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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一. 길동이 몸이 천하다
옛날 저 이조시절에 있었던 일이었다. 한 재상이 있어 두 아들을 두었으니 맏아들의 이름은 인형이요 고담을 길동이라 불렀다. 마는 인형이는 그 아우 길동이를 그리 썩 탐탁히 여겨주지 않았다. 왜냐면 자기는 정실 유씨 부인의 소생이로되 길동이는 계집종 춘섬의 몸에서 난 천한 서자이기 때문이었다. 하인들까지도 길동이는 도련님이라 불러주지 않고 우습게 여기어 막 천대하였다.
이리하여 길동이는 저의 신세를 주야로 슬퍼하였다.
그러나 이 슬픔을 알아주는 사람은 다만 그의 아버지가 한 분 계실 뿐이었다. 그는 길동이를 낳으실 때 문득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진동하며 커다란 용이 수염을 거사리고 앞으로 달려드는 꿈을 꾸시었다. 뿐만 아니라 차차 자라며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만치 총기가 밝고 재주가 비범함을 보시었다.
「이 자식이 장차 크면 훌륭히 될 놈이야!」하고 아버지는 이렇게 가끔 속으로 생각하며 기뻐하셨다. 허지만 길동이가,
「아버지!」하고 품으로 덤석 안길제이면 그 아버지는 아들의 입을 손으로 얼른 막으며
「너는 아버지라 못한다. 대감이라 해야 돼」하고 은근히 꾸짖으셨다. 아들이 귀엽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러나 양반의 집안에서 서자가 아버지라 부르는 법은 없는 일이니 남이 들으면 욕을 할까하여 꾸짖고 했던 것이다.
二. 길동이 슬퍼하다
하루는 밤이 이슥하여 아버지는 사랑마당에서 배회하는 길동이를 발견하셨다. 푸른 하늘에 달은 맑고 정자에 우거진 온갖 나무들이 부수수 하고 낙엽이 지는 처량한 밤이었다. 그 나무 그늘에서 길동이가 달빛에 칼날을 번쩍이며 열심으로 검술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보시고 아버지는 이상히 여기시고 앞으로 길동이를 불러서
「너 초당에서 글을 안 읽고 왜 나왔느냐?」하고 물으셨다.
「달이 밝아서 구경을 나왔습니다」
「구경이라니 공부를 잘 해야 나종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느냐?」
「저는 천한 몸이라 암만 공부를 잘 해도 결코 훌륭한 사람이 못 됩니다」하고 길동이는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그 말이 무슨 속이 있어 함인지 다 짐작하셨다. 그러나 열두 살밖에 안된 아이의 소리로는 너무 맹랑하므로,
「네 그게 무슨 소린고?」하고 재우쳐 물어보셨다. 하니까 그 대답이 ——
「하늘이 만물을 내시되 사람이 가장 귀하오나 저만은 천한 몸이 되와 아버님을 아버님이라 부르지 못하고 형님을 또한 형님이라 부르지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앞으로 무술을 비워 나라에 공을 세우는 것이 남자의 일이 아닐까 하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푹 엎드리고 소리를 내여 슬피 통곡하였다.
아버지는 이 꼴을 가만히 나려다 보시다가 쓴 입맛을 다시며 언짢은 낯을 지으셨다. 이윽고 두 손으로 그 어깨를 잡아 일이키시며,
「천하에 서자가 네 하나뿐 아니니 슬퍼말구 어서 돌아가 자거라」하셨다.
길동이는 아버지의 엄명을 어기지 못하야 제 침소로 돌아오긴 했으나 좀체로 잠은 오지 않았다. 남은 아버지가 있고 형이 있고 하건마는 저는 아버지도 형도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성을 따라 홍길동이라 하면서도 그 아버지를 아버지라 버젓이 못 부르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어린 가슴이 메어질 듯하였다.
길동이는 날이 새이도록 자리 위에 엎드리어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로 이불을 적시고 또 적시고 하였다.
