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드럭거리던 지난 세월이여
마음자리 님의 고교시절을 회상하는 글을 읽었다.
꿈도 많고 호기심도 많았던 시절이니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던 모습이 느껴진다.
그런 성장과정을 거쳐 그는 미 대륙을 누비고 다니는 것일 게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남들의 고교시절에 해당하는 시기에 나는 사범학교를 다녔다.
사도(師道)의 길을 걷는다면서 꿈도 호기심도 살리지 못하고
규격화된 생활만 했다.
그러니 길거리에서 아이스케키를 사 먹을 줄도 모르고
여학생이 어디에 있는지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오직 강의와 어린이들 속에서 교생실습으로 세월을 다 보냈다.
그런 나는 1962년도에 사범학교를 나와 교단에 섰다.
겨우 열아홉 살이었으니 무얼 알겠으며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그럼에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한 선생인 줄만 알았다.
당시엔 검정색 테트론 복지가 유행이었다.
나도 그걸로 양복을 맞춰 입고 다녔는데
그건 위엄의 상징이기도 했다.
허나 내 위엄을 발휘하기엔 교육환경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교직을 버리고 대학에 들어가 새로운 직장생활을 했다.
역시 위엄을 상징하는 복식은 예나 마찬가지였고
거기에 검정색 007 가방을 들고 다녔으니
여전히 세상에서 내가 제일인 줄만 알았다.
그렇게 젊은 날을 거드럭거리기 사십여 년 만에
이천 년 9월 28일, 사회를 수복한다면서 직장에서 뛰쳐나왔다.
생각느니 회한뿐이다.
남는 건 인간미 넘치는 선배와 후배들뿐이더라.
검정색 싱글과 넥타이, 그리고 007 가방은 장 속 깊숙이 쳐 박아두고
지금 나는 누런색 소가죽 숄더백을 처진 어깨에 메고 나댄다.
지난날에 쓴 참회의 글을 아래에 꺼내 보노라.
가을의 하얀 억새숲에서
희야!
보노니 지난날은 가시덤불로 밀려버릴 뿐
이게 무슨 연고란 말이냐
한나절이 다 가도록 입을 열지 못하고
이렇듯 막막한 건
또 무엇 때문이란 말이냐
기어이 하얀 가슴에 머리를 묻어버릴 뿐
이 거뭇한 이는
어찌할 줄을 모르겠구나
굳어버린 가슴에 스치는 깃
달빛 쓸어 모으는 손길인 듯 야릿하고
구름에 가린 햇살조차 실눈 뜨고도 시리다
연신 떨어 내리는 고행(苦行)이여!
몸도 마음도
모두 빈 대공뿐이려니
다치지 않으련다
눈빛만 가만가만 얹어볼 뿐
다치지 않으련다
쥐뿔도 잘난 것 없이
오만하게 거드럭거리던 날들이여!
삭막한 모래판의 사내여!
할퀴고 상처 내는 일뿐
험상궂게 투정 부리던
한 마리 사마귀에 다름 아니었지
억새들 고개 숙여
두 손 비벼대는 겸양
칼날 같은 회초리로 파고드느니
이젠 몸에 지닌 온갖 쇠붙이들
저 들판에 내던져버리고
마침내는 백기(白旗)를 들 수밖에 없구나.
(졸 시 - 하얀 억새숲에서 - 전문)
첫댓글 겉치장으로 돋보이려던
허세를 내던져 버리고
항복의 백기를 든 모습에는,
비움으로 삶의 승리를 쟁취하는 참 모습을 발견합니다.
날은 꾸무리하지만
맘만은 뽀사시한 어린이날 되십시요!
이젠 참고 지는 수밖에요.
그게 순리일 겁니다.
사람이기에 지난 날을 돌아도 보지요.
도도한 지난 날이든
시건방진 지난 날이든
그것도 공짜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남보다 못한 재주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비굴하지 않게
때로는 뛰어나게
때로는 한 칸 낮추어 살아 온 모든 것이
지금 여기입니다.
일부러 나쁜 짓은 아니하겠지요.
잘 나고 싶기도 했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살았습니다.
지금껏, 건강하게 배우자와 함께
가정을 이룬 것 만도
국가에 세금 잘 낸 것 만도
건강한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척 하지 않아도
세상살기 바쁜 세월이지요.
사실 한 가정을 잘 이끌기만 해도 기본은 하는건데 내가정이나마 잘 이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ㅎ
앞서 걸으시는 분들의 든든한 등을
등불 삼아 '아... 내가 걸어온 길도
나쁘진 않았을 거야' 믿으며 걷는
길입니다.
지금 제가 보고 걷는 길 앞에
든든하고 단단하게, 숄더백 메시고
앞서 걷고 계시는 분 있으니
석촌님이십니다.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 표하고 싶을 때
슬쩍 '석촌대형님'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뒤따라 갑니다.
아이구우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나가야지요.
새삼 나도 내 고교 3년을 회상해 봅니다
나는 명문교인 본교 고등학교를 떨어지고 2차 고교를 갔었지요
그런데 그 학교는 공부 가르키는 선생님들이 성의가 없습디다
그래서 3년 동안 학원을 자주 다녔지요
3학년 때에는 가정교사까지 두면서 공부를 열심히 햇었지요
친구들은 있었지만 죽고 못살 정도의 친구는 없었던거 같구요
그리고 친구들과 몰려 다니는 것두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
좌우간 더 열심히 공부 하고 더 교우 관계가 좋은 고교 시절이 될껄 하고 후회가 됩디다
그당시 나의 취미 생활은 나홀로 싸구려 극장에 가서 영화구경 하는거 이었지용
충성 우하하하하하
그러니까 학구파였네요.
그래서 대학진학하고 건축감리사 자격까지 땄겠지요.
여하튼 그런결과로 산업역군이 되었던거고요.
학창시절엔 아무영화나 안 보곤 못배겼을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요.
잘났으나 못났으나 젊은 날에는 누구나 설익은
모습으로 거들먹거리던 때가 있었겠지요.
젊은 날에 완숙한 인격을 갖추었으면 그것 또한
어색한 모습이리라 생각합니다.
책 몇 권 들고 군화를 신고 지리산을 헤매이던
저의 어설픈 젊은 날이 떠올랐습니다.
책 몇 권으로 지리산을 다 품을 양이었던 모양이지요?
젊은날엔 그럴만 하지요.
그옛날에는 가정들이 어려워 등록금이 안드는 사범학교나 교원양성소. 교대를 많이 갔답니다. 머리가 우수한분들이 많이 가셨기에 이나라의 기틀을 잡아주신게 수많은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가르침이였습니다. 저희집안도 교사출신이 많습니다.
큰처남도 청주사범나와 교장했고 처형도 동서도 교사를 했구요. 저의집사람도 서울교대나와 교사생활 38년했답니다. 처남댁도 작년에 교사로 정년퇴직했답니다.
교육자 집안이라 할만 합니다.
흔치 않은 집안이네요.
지금은 교직이 이런저런 위협을 많이 받고 있지만
에전엔 그래도 정신적 대우를 많이 받기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