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선거라는 민주주의 방식이나 힘으로 조직을 움켜잡는 식같은 두가지 방법이 존재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한 방식에 따라 나라의 리더를 선출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지만 쿠데타라는 군사력을 동원해 권력을 빼앗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상황입니다. 특히 후진국이라는 나라들은 지금도 정치 군인들이 득세하며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물론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독재로 일관하는 중국 북한 베트남 러시아 등도 존재합니다. 선거라는 시스템을 동원하지만 결국은 독재 분위기로 나라를 통치하는 곳도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한 경우나 권력을 잡은 뒤 정당하지 않은 수법을 동원할 경우 그 말로가 좋았던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호모 사피언스가 태동하고 난 뒤 인간사에서 한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오늘(3월 13일)은 조선시대 인종때 이괄이 난을 일으킨지 4백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 문득 조선의 정변은 어떤 성격과 모습을 보였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조선시대만 들여다 보겠습니다. 물론 고려시대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이성계 일파에 의한 쿠데타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하지만 일단 조선시대로 국한하면 4번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물론 성공한 것만 그렇습니다. 무인정사입니다. 일명 왕자의 난 또는 방원의 난이라고 부릅니다. 두번째는 계유정난입니다. 수양대군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단종을 폐위시킨 바로 그 사건입니다. 세번째는 중종반정입니다. 조선 10번째 왕인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의 이복동생인 중종을 옹립한 사건입니다. 마지막이 인조반정입니다. 1623년 4월 11일 서인의 반정 세력이 광해군과 대북 세력을 축출하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 이종을 새로 왕으로 세운 쿠데타입니다.
무인정사나 계유정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성격에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3개의 사건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특정인을 따르는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기존 왕의 측근과 주변 세력을 몰아낸 경우입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은 차이가 많이 납니다. 바로 당파싸움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조선의 당파는 선조때부터 태동됩니다. 정통성이 취약하던 선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변 세력을 이용하는데 그런 의도에 당파가 동원된 것입니다. 당시 조선시대 정치 사회 분위기상으로 이념과 성향이 강한 집단이 권력을 장악했고 왕이 권력 강화를 위해 그런 정파를 곁에 둔 것입니다. 당시 조식과 이황 그리고 성혼과 이이는 서로 다른 이념과 성향을 가진 세력으로 당시 유림의 최고 석학들이 서로 융화할 수 없는 사상적 터전을 구축했기에 왕을 둘러싼 권력 쟁탈전은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이후 당파싸움은 극렬해집니다. 지금과 비슷한 양상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속에서 서로 치고 받지만 그때는 학문 사상적 토대속에 서로 한치의 양보없는 대격돌이 전개된 것입니다. 지금 한국 정치는 아마도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그리고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인조 그이후 살벌한 당파싸움의 모습이 그대로 유전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세력들은 쿠데타의 결실을 나눠 가지게 됩니다. 그 결실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당연히 발생합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정도대로 순리대로 정권을 잡았으면 잡음이 덜 했을 것입니다. 누가봐도 혁혁하게 공을 세운 세력 즉 전체 쿠데타 계획을 수립하고 세력을 규합하고 마지막에 광해군을 체포한 그런 세력이 1번 공신 그룹일 것입니다. 다음은 병력을 동원해 관군들을 제거하고 궁궐에 침입해 광해군을 체포하는데 일조한 세력이 2번 공신그룹입니다. 3번 공신그룹은 쿠데타에 참여는 했지만 적극적인 역할보다는 주변에서 맴돌았던 무리들입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최고의 공을 세운 것으로 착각합니다. 자신이 아니였다면 쿠데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돌아온 결과는 너무 약소합니다. 분합니다. 같이 싸워 권력을 쟁탈했는데 별일 안한 것같은 세력들이 권력 핵심을 장악하고 자신들은 찬밥신세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주로 무인들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실컷 칼을 들고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했건만 돌아온 것은 초라한 결과물들 뿐입니다. 불만이 누적됩니다.