이러는 중에 그 형 인형이는 길동이를 죽이기로 하여 뒤로 음모를 시작하였다. 길동이의 재주를 보매 비상할 뿐 아니라 용한 관상재이를 불러 상을 뵈고 나니 그 말이,
「지금은 말씀 드리기가 어렵습니다」하고 매우 거북한 낯을 드는 것이다.
「그래두 바른대루 말 해봐」하고 뒷말을 재촉하니 그제야 옆으로 가까이 다가앉으며
「후일에 왕이 되실 상이외다」하고 귓속말로 나직이 대답하였다.
「뭐?」하고 인형이는 깜짝 놀라서,
「그런 소리는 입 밖에도 내지 마라. 죽인다」하야 돈을 던져준 뒤에 호령을 해서 쫓아버렸다.
인형이네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살아오는 명문거족(名門巨族)이요 게다가 홍문까지 세운 충신이었다. 길동이가 만일에 엉뚱한 생각을 먹고 난리를 일으킨다면 온 집안이 역적으로 몰릴 것이요 따라 빛나든 문벌이 고만 망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하고 인형이는 길동이를 죽이어 없애고자 결심했든 것이다.
三. 길동이 집에서 없어지다
길동이가 촛불을 켜놓고 글을 읽고 있노라니 문득 공중에서 까마귀가 세 번을 울고 지나간다. 밤에는 까마귀가 우는 법이 없는데 이게 웬일인가, 생각하고 점을 쳐보았다. 하니까 역시 오늘 밤이 제가 칼에 맞아서 죽을 수였다.
길동이는 요술을 써서 얼른 몸을 피하였다.
조금 있더니 과연 방문이 부스스 열리며 시퍼런 칼날이 들어오지 않는ㄴ가. 그리고 그 뒤리를 이어 엄장이 크고 수염이 무섭게 뻗친 장사 하나가 눈을 부라리고 들어온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길동이가 종시 보이지 않으므로 방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그때 길동이의 입에서 뭐라뭐라고 진언이 몇 마디 떨어지자 별안간 난데없는 바람이 일고 방은 간 곳이 없다. 장사는 뒤로 주춤하고 몸을 걷으며 눈이 휘둥그렇다. 여기를 보아도 산, 저기를 보아도 산, 앞뒤좌우가 침침하고 험한 산에 둘러싸인 것이 아닌가. 이게 기필코 길동이의 조화이리라 생각하고 그는 제 목숨을 아끼어 산길로 그냥 도망질을 쳤다. 마는 얼마 안가서 길은 딱 끊치고 층암절벽 앞에 내닥쳤으니 한 발만 잘못 내 디디면 떨어져 죽는다.
그러나 어디선가 퉁소 소리가 나더니 한 아이가 나귀를 타고 나타났다. 장사의 옆을 늠름히 지나가며,
「네 어째서 나를 죽이러 왔느냐,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너에게 천벌이 있을 것이다」 하고 점잖이 호령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모진 바람이 일더니 억수같이 퍼붓고 돌이 날아들고 하는 것이다.
장사는 돌에 맞을까 겁이 나서 두 팔뚝으로 면상을 가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일개 장사로서 조그(고)만 아이에게 욕을 당하는 것은 너무나 분한 일이었다.
「네가 길동이지, 이놈 내 칼을 받어라」
장사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와닥닥 달려들자 그 시퍼런 칼로 길동이의 목을 내려쳤다. 이것이 실로 이상한 일이라 안 할 수 없다. 그 칼이 내려지면서 길동이는 간 곳이 없고 도리어 장사의 목이 제 칼에 툭 떨어지며 바위 아래로 구르는 것이 아닌가.
이날 밤 인형이는 정자나무 밑에서 서성거리며 일이 어떻게 되었나, 하고 꽤 궁금하였다. 약속한 시간에도 장사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이내 길동이의 방까지 일부러 와 보았다. 방문을 열고 고개를 디미니 길동이를 죽이겠다고 장담하던 장사의 목이 요강 옆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길동이는 어디로 갔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는 길동이가 무슨 술법이 있는 것을 알고 그길로 얼른 제 방으로 돌아와 문의 고리를 걸었다.
四. 길동이 도적괴수가 되다.
