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일어나라 기적을 창조하자
전 이틀전..우연히 TV에서 정신대 할머니들의 과거를 보았습니다.
피맺힌..한을..느꼈습니다ㅜㅜ
22살의 전 ..일본이란 나라를..꽤 좋아했는데..
패션과 축구등등..
지금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할머니들이..홀로 계십니다.
자신들의 망가지고 찢겨진 몸이 부끄러우셔서..
외롭지만..사람이 그립지만..밥을먹고 끼니를 연맹하는 것은..
자신이 죽으면..이대로 파묻힌다고..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지워져버리다고..ㅜㅜ
부끄러웠습니다.
어느정도는 알고있었는데..정신대라는 것도 역사시간에 배웠던것
같은데..역사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잊으려했는지도 모릅니다.
시끄러워지니까..
할머니들은 그리고 일부 시민연대는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
서 시위를 하십니다.
병약한 몸을 이끄시고..비가오나..눈이오나..ㅜㅜ
이제는 우리가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2000년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에서..
일본은 유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자신들이 저지른 법죄에 대해
국가일이 아닌 사창가의 일부시민이 저지른 일이라고
회피하고있습니다.사이트에 들어가셔서 보십시오.
그건..일본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그리고 역사교과서문제도..어느덧 잊혀져 갑니다.
잊혀져 될 문제가 아닙니다.
종군위안부에계셨던 우리 할머니들의 한..풀어드립시다.
우리가 월드컵에서 세계를 놀라켰듯이 일부가 아닌..우리가
대한민국이 일어섭시다!
이세상의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줍시다.
필리핀 ,대만,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등등
이 많은 나라의 어린 학생부터 아녀자들이 정신대에 끌려가 학살당
하고 몸도 찢어지고 마음은 피멍이 들었습니다.
일본은 대한민국 뿐만이 세계여성의 존엄성을 짙밟았습니다.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
이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쇼!
우리 일어섭시다.!!!!!!!!!!!!!!!!!!!!!!!!!
8월 15일 탑골공원 오전 11시
할머니들께서 일본대사관까지 행진 하신다고 합니다.
동참합시다.저는 전북에서 올라갑니다. 멀리계신분들도
참여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정신이 담긴 빨간 티 다시 한번 입읍시다)
꿈은 이루어진다!
(부탁드립니다. 한 명이라도 더 읽을 수 있게 이 글을 다른 사이트에 옮겨주세요.)
벙어리 냉가슴--자식이 알까 남편이 알까
김명순
나는 1926년생이다. 그동안 살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고생은 다하며 살아온 세월이 내 나이를 팔십은 먹어보이게 한다. 평생을 살면서 가슴에 묻어둔 이 원통함을 통곡으로 토해보고 싶다. 자식이 알까 남편이 알까 마음졸이며 이렇게 털어놓는다.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서울역 앞 동자동 82번지에서 태어났다. 내 위로 언니, 큰오빠와 작은 오빠가 있었다. 셋방살이로 뻔질나게 이사를 다니며 어려운 생활을 한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기억이 자세하지 않다. 유식하고 단아하게 생겼던 분으로 생각되는데 집에서 함께 산 기억이 별로 없다. 한번 나가면 여러 달 안 들어오시고 들어오셨다가도 금새 어딘가로 가셨다. 어쨌든 내 어린시절 생활은 줄곧 가난했다. 어머니가 어딜 나가시는지는 모르지만 저녁이면 밥을 얻어와서 우리에게 끓여주던 생각이 난다.
내가 아홉살 정도 되었을 때 큰오빠와 언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언니는 나하고 8년 나이 차이가 났는데 언니가 무척이나 예뻐서 동네사람들이 나보고 네 언니 반이라도 ?아가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하루는 언니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어머니는 언니의 소식을 알기 위해 사방을 알아보며 다니셨다. 학교에서 친구들도 언니의 소식을 알기 위해 애를 많이 썼고 동네사람들도 모두 걱정을 했다. 어머니는 매일 우시고, 우리 아버지는 잠시 집에 들어와 계시다가 홧김에 다시 집을 나가셨다. 우린 이사도 못 가고 언니가 돌아오기를 애타도록 기다렸다.
