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근대 고래잡이(捕鯨)
韓石根(울산시인협회장)
장생포와 방어진에는 아직도 고래를 잡던 옛 모습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장생포의 포경선 가운데 현재 고래 박물관 실내에 전시된 진양6호는 내해 조선(주)에서 2억 넘게 값을 치러 구입한 것이고, 밖의 마당에 전시된 진양 5호는 최문일 포경선주가 기증한 철선이다. 그 외 포경선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폐선되거나 다른 어업선으로 개조되어 출어하고 있다.
잡은 고래를 처리하던 해체장은 그언저리만 집어볼 수 있으나 장생포는 항구건너 조선소가 들어 섰고, 방어진은 IN조선소가 차지해 있다. 그래도 포경금지가 발표된지 22년이 지났어도 많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성기 때는 하루에도 포경선 한 척이 두 세 마리의 고래를 포획해 항구로 돌아 올 때는 지나던 행인과 외래인들도 어께가 으쓱일 만큼 호경기였고 축제분위기로 술렁거렸다. 그러다가 7~80년대초까지 전성기가 지나면서 장생포항과 방어진 항은 서서히 경기가 침체되면서 차츰 외래인과 지방민들의 발길도 끊겨 한적한 갯촌으로 변모해 갔다. 그래도 방어진 항은 어업전진기지로써 저인망선(고대구리), 오징어잡이 배들이 삶을 유지해 왔다. 다행스러운 것은 현대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상업과 소비도시로 탈바꿈해 갔고, 장생포는 주변 여건이 활발하지 못해 한적한 어항으로 퇴락해 갔다.
어려운 생활고를 견디면서 아픈 과거를 털며 2005년 국제 포경 위원회(I.W.C :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가 울산에서 개최되면서 장생포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 했다. 고래박물관이 생겨나고 고래연구소가 문을 열면서 연중 관광객 30만을 넘어서고 있으니 포경도시에서 관광도시로 탈바꿈되고 있는 현실이다. 아직은 미국의 세계에서도 드물게 보던 포경의 전진기지 켈리포니아 몬트리올만에서의 탐경관광에 미치지 못할지라고 멀잖아 이곳보다 많은 관광객이 상회될 것으로 전망된다.
울산 장생포의 포경기지는 운명적으로 시작되었다. 비운의 한말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이 한반도 침탈 야욕을 저지하려고 외세의 힘이 필요하던 때 조정에서는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1899년(고종.광무3년)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한반도 3곳에 포경기지를 설립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함경남도 신포항, 강원도 원산항, 경상남도 울산의 장생포항(구정포:九井浦)이다. 당시 대한외교 위원이던 정형택(鄭衡澤)과 러시아 대아백작(大我伯爵)헨리케셀링과 광무 3년 4월 29일 울산구정포부경기지 설립을 협약체결 했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한반도연안에서 잡은 고래를 이들 3곳 가까운 부경장에서 헤체하여 경유를 생산하였고 고기는 일본어선이나 일본상인들에게 판매하였으나 남은 것은 바다에 버리거나 땅에 묻어버렸다.
한반도 3곳에 부경장이 설립되기 까지는 러시아 공사이던 웨베르의 역할이컸다. 웨베르는 교제술이 출중한 외교관으로 세태인정(世態人情)에 밝았다. 그는 아관파천(俄館播遷 : 1896.2.11~1897.2.25)이후 조선조정을 마음대로 조정하였고 경원, 경성의 광산채굴권과 무산, 압록강유역, 울릉도의 산림벌채권을 1896년 4월 8일에 러시아인에게 허가케 했다. 또한 왕이 경원궁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권힉득운동을 계속했다. 1897년엔 영흥, 진주의 광산 채굴권, 단천, 삼수의 광산채굴권을 친로내각 외부 대신이던 이완용에게 요구했다. 이후 십수일 뒤인 3월 16일 포경기지를 수일 뒤인 3월 16일 포경기지를 께이제를 링그에게 조여(租與)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자 더욱 적극적으로 요구해 같은 해 3월 하순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3곳의 포구에서 포경을 하여 그 연안에서 창고와 막사를 지어 고래를 헤체하고자 했다. 또한 이곳에서 포경에 필요한 기구를 제작하고자 집요하게 요청했다. 이에 대하여 경상1도의 포경은 1893년에 이미 일본인에게 준허하였으므로 허용할 수 없으나 함경도, 강원도는 결의를 거쳐 준허하기로 하였다.
