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창 폼이 연상되는 우악스러운 투구폼으로 90년대를 풍미했던 투수가 있었다. 별다른 변화구 없이 무조건 힘을 앞세운 투구였지만 타자들은 그를 만나면 힘을 쓰지 못했다. 그가 던진 공에는 배짱과 오기에 천하장사 같은 힘이 버무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넓적한 외모에다 중간계투요원으로서 잦은 등판 때문에 생긴 별명이 ‘마당쇠’였다.
지난 85년 해태에 연습생으로 입단해 90년대 중간계투의 선두주자로 섰던 송유석씨(38).
지난 2001년 한화에서 유니폼을 벗은 그는 세계 특허를 가지고 있는 벤처 건축회사의 사장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지구 안의 ㈜루빌코리아 사장석에서 만난 그는 “야구를 하듯 그렇게 오기와 배짱으로 승부하고 있다. 삶은 언제나 고단하지만 못할 것은 없다”며 여전히 자신감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추어에서 제대로 야구를 배운 게 채 1년도 안됐지만 뚝심 하나로 버텨냈던 그의 저력은 사업에서도 그대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뚝심 하나로 일군 그의 삶을 들여다 본다.
◇ 세계 최초의 회전식 건축물
3년 전부터 벤처기업인 ㈜루빌코리아를 이끌고 있는 송유석은 요즘 사무실이 위치한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지구 내에 세계 첫 회전식 건물을 짓느라 정신이 없다. 일단 1호 건축물을 완성해놓고 투자자들을 유치할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내부투자에만 집중했지만 이제부터는 결실을 볼 수 있으리라고 계산한다. 각 자치단체가 앞다퉈 개성 있는 건축물을 짓는 분위기인 데다 소득수준 향상으로 펜션 건축붐이 계속 되고 있어 전망이 좋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회전식 건축물의 핵심은 배선과 오폐수관을 엉킴 없이 처리하는 것. 건물을 회전시키는 기술은 이미 보편화된 기술이었다. 그는 “남산타워는 바닥만 회전하는 방식인데 반해 우리는 건물 자체를 360도로 돌리는 것이다. 배선과 오폐수관을 처리하는 기술이 세계최초로 개발됐고 우리는 그 특허기술을 사들여 새로운 건축방식을 주도하고 있다”며 자부심을 강하게 표시했다.
◇ 10억원은 수업료
지난 2001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고 사회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그는 사실상 사회 초년병이 아니었다. 선수 시절 식당과 주점 등을 운영하며 제법 돈을 만졌다. 돈도 있고 경험도 있어 은퇴를 앞두고도 큰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설사업은 만만치 않았다. 사업부분에 대해서도 또 각종 법률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왕초보였다. 사기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2년여 동안 날린 돈이 10억원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1년 전 서울에 있던 본사를 광주로 옮기고 제2의 도약을 시도했다. 얼마 전에 다른 사람에게 넘겼지만 사무실 옆에 24시간 영업하는 대형 갈빗집도 개업해 회사 운영자금을 충당하고 있다. 그는 “10억원은 수업료로 생각하고 있다. 덕분에 많이 배웠다”며 예의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투창선수 출신 연습생 1호
87년 처음으로 해태 마운드에 섰을 때 그는 독특한 투구폼으로 관심을 끌었다. 마치 투창을 하는 듯한 어색한 폼이었다. 전남 고흥의 대서중학교 때까지 투창선수로 활약한 전력 때문이었다. 야구가 하고 싶었던 그는 고1 때인 82년 무작정 광주 진흥고를 찾아가 강의원 감독에게 통사정했다. 강 감독은 어이가 없었던지 “우리 선수 중에서 가장 어깨가 강하고, 가장 빠른 선수를 이기면 허락하겠다”고 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무대포 기질의 그는 결국 두 선수를 꺾고 야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그해 선배들의 폭행을 견디다 못한 그는 되려 선배를 폭행하고 가출해 이후 1년간 어두운 뒷골목을 헤매다녔다. 실력차 때문에 야구에 대한 흥미도 잃었을 때였다. 그러나 고3 때인 84년 강 감독의 권유로 다시 야구부에 돌아왔고 하루에 500개씩 3개월 동안 공을 던진 뒤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다. 그해 대통령기 고교대회에서 강팀 광주일고를 꺾는 데 앞장선 활약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응룡 감독의 눈에 들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해태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2년간 고된 허드렛일 생활이 이어졌다.
◇ 마당쇠와 헤드헌터
국내 제1호 노히트노런의 주인공 방수원이 은퇴하면서 그는 뒤를 이어 87년 해태 마운드에 서기 시작했다. 적응기를 거쳐 91년 11승을 시작으로 93~95년 3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했고, 91~95년 매년 100이닝 이상을 던졌다. 벤치에서 원하면 언제나 마운드에 올라 얻은 별명이 ‘마당쇠’였다. 200㎏ 이상의 역기를 번쩍 드는 타고난 강골 덕이기도 했지만 그는 “어깨가 아파 손가락 살점을 입으로 뜯어내며 고통을 참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힘과 배짱이 있어 가능했지만 사실 비장의 무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사구였다. 그는 “어떤 타자에게 안타를 맞으면 분을 삭일 수 없어 다음 타석에서는 꼭 위협구를 던졌다. 그랬더니 타자들이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그가 은퇴할 때까지 던진 사구는 104개. 통산 10걸 안에 들어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빈볼을 교묘하게 잘 던지는 투수를 ‘헤드헌터(headhunter)’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능력 있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전문가로 통하지만 야구에서는 ‘머리를 사냥한다’는 뜻으로 통한다.
◇ 보헤미안
그는 구단과 코칭스태프를 대할 때는 언제나 확실하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아니다 싶으면 가만 있지를 못했다. 그러니 구단에서 좋아할 리 없었다. 97년 해태에서 LG로 트레이드될 때도 마찬가지. 그해 전지훈련 때 강압적인 훈련방식에 반기를 들다 눈 밖에 났고 이후 LG로의 트레이드를 자청했다. 2000년 한화로 간 것도 강성 기질 탓에 구단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후배들로부터는 인기가 대단했다. 그의 말이면 무조건 믿고 따랐다. LG 시절인 99년 주장에 올랐고, 2001년 한화 시절에도 주장으로 선출됐지만 이광환 감독의 요청으로 자진사퇴했다. 깐깐한 데다 선수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그의 프로인생이 순탄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내 성격대로 살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보헤미안의 기질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야구부자
그가 2001시즌 중반에 은퇴를 선언한 것은 아들 원호(배명중 1)때문이었다. 1·2군을 오가는 그를 보며 당시 중대초교에서 야구를 하던 원호가 의기소침해하자 이를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원호는 야구에 광적이다. 아버지를 닮아 체격이 좋다. 그는 “내 야구 인생이 순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야구를 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만큼 큰 선수로 성장해주길 바란다”며 아쉬움을 짙게 남겼던 야구에 대한 과거 기억을 아들이 말끔히 씻어주리라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