깊고 험한 산속이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빽빽이 들어 박혔고 그 위에는 어여쁜 여러 가지 새들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한 옆으로는 까맣게 쳐다보이는 큰 폭포가 우렁찬 소리로 콸, 콸, 나려 찧는다.
그 폭포 위의 바위에 여러 장사가 모여 앉아서 잔치를 하고 있다. 엄장이 썩 크고 우람스럽게 생긴 것들이 더러는 술을 마시고 더러는 무슨 의론을 하는 중이다. 이것이 조선에서 유명한 도적의 소굴이었다.
머리털이 하늘로 뻗친 한 장사가,
「그러나 우리들에게 괴수가 있어야지, 오늘은 꼭 정해 보세」하니까, 그 옆에 앉았던, 눈 한 쪽이 먼 장사가,
「암 그렇지 그래, 괴수가 없이야 어디 일을 할 수가 있나?」
「그렇지만 저 돌을 드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하고 이번에는 뺨에 칼 자죽이 있는 다른 장사가 손을 들어 저편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거진 집채 만한 무지한 바위가 하나 놓였다. 이 돌을 능히 들어야 비로소 도적들의 괴수가 될 자격이 있다. 마는 그렇게까지 기운이 세인 장사들이 모였건만 하나도 이 돌을 감히 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입때껏 괴수를 정하지 못하였다. 도적들이 술에 취하여 떠들고 있노라니까 등 뒤의 돌문이 부시시 열리며 웬 아이가 들어온다. 여간 힘으론 못할 텐데 항차 아이가 돌문을 열고 들어오므로 모도들 눈이 뚱그랬다. 그리고 그 관상을 봐한 즉 범상치 않은 아이임을 대번에 달고 앞으로 불러,
「네 누군데 여길 들어왔느냐?」 하고 물어보았다.
「네, 나는 홍길동입니다. 지나가다가 경치가 하도 좋아서 구경을 들어왔습니다」 하고 그 아이는 조금도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암만 보아도 그 풍채며 음성이 여느 사람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나무 그늘에 앉았던 한 도적이 무엇을 생각하였음인지
「네 그럼, 저 돌을 한 번 들어볼테냐?」하고 턱으로 아까의 그 바위를 가리켰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바위 앞으로 가더니 두 손으로 어렵지 않게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성큼성큼 몇 발짝을 걸어가서는 산 아래로 그대로 내던졌다. 큰 바위가 나려 구르는 바람에 우지끈뚝딱, 하고 나무들이 꺾이고 쓰러지고 이렇게 요란스리 소리를 내었다.
도적들은 경탄을 하고 그 앞에 엎드리어,
「우리들의 괴수를 정할래두 저 돌을 드는 사람이 없드니 장군께서 오시어 처음 드셨습니다. 원컨대 우리들의 괴수가 되어줍시사」하고 절을 하였다. 그리고 아이에게 술을 들어 권하고 돼지고기를 바치고 퍽들 기뻐서 야단이다.
얼마를 흥들이 나서 뛰놀다가 한 도적이 말 하기를
「우리가 몇 달 전부터 해인사(海印寺) 절의 보물을 훔쳐오랴 하다가 재주가 부족해서 못 했으니 장군께서 힘을 모아줍시오」
「염려마라, 그대들은 그럼 나의 지휘대로 해야 할 것이다」하고 길동이는 쾌히 승낙하고 주는 술잔을 또 받아 들었다.
五 . 길동이 해인사를 치다
길동이는 천연스럽게 부잣집 도련님같이 의관을 차리고, 해인사로 찾아갔다. 물론 그 양 옆에는 그것도 칠칠하게 옷을 잘 입은 하인이 둘씩이나 따랐다.
