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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물의 조리·법칙을 가리킨다. 〈장자 莊子〉 천하(天下) 편에서는 "천지의 미(美)를 판단하고, 만물의 이치를 분석한다", 〈한비자 韓非子〉에서는 "만물은 각각 이(理)를 달리하나, 도(道)는 만물의 이에 다다른다"라고 했다. 왕부지(王夫之)의 〈정몽주 正夢注〉에서는 "이라는 것은 하늘이 드러낸 질서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도덕의 준칙으로 확대되었다. 〈장자〉 천하편에서는 "의(義)를 이로 삼았다", 〈순자 筍子〉 악론(樂論) 편에서는 "예(禮)라는 것은 이 가운데 바뀌지 않는 것이다", 〈여씨춘추 呂氏春秋〉 이위(離謂) 편에서는 "이라는 것은 시비(是非)의 근본이다"라고 했다. 송대의 이학은 이를 우주만물의 본원으로 삼았다. 〈주자어류 朱子語類〉 권95에서는 "이에서 기(氣)가 생긴다", "이는 기에 우선한다", "천지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으니 오직 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가 있고 난 뒤에 비로소 천지가 생긴다"라고 했다. 이는 가장 근원적인 실체이다. [대진] 중국 청대의 경험론적 철학자, 역사지리학자, 고증학자. 자는 동원(東原). 청대(淸代) 최고의 사상가로 추앙받고 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책을 빌려 읽으며 독학했다. 향시(鄕試)에는 합격했으나, 권력과 명예의 관문인 진사(進士)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명성 때문에 1773년 황제의 부름을 받아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청대의 황실도서관)의 찬수관(贊修官)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대진은 희귀한 책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문관시험에 6차례나 낙방했으나, 1775년 황제의 특명으로 마침내 진사가 되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다. 주로 고대 지리학과 수학·언어학·경학(經學) 분야에서 모두 50여 권의 책을 저술하거나 편집했다. 그는 송대(宋代) 사상가들이 불교와 도교의 잘못된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그들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비판했다. 송대 철학자들은 인간에게는 정욕의 원인이 되는 물질적인 본성[氣]과 기를 지배하는 초월적이며 정신적인 원리[理]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원론에 대해서 대진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했다. 그는 '이'란 모든 사물, 심지어 욕구 속에도 들어 있는 내재적인 구조라고 했다. 또 '이'는 송대 철학자들의 생각처럼 명상을 통해 어느 순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문학·역사·언어학·철학에 대한 정밀한 연구를 꾸준히 한 후에나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기이원론] 이(理)와 기(氣)라는 2가지의 서로 다른 근본 원리로 모든 사물의 존재와 운동을 설명하는 이론. 성리학의 이기론 중에 특히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기일원론(氣一元論)과 구별되는 견해이다. 이기론적 세계관을 완성한 주희(朱熹)는 "이와 기는 서로 떠날 수 없으나,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理氣不相離 理氣不相雜)고 했다. 즉 이는 기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며 또 기는 이에 근거해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히는 한편, 이와 기가 각각 독립적인 실재(實在)로서 서로 구별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 구별되는 측면을 설명하여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면서 기를 낳는다거나 이는 기 바깥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라고 했는데, 이러한 견해를 가리켜 이기이원론이라고 한다. 이와는 달리 이기일원론에서는 이와 기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양자의 상호의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특히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거나 기 바깥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어떤 실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기에 내재하는 원리나 법칙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 기일원론에서는 이가 기와는 별개의 실재이면서 기에 내재하여 그 원리나 법칙성이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기 스스로의 법칙성이나 기 스스로가 바르게 작용하도록 하는 원리를 가리켜 이라고 했다. 주희의 이기이원론을 더욱 명확한 이론체계로 재정립한 것이 이황(李滉)의 이기론인데, 그의 이론을 가리켜 주리론(主理論)이라고도 한다. 주리론의 특징적 학설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서, 이는 형태는 없으나 운동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이 자체의 운동으로 음양(陰陽)을 낳는다고 하여,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며 또 기의 바깥에 존재하는 정신적 실체라는 점을 더욱 명확히 했다. 이러한 주리론은 이와 기의 근본적 차별성과 기에 대한 이의 선차성(先次性)·우위성(優位性)·능동성을 강조한 것이었는데, 그 극단적인 견해가 이진상(李震相)의 이일원론(理一元論)이었다. 이일원론에서는 세계의 근원적 존재나 근본적 원리로서의 지위가 이에만 인정되고, 기에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황] 이황 /이황의 묘, 경북 안동시 ... 이황의 학문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태극도설〉·〈주역〉 등 주자학에서 중요시되는 글뿐만 아니라 〈주자어류 朱子語類〉·〈주자대전 朱子大全〉 등 주자의 글을 평생 금과옥조로 여겨 깊이 연구했고, 이를 알기 쉽게 편집했다. 주자의 서한문을 초록한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20권은 그가 평생 정력을 바쳤던 편찬물이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로 대부분의 저술이 이때 이루어졌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 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 를 완성했다.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 自省錄〉을 거의 완결하고 서(序)를 썼다. 59세에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하여 토론했는데 이 논변(論辨)은 66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62세에 〈전도수언 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계원명이학통록 宋季元明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하여 그 서를 썼다. 이것은 명나라 황종희(黃宗羲)의 〈송원학안 宋元學案〉에 앞서는 것으로 주자학파를 중심으로 송대 이후 중국 유학사를 정통론적 입장에서 정리한 문헌이다. 64세에 이연방(李蓮坊)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李彦迪)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으며 〈심경후론 心經後論〉·〈양명전습록변 陽明傳習錄辨〉을 지었다. 68세에 성리학의 주요문헌에 나오는 개념을 유기적으로 구성하여 핵심적 교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성학십도〉, 70세에 마지막 작업으로 〈사서석의 四書釋疑〉를 편찬했다. 이황의 성리학은 정자와 주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풍부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理)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기론). 그는 이를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主宰)하는 우주의 최종적 본원이자 본체로서 규정하고 현상세계인 기(氣)를 낳는 것은 실재로서의 이라고 파악했다. 그는 주자의 이해와는 달리 기와 마찬가지로 이가 동정(動靜)하고 작위(作爲)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가 동정하지 않고 작위성이 없다고 한 종래의 이론은 이의 체(體)의 측면이고 그 용(用)의 면으로 말하면 이 또한 동정하고 작위하는 성질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이와 기의 관계는 이주기종(理主氣從)·이존기천(理尊氣賤)의 구조를 가지며, 이는 기보다 절대적·우월적인 것이 된다. 이황의 이러한 이기론의 구조와 특성은 심성론(心性論)에서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괄한다는 주자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성과 정의 근원을 이와 기를 분별(分別)하는 방법을 통해 구했다.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도 역시 4단과 7정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에 대해서는 이와 기로써 근원을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단칠정). 특히 정에 대한 이해는 기대승과 8년 동안이나 토론을 벌이며 이기호발설로 정밀히 체계화했다(→ 사단칠정논쟁). 곧 "4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고, 7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이라 하여 4단은 이에 근원하고 7정은 기에 근원하여 각각 발한다고 했다. 