요하였던 사람은 아무나 무턱대고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것을 꾸어 줄 만한 친분이 있는 벗에게 찾아갑니다. 바라는 것을 얻어내고자 영리한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한밤중에 자고 있던 그 벗은 귀찮기도 하고 이미 잠든 식구들을 깨우기가 곤란하다며 거절하지만, 친구의 청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계속 졸라 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친구 사이였고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줄곧 졸라 대다’로 번역된 그리스 말 ‘아나이데이아’는 ‘뻔뻔스러움’ 또는 ‘부끄러운 줄 모름’을 뜻합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친구끼리라면 조금 염치없이 뻔뻔하게 굴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서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누구에게 청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신뢰 관계는 친구 사이보다 어쩌면 부모 자식 사이에 더 끈끈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벗이 부탁하는 청도 거절하기 힘든데, 자녀들이 청하는 것을 아버지가 거절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자비를 신뢰합니다. 세상 어떤 아버지보다도 선하신 분,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사소한 청 하나도 허투루 흘려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 여정에 꼭 필요한 선물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우리의 영적 여정에 필요한 선물은 결국 성령의 은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그 좋은 것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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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예수님이 사시던 팔레스티나에는 일기가 한낮에는 뜨거우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오후 늦게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늘 복음(루카 11,5-13 )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 여행자도 바로 한낮의 더위를 피하면서 친구 집에 한밤중에서야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지방에서는 손님 대접을 잘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천사를 대하듯 했으며, 후하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것이 또한 그들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겼다.
그리고 그들의 식생활의 빵은 각 가정에서 구웠는데, 하루에 자기 식구들에게 넉넉할 만큼의 양만 굽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유는 구워서 시간이 지나면, 굳어져서 먹기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밤늦게 여행하는 손님을 맞이하게 되면, 주인은 당황하게 마련이다. 손님 대접은 잘해야겠는데, 구워 놓은 빵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은 깊었지만, 주인은 친구에게 빵을 빌리러 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의 집 문은 닫혀 있었다.
그 지방에서는 매우 불가피한 용무가 아닌 이상, 닫힌 문을 함부로 두드리지 않는다. 아침에 문을 열어 놓으면, 그 문은 온종일 열어 놓은 채로 놔두며, 만일 문이 닫혀 있다면, 그것은 주인이 다른 이에게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표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손님을 맞이한 사람은 한밤중에 문이 닫힌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빵을 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팔레스티나의 가난한 집의 집 구조라는 것은 창문 하나가 달린 방 하나에서, 땅위에 갈대와 골풀로 짠 매트리스를 깔고 그 위에서 자는 것이 보통이므로, 한 사람이 일어나면, 온 가족이 잠을 깨우게 되는 결과를 빚게 마련이었던 관계로 오늘 이야기에서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이미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줄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만 보더라도 생활 여건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친구의 문을 계속 두드리며 빵을 빌려 달라 했다는 것이며, 결국 얻었다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다.
이렇게 귀찮아서 마지못해서 하는 집주인이 그 친구의 염치없는 인내심에 억압되어서, 결국에는 그가 필요로 하는 빵을 내주게 되었다면, 하물며,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예수님의 일러 주심이다.
비록 사람은 부족하고 악할지라도 남에게는 몰라도 자기 자녀들이 필요로 해서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거늘, 하물며 아버지신 하느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어떠한 마음으로 우리의 요구에 응답하시겠느냐?! 그 인자를 의심치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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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하면 그분께서는 이에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분의 응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때와 방식이 아니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령 꼬마 아이가 자기 아빠에게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 아빠는 그 간청을 곧바로 들어주겠습니까?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컸을 때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뒷바라지하고, 그 뒤 자동차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에야 운전할 수 있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하여 적절한 때를 살펴보고 계시며, 심지어 그때까지 우리가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주십니다.
또 아이가 동네에서 친구들과 싸웠는데, 분을 이기지 못하여 엄마에게 달려가 그 친구를 혼내 달라고 청하면 엄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며 우선 화를 달래고, 무엇이 올바른지 차근차근 설명해 준 뒤에야 그 친구에게 가서 진정한 화해를 이끌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뱀을 달라는 기도라면, 그분께서는 생선으로 응답하시기 위해서 적절한 형태를 찾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침묵을 두고, 그분을 무능하게 보거나 선하지 못한 폭군으로 내몬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점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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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강정 시몬 신부님]
가끔 교우들의 방문을 받곤 합니다. 문제에 답이 없다며 애통해하는 이들에게 떠남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라며 토닥여 돌려보내곤 합니다. 인간사 모든 문제에 답을 갖고 계시는 하느님이시거늘, 때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실패란, 구하지 않고 찾지 않으며 두드리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구하지 않으면서 받기를 원했고, 찾지 않으면서 얻기를 바랐으며, 두드리지 않으면서 열리기만을 바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눈물을 거두고, 사람들 앞에서는 고통을 호소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입을 다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빌리기보다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구하는 자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으십니다. 문제를 들고 당신 앞에 나아온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한 가지를 찾는 자에게 열 가지를 덤으로 얹어주시고, 문을 두드리는 자마다 축복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항구한 기도, 이것이 바로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와 눈물을 헛되이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응답은 기도하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강점이자 하느님의 약점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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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하는 그대로>
루카 11,5-13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대 하는 그대로>
청하는 벗에게
주는 그대여,
청하시게나,
주실 것이니.