해안사라는 절은 산속 깊이 들어앉은 굉장한 절이었다. 중들은 문간까지 나와 길동이를 공손히 맞아드렸다. 그리고 얼굴 둥그런 우두머리 중이 그 앞에 와 절을 하며,
「어데서 오시는 도련님이십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서울 홍판서댁 아들이다. 느이 절에 와 공부를 좀 하랴하니 조용한 방을 하나 치워주기 바란다」
길동이는 이렇게 말을 하다가, 중이
「네 곧 치겠습니다」하고 물러갈랴 하니까
「아니 지금이 아니라 사흘 후의 말이다. 그날 쌀 스무 섬을 가져와 너희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랴하니 음식도 정히 만들어주기 바란다」하고 다시 혼란스러이 하인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중들은 기뻐서 그날부터 방을 치고 마당을 쓸고 하였다. 재상가의 아들이 와서 공부를 한다니까 여간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무슨 큰 수나 생긴 듯이 서로들 수군거리며 손이 올 날을 기다렸다.
어느 듯 세 밤이 지났다.
점심때 쯤 되자 절 마당에는 큰 쌀섬 하나씩을 짊어메고 하인들이 몰려들었다. 이십여 명 하인들이 다 들어오고 나서 그 뒤에 길동이가 지팡이를 천천히 끌고 들어온다.
여러 중들은 버선발로 뛰어 내려와 길동이를 방으로 맞아 들였다.
「먼 길 오시느라구 얼마나 고생을 하셨습니까」
「고생은 없었으나 시장하니 저 쌀로 곧 음식을 차려주기 바란다」하고 길동이는 정말 배가 고픈 듯이 힘없이 자리에 쓰러졌다.
중들은 말짱 내려와 팔들을 걷고 밥을 짓는다, 찬을 만든다, 하며 분주히 돌아다녔다. 음식이 된 다음 우선 길동이 앞에 떡 벌어지게 차린 교자상 하늘 곱게 갖다 놓았다. 하인들과 중들은 마당에다 멍석을 깔고 거기들 삥 돌아앉아서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몇 숟갈을 안 떠서 길동이는 딱, 하고 돌을 씹었다.
「이놈! 음식을 이리 부정히 해놓고 먹으래느냐? 」하고 대뜸 눈이 빠지게 호령하였다.
중들은 너무 황송하여 밥들을 입에다 문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벙벙하였다. 대미쳐 길동이는 잡았던 수저로 상전을 우려치며
「이놈들! 너희 놈들은 죄로 볼기를 맞아야 한다」하더니 제가 데리고 온 하인들을 돌아보고는
「얘들아! 저놈들을 묶어놓아라」하고 영을 내렸다.
하인들은 우 달려들어 굵은 밧줄로 중들을 하나씩 꼭꼭 묶어놓았다.
그러자 대문 밖에 숨어 있던 여러 도적들이 쭉 들어서서 광을 뒤지는 놈, 다락엘 올라가는 놈, 뭣해, 있는 보물이란 모조리 들고 나섰다. 그리고 길동이 하인들과 한패를 지어 산 아래로 달아났다.
그러나 중들은 일어나진 못하고 이걸 보고서 괜스레 자꾸 소리만 내질렀다.
「도적이야!」
「저놈들 잡아라, 보물 훔쳐간다」
六 . 길동이 함경감사를 골리다
이때에 함경감사는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서 제걸 만들고 그걸로 부자가 되었다. 그래도 백성들은 아무 말 못하고 그가 받치라는 대로 돈을 받치고 쌀을 받치고, 이렇게 무턱대고 자꾸 뺏기었다. 왜냐면 감사의 영을 거역하면 붙들려가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하는 까닭이었다.
길동이가 이걸 알고 하루는 부하들에게 말하되,
「내 먼저 갈게니 사흘 후 함경 땅으로 만나자」하고 저 혼자서 길을 떠났다.
사흘 동안을 타달타달 걸어서 함경 땅에 비로소 닿은 것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질 때였다. 길동이는 허리도 아프고 기진해서 풀밭에 드러누워 밤들기를 기다렸다.
캄캄하게 어두웠을 때에야 다시 일어나서 남문 밖에 있는 솔밭에다 불을 질렀다. 불꽃은 하늘을 뚫을 듯이 무서운 세력으로 활활 타오르며 사방을 벌겋게 물들였다.