그렇게 2-3년이 지나서야 언니는 거지차림을 해가지고 돌아왔다. 뼉다귀만 앙상한 언니를 구경하려고 동네사람들이 우리집에 몇십명씩 몰려들었다. 그 사람들은 여자가 너무 예뻐서 팔자가 사납다고들 했다. 한번은 내가 어머니 심부름을 나가다가 동네사람들이 언니가 일본놈한테 끌려갔었다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후 우리집은 그 동네를 떴다. 무엇이 불안했던지 어머니는 내가 밖에 나가 못 놀게 했다. 소공동에 살 때 나는 학교에 들어갔다. 열한살인가 열두살에 1학년이 되었으니 좀 늦은 편이었다. 수표동에 있는 화강소학교에 입학해서 다녔는데 그것도 4학년 겨울에 그만두어야 했다. 홍제동으로 이사가고 나니 학교는 너무 멀고 월사금 낼 돈은 없고 해서 친구들하고 엉엉 울면서 헤어졌다. 다시 소공동으로 이사를 와 어머니 아버지가 공터에서 막걸리 장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사 후 언니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어머니는 계속 한약만 지어다 먹이고 무당을 불러 병 ?는 푸닥거리만 했다. 그래도 언니는 별로 나아지는 것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온 해 겨울에 죽었다. 외가집이 있었던 금곡에 시체를 묻었다.
당시 큰오빠는 장가를 갔는데 마땅히 하는 일이 없었고 작은 오빠는 인쇄소에 다녔다. 난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작은 오빠와 친했다. 나는 작은 오빠 말이라면 뭐라도 했고 작은 오빠도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다. 어머니 아버지보다도 그렇게 좋았던 작은 오빠는 20살이 갓 넘어 징용을 가게 되었다. 그후 큰오빠는 돈 번다고 자기 식구들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결국 부모님과 나만 남았다. 징용간 작은 오빠가 히로시마에서 편지를 보냈다. 나는 유독 친했던 작은 오빠가 너무도 보고 싶었고 가난에 짓눌리는 생활에 갑갑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물에 걸려들어
소공동에서 다시 다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 1945년, 내가 19살 나던 해였다. 양력 정월달이라고 기억하는데 정내회(町內會)에 있는 남자가 와서 집에서 노느니 취직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만약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집에 있으면 정신대에 나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일본에 가서 일하면 돈도 벌고 정신대에도 안 나가니 참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나중에 어머니가 들어오시면 의논해본다고 했다. 그때 집에는 나 혼자 있었다. 그리고는 며칠이 흘렀는데 또 그 사람이 와서는 빨리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말하고 갔다. 그동안 어머니한테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가 하루는 어머니가 저녁 무렵 들어오시자 그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취직은 무슨 취직이냐고 하면서 ?아이구 큰일났구나, 또 이사가야겠구나? 하셨다. 그러나 그때 내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막걸리 장사하던 것이 불법이라고 지서에 불려 들어가 혼이 나고 나오신 후로 아버지는 마땅히 일자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혼자 뭘 하시는지 겨우 밥이나 얻어와 먹고 사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나라도 취직해서 돈이라도 벌면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내회 남자 말이 일본에 가게 되면 히로시마에 있는 작은 오빠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해서 마음이 더더욱 기울었다.
어머니가 가지 말라고는 했지만 밤새 이런저런 생각 끝에 몰래 짐을 싸들고 어머니가 일나가신 사이에 정내회의 그 남자를 찾아가 일본에 가서 일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날로 바로 그 남자와 서울역에 가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밤새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리자 그 남자는 나를 일본 남자 2명에게 넘겼다. 그때서야 더럭 겁이 났다. 학교에서 일본말을 배워 조금 알기는 했지만 일본말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일본말을 하면 그 사람들이 말을 시킬 것 같아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아갔다.
