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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과 화성
유 봉 학 (한신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一)
1800년 6월 28일, 원대한 정국구상 실행의 서막에서 불의의 병마로 정조(正祖; 1752 - 1800)는 서거하였다. 아직 50 미만의 아까운 나이로 그의 가슴에 피맺힘으로 남았던 수십 년 회한(悔恨)을 미처 다 풀지 못한 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1762년 아버지를 여읜 이후 죄인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썼던 정조가 갖은 파란 끝에 할아버지 영조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1776년이었다.
정조는 선대 이래의 탕평정치(蕩平政治)를 계승하되, '우현좌척(右賢左戚; 士林을 등용하고 戚族을 배제함)'과 '우문지치(右文之治; 학문에 입각한 정치)'의 개혁적 명분을 전면에 내세워 정국을 새롭게 이끌어 가고자 하였다.
그는 영조대 52년 간의 정치적 폐단을 절감하여 정국운영에서 척족 등 특권세력을 배제하고 규장각(奎章閣)을 세워 학문정치(學問政治)의 기틀을 다지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를 모색하였다.
당시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등 일군의 학자들이 표방하였던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모범으로 새로운 것을 창안함)'의 지향성은 전통적 토대 위에서 변화를 추구하던 정조대의 문화적 분위기 일반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집권 초기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하여 정치적 기반을 확보해갔던 정조가 자신의 오랜 숙원 중 하나인 사도세자 묘소 이전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은 즉위 후 무려 13년이나 지나서 였다.
긴장의 세월 속에 끈질기게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던 정조는 1788년 득의의 삼상체제(三相體制)를 출범시키고, 노론 소론 남인 삼당(三黨) 간의 상호견제구조를 수립하였다.
그리고는 이듬해 1789년 7월, 전격적으로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뒷산) 아래에 있던 사도세자의 초라한 묘소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한다는 천하명당 자리에 옮겨 여기에 왕릉에 버금가는 위격을 갖추어 놓음으로써 왕권의 정통성 시비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는 강화된 왕권을 토대로 정조 치세(1776 - 1800) 24년의 후반을 여는 획기적 사건이었으며, 화성 신도시 건설이라는 다음 단계의 야심찬 사업으로 이어졌다.
정조는 사도세자 묘소 이전 이후 다시 5년을 기다려 1794년부터 10여 년 후를 바라보는 장기적 정국구상 위에 중흥을 맞았던 조선의 국력을 기울여 화성 신도시 건설사업(華城城役)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실상 화성성역을 시작한 1794년은 정조로서는 대단히 뜻깊은 해였다. 이 해는 국초(國初)의 한양 정도(漢陽定都 - 1394년)로부터 4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사도세자가 살았다면 혜경궁 홍씨와 함께 육순(六旬)을 맞았을 해이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 해를 맞아 한양에 비견할 만한 신도시를 건설하려 10년 계획으로 화성성역을 시작하게 된다.
1794년으로부터 10년 후인 1804년, 갑자년(甲子年)은 어머님인 혜경궁이 칠순(七旬)을 맞는 해이며,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을 옮기고서 명당의 효험인듯 바로 얻게된 왕세자가 15세 성년(成年)이 되는 해였다.
정조는 갑자년이 되면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구상을 가지게 된다.
그는 개혁의 시범도시 화성에서 사회경제적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상왕(上王)으로서 배후에서 정치적 영향럭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할아버지 영조의 간곡한 당부 때문에 자신이 이룰 수 없었던 사도세자의 추숭(追崇)을 신왕(新王)으로 하여금 이루어 내도록 하는 등 정치적 숙원도 실현하고자 의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화성건설에는 정조의 각별한 정성이 기울여졌다. 중흥의 극점을 맞았던 정조대의 문화적 역량이 총동원되어 화성은 애초 10년 계획을 2년 반으로 앞당겨 정조 즉위 20주년인 1796년 10월에는 그 빛나는 웅자(雄姿)를 드러내었다.
전장 6km의 성곽과 600칸에 달하는 화성행궁(華城行宮), 그리고 5천 호를 포용할 수 있는 도시 및 생산기반시설을 갖춘 첨단 신도시로서 화성은 정조의 꿈과 원대한 정치적 구상, 그리고 신민(臣民)들의 지혜와 노력의 결집체였다.
