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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 37. 날개 아래 모음 같이 - 마 23: 39. 나를 보지 못하리라.
7.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다 ( 23: 37-39. 눅 13: 34-35 )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여러 번 예루살렘을 감싸려 하셨으나 예루살렘 거민들은 하나님을 대항하고 회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 성은 최종적 회복의 때까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주의 재림의 때에 세상은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세상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영광스러운 회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이다. ( 자세한 내용은 저자의 성경종말론과 요한계시록을 참조하여주시기 바랍니다. jung8h@daum.net 로 신청하시면 보내 드립니다. )
* 계 21: 1-2 –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마 23: 37. 날개 아래 모음 같이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이 절은 23장 전체의 내용을 예수께서 직접 자신의 감정을 첨가하여 마무리 짓고 있다. 문장 형태는 탄식문 형태이다.
1]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반복하여 두 번 부름으로써 애절하고 격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태가 다른 곳에서 흔히 사용하였던 헬라식 발음으로서의 '예로솔뤼마'(*)가 아닌 히브리식 발음으로 민족적 동질성과 연대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할 수 있고 종교적 중심지로서 상징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의 이 탄식은 종교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백성을 향한 애정 어린 부름이다.
2]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평화의 성읍이요 하나님의 성전이었던 도성이 살인자와 반역의 도시로 변한 사실에 대한 예수의 엄숙한 개탄(慨嘆)이다(34절).
모세 율법은 사술, 우상숭배 등을 위시한 가증스런 범죄자를 돌로 쳐 죽이도록 명령하고 있다.
* 레 20: 27 -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 신 17: 5, 7 – 5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7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유대인들의 미쉬나(Mishnah, M. Sanhedrin 7:4)는 거짓 선지자들을 돌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이처럼 돌로 치는 일은 분노한 폭도나 사전에 계획된 공모(共謀)에 의해 이뤄지기도 했다.
* 마 21: 35 -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 행 7: 57-58 –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3]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이와 같은 표현은 사 31: 5. 36: 7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사 31: 5 -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 사 36: 7 -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이는 당시에 대중들이 잘 알고 있는 격언구 형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격언구는 사랑과 애정과 보호를 함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예수께서 갖고 있는 강렬하고 순결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애정을 하나님께서 품으시는 사랑과 일치시키고 있다.
4]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이 말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초월적으로 돌아보시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 요 8: 58 -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본문의 '몇 번이더냐'(how often)라는 말은 주어(主語)가 예수 자신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과 더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 기간에 마치 암탉이 독수리의 침입을 예상하고 자기 새끼를 바삐 모으듯이 예루살렘(모든 유대인들을 뜻하는 환유법적 표현)을 모아서 보호하려고 노력하셨다.
* 신 32: 11 -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 렘 48: 40 -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가 독수리 같이 날아와서 모압 위에 그의 날개를 펴리라.
비록 유대 지도자들을 책망하면서 심판과 화를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처럼 누구든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 겔 18: 32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따라서 예수는 1회만이 아니라 집요(執拗)하고도 끈덕지게 당신의 백성을 구원코자 하셨다.
5]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의미는 단지 그들이 원치 않는 수동적인 배척뿐만이 아니다. 비난과 공격 등의 적극적인 배척을 하였다는 것을 앞의 '죽이고', '돌로 치는'이라는 표현과 연관시켜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무모하게도 자신들의 멸망의 날을 앞당겼던 것이다. 정녕 하나님의 사랑을 영속적으로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정한 때에 극렬하고도 단호한 심판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 사 28: 1-2 – 1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마 23: 38. 너희 집이 -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
1] 보라. 너희 집이
헬라어로 '오이코스'(*)라는 단어는 '집'이라는 뜻 외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일반적인 '집'이나 '거처'를 뜻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신령한 성전으로서 기독교인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 딤전 3: 15 -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 벧전 2: 5 -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벧전 4: 17 -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나라나 가문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집을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예루살렘 성전을 나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전을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 마 24: 1-2 –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그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 렘 12: 9 - 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2)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적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국가의 멸망이다.
여하튼 예수를 끝까지 배척함으로써 버림받은 성전이나 국가는 '나의 집'이 아닌 '너희 집'이 되는 것이다.
2]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몇몇 고대 사본들에는 '황폐하여'라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이 말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황폐한'(*, 에레모스)이라는 단어는 '한적한', '사막', '버림받은' 등의 뜻으로 바로 이어지는 '버려진 바 되다'(*, 아피에타이)와 유사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예루살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 것이다.
* 마 1: 23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정녕 생명(生命)과 복(福)의 근원이신 예수가 '버려진 바 된' 곳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영영히 '황폐'될 수밖에 없다.
* 사 5: 5-6 –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을 거절한 결과는 황폐요, 파멸과 고생이며 죄의 값은 사망이다.