부산에 도착하여 바로 배를 탔다. 배 안으로 내려가니 나이먹은 한국 여자들이 10명 정도 있었다. 서로들 말을 안하고 있었으니 그 사람들이 다들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멀미가 나서 밖이 보이는 곳에 올라가봤더니 집도 산도 하나도 안 보이고 배는 바다 한가운데 덩그마니 떠 있었다. 위에는 비행기 한 대가 떠 있었고. 그때 나를 인계받은 일본 남자 중의 한 명이 오더니 나에게 뭐라고 말하면서 따귀를 때리고는 손을 잡아 꺾었다. 아마도 내가 바다에 빠져 죽으려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그때 꺾인 상처 때문에 지금도 손마디가 툭 불거져 나와 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엎드려 있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내가 어머니 몰래 나온 것이 너무너무 후회가 되고 이런저런 생각에 서러워 눈물만 나왔다.
그날 저녁쯤 되어 배에서 내렸다. 8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배에서 내리면서 사람들이 시모노세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낯선 말이었지만 열심히 ?세키 세키? 하면서 외웠다. 왠지 불안한 마음에 이곳이 어디라고는 알고 있어야지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에서 내려 기차를 탔다. 다른 한국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나와 나를 인계받은 일본 남자 둘만 기차를 탔다. 온통 창이란 창은 다 막혀 있어서 대체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아, 이제 난 죽었구나. 오빠고 뭐고 난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게 깜깜해졌다.
난데없는 첩살이
기차에서 내려 두 일본 남자가 나를 어느 집엔가 데리고 갔다. 나이가 마흔쯤 되어 보이는 일본 남자가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아주 좋아했다. 두 남자(세 남자 아닌지?)는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하더니 니를 데리고 왔던 남자들은 돌아갔다. 주인 남자는 나에게 방 하나를 가리키더니 들어가라고 했다. 집안 형편을 살펴보니 앓아 누워 있는 부인이 있고, 스무살 정도 먹은 아들이 있었다. 난 방에 들어가서 일하는 여자가 해주는 밥을 받아 먹고 불안한 마음에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니 일하는 여자가 이부자리를 펴주고 자라고 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주인 남자가 들어왔다. 주인은 그 이부자리에 눕더니 나더러 옆에 누우라고 끌어당겼다. 싫다고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니 일어나 나를 눕히곤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무서워 반항도 크게 못했다. 머리는 멍멍하고 몸은 뻣뻣하여 움직이지도 못했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도 남자와 어떻게 상대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뭐가 아래로 들어오는데 난 그게 무릎팍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 어찌나 아프던지 정신이 아찔하였다. 피가 흥건이 나고 밑은 빠지듯이 아프고. 그러고 난 후에서야 난 내가 몸을 뺏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로 주인은 계속 나를 데리고 잤다. 주인이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면 그 아픈 짓거리를 안 당해도 되었다. 주인은 아파 누워 있는 자기 부인방에는 잘 안 들어갔다. 매일 밤 그 지긋지긋한 잠자리를 강요당하는 와중에서도 그 부인에게 무슨 죄 지은 것 같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괴로왔다. 그 주인 여자 마음이 오죽할까 해서.
주인 이름은 스하라라고 했고 아들은 지로라고 했다. 주인은 군인이었는데 아침에 군복 입고 나갈 때 보면 어깨에는 뻘건 헝겊 위에 별이 달린 계급장이 붙어 있었다. 집에는 방이 3개 있고, 마루에 사진과 채찍 그리고 긴 칼이 걸려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말도 있었고. 난 그 집에 머물면서 부인의 시중도 들어주고 집안일을 거들기도 했다. 하지만 밥 짓는 일은 못하게 했다. 집안사람들이 나를 학대하지는 않았다.
그 집에 있으면서 폭격소리를 아주 자주 들었다. 주인 남자에게 이 곳이 어디냐고 손짓 발짓으로 물어보니 히로시마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도 일본말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히로시마라는 말을 듣고는 작은 오빠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느 정도 무서움이 가신 후 그 주인 남자에게 오빠가 이 곳에 있으니 오빠를 좀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내가 일본에 갈 때 가져갔던 오빠 편지를 보여줬다. 알았다고 하면서 손가락 4개를 펴보이며 이렇게 자고 나면 만나게 해준다고 했다.