찾는 벗에게
얻게 하는 그대여,
찾으시게나,
얻을 것이니.
문을 두드리는 벗에게
여는 그대여,
문을 두드리시게나,
열릴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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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믿고, 하느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 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 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 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깎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것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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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눈앞이 캄캄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일이 잘되지 않을 때 사용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커다란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극장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야 어둠에 조금씩 적응할 수 있습니다. 눈의 조리개가 더 열리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꽤 많은 부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눈앞이 캄캄해지는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면서 잠시 눈을 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때가 바로 기도하는 시간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눈을 뜬다면 어떨까요? 그때 비로소 고통과 시련이 그렇게 크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쁘면 ‘기도할 시간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유가 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삶과 절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도끼질을 잘하기 위해 미리 도끼날을 가는 것처럼,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줘서 삶을 잘 살도록 해 줄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느님 나라를 여셨고 모든 사람을 교화시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고 하십니다. 마지막 날에는 당연히 악인과 선인을 가리는 심판이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이 나라 백성이 될 자격을 주시지요. 더군다나 아들에게 빵 대신 돌덩이를 줄 아버지 어머니가 없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수 없는 법이라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빵과 돌, 생선과 뱀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대조하는 유다의 고유 어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저자라 할 수 있는 루카는 전혀 비슷하지 않은 달걀과 전갈을 비교합니다. 아마도 루카가 의사였기 때문에, 몸에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대조한 것일 것입니다.
악에 기우는 사람들이어도 부모로서 자기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압니다. 하물며 아버지 중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나쁘게 내버려 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하느님께 청원하도록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 부탁을 들으면서 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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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와 삶>
-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 -
어제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 이어 계속되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기도와 삶이 하나임을, 함께 감을 봅니다. 기도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바로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러나 기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기도역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기도보다 더 중요한 영성 훈련도 습관도 없습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한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둘중 하나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주님 앞에 가면 영혼의 얼굴을 검사할 것이다. 나를 닮았나 안닮았나? 기도는 사랑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기도할 때 주님을 닮는다.”-
그러니 기도는, 믿음은, 삶은 항구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중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 비유’가 바로 이런 자세의 기도와 삶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사람이 이럴진대 하느님은 더욱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의로우실뿐 아니라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도에 앞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아버지는 농부라 했는데 농부의 삶자체가 기도처럼 생각됩니다. 얼마 전 선물 받은 사과에 대한 설명문이 이색적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해그린 사과 농원입니다. 올해는 사과농사를 지어온 농부로, 기후변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는 한 해였습니다. 한 달 반 이상 이어지는 중부지방의 긴 장마와 폭우, 그간 농사지어 오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래 해충들, 많이 놀라기도 하고 대처하는데도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몇 날 몇 밤 애태우는 시간을 들여 가꾸어낸 이 사과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과 한 알이지만 저희에게는 ‘참’ 소중한 사과입니다. 다소 손실이 발생해도 저희 해그린 사과의 농사는 한결같습니다. 껍질 그대로 드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이들이 이런 농부일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항구한 농부의 삶의 모습인지요. 그대로 기도와 삶이 하나가 된 모습입니다. 전문을 그대로 옮기면서 성서를 필사하듯 경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과 농사는 1년입니다. 그러나 사람 농사는 평생입니다. 죽음 준비도 따로 없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의 삶 자체가 죽음 준비입니다.
과연 내 삶의 농사는, 내 자녀들 삶의 농사는 잘되고 있는지요? 탐스런 열매의 수확까지는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올해 배농사를 보며 실감합니다. 배농사는 일년이라 내년 복구도 가능하지만 사람 농사는 평생이라 어려서부터도 중요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와 노력이 절대적입니다.