기대승은 이것이 이와 기를 독립된 물(物)로 생각하는 것이며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는 원칙을 벗어나는 것이라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이러한 이해는 인간의 선한 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맹자의 본래 뜻을 살리기 위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기만 있고 이의 탐[乘]이 없으면 인간은 이욕(利欲)에 빠져 금수(禽獸)로 된다고 보았던 그는 본성의 단서로 간주되는 사단을 이가 발한 것이라고 역설함으로써 인간 본래의 선한 본성이 자연적으로 발현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이(理) 우위론적 철학은 이성에 의한 적극적 실천을 보다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주자학에 바탕을 두면서도 이를 한층 발전시켰던 이황은 불교와 도교는 물론, 유교의 양명학(陽明學), 서경덕(徐敬德)의 기일원론(氣一元論), 나흠순(羅欽順)의 주기설(主氣說), 오징(吳澄)의 주륙(朱陸) 절충적 견해 등은 모두 이단·사설로 비판·배척했다. 특히 16세기초에 이미 소개되어 확산되던 양명학과 서경덕·나흠순의 견해를 집중적으로 비판하여 조선의 주자학이 성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기발이승일도설] 이이는 이 세계의 일체존재는 이(理)와 기(氣)로 되어 있고, 이 양자의 존재구조는 발하는 기 위에 이가 올라타 있는 상하의 구조라 했다. 이것은 이황이 사단(四端)을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칠정(七情)을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의 두 길로 제시한 것과 대조된다. 즉 이황이 사단을 이가 발함에 기가 따라가는 전후의 존재형식으로 보고, 칠정을 기가 발함에 이가 올라타 있는 상하의 존재형식으로 본 것과는 구별된다. 이황이 2가지의 존재형식을 설정했다면, 이이는 기발이승 즉 발하는 기 위에 이가 올라타 있는 하나의 존재형식만을 취한 것이다. 이이의 설은 비록 이황의 사단칠정론에서 이끌어진 것이지만, 이이 성리학의 존재론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이는 형이상자(形而上者)로서 발할 수 없고, 기는 형이하자(形而下者)로서 발하는 것이라는 그의 이기 개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발하는 것은 기요, 발하는 까닭이 되는 것은 이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할 바가 없다. 이이는 근본적으로 이의 발용성(發用性) 내지 작위성(作爲性)을 부정한다. 그것은 정(程)·주(朱) 성리학의 대원칙이다. 만일 이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발용 변화하는 것이라면 기와 다를 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이는 이황의 이발(理發)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비판한다.
기발이승(氣發理乘)이란 이와 기가 본래부터 묘합해 있는 하나의 존재구조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이때 기는 발하는 것이고 이는 발하지 않으나 기의 발을 주재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이는 기발의 원인이 되므로 아무리 기가 발하는 고유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와의 묘합구조하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기발이승의 존재구조는 이이에 의하면 시간적으로 선후가 없고 공간적으로 이합(離合)이 없는 것이라 한다. 만일 이와 기 사이에 시간적으로 선후의 차이가 있고 공간적으로 조금이라도 빈 틈이 있다면 이는 하나의 존재이기에 미흡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이는 이황의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의 표현은 잘못 되었다고 보게 된다. 그것은 이란 발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이것은 시간적으로 이선기후(理先氣後)의 혐의를 피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이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서 우주·자연뿐만 아니라 사단칠정을 모두 기발이승의 존재구조로 이해하고, 나아가 기질지성(氣質之性), 인심(人心), 도심(道心)까지도 기발이승의 구조로 이해한다(→ 인심도심설). 따라서, 기발이승은 이이의 성리학에 있어서 일체존재의 내면구조를 설명하는 용어로서, 그의 이기지묘(理氣之妙), 이통기국(理通氣局)과 상통되는 의미를 갖는다. → 이통기국론 [기대승]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증(贈) 이조판서 문민공(文愍公) 준(遵)의 조카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 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이듬해 대사성에 올랐다. 1570년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기일원론]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기준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이황과 정지운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지나치게 〈주자어류 朱子語類〉와 운봉호씨설(雲峰胡氏說)에만 근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단칠정논쟁). "자사(子思)와 맹자가 말하는 바가 같지 아니하므로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여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하여 선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와 기를 양물(兩物)로 삼는 것이니, 이는 칠정이 성(性)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사단이 기를 타지[乘] 않는다"는 것이다(→ 이기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할 때에는 혹 이와 같은 설이 옳을지 모르나 사단·칠정은 이처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견해에 반대했다(→ 인심도심설). 이어서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입각한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성(性)과 정(情)은 미발(未發)·이발(已發)의 다름이 있을 뿐 불가분의 표리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 성(性)은 선(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정(情)도 그 성(性)이 발하여 된 것이므로 불선(不善)이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사단칠정을 이기(理氣)에 분속(分屬)시킨다면 이(理)와 기(氣)를 독립된 별물(別物)로 보게 되어 사단 속에 기(氣)가 없고 칠정(七情) 속에는 이가 없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사단과 칠정을 대설(對說)이 아닌 인설(因說)로 파악하는 것으로 결론짓게 된다. 그는 사단이 칠정 중의 사단인 것처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서의 순리(純理)도 겸기(兼氣)인 기질지성(氣質之性) 중의 것임을 의미한다고 하여 심성론적(心性論的)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요, 기는 이의 재료인 것이다. 이 둘은 본래 나누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물에 존재할 때는 본래 혼륜(混淪)되어 분개(分開)할 수 없다. 단 이약기강(理弱氣强)하고, 이는 조짐이 없으나 기는 흔적이 있으므로 그것이 유행(流行)·발견될 때 과불급의 차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칠정이 발할 때 혹은 선하고 혹은 악하여 성(性)의 본체도 혹 완전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기(理氣)는 논리적으로 구별되지만 실제에서는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심성론을 중심으로 사단과 칠정의 차이를 중절(中節)과 부중절(不中節)로써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은 태극도설에도 반영되었다. 태극(太極)은 이(理)로서 주재자요, 음양(陰陽)은 기(氣)로서 재료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정치사상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民利)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民本政治)·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종과 선조에 대한 경연강의(經筵講義)에 담겨 있다. 〈논사록 論思錄〉에 제시된 거현론(擧賢論)·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은 왕도정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었다. 먼저 현자(賢者)의 등용을 중시하고, "현자를 등용하고자 한다면 먼저 시비를 분명히 하여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연후에야 현자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여 윤원형 등 당시 집권층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는 거현(擧賢)이야말로 양민(養民)하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현자들이 화를 입으면 소인배들이 득세하고, 그들의 사치와 사욕으로 말미암아 민재(民財)가 약탈되므로 민심이 흩어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임금은 재용(財用)을 선처하여 민생들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이재양민이 정치의 요체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국가정치의 일차적인 근본인 군덕(君德)의 증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덕치(德治)의 두 기둥인 존현(尊賢)과 이재(理財)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禮)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예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오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었다. 