회개치 않으면 망할 것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마 23: 39. 나를 보지 못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1]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께서 여러 번 예루살렘을 감싸려 하셨으나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대항하고 회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 성이 하나님을 거절한 결과는 황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 회복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세상은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나타날 것이다. 역사는 이 세상의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의 영광스러운 회복이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 1-2에서,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며 또 아름답게 단장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였다. 그것이 성경이 증명하는 인류의 복된 최종적 상태, 곧 천국의 소망이다.
2]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이 구절은 시 118: 26을 인용한 문구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호산나'의 연호와 함께 사용된 구절이다(21: 9). 이 표현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예배드리러 온 자들에게 인사할 때 사용했던 말로 추측된다.
그런 점에서 성전의 주체요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도 존귀한 승리자로 오셨으므로 마땅히 모든 이들로부터 인사와 존경을 받아야 했다(France).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배열됨으로써 '까지'라는 말을 예루살렘 입성 때 곧 종려 주일(Palm Sunday)까지를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종려주일에 사람들이 이 말을 외쳐 여전히 종말의 완성을 고대하는 역설적인 성취(ironic fulfillment)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제부터'(*, 아프 아르티)란 말이 대부분 종말의 완성과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확실해진다.
* 마 26: 29, 64 –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3]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와 더불어 본 절의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부활 후의 예수의 출현(出現)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종말적 도래(Parousia)를 가르킨다고 본다.
* 행 10: 41 -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그런데 문맥의 전개를 고려해 볼 때 예수의 재림은 곧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 마 24: 30-31 –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 빌 2: 9-11 –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계 1: 7 –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인용된 시 118편의 구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고려할 때, 예수는 심판자로서 뿐만 아니라 환영받는 왕으로 재림할 것이다. (Benoit, Bonnard, Sohlatter).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지금껏 메시야를 배척해 온 잘못을 회개하며, 전 민족적으로 그들이 거절했던 메시야를 '호산나' 찬송하며 그분의 절대 권위를 승인(承認)할 것이다.
* 롬 11: 26 -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사 59: 20 이하)
* 슥 12: 10 –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로 인해 선민의 영광스런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
* 호 3: 4-5 – 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이것은 구약에 예언된 이스라엘 회복의 때이다. 이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때요,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 때이다.
그때가 있다. 인류 역사는 심판으로, 황폐와 파멸로 끝나지 않는다. 인류 역사는 미래에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로 끝날 것이다. 그 나라와 그 도시가 준비되어 있다.
* 계 21: 1-2 –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리스도인의 복된 소망이다. 베드로후서 3: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현재의 이 세상의 하늘과 땅은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 속에도 갖가지 불행한 요소들이 있다.
아름다운 하늘은 때때로 폭우와 폭설을 내린다. 각가지 먹을 것을 주는 땅은 때때로 화산과 지진으로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무서운 전염병들이 돌기도 한다. 바다는 때때로 사람들을 삼킨다.
이것들은 다 사람이 죄를 범한 후 하나님께서 주신 저주의 결과들이다.
* 창 3: 17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러나 현재의 하늘과 땅은 영원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다. 저주받은 죄악 된 세계가 지나가고 의와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신세계가 올 것이다.
(1) '새 하늘과 새 땅'은 사 65: 17과 66: 22을 반영한다.
* 사 65: 17 –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사 66: 22 -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논'(*)은 '시간적으로 최근이나 새로운'을 의미하는 헬라어 '네오스'(*)와는 달리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 (Johnson). 그러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갱신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 질서의 창조를 의미한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임재하사 그분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며,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이다. (Beasley-Murray, Johnson, Mounce).
* 계 21: 3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 벧후 3: 13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사 65: 17과 사 66: 22과 벧후 3: 13에서 언급한 때를 말하며, 아담에게 주신 에덴동산과 모세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천국(하늘나라)의 실체(實體)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한다.
* 고전 15: 26-28 –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 이 표현은 옛 모습에 대한 것이 아니다.
계 20: 11에서 눈에 보이는 세계는 이미 간데가 없어졌다. 이 표현은 21: 10의 "새 예루살렘"을 말한다. 이러한 새 모습(새 하늘과 새 땅)을 살펴보자.
① 새- 질적인 변화 - 갱신설.
새 하늘새 땅은사망이나 고통, 죄악이 존재하지 않은 성도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의미한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났던 에덴동산의 회복이다.
② 보니
역사적인 사실로 들어남으로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인 일이다.
* 벧후 3: 13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3) 옛 모습 -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앞서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과 대조를 이룬다. 본 절의 강조점이 '새 하늘과 새 땅에의 거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음을 나타낸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범죄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처음은 범죄 이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좇겨나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 땅을 의미한다.
이 하늘과 땅은 죄와 사망이 온전히 사라지는 종말론적 구속의 날을 고대한다.
