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 때(지금으로부터 무려 8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화장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사다 준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선크림을 바르는 게 전부였다. 사실 선크림도 귀찮아서 안 바르고 다닐 때가 더 많았다.
어쨌거나 이땐, 꾸미는 걸 좋아하는 친구들이 드물게 반에 몇 명 있긴 했었다. 그렇지만 안 꾸미는 친구들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러다 열다섯 살이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내 가방 한 구석에는 에뛰드 틴트와 스킨푸드 비비크림이 기세 등등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헉! 뉘신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내 돈 주고 산 것들이 확실했다.
이때 사귀었던 친구들은 노는 걸 좋아했다. 꾸미는 것도 좋아했다. 아픈 사람 같아 보인다며, 친구들은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자신들의 틴트를 내게 빌려주었다. 심지어는 직접 발라주는 친구도 있었다.
다 같이 시내에 놀러 갈 때는 내게 화장을 해주기도 했었다. 그럼 예뻐졌다고 다들 좋아하며 웃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지만 친구들의 상냥한 배려를 뿌리칠 용기가 그땐 없었다. 그래서 난 친구들에게 기꺼이 물들여지기로 결심했다. 그럼 이상한 기분도 더 이상 느끼지 못할 테니까.
10분밖에 되지 않는 쉬는 시간에는 손거울 속의 나와 마주한 채로 다시 틴트를 바르고, 비비 크림을 바르고... 예습? 복습? 알게 뭐람. 난 화장품을 복습해야 하는데!
체육 시간에는 수행평가로 달리기를 실시하게 되면, 앞머리가 있는 친구들은 너도 나도 이마를 가리고서 뛰었다. 가슴이 큰 친구들은 그걸 부끄러워하며 뛰었다. 그럼 남자 애들은 킥킥대며 놀렸다. 그건 놀림감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럴수록 우리들은 한 없이 작아졌다.
"다리 라인은 예쁜데 종아리 알이 많네."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나는 그때부터 집에 있는 전신 거울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많아졌다. 종아리 알을 없애는 방법들을 검색해 따라 하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맥주병으로 종아리 알을 쉴 새 없이 밀었다. 학교에서도 틈만 나면 종아리 알을 '제발 좀 사라져라'하면서 주먹으로 때리고 손으로 주물렀다. 내 신경은 온통 종아리 알에 쏠려 있었다.
어쨌거나 그 한 마디 말로, 내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정신없이 바쁜 아침 시간에도 전신 거울 앞으로 가서 다리 상태를 체크해야만 했다. 밥을 한 숟갈 덜 먹게 될지라도, 지각을 면하기 위해 숨을 헐떡이며 뛰게 될지라도, 빼먹을 수가 없었다.
내 짝꿍은 점심시간에 매일 축구를 하느라고 피부도 그을렸고 허벅지에 근육도 가득하고 종아리 알도 볼록 튀어나와 있는데, 그 아이의 짝꿍이었던 나는 깨끗하고 하얀 피부가 되려고 노력하고 더 타지 않게 노력하고 종아리 알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데도 나와 그 아이는 너무나도 달랐다. 다르다는 사실을 그땐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엔 좀 더 완벽한 라인의 일자 다리가 되고 싶었다. 이유? 단순하다. 그게 예뻤으니까. 사람들이 예쁘다 정했으니까.
그래서 네이버 검색창에 일자 다리가 되는 방법을 검색해봤다. 안 쓰는 스타킹을 세 개를 각각 발목, 무릎, 허벅지에 풀리지 않도록 꽉 묶었다. 그걸 지켜보던 언니가 자기도 하겠다며 나를 따라서 묶었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언니는 답답해서 못하겠다고 스타킹들을 다 풀어 방구석으로 밀쳐버리고서 아주 편하게 잠을 잤다. 나는 오로지 예쁜 다리를 가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아주 불편하게 잠을 잤다.
일주일을 넘게 그러고 살았던 거 같다. 피곤했다. 예뻐지는 길은 멀고, 험하고, 몹시 피곤했다. 이때의 난 내가 어째서 예뻐지는 길을 걸어야만 하는지, 한 톨의 의심 조차 품지 못했다. 나의 작은 세계는 매 순간 코르셋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날에는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나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일회용 마스크를 구매해 화장을 하지 않은 날엔 마스크를 쓰고 학교를 다녔다. 안경을 쓴 상태에서 마스크까지 쓰자니 불편했다. 무언가를 먹을 때만 비로소 마스크를 벗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예쁘게 살아가야만 했다. 자기만족이라고 끊임없이 주문을 걸면서 예쁘고 아름답게 살아가야만 했다.
정말 이상하고 기괴한 일이었다. 원래의 난, 예전의 난, 아주 오래 전의 나는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던 거 같은데, 꿈이 참 많았던 거 같은데... 전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가버린 거지? 예쁘게 살아가는 거 말고, 더 중요하고 더 소중했던 게 있었던 거 같은데, 어디로 가버린 거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왜 훈녀 생정들을 밤새서 보고 뷰티 프로그램 방송을 챙겨봐야 했던 걸까. 왜 얼굴에 난 여드름을 가리려고 컨실러를 써야 했던 걸까. 왜 양악을 하고 싶어 했던 걸까. 왜 코 성형을 하고 싶어 했던 걸까. 왜 평균 체중인데도 다이어트를 하고 싶어 했던 걸까. 왜 음식을 씹고 뱉어야 했던 걸까. 왜 아침잠을 줄여가면서까지 화장을 했어야 했던 걸까. 왜 택시를 타는 한이 있더라도 렌즈를 끼고 화장을 하고 1교시 강의를 들으러 가야 했던 걸까. 왜 본연의 상태인 나를 아껴주지 못했던 걸까. 왜 본연의 상태인 나를 좀 더 사랑해주지 못했던 걸까.
첫댓글 와 진짜 내 학창시절 여기다있다...... 지금도 다 못벗어남 아직도 물음표로 남은게 너무많아
와... 진짜 탈코 결심함
나 몇달전까지만해도 양악할려고했는데ㅜ나년 반성한다
ㅈㄴㄱㄷ 근데 양악은 턱관절 장애 있어서 꼭 해야하는 사람도 있어!
@넌 여자가 이러면 정떨어져? 난 미용목적이였어ㅠ
@봄이당당다다다다다 아하 그렇다면 탈코 응원!!
종아리알... 예전에 친구들이 발로밟아서 터트려야한다해서 심각하게 고민했었는데 ㅅㅂ
나는 화장을하지않으면 왕따를당해서 화장을시작했다 힘들었어정말..
이따 읽어볼 것
'여자'의 외모에만 미친 나라
휴 진짜 난 예쁠 필요가 없는데 왜 예뻐지려고 했을까? 난 나대로도 괜찮아
난 진짜 나중에 입양하거나 정자은행 이용해서 애 낳으면 내 딸 페미니즘 교육 진짜 철저히 시킬거임... 딸 친구들도 다 모아서..
15에 화장 시작함 ㅅㅂ 그때 겟잇뷰티 렛미인 이런 거 유행이라 성인되면 성형하려고 견적냄
남자들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데 여자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