특히 예는 "천명(天命)의 성(性)에서 나왔으므로 범인(凡人)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성인(聖人)만이 이를 안다. 그리하여 예법을 만들어 일세(一世)를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임금이 지성으로 현자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현자 또한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 오직 임금의 현자를 쓰려는 성의가 있느냐에 있을 따름이다"라 하여 신하의 상향적인 예뿐만 아니라 임금의 신하에 대한 예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그는 "언로(言路)는 국가의 대사(大事)이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는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는 위태롭다"라고 하여 임금이 언로를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시비(是非)를 명확히 가려 소인배의 득세를 방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景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논사록〉·〈주자문록 朱子文錄〉·〈고봉집〉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사단칠정논변] 인성(人性)을 설명하는 성리학의 주요개념. 맹자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는데, 각각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된다. 칠정은 〈예기 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등 사람이 가진 7가지 감정을 말한다.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송대에 성리학이 성립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 유교에서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까지 확대하고 또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세계관을 수립하려 했던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성리학에서는 마음이 사물에 감촉되지 않은 상태, 즉 심의 미발(未發)을 성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에 이미 감촉된 상태 즉 심의 이발(已發)을 정이라 한다. 결국 미발의 성이 발한 것이 정이며, 사단과 칠정 모두 정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주희는 사단을 '이지발'(理之發)로, 칠정은 '기지발'(氣之發)로 설명하여 양자를 구분하기도 했으나, 사단과 칠정의 이기 분속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이 도입된 초기부터 16세기까지 사단과 칠정을 이기론으로 설명할 때 각각을 이(理)와 기(氣)에 분속시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단칠정논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정지운(鄭之雲 : 1509~61)의 〈천명도 天命圖〉에서도 사단의 발은 순리이며 칠정의 발은 기가 겸한 것이라고 했다. 이황(李滉 : 1501~70)도 역시 이 〈천명도〉를 수정하면서, 사단은 이에서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 혹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 하여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 분속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1559년(명종 14)에 기대승(奇大升 : 1527~72)이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이황이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8년에 걸친 사단칠정논쟁이 이루어졌다. 사단칠정의 이기 분속 문제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커다란 철학적 문제로 대두하게 된 배경에는 이 시기 조선 성리학에 이제까지의 이기이원론과는 다른 이기일원의 이기론이 성립하기 시작했다는 사정이 있었다.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이기이원론은 이를 기의 존재 근거로까지 인정하는 견해를 가리키며 이기일원론은 이를 기의 조리(條理)로만 인정하는 견해를 가리킨다. 이러한 차이가 사단칠정론에서는 기발과 함께 이발을 인정하는 견해와 기발만을 인정하는 견해로 나타난다. 이황은 이기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 분속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기일원론적인 견해에 바탕을 두고 사단과 칠정을 설명함으로써 사단과 칠정을 명확하게 이와 기에 분속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 이황은 이기의 관계가 비록 밀접해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理發氣隨之)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之)이라 해도, 사단은 그것이 유래하는 바가 마음 속에 있는 본연지성이요, 칠정은 그 유래하는 바가 기질지성이며, 또 사단은 기가 따르는 것이지만 주로 하여 말하는 것(所主而言)이 이에 있고 칠정은 그것이 기에 있기 때문에 각각을 '이지발'과 '기지발'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사단칠정 문제에 대한 이황의 이러한 견해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이라 불린다. 이기호발설에 대해 기대승과 그후의 이이(李珥 : 1536~84)는 사단과 칠정은 모두 기질지성 속에 갖추어 있는 이가 기를 타고 발한다는 점에서 그 유래하는 바가 같으며, 다만 발해서 순선한 것만을 가리켜 사단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황의 견해 가운데에서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만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사단과 칠정이 유래하는 바를 모두 설명했으며, 칠정 이외에 따로 사단의 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 사단이 포함되는 것이라고 했다. 기대승과 이이의 이러한 견해는 이기겸발설(理氣兼發設)로 불려진다. 1572년(선조 5)에 성혼(成渾 : 1535~98)은 사람의 마음을 형기(刑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기는 인심(人心)과 성명(性命)의 정리에 근원하는 도심(道心)으로 구분할 수 있듯이 성이 발한 정도 사단과 칠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사단은 이에서 발한 것으로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성혼과 이이 사이에 다시 사단칠정논쟁이 벌어졌다. 성혼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이이는 인심·도심의 구분과 사단칠정의 구분은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사단칠정을 각각 이기에 분속하는 이황과 성혼의 견해를 비판했다. 16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호발설과 겸발설로 정리된 사단칠정의 이기론적 해석은 그후에도 우리나라 성리학의 중요한 이론적 탐구 대상으로 남아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고, 성리학 이해에 깊이를 더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가운데 이황의 호발설을 지지하는 견해를 주리론(主理論)이라 하고, 이이의 겸발설을 지지하는 견해를 주기론(主氣論)이라 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양대 흐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허목] 허목은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한 정구·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한다"라고 하여 이기불리(理氣不離)를 주장했으며, 무한한 이가 유한한 기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성리학, 이기론).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서는 '심(心)의 사덕(四德)은 사단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천리(天理)의 발로처'라고 하여 사단이발설(四端理發說)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이기·태극(太極)·심성(心性)을 일원적으로 파악하려는 심학(心學)이 중심이었다. 그는 천지자연의 변화는 인간의 심성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아 인간에 내재되고 주체화된 천리인 본성(本性)의 함양과 보존, 그 실천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에 대한 파악은 그의 학문적 모색과 자아실현의 자세에 있어 주체성의 강조로 나타난다(→ 심성론). 허목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공자에게서 발견하고 그 실현방법으로서 고문(古文)·고학(古學:六經學)에 주목했다. 