며칠 있다가 차를 태워 작은 오빠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무슨 공장 같은 건물이었는데 그곳에서 오빠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작은 오빠는 나를 보더니 여기는 무엇 하러 왔느냐고 하면서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울며 내가 여기 오게 된 이야기를 했더니 오빠는 화를 내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을 빠져나가라고 했다. 여긴 살 데가 못 된다고 했다. 한 서너시간 오빠와 울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주인 남자가 이제 가야 된다고 나를 데리러 왔다. 오빠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작별을 했다.
다시 그 집에 돌아온 후론 그 집 주인 남자의 온갖 비위를 맞추며 제발 조선에 보내달라고 졸라댔다. 주인 여자에게는 ?내가 있으니깐 아저씨가 아줌마한테 안 가지 않느냐. 그러니 나를 조선에 보내면 아저씨가 아줌마를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면서 졸랐다. 저녁마다 주인 아들한테 한두시간 일본어를 배웠는데 그 아들한테도 졸라댔다. 두달쯤 지나자 주인 여자도 울화병이 나는 듯 나를 대하는 것이 점점 고약해졌다. 그래도 아침에 눈 떠서부터 저녁까지 옆에서 졸랐다. 내가 조선에 가야 아줌마가 좋아진다고 하면서. 주인 남자는 내 말을 되도록이면 다 들어주었는데 조선에 보내달라고 조르면 화를 내기도 했다.
어느 날 주인 남자가 아침에 나간 후 주인 여자와 그 아들과 함께 있으면서 난 또 졸랐다. 나를 조선에 보내달라고. 주인 여자와 아들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더니 아들이 나한테 짐을 챙기라고 했다. 데려다주겠다고. 그저 고맙고 좋은 마음에 서둘러 짐을 챙겨 그 아들을 ?아나섰다.
나를 어느 역에 데리고 갔다. 그 아들이 일본 사람 둘에게 뭐라 하더니 나를 그 사람들한테 넘겼다. 그리곤 나를 한번 흘깃 보더니 가버렸다. 일본 남자들이 내 팔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하기에 나는 안 간다고 소리를 질렀다. 난 조선에 갈 거라고. 그랬더니 한 놈이 내 허벅지를 냅다 차면서 빨리 가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끌고 갔다.
보내달라 떼쓴 것이 그저 후회스러워
나를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창고같이 생긴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방이 10개 정도 주루룩 있었는데, 그중 한 방으로 들어가니 한평 조금 넘을 만한 방에 담요 하나만 덩그러니 깔려 있었다. 조금 있으니까 어떤 일본 여자가 밥을 가져다주고 이런저런 시중을 들어줬다. 그때 난 ?아, 주인 남자가 내가 그 집에 있으면 부인에게 미안하니깐 이곳에 머물게 하면서 조선에 보내주려 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주인 남자가 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저녁 때가 되니 밥 가져다줬던 여자가 씻으라고 따뜻한 물을 떠다 줬다. 씻고는 오늘 밤이라도 당장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낯선 일본군인이 들어왔다. ?아, 이제서야 내가 떠나는구나. 나를 데리러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게 누으라 했다. 나는 보따리를 무릎에 얹어놓은 상태로 ?저리 가라?고 하면서 손으로 그 일본 군인을 밀었다. 그랬더니 다시 나를 슬슬 달래면서 끌어당겼다. 나는 보따리를 꼭 껴안은 채로 뒤로 떠밀려져서 일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 이놈이 여자한테 굶주려 나를 보고 이 짓을 하는구나. 이것만 끝나면 사하라한테 나를 데려다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크게 발버둥치지 않았다.
그러나 상상도 못했던 생활이 시작되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고 몸서리쳐진다. 내가 조선에 보내달라고 떼만 쓰지 않았더라도 그런 일은 안 당했을텐데 하는 후회가 지금껏 든다. 싫더라도 한 놈한테만 그냥 당하는 것이 더 나았을테니깐.