그러나 왕조 중흥의 표상이자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서, 또한 장차 상왕으로 군림할 정조의 정치적 근거지로서 건설되었던 이 웅대한 도시는 갑자년까지 불과 4년을 남긴 채 정조가 서거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의 혼백만이 깃든 '꿈과 비원(悲願)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二)
정조와 휘하의 관료학자들은 한양 정도 이후 꼭 4백년만에, 그를 의식하며 그에 비견할만한 새로운 개념의 신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수원은 성곽도시로서 외관의 일신 외에도,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여 여러 기능을 갖춘 자족적(自足的) 대도시를 지향하였으며 건설과정에서는 미래지향적 방안이 강구되어 실천되었다.
우선 수원에는 유수부(留守府)를 두어 서울 외곽의 개성 강화 광주와 함께 4유수부의 하나로 그 행정적 위상을 높였다.
게다가 이곳에 장용외영(壯勇外營)을 두어 서울 외곽 방어의 핵심 기지가 되고, 국왕의 친위군단인 장용영(壯勇營)의 강력한 군대가 여기에 집결되어 어느 지역보다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부상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 시기 조선의 도시 발달과 수도권 확대, 그리고 상업발달의 추세에 부응하여 수원을 상업도시로서의 성격을 가진 서울 남부의 대도회로 키우려는 실질적 시책들을 마련하였다.
삼남(三南)으로의 요로(要路)인 이곳으로 새로운 교통로를 내고, 정약용(丁若鏞)과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 진보적 지식인들의 구상을 대폭 수용하여 여기에 전국적 규모의 시장과 상점을 개설하고, 국제무역과의 연관을 고려하면서 상인들을 유치하며 인구를 집중시켰다.
수원 인근의 지주들이 화성 내에 모여살도록 하는가 하면, 양반층도 상업에 종사하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당시 농업의 발달을 의식하여 선진적인 농업생산 시설을 수원에 시범적으로 설치하였다.
수원 북쪽에 만석거(萬石渠 - 정자동 일왕저수지, 일명 조개정방죽)라는 저수지를 파서 관개시설을 갖추고, 인근에 드넓은 국영농장 둔전(屯田, 大有屯 일명 北屯)을 설치하여 최신의 농법과 협동농업으로 선진적 영농을 시도하는 등 농업진흥책을 강구하여 실천하였던 것이다.
이 만석거와 대유둔의 성공은 곧이어 1798년 만년제(萬年堤)와 1799년 축만제(祝萬堤, 일명 西湖) 설치 및 축만제둔(祝萬堤屯, 일명 西屯) 경영으로 확대되어, 우리나라 농업사 및 농학사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되고, 오늘날 수원이 농업연구 중심도시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화성성역 과정에서는 수원의 자연조건에 유의한 치수책(治水策)으로 수원천을 준설하고 여러 저수지와 연못을 마련하였다.
여기에는 인공적 구조물을 설치하고 많은 수목을 계획적으로 심어서 이들 시설이 실용적 기능을 발휘하면서도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도록 구상하였다.
화성 안팎의 인공적 시설물들은 군사시설이자 도시기반시설로서 평상시와 유사시의 복합적인 기능을 가지면서도 수원의 자연과 어울리는 외관을 가지도록 하여, 이들이 수원 춘팔경(春八景) 추팔경(秋八景)과 수원팔경(水原八景) 등 여러 명승이 됨으로써 수원은 언제나 활기와 아름다움이 가득찬 자족적 신도시로 태어났던 것이다.
신도시 화성은 조선왕조의 발전방향이나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중흥을 맞이한 조선의 사회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전성을 상징하듯 건설되었다.
화성성역 과정에서는 당시 조선사회가 당도했던 여러 변화를 받아들여 그 성과를 활용하는 현실주의적 지향성이 나타나고, 중흥의 극점에 올랐던 정조대 문화예술과 사회경제, 과학기술 발달의 모든 성과들이 반영되었다.