그러나 공자 또는 육경의 내용을 묵수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을 섭렵함으로써 자신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인격주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자아의 발견을 현실의 주체적 인식과 비판의 자세로까지 확대하여 사물의 실제·실상을 직시하고 이렇게 얻어진 경험사실의 가치를 고전(古典)에 근거하여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서경덕] 1489(성종 20)~1546(명종 1).조선 중기의 학자. 서경덕 /서경덕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했다.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 가계 및 생애 할아버지는 순경(順卿), 아버지는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호번(好蕃)이다. 송도(松都:지금의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을 부쳐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이해에 병이 깊어지자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선배들의 주석이 있는 것을 다시 거듭 말할 필요가 없고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글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제 병이 이처럼 중해졌으니 나의 말을 남기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 太虛說〉·〈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대상복제(大喪服制)에 대한 상소를 하여,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3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 기일원(氣一元)의 철학 서경덕의 철학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하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데 특징이 있다. 격물을 중시했던 그의 학문방법은 독창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시원을 허(虛) 또는 태허(太虛)라고 보았으며, 이를 선천설(先天說)로 설명했다. "태허는 말끔하여 형체가 없다. 이를 선천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끝이 없고 과거에 시초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한끝을 모른다. 말끔하게 허하고 고요한 것이 기의 시원이다. 끝없이 넓은 우주에 꽉 들어차서 빈틈이 없고 털끝 하나도 드나들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당기려면 허하고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실은 차 있으니 없다고 할 수 없다. 한계가 없는 것을 태허라 하고 시초가 없는 것을 기라고 하니 허가 바로 기이다. 허가 본래 무궁하고 기 역시 무궁하니 기의 근원은 처음부터 하나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한 태허는 곧 물질적인 기이며 기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물의 근원을 기로 설명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정신, 지각까지도 포함한 천지만물은 기의 취산(聚散)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담연청허하면서 보편타당한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둘을 함유하여 낳고 둘은 그 자체의 능력으로 변화의 작용을 한다. 둘은 곧 음양·동정(動靜)·감리(坎離) 등을 가리킨다. 둘을 낳는 하나는 곧 그 음양이나 감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담연주일(淡然周一)한 기이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 음양이 될 때 양이 변화를 극한 것이 하늘이 되고 음이 모이고 응결한 것의 극이 땅이 된다. 또 양의 정수가 맺혀 해가 되고 음의 정수가 맺혀 달이 된다. 나머지 기운들이 하늘에서는 별이 되고 땅에서는 물과 불이 된다. 그는 이런 과정을 선천에 대해서 후천(後天)이라고 했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기의 운동이다. 그런데 그는 이 기의 운동이 다른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 능히 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를 '기자이'(機自爾)라고 표현했다. 한편 그는 기의 취산에 따라 무형의 기와 유형의 기로 구별하여 보았다. 시원적인 기로서의 태허는 감각할 수 없는 무형의 기이며 천지만물을 형성하는 기는 유형의 기라고 했다. 즉 기가 쌓이면 유형의 기가 되고 흩어지면 무형의 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전개했다. 물질적인 기는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따라서 창조도 소멸도 없다는 전제로부터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는 흩어질 뿐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이를 기에 선행하는 1차적 존재라고 주장한 주희의 견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사생귀신은 오직 기의 취산에 불과하며, 그 취산은 결코 유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환의 과정임을 설명했다. 한편 인성론에서는 전통적인 성선설을 주장하고,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주정(主靜)을 제시했다. 또한 현실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대상복제에 대해 올린 상소에서 왕릉이나 기타 묘지가 무분별하게 지정되고 확장되는 데 따른 폐단과 왕릉의 축조를 위한 채석의 노역동원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학설은 당시 주조를 이루었던 정주학의 이론과는 다른 독창적인 부분이 많았으므로, 이황·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이황은 정주의 학설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으므로, 서경덕의 기론에 대해 그가 이를 잘못 풀이했다고 비판했다. 이황은 "그의 견해는 별달리 정밀하지 못하다. 그의 학설을 보면 1편도 병통이 없는 것이 없다"고까지 비판했다. 이이도 "퇴계는 모방을 주로 하여 매끄럽게 꿰뚫는 맛이 없는 반면, 화담은 총명이 지나쳐서 스스로 얻은 견해가 많지만, 그 자득의 견은 더 향상이 되지 못하고 그 위에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일절(一節)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것은 방만하기 쉬워 잃는 바가 있으므로 차라리 이황의 모방을 본받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妙)를 분명하게 터득한 것으로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칭송했다. 더욱이 이이는 서경덕의 기자이설을 취하여 이를 형식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 학파에 이어져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대표하게 되었다. 서경덕의 학설은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최초로 기일원론의 체계적인 전개를 시도한 것이었으며, 이이 등 주기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문하에서 박주(朴洲)·박순(朴淳)·허엽(許曄)·남언경(南彦經)·민순(閔純)·이지함(李之?)·이구(李球)·박민헌(朴民獻)·홍인우(洪仁祐)·장가순(張可順)·이중호(李仲虎)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었다. 1567년(명종 22) 호조좌랑에, 1575년(선조 8)에는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기철학]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체를 기(氣)로 보고, 모든 현상세계는 기의 운동과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는 철학체계. 학자에 따라 내용은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다음 몇 가지의 공통성을 갖는다. 먼저 이 세계의 궁극적 실체를 기로 규정하고 만물의 현상적 전개는 기 운동의 소산이라 본다. 또한 기 운동과 작용의 원인을 기 자체에 있다고 보며, 근원적인 기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理)는 기의 내재적 법칙성 내지 속성으로 격하되고 독립적 실체성이 부정된다. 대표적인 기철학자로서 서경덕(徐敬德)·임성주(任聖周)·최한기(崔漢綺)·최제우(崔濟愚) 등을 들 수 있다. 서경덕은 주리철학(主理哲學)이 강조되던 16세기에 기철학을 전개한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그는 천지만물이 생성되기 이전의 우주원형을 태허(太虛)라 하고 그것은 맑고 형체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크기가 끝이 없고 그 먼저 됨이 시작이 없다. 맑고 허(虛)하고 고요한 것이 기의 근원이다. 끝없이 넓은 우주에 꽉 들어차서 빈틈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당기려면 허하고,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실은 차 있으니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기는 비록 형태도 없고 감각할 수도 없으나 우주공간에 가득 차 실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만물이 구체적으로 생성되는가? 이를 기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설명한다. 한결같이 맑고 허한 기가 끝없이 공간에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이 크게 모여 하늘과 땅을 이루고 작게 모여 만물이 된다. 