훗날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한 후 한반도의 포경기지 3곳을 모두 일본인에게 넘겨주고 한반도해역에서의 포경도 할 수 없게된다. 모든 재해권을 상실한채 1904년 부터는 일본이 포경을 독점하고 포경기지를 운영하며 본격적인 포경사업을 전개해 나가게된다.
한일합병 이후 1911년 조선총독부의 선포된 어업령 지시에 따라 허가된 12척의 포경선은 조선 연근해에서 포경을 시작했다. 매년 5월1일부터 9월30일 까지 포경금지 기간을 설정하고 어린 새끼고래와 새끼를 동반한 어미 고래의 포경도 금지 하였다. 한편 엄격하고 까다로운 자격과 시설 기준을 적용하여 자본이 열악하고 경험이 부족한 조선인에게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관례로 조선의 일본인이나 일본국에 적을 가진 법인들만이 포경토록 철저히 규제함으로써 독점포경을 경영케했다. 이로써 1916년에 동양포경(주)은 대일본 수산(주), 나가토수산(주)을 합병하여 조선내 일본 최대의 포경회사를 설립하였다. 경상남도 울산군 장생포(長生浦) 함경북도 경흥군 유진, 강원도, 장전, 신포, 제주도, 대흑산도, 대청도에 이르기까지 사업장을 만들고 한반도 포경업을 독점했다. 이미 이 이전부터 울산의 장생포에서는 활발하게 포경업이 일인들에 의해 성행되고 있었음은 미국의 앤드리우(By Royc. Hndrews.)가 이곳 장생포에서 1912년에 취재논문이 발표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특히 울산의 장생포 헤체장에 오른 귀신고래(회색고래)의 죽어가면서 슬프게 우는 모습의 사진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찢어 놓는다.
아무리 엄한 법령을 만들어 놓아도 인간의 간악한 욕구는 새끼고래이든 어미고래이든 무자비하게 포살하는 잔인성을 가지고 있어 발견되면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는다. 고래 가족이 유적하게 유영하는 모습은 한폭의 그림이다. 포경선에게 이 장면이 포착되면 고래가족의 행복은 끝이나버린다. 포수는 즉시 암고래를 겨냥하고 총포의 방아쇠를 당긴다. 바다는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고 새끼는 어미를 찾아 목쉬게 부르짖는다. 이 울음소리는 소의 울음소리로 슬프게 들린다. 숫고래는 죽어가는 암고래의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다가 잔인하게 두 번째 작살포에 맞아 운명적인 생을 마감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새끼고래는 망망대해 고아로 남아 포식자 범고래떼의 공격에서 살아남지를 못한다. 이렇듯 절망적인 생을 살아가는 포유동물인 고래. 이 고래들이 하필이면 울산의 장생포 항구에서 죽음의 최후를 맞아 토막내어진 육신은 천갈래 만갈래로 나뉘어져 인간의 기호식품이 되어 식탁에 오른다.
포경의 작살포성이 멎은지 22년, 그러나 지금도 고래고기집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으니 기가찰 노릇이다. 금식을 못하는 인간의 욕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가 보다.
<약력>
∘울산문수필담동인
∘월간문학등단, 대표에세이 문학회,
경남수필 문학회, 영호남수필 문학회장 역임
∘울산시인 협회장
∘동포문학상(12회), 한국수필문학상(10회)
영호남수필문학상(9회), 울산문화공로상(94년)
∘저서:수필집-봄버들연가 외 12권
시 집-문화유적 답사 시 외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