정조대의 새로운 문화건설 방향이었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향성, 곧 전통적 토대 위에 외래의 새로운 요소를 적절히 접합시키는 창의성이 화성건설의 한 특징이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화성성역의 전과정을 기록 정리하여 세계에 유례없이 방대하고도 세밀한 자료를 남겨놓았던 것은, 당시 조선사회가 얼마나 완벽한 책임성을 바탕으로 모든 일을 운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 화성성역의 공사보고서로서 책 속에 또하나의 화성을 보존하고 있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와 조선후기 최대의 문화예술행사이기도 했던 혜경궁 수원행차 및 회갑연(回甲宴)의 행사 보고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통해 우리는 화성성역의 진행과정과 준공된 원형, 행사일정과 행사내용 등을 완벽하게 알아낼 수 있다.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역할과 작업 내용(예컨대 모든 목수 석수의 이름과 작업과정까지), 들어간 돌 한덩이 못 하나까지도 빠짐없이 기록한 완벽한 자료들은 부실과 졸속을 원천적으로 배제하였던 당시 조선의 놀라운 관리능력과 책임성, 그리고 시설물이 훼손되고 전통문화가 단절되는 경우에도 언제나 완전한 복원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한 후대에의 배려와 차원높은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이는 조선사회 발전의 저력이자 전통시대에 우리 민족이 성취했던 위대한 문화적 능력이었다.
(三)
정조의 의지와 정조대 조선의 전 국가적 역량이 결집되어 추진된 화성성역으로 우리는 민족문화의 위대한 금자탑을 지니게 되었다.
200년 전 화성건설과 관련하여 남은 유형의 문화유산들은 물론이고, 새도시 건설을 위한 세심하고도 차원높은 여러 배려와 무형의 유산들은 수원의 여러 곳에 다양한 흔적으로 남아 도시 발달의 밑거름이 되어 왔으며 그 우수성은 세계로부터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설 200주년이 지난 현재, 아직도 화성은 자족적 신도시로서가 아니라 '수원성'이라는 일개 성곽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화성신도시에 '수원성'이라는 왜곡된 이름을 붙이고 성곽만을 문화재로 지정하고는 나머지 시설물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던 양상은 오늘까지도 그대로이다.
해방 이후 지금껏 근본적 반성은 물론 기초적 연구를 도외시한 채 진행되는 주먹구구식 문화유산 보존시책은 화성신도시의 울타리였던 성곽 보호에만 국한되고 있으며, 화성 내외의 보다 중요한 문화유산들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고 있다.
과거에 선현들이 조성해 놓은 호수, 연못, 정자 및 그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과 환경, 그리고 도시기반시설과 생산기반시설 등 자족적 신도시의 여러 시설물들은 복원을 위한 완벽한 자료가 남아 있음에도 이를 도외시한 파행적 개발시책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러하기에 화성성역 200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남아있는 완벽한 자료를 토대로 원형회복에 총력을 기울였어야 할 시점에, 오히려 정책당국은 수백억 원을 들여 만석거 축만제와 국영시범농장 터를 매립하고 수원천을 복개하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다.
선진 영농의 터전 만석거와 축만제가 200주년을 맞았음에도, 그 터전에서 농업진흥의 꿈을 계승하여야 할 서울대학교 농생대는 200년 선진영농의 전통을 미련없이 내버리고 서울로 떠나기로 결정하였으며, 자랑스런 역사적 전통은 단절의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포장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200주년을 맞아 오히려 더욱 훼손된 화성신도시의 경우는 우리 시대 역사의식의 파탄과 문화의식의 파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부실과 졸속, 낭비와 비효율로 특징지워 지는 우리 시대 후진성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가 후진성을 극복하여 선진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와 전통문화는 다시 직시되어야 한다.
200년 전 정조시대의 화성 신도시 건설 과정에서 보여준, 부실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책임성과 원대하고도 세련된 구상, 언제라도 복원이 가능하도록 한 미래지향적 실천은 오늘 우리가 다시 달성해야할 목표이다.
200년이 지나 세계로부터 인정받기에 이른 정조시대의 문화유산을 돌이켜보며, 그 역사적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겨 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참고문헌
유봉학, 1996 {꿈의 문화유산, 화성} (신구문화사)
2001 {정조대왕의 꿈} (신구문화사)
약력;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현재 한신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저서; 1995 {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 (일지사)
1996 {꿈의 문화유산, 화성} (신구문화사)
1998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신구문화사)
2001 {정조대왕의 꿈} (신구문화사)
첫댓글 파일은 같은내용을 좀 더 보기좋게 한 것입니다. 다운받아 읽으시는게 훨씬 좋습니다.
읽는데 눈이 피곤해서 난 그냥 도망가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