즉 한결같이 맑고 허한 기가 움직여 양(陽)을 낳고 고요하여 음(陰)을 낳은 처음부터 점차적으로 모여 한없이 넓고 두터워짐으로써 하늘·땅이 되고 인류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만물이 생기기 이전 형이상(形而上)의 본체세계는 선천이 되고, 만물이 생긴 이후의 형이하(形而下)의 세계는 후천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일기(一氣)의 미발(未發)한 본체가 선천인 것이고 이발(已發)한 현상이 후천이라 하겠다. 그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움직임과 고요함, 닫힘과 열림이 없을 수 없거니와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기틀이 스스로 그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묘한 것이니 갑자기 뛰기도 하고 갑자기 열리기도 한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일까?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요 또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理)의 때라는 것이다. 이란 무엇인가? 기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이는 기의 주재이다. 이른바 주재라 함은 밖으로부터 와서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의 작용을 지시하여 그렇게 되는 근본의 바름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요 기가 시작이 없는 것이므로 이도 본래 시작이 없는 것이다. 만일 이가 기보다 앞서는 것이라면 기가 시작이 있게 된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의 이란 기 자신의 운동법칙으로서 기와 대립하는 별개의 실체이거나 외부로부터 와서 기의 운동을 제어하는 주재자가 아니다. 기가 스스로 그 소이연(所以然)의 정당성을 잃지 않고 바르게 작용하도록 자율규제하는 내재적인 조리(條理)를 말하는 것이다. 즉 이는 기의 내재 속성으로 기의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 선천의 영역에서 다만 소질로서 잠자고 있을 뿐이고, 기의 운동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서경덕의 이는 전통적인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와는 다른 것으로 기 속에 내포된 이라 하겠다. 그는 또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기는 흩어질 뿐 소멸하지 않는다는 기불멸론을 주장하였다. 사람이 낳고 죽는 것, 인간·영혼 같은 것은 모두가 기의 뭉침과 흩어짐에 불과하다. 모이고 흩어짐은 있어도, 있고 없음은 없다. 그것은 기의 본질이 그런 것이다.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나무 같은 미미한 것일지라도 그 기는 마침내 흩어지지 않는데 사람의 정신·지각 같이 크고 또 오래 걸려 뭉쳐진 것은 어떠하겠는가? 형체의 흩어짐을 보면 다 없어짐에 돌아가는 것 같다. 이와 같이 기의 작용은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기는 영원히 불멸한다 하여 기의 항존성(恒存性)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철학에 대해 이황(李滉)은 서경덕의 학문이 기수(氣數) 일변에 치우쳐 기를 이로 잘못 알고 있으며, 또한 기의 불멸을 주장하여 불교적 병폐에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이황과 마찬가지로 서경덕이 기를 이로 알고 있는 병폐를 비판하지만, 그의 철학적 독창성과 함께 기의 지극히 오묘한 경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임성주는 서경덕의 기철학을 계승 발전시킨 18세기의 대표적인 기철학자이다. 그는 세계의 근원을 기라 하고 그것은 무한한 공간에 충만되어 있으며 시공적으로 한계가 없다고 하였다. 근원의 원기(元氣)는 장재(張載)가 말한 태허·태화(太和)요, 서경덕이 말한 태허와 같다. 그는 모든 사물과 모든 현상, 오상(五常)과 오행(五行), 양의(兩儀), 태극(太極), 원기(元氣) 등 모든 것은 기에 붙어서 이름지은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덕(德)·원(元)·도(道)·건(乾)·신(神)·명(命)·제(帝)·태극(太極)이 모두 원기(元氣)·태허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만물은 기의 운동변화에 따라 생성되며, 기의 운동은 그 자체에 원인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는 전통 성리학에서 말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기에 내재하는 법칙성 내지 속성으로 이해된다. 그는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이기묘합(理氣妙合)의 관계에서 보면 곧 기일분수(氣一分殊)와 같다고 주장한다. 즉 만일 일(一)에 대해 논한다면 다만 이(理)만 일(一)이 아니라 기(氣)도 역시 일(一)이고, 만일 만(萬)에 대해 논한다면 기(氣)만 만(萬)이 아니라 이(理)도 역시 만(萬)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기 밖에 이가 없다는 기철학적 관점에서 기일분수의 이론을 전개했음을 의미한다. 최한기는 전통적인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사변철학 내지 주리적(主理的) 전통과 결별하고 기 중심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기설(理氣說)의 기가 아닌 신기(神氣)라는 실체개념을 독자적으로 설정하여 그의 기철학을 전개한다. 신기는 천지만물의 근원적 실체로서 활동·변화하는 한 덩어리의 활물(活物)이며, 본래 순수하고 담박하여 맑은 바탕을 갖고 있다. 비록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에 따라 변하더라도 그 본성만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기는 또 천지를 꽉 채우고 물체에 푹 젖어 있어 모이고 흩어지거나, 모이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것은 어느 것이나 모두 기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는 천지의 용사(用事)하는 바탕이고 신(神)은 기(氣)의 덕이다. 또 신과 기를 함께 말하면 신은 기 가운데 포함되고, 신 하나만을 말하면 기의 공용(功用)으로 뚜렷이 드러난 것이므로 기가 바로 신이고 신이 바로 기인 것이다. 이처럼 그에 있어서 천지·인간·만물의 생성은 오직 기로써 설명된다. 최한기는 천에 대해서도 전통적 성리학의 해석을 거부하고 기에 의해 형성된 자연으로 이해한다. 그는 말하기를 천(天)은 곧 기이고 기는 곧 천이라 한다. 또 천이란 기가 쌓인 것의 총칭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천은 뜻없이 만물을 낳는 것이니 만물은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며, 땅은 뜻없이 만물을 성장시키는 것이니 만물은 자기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다. 천지의 의지·주재성 등을 부정하고 오로지 기의 소산인 자연으로서의 천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만물의 차별성을 기와 질(質)의 결합에서 찾는다. 기가 견고하게 엉키어 질이 된다. 우주의 다양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기와 질이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기를 천지의 기와 형태의 기로 구별한다. 천지의 기는 근원적인 기로서 무궁무진(無窮無盡)하여 불멸하나, 형체의 기는 질과 결합하여 만물을 이룬다. 기는 하나이지만 사람에 품부(稟賦)되면 사람의 신기가 되고, 물건에 품부되면 물건의 신기가 된다. 따라서 형체의 기는 만물의 생성소멸에 따라 생성소멸하며 소멸되면 천지의 기로 환원된다. 아울러 형체의 기는 변화무상(變化無常)하지만 천지의 기는 영원불멸하는 것이어서 서경덕과 같이 기의 불멸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이(理)란 무엇인가? 그는 이를 실체개념으로 보지 않고 기의 조리 내지 내재적 속성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기가 있으면 반드시 이가 있고 기가 없으면 반드시 이가 없다 하여 이를 기 속에서 이해하였다. 최제우는 지기일원(至氣一元)을 만물 생성의 근원적 실체로 규정하고 모든 만물은 지기(至氣)의 현현(顯現)에 불과하다 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도 자연도 그리고 인간의 심신(心身)도 지기의 조화로 설명된다. 기는 허령창창(虛靈蒼蒼)하여 무슨 일에나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무슨 일이나 명령하지 않음이 없다.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려우며, 들리는 듯 하되 보기가 어려운 것이니 또한 혼원(渾元)한 일기(一氣)이다. 지기는 천(天)·인(人)을 관통하는 우주의 생성력이며 만물의 조화력이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기철학을 유물론으로 해석·이해하는데, 기가 곧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기일분수, 기일원론 [조식] 1501(연산군 7)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일대) 토동~1572(선조 5).조선 중기의 학자.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 어머니는 인주이씨이다. 김우옹·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사위이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3년에는 경상감사 이언적이 만나기를 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1551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 1559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551년 오건(吳健)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 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571년에는 선조가 식물(食物)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72세로 죽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산서원(德山書院)을 세운 뒤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晦峴書院)을 세웠고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되었다. 