성안에 있던 백성들은 모도들 놀라며 남문 밖으로 뛰어 나왔다. 이 불을 그냥 두었다가가는 성안에까지 번져서 재물이 타고 사람들이 죽고 할 것이다. 그들은 통을 물을 퍼 나르며, 그 물을 받아 끼어 얹으며, 일변 아우성을 치며,
「여기다, 여기부터 껴얹으라」
이렇게 불끄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였다.
이런 틈을 타서 길동이는 조금 전에 와 기다리고 있던 부하들을 데리고 텅 비인 성안으로 들어섰다. 함경감사의 집은 성 한 복판에 섰는 크고 우뚝한 기와집이었다. 그 집을 찾아가 광을 때려 부수고 쌀 돈 할 것 없이 죄다 구루마에 싣고 북문으로 곧장 달아났다.
길동이는 북문을 나올 제 조히에다 활빈당(活貧黨) 홍길동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였다. 활빈당이라 하는 말은 굶은 사람을 도와주는 무리라 하는 의미다.
한 삼십 리쯤 구루마를 끌고 가다가 길이 어두워서 더는 갈 수가 없었다. 동이 트거든 가자, 생각하고 멀리서 불이 반짝거리는 인가로 찾아갔다.
「여버시유! 하루 밤 쉬어 갑시다!」하니까 한 농부가 나오더니
「네, 어서들 들어오십시오」하고 친절히 맞아드린다.
도적들은 너무 벅찬 일들을 하였기 때문에 배가 몹시 고팠다. 안마당으로 들어들 가며
「여보 주인! 우선 밥을 좀 먹게 해주」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상투를 긁으며 퍽 미안해하는 낯이더니
「황송합니다마는 밥은 안 됩니다. 저희들도 쌀이 없어서 이틀 째 굶습니다」하고 무슨 죄나 진 듯이 머리를 숙이었다.
길동이는 이 소리를 듣고 가난한 동리로군,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이 쌀과 돈을 풀어서 동리 사람들에게 똑 같이 나눠주어라」하고 분부하였다.
부하들은 구루마에서 짐을 내려 쌀을 푸고 돈을 세고 하였다. 그리고 남은 사람은 그것을 받아서 집집마다 한 몫씩 문간에다 갖다 놓았다.
주인은 이게 꿈이나 아닌가 하고 얼이 빠져서 섰다가 제몫으로 쌀과 돈을 받고는
「정말입니까, 이게 정말입니까?」하고 물으며 수없이 절을 하고 또 하고 하였다.
七 . 길동이 죄로 잡히다.
나라에서는 홍길동이라 하는 도적이 있어 온갖 재물을 훌몰아간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곧 잡아들이라, 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나 하나도 잡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날마다 길동이에게 도적맞았다는 소식만 오고하는 것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홍길동이라는 도적이 조선 팔도에(지금은 십삼도지만 예전에는 팔도이었다) 하나씩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똑 같은 홍길동이가 한날 한시에 여덟 군데서 도적질을 해 가는 것이다.
임금님은 홍길동이를 못 잡으시어서 은근히 골머리를 앓으셨다. 그러나 우연히 홍길동이란 아이가 전 이조판서 홍모의 서자임을 아시고 그날로 당장 인형이의 부자를 붙잡아 들이게 하시었다.
길동이 아버지는 우선 옥에 가두고 인형이를 불러서
「홍길동이라는 도적이 너의 서동생이지?」하고 손수 물으셨다. 인형이는 죄송하여 이마를 땅에 붙이고
「네, 저의 서동생이올시다, 어려서 집을 떠나 생사를 모르더니 인제 알고 보니까 도적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즈 애비는 글로 인하여 저러케 병이 위중하게 되었습니다.」하고 대답을 여쭈었다.
「그럼 느이들이 냉큼 잡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느 부자를 구양을 보낼 터이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저 애비만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인형이는 이렇게 임금님께 다짐을 두고서 그 길로 곧 함경 땅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길동이의 신변을 염려하여 병환이 나고 늘 ㅇㅇㅇㅇ 신음하시는 중이었다.
그 몸으로 귀양을 가신다면 생명이 위험하실 것이다. 그럼 아버지의 병환을 위하여 또는 여지껏 충신이던 문벌을 위하여 하루 바삐 길동이를 아니 잡을 수 없다.