아침 9시 반이나 10시 정도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나면, 어떤 때는 점심 전부터 군인들이 오고 보통은 오후가 되면서부터 군인들이 밀려왔다. 일요일엔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군인들은 나란히 줄을 서 있다가 한명씩 들어와서는 보통이 5분, 길어야 10분 정도 있었다. 한 놈 나가면 또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밤 10시경이 되어서야 그 생지옥이 끝났다. 하루에 적어야 20명이었다.
하라는 대로 안한다고 맞기도 엄청 맞고 기절도 숱하게 했다. 그러면 주사 놔줘서 다시 깨어나고. 오줌을 질질 싸고 피범벅이 되어 누워 있으면 어떤 놈은 냅다 발길질을 하고 그냥 나가버리기도 했다. 치마로 얼굴을 쓰고 누워 있으면 얼굴 가린다고 맞고, 자기들 성기를 입에 갖다대고 빨라 해서 안 빨면 맞고. 조선말 쓴다고도 맞고. 하도 맞다 보니 병신이 됐는지 그저 눈만 멀뚱 멀뚱 뜨고 송장처럼 누워 있었다. 공습 때는 밖에서 문을 잠그고 모두 없어졌다. 처음엔 무서워서 방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나중엔 그냥 천정만 보고 누워 있었다.
어떤 놈은 금방 하고 나가고 어떤 놈은 안돼서 질질 끌었는데 그렇게 몇 십분씩 진저리가 나게 끌고 나면 난 기절을 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그냥 기절하고 누워 있으면 밥해주는 일본 아줌마가 와서 찬물로 씻어주고 미음을 가져다 먹이곤 했다. 거기서 내가 살아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저 목숨이 붙어 있어 때가 되면 밥먹고 시간 되면 군인받고 그저 그렇게 지낸 생활이었다.
입구에서 감독하는 군인이 서너명 있었는데 자주 바뀌었다. 바람 쐬러 나왔다가 감독하는 놈들에게도 숱하게 맞았다. 군인들은 들어올 때 입구에 있는 놈들에게 뭔가를 내는 것 같았다. 그것이 군표나 돈일 것이라는 것은 요즘에서야 알게 되었다.
밥해주고 빨래해서 가져다주는 아줌마는 바뀌지 않았다. 빨래라야 걸치고 있는 겉옷 하나였지만. 아예 속옷은 안 입고 있었다. 나이가 마흔살 정도 된 일본여자였는데 같은 여자라 그런지 많이 위로를 해줬다. 내가 기절을 자주 해서 그 아줌마 신세를 많이 졌다. 내가 깨어나면서 시모노세키가 어디냐고 나를 거기다 좀 데려다 달라고 하면 말은 안해주고 그저 걱정말라고만 하면서 피를 닦아주곤 했다. 비록 일본 사람이었지만 그 아줌마한테 나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아줌마는 그 곳에서 유일하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줌마는 내가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봐도 그런 건 물어보면 안된다고 했는데, 그러다 얼핏 오사까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곳에 있으면서 다른 방에 있는 여자들과는 한번도 이야기해보지 못했다. 딱 한번 화장실 가다가 복도에서 마주친 여자가 있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감독하는 놈 눈에 띄일까봐 그냥 지나쳤다. 밖에 나왔다가 감독하는 놈들 눈에 띄면 맞기 때문에 화장실 가는 것외에는 방에만 있었다. 밥도 방으로 갖다주는 것만 먹고.
군인들은 가지가지였다. 와서 개 돼지만도 못하게 지랄하는 놈도 있지만, 몇몇은 추근대지 않고 그냥 옆에서 안고만 있다가 가는 사람,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찾겠다고 하면서 이야기만 하다 가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대개가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이었다. 나를 불쌍하다고 하면서 내게 잘해주려고 했던 장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한번 나와 자고는 그 다음부터는 이야기만 하다 가곤 했다. 그 사람은 내 밑이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닦아주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도 나를 다른 곳에 보내는가 싶어 말을 시켜도 안하고 싫어했다.