또한 조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이 생존했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정도로 사화가 자주 일어난 때로 훈척정치(勳戚政治)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다. 그는 성년기에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보았다. 기묘사화 때는 숙부 언경(彦卿)이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성우(成遇)·송인수(宋麟壽) 등 많은 친구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그는 1, 2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곧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인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 남명학). 그가 늘 지니고 있던 검명(劍銘)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고 새겨놓았듯이 그의 철학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나간다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한 것이었다.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한 본심(本心)의 함양에 주력하게 되는 반면 '의'는 외적 행위의 단재(斷裁)를 통한 사욕(私欲)의 제거에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일체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했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그는 초학자에게 〈심경 心經〉·〈태극도설 太極圖說〉·〈서명 西銘〉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 방법을 비판하고, 〈소학〉·〈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이황과 기대승 등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했다(→ 사단칠정논쟁).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기록 곳곳에 당시 폐정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준엄한 비판과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난세(亂世)에는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을 투철히 하여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식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의식을 보여주었다. 조식과 그의 문인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유학의 두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었으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흥 등 조식의 문인들이 광해군 때 대북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참여한 탓에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조식에 대한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그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남명집〉과 독서를 하다가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 學記類編〉이 있다. [성리학] 유교에 철학적 세계관을 부여하고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 확립한 새로운 학풍. 중국에서는 이미 당대부터 종래의 훈고학(訓?學)과는 다른 유교학풍을 세우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그 노력은 북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라는 사상체계와 학문방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후 남송의 주희(朱熹 : 1130~1200)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朱子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대의 왕수인(王守仁 : 1472~1528)의 학문·사상, 즉 양명학까지 성리학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만을 성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송대 성리학의 성립에는 불교 철학이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성리학의 세계관과 불교의 세계관은 근본적인 성격이 달랐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현실의 자연과 사회는 궁극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가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회를 도덕적인 본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개별성을 긍정했다.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에 의해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기는 맑음과 흐림, 무거움과 가벼움 등에 따른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갖는다.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적 질서를 갖는 것이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법칙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만물의 존재 근거가 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만물에는 모두 이가 내재한다는 점에서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인간 이해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으로 체계화되었다. 본연지성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이로서, 도덕적 본성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기질지성은 인간 형성에 관여하는 기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육체와 감각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인간 본능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본연지성에 따른 행위는 선한 것이며, 기질지성에 따른 행위는 인욕에 의해 악으로 흐르는 경향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보존하는 도덕 실천을 통해 본연지성에 따르는 생활방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방식을 가지기 위해서 사물에 존재하는 천리를 인식하는 궁리(窮理)와 인욕의 발동을 억제하는 내면적 수양으로서의 거경(居敬)이라는 수양 방법이 제시되었다(→ 거경궁리). 그런데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의 구체적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나아가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따라서 성리학은 이의 보편성을 통해 유교적 윤리도덕과 명분론적 질서의 보편성을 교설하며, 인간은 명분론적 질서 속에서 각각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결국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성의개념] 인간이 갖추고 있는 선험적·보편적 본성을 가리키는 개념. 성에 관한 논의는 중국 전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심성론). 이 시기 성설은 주로 성의 선악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고자(告子)의 성무선무불선설(性無善無不善說),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筍子)의 성악설(性惡說) 등을 들 수 있다. 그후 후한대의 양웅(揚雄)은 성의 선악혼설(善惡混說)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당대의 성설은 동중서(董仲舒)에서 발단하여 한유(韓愈)에 이르러 정립된 성삼품설(性三品說)로 대표된다. 이는 인간에 따라 그 성에 상(上) 즉 선(善), 중(中) 즉 선악혼(善惡混), 하(下) 즉 악의 차별이 있다고 하며 성의 선악에 따라 인간을 고정적으로 서열화했다. 이러한 성설에 의하면 인간의 상하계층은 타고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 되어 인간은 원래부터 불평등한 존재가 된다. 수·당대에는 이러한 유교적 성설과 함께 불교의 불성론(佛性論)이 인간의 성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불교의 불성에 대한 논의는 모든 인간이 해탈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 근거로 모든 인간이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 불성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인간의 근기(根機)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근기를 성삼품설과 마찬가지로 상·중·하 3단계의 차별이 있는 것으로 설명했다. 