‘해그린’ 이란 명칭도 예쁩니다. 해가 상징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둥글고 환히 붉게 빛나는 해를 그리워 닮은 ‘해그린’ 사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그리워 닮아가는 하느님 닮은, 신망애의 하느님, 진선미의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그린’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느님그린’ 이들이 성인들이요,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각별히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브루노 사제 은수자입니다. 바로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의 소재가 된 카르투시오회 수도회의 창립자입니다. 성인은 생래적으로 고독과 침묵의 기도생활을 한결같이 사랑하며 추구했고, 또 그렇게 살다가 조용히 선종하셨습니다. 돌아가셨다라기 보다는 조용히 하느님께 사라지신 느낌입니다. 성인에 대한 일부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1084년 그는 몇몇 동료와 함께 그로노블로 이주하여 적막한 알프스 산속에서 은수처를 마련했다. 이곳에 성 브루노와 동료들은 경당과 개인 은수처를 만들고 성 베네딕도회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였으니 카르투시오 수도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은 극도의 가난을 실천하고 노동과 기도, 성경을 필사하는 작업을 했으니 그들의 규칙을 글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공적인 명예를 거부하는 카르투시오회의 규칙에 따라, 성 브루노에 대한 공식적인 시성식은 없었지만, 1514년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카르투시오회 내에서 성 브루노를 공경해도 좋다는 인가가 내려졌고, 1623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축일이 10월6일로 정해졌고, 1674년 교황 클레멘스 10세는 보편교회에서 성 브루노 축일을 기념하도록 합니다.’-
사후 성인 축일을 기념하기 까지 오백년에 걸쳐 이뤄지는 일들을 보면 모든 것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고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정말 이런 과정을 아시는 분은 하느님뿐이겠습니다.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권위 있는 말씀 앞에는 반드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란 말마디가 앞에 옵니다. 이어지는 삶의 자세는 기도와 믿음, 삶에 대한 자세입니다. 위 농부처럼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한결같은 기도와 믿음, 삶에 있어서 도전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그대로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기도의 전사의 삶의 모습이자 평생 졸업이 없는 주님의 학인, 기도의 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영적 탄력 좋은 삶이라 합니다. 눌렀다 놓으면 즉시 튀어나오는 용수철처럼 삶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들어 노쇠해 가면서 육신의 탄력은 떨어질지라도 영혼의 탄력은 떨어져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탄력이 떨어져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약해지면 삶은 무의미, 무의욕, 무감각이 지배할 것이니 이보다 더 큰 재앙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와 믿음이, 삶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최고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얼마전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제자들의 믿음의 청대신 성령을 청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항구히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때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11,13)
정말 궁극으로 청할 것은, 정말 필요한 것은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갈라디아서의 소주제는 ‘율법과 성령’입니다. 갈라티아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마칠 것을, 정말 성령에 따른 삶을 요구하는 바오로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성령입니다. 참으로 복음을 믿을 때, 항구하고 간절히 청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참 좋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선물하심으로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영적탄력좋은 삶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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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11,9)
<믿음과 신뢰의 문제!>
오늘 복음(루카11,5-13)은 '끊임없이 간청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인가를 간청한다는 것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한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넉넉하고 넘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없고, 그래서 청할 것도 없다."
과연 그럴까요?
세상 기준 안에서만 보면,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 안에서만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꽤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죽음 저 너머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청할 것이 꽤나 많을 것 같습니다.
필요한 것을 청하고 받고 하는 문제는 내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청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권한 밖의 일입니다. 나는 단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께 대한 단순한 믿음과 신뢰를 드러낼 뿐입니다.
'왜 내가 청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가?' '왜 내가 청하는 것을 빨리 주시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내 권한 밖의 문제입니다. 나는 단순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청할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청하는 것을 당장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내가 원하는 때에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드러내거나 짜증을 내면서 평화를 깨트리지 말고, 믿음과 신뢰 안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단순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 공동체 안에 필요한 것을 간청하도록 합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나는 그것을 청하고 있는가? 또한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드리고 있는가?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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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wH7Mf6XW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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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청하여라. 너희세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하느님 사랑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거짓의 나가
사라지면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의
나를 만납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으로
가득한 기쁨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기도입니다.
온전히 우리
생활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을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로 삶을
바라보는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올바른
마음의 행위가
참된 기도입니다.
조르고 청하는
기도에서
시작하지만
기도는 성장하며
받아들이고
베풀 줄 아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나갑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언제나 기도에
화답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을
만나게 합니다.
가슴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임을
다시 배웁니다.
우리를 있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면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고 겨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는 나의 뜻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뜻을
받아들이는
평화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가장 좋은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는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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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언제나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은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기쁨이
아버지의 기쁨이며
우리의 행복이
아버지의 행복입니다.
자녀들인 우리에게
주시기로 한 사랑을
기도로 체험하게
되는 우리 뜨거운
일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기도로
아버지 하느님께
바칩니다.
기도와 일상 사이
일상과 기도 사이에
사랑의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진실로 믿습니다.
드디어 알게되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청하는 기도로
마침내 살아갈
힘을 얻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모든 여정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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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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