하도 많은 남자들을 상대하다보니 얼마 안되어 몹쓸 병이 들었는지 밑이 시뻘겋게 퉁퉁 붓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들어오는 군인이 제각기 콘돔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끼는 놈도 있고 안 끼는 놈도 있었다. 군의가 와서 주사를 놓아주었지만 잘 낫지를 않았다. 병든 상태에서도 계속 군인을 받았다. 한번은 어떤 놈이 바지를 내리고 덤벼들려고 하다가 시뻘겋게 된 내 밑은 보고는 뭐라 욕지거리를 하고는 못 같이 뾰족한 것을 가지고 자궁을 찔러버렸다. 거기에 병균이 옮아 번져서 고름과 피가 범벅이 되었는데도 그냥 누워 군인을 받았다. 그 엉망이 된 밑을 보고도 덤벼드는 놈들이 인간 같지 않았다.
약 먹고 주사맞고 치료를 해도 병이 낫지를 않았다. 무슨 주사인지 한번 맞고 나면 속이 울렁울렁하고 입과 코에 냄새가 올라와 역겨웠다. 군의가 치료를 하면서 약으로 치료가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다. 한번은 내게 잘해주었던 장교와 군의가 같이 왔다. 그 장교는 군의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나를 내보내라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나를 또 딴 곳에 보내려는 이야기로 들었다.
어느 날인가 아줌마가 오더니 내가 조선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너무 병이 심하게 들어 나만 조선에 보내준다고 했다. 막상 조선에 나간다는 소리를 들으니 내가 죽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절을 했을 때 죽게 그냥 내버려두지 나를 깨운 아줌마도 야속하고. 나중엔 그나마 병이 깊어서라도 이렇게 나오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긴다. 지금 생각하니 그 장교가 나를 나가게 손 써준 것 같다.
살아 돌아오기는 했지만
군의가 뭐라 씌어 있는 종이를 내게 줬다. 그 곳에 있던 군인이 나를 배 타는 데까지 데리고 갔다. 배 타는 데에서 어떤 사람에게 그 종이를 보이고 안내인 하나와 배를 탔다. 타고 나니 그저 ?이제는 살았구나. 이젠 어머니한테 돌아가는구나? 하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부산에서 배를 내려 안내인이 기차를 태워줘 혼자 서울에 도착했다. 1945년 양력설을 세고 일본에 가서 두 달 동안 스하라 집에 있다가 3월부터 내가 돌아온 7월까지 오사까에서 군인들을 받다가 반년이 넘어서야 서울에 돌아왔다. 서울역에 내렸는데 돈이 수중에 한푼도 없어 걸어서 예전에 살던 도동의 집까지 갔다. 보따리도 하나 없이 걸치던 옷에 조리 하나 신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밑이 아파 몇번을 주저앉으면서 집으로 갔다.
다행히 식구들은 이사를 안 가고 그 집에 그냥 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발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들어가니 어머니가 방문에 걸터앉아 계셨다. 어머니가 나를 보더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밑에 병이 있는 상태에서 돌아왔으니 동네 사람들이 알까봐 쉬쉬하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다녔다. 어머니는 굳이 내게 어디 갔다왔느냐는 것을 물어보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다 알고 계신 것 같았다. 간혹 ?딸 둘 있는 것을 이렇게 버렸구나? 하시면서 울곤 하였다.
하도 배가 아파 뒹굴으니 어머니가 만져보고는 아이가 들은 것 같다고 했다. 이대 부속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아이가 이미 뱃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꺼내보니 사내아이인데 얼굴부터 몸 반쪽이 이미 썩어 있었다. 의사는 균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됐다고 했다. 6-7개월 된 아이였다. 아이는 죽은 채로 내 뱃속에서 근 한달을 있었던 것이다. 그게 아마 처음갔던 집 남자 스하라의 씨인 것 같다. 내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에는 달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그후 병 치료를 위해 여기저기 용하다는 병원을 다니다가 이광수씨 부인이 하는 산부인과에 가서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깨끗해졌다.