불성론은 인간의 성 그 자체의 성질, 특히 선악과 관련된 성질을 문제삼기보다는 인간의 마음 속에 불성이라는 신비스런 정신적 실체의 존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때까지의 유교적인 성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성론은 송대에 새로운 유교로 성립한 성리학의 성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은 그 이전까지의 유교적·불교적 성설을 계승하고 종합하여 체계적인 성설을 정립했다. 북송 때의 성리학자인 장재(張載)는 성을 천지지성(天地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했고, 정이(程?)는 의리지성(義理之性)과 기질지성으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남송대의 주희(朱熹)는 장재와 정이의 이론을 계승하여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의 개념에 의해 인간의 성을 설명했다. 이 2가지 성 가운데 본연지성이 성의 기본 내용이며, 그것은 이기론에서 말하는 이(理)가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곧 성리학의 성설을 집약하는 '성즉리'(性卽理)라는 명제의 내용이다. 성리학의 설명은 불교에서 주장하는 불성의 보편성에 대한 교설을 계승하여 인간의 보편적 본성으로서 본연지성의 개념을 설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과 성리학의 본연지성은 그 내용에서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불성이 성불(成佛) 가능성이라는 초세속적인 내용을 갖는 것이라면, 본연지성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현세적인 도덕규범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결국 성리학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인의예지신이라는 오상(五常)의 도덕규범이 내재해 있으며, 그러한 도덕규범에 의해 인간의 선험적이고 보편적인 본성이 규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성리학에서는 그 이전까지 유교에서 성의 차별을 강조하던 성삼품설이나 불교의 근기설을 기질지성의 개념 속에 포함시켜 설명했다. 성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형성에는 이와 함께 기가 관여하게 되는데 그러한 기의 관여에 따라 형성되는 성을 기질지성이라 했다. 이 기질지성의 차이에 따라 인간은 자신이 갖추고 있는 본연지성을 제대로 실현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본연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평등한 존재이며, 나아가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본연지성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성설은 배워서 성인에 이를 수 있다는 성리학의 성인관과 모든 인간에 대한 도덕적 교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교화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불교의 불성론에 따른 인간 본성의 이해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주자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성즉리의 사상이 들어오면서부터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개념을 통해 성을 이해했다. 처음에는 주자성리학의 성설을 그대로 따랐으나 16세기 후반부터는 독자적인 성설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성리학의 중심문제로 떠오른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 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사단칠정논쟁에 보이는 성에 대한 견해는 이원론과 일원론으로 구분된다. 이황(李滉:1501~70)은 이원론의 입장에서 이(理)를 내용으로 하는 본연지성과 기(氣)를 내용으로 하는 기질지성이 각기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 구별을 강조했다. 따라서 성이 발한 것으로서의 정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본연지성이 발한 사단과 기질지성이 발한 칠정은 각각 구분되며, 사단은 순선이고 칠정은 선악이 함께 있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일원론의 입장을 취하는 기대승(奇大升:1527~72)과 이이(李珥:1536~84)는 인간에게 성은 기질지성밖에 없으며 본연지성이란 그 기질지성에 내재하는 이의 측면만을 가리키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했다. 본연지성은 이론적 개념일 뿐 실재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개념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성이 발한 정은 선악이 함께 있는 칠정뿐이고, 사단은 그 칠정 가운데서 선한 측면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후 조선에서 성설의 발전은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으로 이어졌다. 이 논쟁은 이이의 성리학을 계승한 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이이는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에 의해 "인성이 물성이 아닌 것은 기의 국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의 통이다"라고 하여 천부의 이가 한결같은 것일지라도 인물이 기질을 갖추고 품수한 이, 즉 성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후 율곡학파는 인성과 물성이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708년(숙종 34) 이간(李柬:1677~1727)과 한원진(韓元震:1682~1751) 사이에 인물성동이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는데 물성도 인성과 마찬가지로 오상(五常)을 갖추고 있는지의 여부가 그 논쟁점이었다. 한원진은 이이의 '이는 같으나 성은 다르다'는 논리에 입각하여 물에는 인의예지신의 오상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함으로써 오상을 모두 갖춘 인성과 그렇지 못한 물성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간은 '성은 같으나 기가 다르다'는 논리에서 인과 물에 모두 오상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 인과 물의 근본적 차별성을 부정하고, 외면적으로 물이 오상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인과 물의 기질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지 본연이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이후 이 논쟁은 율곡학파 전체에 파급되어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인물성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호론(湖論)이라 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낙론(洛論)이라 했다. 이러한 논쟁은 성리학의 수양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적 쟁론이었으나, 그 결과는 인간중심, 즉 인간본성과 그 도덕적 지향에만 집중되었던 종래 성리학의 인식 범주를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 객관사물의 세계에까지 확대시키는 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호락논쟁 이전의 성리학에서 인간의 심성문제에만 주력하던 것에 비하면, 이때 물성이 문제되고 있다는 자체가 당시 학자들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사물을 새로이 설명해가려 함을 보여준 것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심성론 위주의 성리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 태도의 출현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상과 같이 사단칠정논쟁이나 인물성동이논쟁을 통해 조선의 학자들은 성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했으나, 그것은 오상이라는 구체적 도덕규범을 인간의 본성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성리학적인 성설의 범위를 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경우는 오상이라는 구체적 도덕규범이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한다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성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도 유교적인 성선설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말하는 성은 성리학에서처럼 오상이라는 구체적 도덕규범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의하여 선과 악이 규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도덕적 능력에 의해 선과 악이 판단·선택된다고 하여 성리학적인 성설과는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정의개념]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본래 가지는 감정이나 정서를 가리키는 개념. 정이라는 말은 〈시경〉·〈서경〉에도 이미 보이지만 그것이 철학적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였다. 맹자(孟子)는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된 도덕적 능력을 성(性)이라 했고, 이 본성의 4가지 단서로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마음을 들었다. 비록 맹자는 사단(四端)을 정이라고 규정하지 않았으나, 송대 이후의 성리학자들은 사단을 대표적인 선정(善情)으로 파악했다. 