* 롬 8: 31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처음 하늘과 땅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마귀가 공중 권세를 잡던 곳으로 성도들을 밤낮 참소했다. 처음 하늘이 새 하늘로 이루어질 때 마귀의 참소가 다시는 없게 된다.
* 엡 2: 2 -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계 12: 7-10 –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처음 땅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므로 저주받은 땅으로서 가시와 엉겅퀴가 났던 곳이었다. 그 땅에 저주가 풀리고 새 땅이 됨 같이 우리의 몸의 저주가 없는 새 땅과 같이 새 몸이 되자.
우리는 새 하늘의 영계 축복을 받아 마귀 참소가 없는 새 하늘의 영계 수준에 이르러야 하겠다.
* 사 25: 8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지금까지 입었던 옷을 벗어 던져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것과 같은 지금까지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다시 창조되는 것을 말한다.
* 히 1: 10-12 –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 전 1: 4 -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4)처음 하늘과 처음 땅
* 창 3: 14-24 –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 롬 3: 9-19. 23-27 –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5)없어졌다
* 벧후: 3: 10 -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고전 10: 1-11 –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① 바다 - 옛 세상
* 사 57: 20 -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 단 7: 3 -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연관된 것으로 '바다' 역시 지리적인 것이나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Johnson).
구악에서 '바다'는 악과 연관되어 비유되고 있다.
* 사 57: 20 -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본서에서는 사탄이 나오고 죽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 이해된다.
* 계 13: 1 -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 계 20: 13 -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이러한 사실은 '바다'가 악을 가리키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의 '바다도 있지 않더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옛 질서, 즉 타락과 죄와 사망으로 가득찬 질서와는 엄격하게 분리된 새 질서임을 시사한다(Ladd).
계시록에서는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이 나오고
* 계 13: 1 -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 계 20: 13 -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 바다의 물을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이라 했다.
* 계 17: 15 -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그러므로 바다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 존재하던 진리(眞理)의 세계를 말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 있었던 진리들이 모두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거짓 진리와 거짓 영과 거짓 복음(福音)의 바다가 다시는 없게 될 것을 말한다.
② 다시 있지 않더라.- 완전한 소멸
* 사 65: 17 –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6) 거룩한 성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① 하늘에서 내려오니
이것은 승리한 교회의 모습으로 하늘에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 성전은 하늘(성경)에서 만들어진 성전이요 하나님께로부터(말씀으로 건축된) 해산된 성전이라는 것을 말한다.
* 사 26: 1 -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 사 52: 1 -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② 예비한 것
* 사 61: 10 -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③신부
남편을 위하여 신부의 옷으로 단장한 성도로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아내라고 하였다. 어린 양의 아내는 세마포 옷을 입은 자다.
* 계 19: 8 -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는 성도(聖徒)들의 옳은 행실이니 새 예루살렘 성전이란 사도 선지자들과 평강(平康)을 이룬 사람을 말하고 있다.
(7) 단장 - 신부의 모양
'새' 역시 앞 절에서 사용된 단어 '카이넨'과 같이 질적(質的)으로 새로운 것을 말하니 새 예루살렘 성전은 땅에 있는 교회 성전과는 질적(質的)으로 다른 하늘의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성경(하늘)에서 일곱 날의 진리의 빛으로 만들어진 사람 성전이라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하늘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시어서 땅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 버리라고 하셨다.
* 요 2: 19-21 –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전이 창조되면 건물 성전이요 교회 성전들은 무너지고 사라지게 되면서 새로운 사람 성전이요 육체 성전의 세상이 열리게 된다.
* 갈 4: 24-26 –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때부터 교회 성전에 계시던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居)하시는 사람 성전이요 육체 성전의 세상이 시작되니 이것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셨다(계 21: 3-7).
(8)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① 성도들의 영원한 기업이다.
* 롬 8: 17 -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② 우리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곳이다.
* 롬 8: 18 -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③ 바울이 가 본 셋째 하늘이다.
* 고후 12: 1-4 –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④ 바울이 소망한 하늘의 영원한 집이다.
* 고후 5: 1-2 –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⑤ 아브라함이 바라본 성이다.
* 히 11: 10 -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⑥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처소다.
* 요 14: 1-3 –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9) 본 절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사용된 '새' 역시 앞 절에서 사용된 '카이넨'(*)으로 지상의 옛 예루살렘과는 달리 질적으로 변화된 하늘의 예루살렘을 암시한다.