권력 핵심을 장악한 무리들은 점차 권력의 맛에 취해갑니다. 그 달콤한 맛에 취하다보니 이제는 그 안에서도 계파가 조성됩니다. 서로 더욱 강력한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상대방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갖습니다. 파이는 한정돼 있는데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려다 보니 상대의 몫을 빼앗아 오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바로 당내 본격적인 권력투쟁이 발생한 것입니다. 권력투쟁은 살벌한 칼부림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지금부터 정확하게 400년전인 1624년 3월 13일(음력 1월 24일) 발생한 이괄의 난입니다. 조선시대 최대의 군사난이라는 이괄의 난에 대해 여러가지 학설이 존재합니다. 논란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공통된 사항만 논합니다. 이괄은 병마절도사로서 북방을 지키는 장수였습니다. 당시 후금의 상황이 심상치않게 전개되자 비변사가 이괄을 변방 방어를 위해 급파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인조가 받아드림에 따라 이괄은 1만 5천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격합니다.
이괄이 변방에서 국경수비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한양에서는 서인들이 자신들의 라이벌 계파인 북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꾸밉니다. 서인의 핵심들인 문회 허통 등은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한명련 정충신 등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인조에게 고합니다. 이들은 광해군 시절 한때 광해군과 친분관계가 있던 세력이었지만 인조반정때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인조의 신임을 받던 세력이었습니다. 인조는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고 조사결과 무고임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서인 핵심세력은 이괄을 부원수직에서 해임하고 한양으로 소환해 국문할 것으로 재차 요청했고 이괄 대신에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한명련 등을 한양으로 압송해 국문하는 것으로 타협을 봅니다.
이괄은 탄식합니다. 정말 온갖 역경을 참고 인조반정을 성공시켰고 후금의 공격을 막기위해 변방까지 와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한양에 있는 왕 주변 핵심무리들은 자신들을 토사구팽시키려는 그런 계략에 분노합니다.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국경에서 오랑캐무리들의 공격을 막기위해 분골쇄신하는 자신들을 오히려 역모로 처단하려는 음모 그리고 그런 음모를 눈감아주는 왕인 인조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갖습니다. 이괄은 아들 이진을 잡으러온 금부도사와 그 무리들을 살해하고 군사를 일으킵니다. 자신과 같이 역모혐의를 쓰고 옥에 갇힌 한명련을 구출해 반란세력에 합류시키면서 세력을 확대합니다. 한명련은 임진왜란때 큰 전적을 올린 무장입니다. 이괄은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인조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지 10개월 만에 일입니다.
이괄의 반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밀고 내려 갑니다. 인조를 비롯한 서인 핵심 세력들은 화들짝 놀라 옥에 갇혀 있던 수십 명의 대북파 세력들을 모두 처형시킨 뒤 부랴부랴 한양을 버리고 공주로 피난을 떠납니다. 난이 났다하면 도망가기 바쁜 나라의 최고 책임자의 모습을 인조는 또 보여준 것입니다. 이괄의 반군은 드디어 한양 도성을 점령했습니다. 태조 이성계 이후 궁궐이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것은 이괄의 난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이괄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선조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합니다. 하지만 이괄은 한양을 점령한 것에 만족합니다. 그때 공주까지 진격해 인조를 체포했으면 조선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겠죠. 이괄의 난은 관군의 도성 포위로 인해 좌절되고 이괄은 부하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습니다. 이괄의 이틀 천하는 그렇게 마감됐습니다. 이괄의 난으로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불심이 팽배해졌고 국경 수비부대가 상실됨에 따라 정묘호란과 이어서 병자호란이라는 조선의 치욕적인 역사가 기록됩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뒤 공이 있고 없음 그리고 크고 작음 등을 따지는 이른바 논공행상이 빚은 이 이괄의 난이 지금도 우리 정치 사회에 전하는 의미는 너무도 크다고 보입니다.
역사는 되풀이 되듯 그 당파싸움의 역사는 현재 한국에서 진행중입니다. 또한 여러 갈등과 다툼도 역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4백년전에 이괄의 난이라는 것이 있었더라는 표피적인 의미을 떠나 왜 그런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보입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판도 마찬가집니다. 권력장악에 취하고 그 속에서 서로 큰 떡을 차지하겠다고 다투고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에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의명분없이 단지 자신의 힘을 더 강화하고 무리수를 동원하더라도 상대를 누르고 정치 세력을 더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사이 국민들은 힘들고 피곤한 생활을 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국민과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져 노력한다고 강변할 지 모르지만 정치판에서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정치판에 벌어지는 각종 사건들이 바로 그런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판단과 계략속에 국민이 존재하고 있는지 정말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외신을 비롯한 외국의 시선은 한국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서방 언론들도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한 지적을 본격화하는 분위기입니다. 조선시대 그리고 4백년전 오늘 일어난 이괄의 난이 단순한 반란으로만 여겨지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2024년 3월 13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