그러나 길동이에게는 극히 교묘한 재주가 있다. 그대로는 감히 잡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함경 땅에 와서 궁리궁리 하였다. 그 끝에 함경읍 사대문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붙였다.
길동이 보아라, 아버지는 네가 집을 나간 후 생사를 몰라 병환이 되시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몸으로 너의 죄로 말미암아 옥중에 가 계시다, 너에게도 부자지간의 천륜이 있거든 일시를 지체 말고 나의 손에 와 묶기기를 형으로서 바란다 —— .
인형이는 읍내의 집 하나를 종용히 치고 길동이가 찾아오기를 매일같이 기다렸다. 어느 날 혼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니 한 손님이 찾아왔다. 얼른 보니 의복은 비록 어른과 같이 차렸으나 아직도 어린 티가 보이는 길동이 아닌가 ——
「네가 길동이가 아니냐?」하고 인형이는 그 손목을 붙잡자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그리고 한참을 지난 뒤에
「그 전 일은 모도 내가 잘못했다. 지금 아버지가 병환이 위독하시니 너는 잘 생각하야 내 손에 붙잡혀 주기 바란다」하고 슬피 애원하였다.
길동이는 아무 말 없고 다만 맘대로 묶으란 듯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인형이는 그 손을 쇠사슬로 잘 묶어가지고 그날로 서울을 향하여 떠났다.
길에서 길동이가 잡혀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도들 구경을 나왔다.
「저 어른이 도적의 왕 길동이시다」
「저 양반이 우리에게 쌀을 논아주신 길동이시다」 하고들 수군거리며 어떤 사람은 그 옆을 지날 제 절을 하는 이도 있었다.
八. 여덟 길동이 대궐에 오다
대궐 안으로 인형이가 길동이를 끌고 들어서니, 놀라운 일이라, 다른 사람이 또한 길동이를 묶어가지고 들어온다. 그리고 조금 있더니 또 다른 길동이가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이렇게 하여 순식간에 궁전 앞뜰에는 여덟 길동이가 쭉 들어섰다.
거기에 모여 섰던 대신들은 눈들을 크게 뜨고 벙어리같이 벙벙하였다.
임금님도 크게 놀라시며
「이놈들! 대체 어떤 놈이 정말 길동이냐?」하고 된통 호령을 하시었다. 그러니까 여덟 길동이가 제각기 서로
「네가 정말 길동이지, 난 아니야 —」하고 밀면 이번에는
「제가 정말 길동이면서 괜히 날 보고 그래」 하고 성을 내인다. 마는 얼굴도 똑 같고 키도 똑 같고 심지어 그 음성까지도 조금도 다른 곳이 없었다.
노하셨던 임금님도 하 기가 막히어 멀거니 넋을 잃으셨다. 그리고 한참 궁리 하시다가 급기야 길동이의 아버지를 옥에서 뜰로 끌어내게 하셨다.
「애비면 알 터이니 정말 길동이를 찾아내어라 ——」
「네 황송합니다. 제 자식 길동이는 왼쪽 다리에 붉은 점이 있사오니 곧 찾아내겠습니다.」하고 아버지는 병에 야윈 해쓱한 얼굴을 땅에 박고 절을 하더니 길동이를 돌아보고는,
「이놈! 여기에 임금님이 계시고 또 느이 애비가 있는데 발칙스리 이놈!」
하고 호령은 했으나 그 자리에 피를 쏟고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병으로 가뜩이나 쇠약한데다가 또 내 자식이 왕께 죄를 졌구나 하는 원통한 생각에 고만 기절되고 만 것이었다.
여러 대신들은 대경실색하여 일변 물을 떠다 먹인다 혹은 사지를 주물러준다 하며 모도들 부산하였다.
임금님도 가만히 보시다가 가엾이 여기시고 당신이 잡숫는 명약까지 갖다 먹이게 하셨다. 그래도 피어나질 않고 그냥 꼿꼿이 굳고 말았다.