본 절에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두 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능력과 수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곳은 죄와 사망과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분리된 곳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물이요 하나님의 거처이다. (Morris, Johnson).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할 때 새 땅에 내려왔다. 새 땅에 내려온 것은 영원 천국이 아니라 천년왕국이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다. 천 년 동안 왕노릇한다고 했는데 그곳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영원 천국에서는 왕 노릇한다는 개념이 없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평등한 관계라 하면 천년왕국은 상을 받고 유업을 누리며 왕 노릇하는 기간이다. 왕 노릇한다는 것은 천년왕국에서도 아직은 하여야 할 일이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성안에서의 왕 노릇이 아니라 성 밖에 있는 만국 백성들을 향해 왕 노릇하는 것이다. 그래서 땅에서 왕 노릇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②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본문의 남편과 신부의 비유는 새 예루살렘이 지리적인 것이거나 공간적인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남편과 신부'의 비유는 하나님과 백성 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 계 19: 7 -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 사 61: 10 -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구속받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의미하며 하나님과 백성 간의 교제를 암시한다. (Mounce, Kiddle, Ladd, Johnson).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린 양의 신부로 어린 양을 위해 단장하였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 (계 21: 2).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진 성이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말하고, 계시록에서는 신부(新婦)를 새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하면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여인을 어린 양의 아내라고 하셨다.
* 호 2: 19-20 –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 계 19: 6-8 –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신부(新婦)는 성도(聖徒)들의 옳은 행실(行實)로 만들어진 세마포 옷을 입은 자(계 19: 8)라고 하셨으니 성도들이란 사도 선지자들을 말하며 세마포 옷이란 사도 선지자들의 영과 진리로 만들어진 의의 옷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부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해산된 자요 사도 선지자들의 신앙(진리) 위에 세워진 자다.
* 엡 2: 20-22 –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늘에서 건축된 성전이라는 것을 말한다.
* 유 1: 20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 고전 3: 16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요 14: 20-23 –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4] 주님의 탄식
극진히 베푼 사랑이 여지없이 거절당했을 때 겪는 아픔은 실로 크다. 신음소리가 가슴에서 북받칠 만큼 그 아픔은 크다. 더우기 그 사랑을 거절한 상대방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빠지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면 그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플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보며 이같은 심정으로 탄식하고 계신다. 오늘 주님의 탄식을 다시 듣는 우리는 필연코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만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본문에서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파송한 사람들을 돌로 쳤다고 하였다. 일찌기 하나님께서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사 1: 2-3)라고 탄식하셨다.
그러나 이렇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마침내 그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에서 무한한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사랑마저 거절하였다.
(2) 예수님의 호소를 거절했다.
주님은 암탉이 위기에 처했을 때 황급히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보호하는 본능처럼, 죄악의 오점으로 얼룩져 위기를 면할 수 없게 된 예루살렘을 품에 보호하려 하셨다.
그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마 23: 37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강요하지 않았다. 사랑으로 호소하셨다. 예수님의 사랑의 호소를 받느냐 거절하느냐는 인간 편에서 선택할 문제였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결코 무책임할 수 없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 애타는 메시야의 호소를 거절한다면 어디가서 구원의 길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3)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의 완악한 마음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예수의 애끓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또 그의 수많은 역사와 증언에도 불구하고 완악해진 유대인들은 마음 문을 굳게 닫고 열 줄을 몰랐다.
인간의 마음 문은 외부에서 열 수 있는 손잡이가 없다. 내부에서 열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계 3: 20)이라고 말씀하셨다.
죄란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고의적으로 돌이키지 않는 완악한 마음과 거부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주님은 이 닫혀져 열릴 줄 모르는 완악한 마음으로 인하여 탄식하셨다.
(4) 황폐하게 버림받을 미래를 보셨다.
주님의 호소를 거절한 예루살렘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 불과 40년이 채 못되어 폐허 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메시야를 거절한 대가로 주어진 직접적 결과였다.
만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일지라도 주님의 애절한 복음의 호소를 거절한다면 예루살렘 성읍이 기초까지 초토화되었듯이 삶의 과정이 무력해지며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형벌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복음을 멸시하는 심령들을 바라보시며 그 미래가 너무도 참혹함에 안타까와 하시며 탄식을 하고 계신다.
(5) 이제 주님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호소를 듣고, 또 그의 제자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 마음 문을 열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오늘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늦지 않게 결단해야 한다. 주님의 탄식 소리가 내 영혼, 내 민족을 향해 지금 다시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죄로 물든 내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회개하며 내 마음 문을 열고 주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보시며 또다시 탄식하며 우시지 않게 지금 결단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 히 4: 16 -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외부적 성결보다 내면적 성결을 중시해야 한다.
외식자들은 위생적 성결은 지켰지만, 심령에는 탐욕과 불의가 가득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면적 성결이다.
둘째, 우리는 외부적 단장보다 내면적 단장을 중시해야 한다.
외식자들은 외모로는 아름답게 단장했으나 심령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였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셋째, 우리는 의인의 피를 흘리는 악을 행치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은 많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우리는 죄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그 반역의 정신을 조심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지옥의 판결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천국 백성으로 바르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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