아들에게 전해진 위안부 흔적
동네에서 다시 정신대를 모집한다는 소리를 듣고 놀래서 어머니가 옆집에서 하숙하고 있는 남자하고 결혼을 시켜버렸다. 무엇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냥 결혼했다. 그리고는 얼마 있다가 곧 해방이 되었다. 치료가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결혼을 해버려 병이 다 낫지를 않았던 모양이었다. 몇개월 살았는데 내가 매독균을 옮겨줬다고 때리고 내?아서 임신한 몸으로 친정에 왔다. 왠 임신은 그렇게 쉽게 되는지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덜컥 아이가 들어선 것이다. 나는 뱃속에 들은 아이도 또 죽어 있을 것 같아 무서웠다.
그러다 작은 오빠가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원자탄이 떨어질 때 화상을 입어 몸이 불거져서 왔다. 오빠는 앓다가 갈비뼈에서 이빨 같은 것이 부스러져 나오더니 다음 해 죽었다.
작은 오빠가 죽은 해 나는 친정집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겉으로는 별 이상이 없어 보여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친정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얼굴이 반반하다고 ?아이 딸리면 어떠냐 시집가라? 하면서 친구 엄마가 중신하여 지금의 영감하고 선을 보고 살게 됐다. 애 딸린 여자라고 시부모, 시누이한테 구박도 많이 받고 여러 번 ?겨나기도 했다. 그 서러움은 또 말도 못한다. 한겨울에 광목 빨면서 물을 못 데워 쓰게 해서 찬물에 손이 시뻘겋게 언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남편은 내가 얼굴이 곱상해서 애가 딸려도 그냥 결혼을 했지만 살다보니 마음이 변하는지 집에도 안 들어오곤 했다. 영감이 젊을 때 바람을 피워서 속도 많이 썩었지만 내 꼴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아이는 줄줄이 생겨 아이 낳고 시댁식구까지 먹여 살리느라고 이짓저짓 다하며 살았다.
첫번째 남편에게서 난 큰애는 의붓아버지 밑에서 구박을 많이 받았다. 큰아이는 공부도 못 시켰다. 그애는 국민학교만 겨우 졸업하고는 안해본 일없이 별별 고생을 다했다. 나가서 거의 빌어먹다시피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렇다고 내가 감쌀 형편도 아니라 돌봐주지도 못했다.
그러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불안증이 생기고 정신이 막 혼동되는 증세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영감이 싫어지고 소름이 끼쳐 나가라고 소리도 지르고 발광을 했다. 누굴 중을 만들려 하냐고 구박을 얼마나 받았는지. 그래도 사람소리 텔리비전 소리만 나면 불안하고 무서워서 문 걸어 잠그고 아무도 못들어오게 했다. 텔리비전에서 총소리를 듣고 몇번을 졸도도 했다. 사람만 보면 무섭고 무슨 소리만 들려도 떨려 방에 들어앉아 무릎으로 기어다니는 생활을 근 30년 했다. 내가 이렇게 제대로 걸어다닌 게 이제 4년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지금도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불안해서 아티반을 계속 먹고 있다.
지금 영감한테 낳은 자식이 4명이다. 딸 셋에 아들 하나. 모두 자기 밥 먹고 잘 살고 있다. 지금은 막내딸과 함께 사는데 그 전엔 먼저 남편에게서 난 큰 아들 집에 있었다. 그 아들은 국민학교를 겨우 나왔지만 남의 밑에서 이것저것 배운 것을 가지고 자기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멀쩡히 잘 살다가 마흔살이 넘어 갑자기 신경발작증을 일으켰다. 그래서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는데 그때 어머니를 데리고 오라 해서 갔었다. 의사가 가족들은 다 나가 있으라 하더니 나한테 혹시 그전에 매독을 앓다가 낳은 것이 아니냐고 해서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리다 나온 적이 있었다. 그저 내가 죄인이었다. 자식 신세까지 그렇게 만들어놨으니. 뱃속에서 멀쩡히 나와 성한 줄 알았지 그게 40년만에 정신병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나.