그제서야 여덟 길동이가 제각기 주머니를 훔척훔척 하더니 환약 하나씩을 꺼내들고 저의 아버지의 입에다 차례차례로 넣어주었다. 하니까 죽었던 아버지가 기지개를 한 번 쓱 하고는 그리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이때에 여덟 길동이가 임금님 앞에 나와 공손히 절을 하고는 하는 말이
「임금님께서 길동이를 잡고자 하셨으나 실상은 아무 죄도 없사외다. 백성들의 피를 긁어먹고 사는 감사들의 재물을 뻿아다가 빈한한 농민에게 풀어주었으니 그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앞으로는 저를 잡으려 하시던 그 명령을 걷어주시기 바라나이다」
그리고는 여덟 길동이는 하나씩 둘씩 땅에 가 벌떡벌떡 나가자빠지고 만다.
임금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입을 멍하니 벌리었다. 왜냐면 곧 달겨들어 쓰러진 길동이를 암만 뒤져보니 정말 사람 길동이가 아니라 죄다 짚으로 만든 제웅이었던 까닭이다.
九. 길동이 조선을 뜨다
그것은 꽃들이 만발한 그리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장안 백성들은 사대문에 붙은 이상스러운 종이를 쳐다보며 입입이 수군거리고 하였다. 그 종이에는 이러한 글이 씌어져 있었다.
홍길동이는 암만해도 못 잡는 사람이니 그의 소원대로 병조판서(兵曹判書)의 벼슬을 시켜 주시라. 그러면 임금님의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마지막 하직을 여쭙고 부하들을 데리고 멀리 조선을 떠나리라 ——.
대신들은 이것을 보고 서로 의론하여 보았다. 홍길동이 이놈을 제 원대로 병조판서를 시켜주면 그 은혜를 갚고자 대궐로 하직을 올 것이다. 그때 문간에서 여럿이 도끼를 들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려할 제 달려들어 찍어죽이면 고만이 아닌가 ——
임금님께 이 뜻을 아뢰고 그날 저녁때로 사대문에 방을 붙이게 하였다.
홍길동이에게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리셨다. 낼로 와 인사를 여쭈어라 ——
그 이튿날 점심 때가 좀 지내서이다. 남문으로 한 도련님이 나귀를 타고 들어오니 이것이 즉 길동이었다. 군중은 길동임을 대뜸 알고 서루 눈짓을 하여
「저 양반이 길동인데, 잡힐랴고 저렇게 들어오나?」
「아니야 지금 병조판서를 하러 들어오신다」하고들 경사나 만난 듯이 쑥떡쑥떡 하였다.
그런 가운데로 지나며 길동이는 자랑스럽게 떡 버티고 궁전으로 들어갔다. 임금님 앞에 가 절을 깍듯이 하고나서
「저의 죄가 큰 데도 용서하시고 병조판서까지 나리어 주시니 너머나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지금 곧 멀리 조선을 떠나겠나이다」하고 마지막으로 하직을 하였다.
대문 뒤에서는 길동이 나오기를 고대하여 손에 땀이 나도록 도끼를 힘껏 잡고 있었다. 그러다 길동이가 문간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머리 위에 내려지도록 도끼를 꼭 겨냥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길동이는 어느 틈에 알았는지 문간까지 한 서너 발자욱을 남기고 공중으로 후루루 솟아 흰 구름을 타고 가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고개를 들고 닭 쫓던 개 모양으로 하늘만 멀뚱이 쳐다보았다.
임금님도 그제야 길동이의 참 재주와 그 인격을 알으시고 비로소 뉘우치셨다. 저런 길동이를 신하로 데리고 일을 하였더라면 얼마나 행복이었을까, 또는 얼마나 정사를 편히 할 수가 있었을까 —— 이렇게 생각하시고 옆에 서 있던 신하에게
「홍길동이를 한 번 더 보고 싶다」하고 멀리 놓쳐버린 길동이를 매우 아깝게 말씀 하셨다.
(끝)
원전 科學敎育雜誌『新兒童』 제 2호 1935. 10
朝鮮兒童敎育會內 新兒童社(편집겸 발행인 金癸得)
인용출처 : 『근대서지』. 근대서지학히 반년간. 2012.제 5호. 소명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