큰 아들은 지금도 한달에 한번씩은 발작을 한다. 제가 더러운 개구녕에서 나와 이렇다고. 의사가 이야기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런 말을 하면서 작년엔 에미를 죽이겠다고 집안살림 다 집어던지면서 달려들었다. 너무 무서워서 그 길로 아들 집을 나와 막내딸 집으로 왔다. 큰 아들이 정신병원에 있을 때 며느리는 집을 나갔다.
그동안 살면서 그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말을 가슴에 담고 어서 죽기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지금도 이렇게 신고를 하고 이런저런 행사에 참석하곤 하지만 행여 얼굴이 알려질까봐 마음을 졸인다.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어 내 원통한 세월을 마음껏 통곡도 못한다. 만약 내가 위안부로 갔다온 것을 사돈댁들에서라도 안다면 자식들 인생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내가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신경병에 당뇨에 약 없이는 살지 못하고, 남들에게 꺼내놓지 못하는 이런 엄청난 것을 가슴에 묻고서 속병 앓으며 사는 것을 누가 알겠나. 죽어 가슴에나 묻어둘 이 원통한 것을 누가.
나는 같이 끌려간 처녀들과 함께 깨끗한 정조를 무참히 짓밟히고 짐승같은 일본군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어느할 잡지사 사장이라는 놈은 조선여성들이 마치 돈을 벌기위해 자진해서 "위안부"으로 된것처럼 모독하였다고 한다.
이것만 보아도 일본의 현위정자들과 일본의 어용출판물들이 얼마나 철면피한가를 알 수 있다.
자진하여 나선길이라면 무엇때문에 화차의 벽과 짐배기 등에 머리를 부딪히며 목놓아울었겠는가.
그렇게 "좋은 돈벌이"라면 왜 자기 딸들은 보내지 않았는가.
"위안소"에서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몸서리쳐지곤 한다.
짐승우리와도 같이 판자를 칸칸이 막은 "집"에서 매일 수십명씩 야수처럼 달려드는 일본군에게 청춘의 넋과 육체를 여지없이 짓밟히는 성노예의 굴욕도 그렇지만 오늘까지 가슴에 사무쳐 내려가지 않는 것은 숱한 조선여성들이 일본군에게 모든것을 깡그리 유린당하고도 죄없이 목숨을 빼앗긴 사실이다.
어느 날 마당쪽에서 사살 살리라는 비명이 들려 뛰어나가보니 옆방에 있던 영자(서울에서 같이 왔었음)가 팔다리를 꽁꽁 묶이운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도려낸 젖가슴, 잘리운 왼팔을 보고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한참 후에 깨어보니 일본군은 숨도 채 지지않은 그를 울타리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달려들며 항거하자 일본군은 나의 팔을 뒤로 묶어놓고 군도뒷등으로 머리와 어깨, 잔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정신을 잃은채 물 한모금 못마시고 창고에 갇혔다가 사흘후에야 풀려나왔는데 그 때 끌려나간 영자는 소식이 없었다.
서울에서 같이 왔던 경숙이도 후에 일본군에 학살당하였다.
일본군이 지껄인것처럼 그들이 조선여성들을 성노예로 만들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죽이고도 무사했던것은 일본 정부와 군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죽음의 소굴에서 구사일생으로 도망하여 여러곳을 떠돌아다니며 매춘업자들이 운영하는 업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있던 "종군위안소" 처럼 보초도 가시철조망도 없었다.
"종군위안부" 만행은 매춘업자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당시의 일본당국의 조직적인 범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당국은 매춘업자들이 데리고 다님녀서 한 일이라고 발뺌을 하려 했으며 또 어느 얼빠진 어용신문은 "일본측의 감각으로서는 황당무계"하다고 부인하였다.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뻔뻔스러운 소리를 탕탕 떠들어댈 수가 있겠는가.
일본정부는 이제라도 온전한 감각을 가지고 억울하게 청춘을 빼앗기고 세상을 떠난 조선여성들과 살아있는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원한에 찬 절규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솔직히 반성하며 응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나는 일제의 "종군위안부" 강요행위로 인하여 단 한명의 자식도 없이 조카의 부양을 받고있으며 벌써 칠순을 넘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