그런 점에서 〈맹자〉는 성과 관련해서 정을 설명하고, 또 그 성과 정의 선악을 문제삼는 유교적 심성론(心性論)의 원형을 보여준다. 순자는 〈순자〉 정명(正名)에서 '성의 호(好)·오(惡)·희(喜)·노(怒)·애(哀)·락(樂)을 정이라 한다' 또는 '정은 성의 질(質)이다'라고 하여 정의 근원을 성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순자의 경우에는 성이란 생존을 위한 본능적 욕구나, 외부 대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육체적 반응을 포함하는 것이며, 정이란 성에 바탕을 두고 생기는 호·오·희·노·애·락 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순자는 이러한 자연 그대로의 성과 그에 바탕을 둔 정은 악한 것이며, 따라서 사람은 주체적 행위에 의해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고 했다. 순자와 비슷한 생각은 〈예기〉 예운(禮運)에서도 보이는데, '무엇을 인정(人情)이라 하는가. 희·노·애(愛)·구(懼)·애(哀)·오·욕(慾)의 7가지는 배우지 않고서도 능하다'고 하여 후대에 칠정이라고 불리는 7가지의 정을 들고, 그러한 정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정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정은 예의에 의해 규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한대에 이르면 〈백호통의 白虎通義〉에 성선정악론(性善情惡論)이 보이는데, 이것은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인간의 본성 및 그 발현 형태로서의 정을 논하여 인간은 음양의 기를 품부받아 태어나게 되며 내적으로 오성(五性:仁·義·禮·智·信)과 육정(六情:喜·怒·哀·樂·愛·惡)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본성은 선하지만 정은 악하다는 이론이다. 중국에서 성정의 문제가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송대에 성리학이 발흥하면서부터이며, 그 성리학적인 심성론을 체계화한 사람이 주희(朱熹)이다. 주희는 장재(張載)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고, 체용(體用)·동정(動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심·성·정의 관계를 설명했다. 주희에 의하면 성의 내용은 인·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은 희·노·애·락의 정이 아직 발동하기 이전의 절대적으로 고요한 중정(中正)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이 발동하게 되면 성의 용(用)으로서의 정이 나타난다. 그리고 체(體)로서의 미동(未動)의 성과, 용(用)으로서의 이동(已動)의 정은 모두 마음에 포괄되는 것이고 또 마음의 통제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심통성정'이라고 했다. 또한 성정과 선악 문제에 대해서는 성은 선한 것이며 정은 그 자체로서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나, 그렇다고 해도 정은 이미 발한 것, 움직이는 것이므로 자칫하면 중정을 잃고 악으로 흐르기 쉽다. 다시 말해 정이 움직여 과도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욕심'으로 악이 되고, 정이 중정을 얻은 상태라면 그것은 좋은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성리학에서는 마음이 사물에 감촉되지 않은 상태, 즉 심의 미발(未發)을 성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에 이미 감촉된 상태, 즉 심의 이발(已發)을 정이라 한다. 결국 미발의 성이 발한 것이 정이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이 모두 정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한다. 주희는 사단을 '이지발'(理之發)로, 칠정은 '기지발'(氣之發)로 설명하여 양자를 구분하기도 했으나, 사단과 칠정의 이기 분속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지는 않았다. 사단과 칠정의 이기 분속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룸으로써 성리학의 심성론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 우리나라의 사단칠정론이다. 대표적인 사단칠정론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황은 이기의 관계가 밀접해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서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理發氣隨之)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之)이라 했다. 사단은 그것이 유래하는 바가 마음속에 있는 본연지성이요, 칠정은 그 유래하는 바가 기질지성이다. 또 사단은 기가 따르는 것이지만 주로 말하는 것이 이이고, 칠정은 주로 말하는 것이 기이기 때문에 각각을 '이지발'과 '기지발'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이황의 견해에 대해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질지성 속에 있는 이가 기를 타고 발한다는 점에서 그 유래하는 바가 같으며, 다만 발해서 순선(純善)한 것만을 가리켜 사단이라고 한다 했다. 그는 이황의 견해 가운데서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만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사단과 칠정이 유래하는 바를 모두 설명했으며, 칠정 이외에 따로 사단의 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 사단이 포함되는 것이라고 했다. [도학파]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 도학적 경세론(經世論)에 입각한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광조(趙光祖) 중심의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말. 도학은 원래 중국 송대·명대의 성리학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주희(朱熹)의 성리학이 전해졌다. 안유(安裕)·백이정(白?正) 등에 의해 도입된 주자학은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조선의 건국이 추구되면서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도전·권근 등과 고려 왕조의 존속을 주장했던 정몽주 계열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뒤 도학의 정통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이라고 인식되었으며, 이 학통을 이어받은 조광조·김식(金湜)·기준(奇遵)·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등이 중종 때 중앙정계에 나아가 활약하게 되면서 '도학' 이념의 정치적 실현이 시도되었다(→ 사림파). 이들 도학파가 내세웠던 정치적 이념은 요순삼대(堯舜三代)의 '지치'(至治)를 실현함으로써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들이 시도한 여러 가지 개혁정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개혁정치는 크게 인습과 구제도를 없애는 것과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이라는 2가지 측면에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전통적 명분을 회복하고자 하는 조치가 함께 시도되었다. 즉 세조의 즉위 과정이나 무오사화(戊午士禍)·갑자사화(甲子士禍)·중종반정(中宗反正) 등 여러 정변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윤리적 정당성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들과 표리관계를 가지면서 새로운 통치질서의 기반을 닦기 위해 성리학적 도덕질서에 어긋나는 궁중의 인습과 구제도의 혁파(革罷)가 추진되었다. 궁중 여악(女樂)·내수사(內需司)의 고리대(高利貸) 등의 폐지가 주장되었으며, 궁중 내의 불교행사인 기신재(忌晨齋)와 도교 의식을 행하는 기구인 소격서(昭格署)와 같은 것들을 없애려고 했다. 또한 중앙의 이러한 개혁정치와 함께 〈주자가례 朱子家禮〉·〈삼강행실 三綱行實〉 등의 윤리규범과 〈소학 小學〉과 같은 행동강령의 광범위한 보급·실천 운동을 통해 성리학적 윤리에 입각한 새로운 향촌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다. 특히 〈소학〉을 강조하고 권장했다. 왜냐하면 〈소학〉은 성리학이 설정한 교육목표를 집약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같은 교육을 통해 '요순삼대'의 이상사회가 성취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을 위해서는 그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 행위가 전제되었으며, 그것은 〈소학〉의 교육·실천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성리학적 윤리질서의 광범위한 보급을 위해 향교(鄕校)와 같은 지방교육기관이 재정비되었으며, 유향소(留鄕所)를 통한 향약(鄕約) 보급운동이 이루어졌다. 한편 이와 같은 개혁정치를 이끌어갈 인재를 과거(科擧)가 아닌 천거(薦擧)를 통해 선발하고자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했다. 이와 함께 '현철군주론'(賢哲君主論)을 제기하여 경연의 강화를 통해 군주의 자질과 덕성을 함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치들은 그동안 정치적·경제적 기득권을 누려왔던 훈구파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특히 현량과의 실시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므로 이들의 완강한 저항을 초래했다. 그결과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었고 도학정치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도학정치 이념은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에게 이어져 이후의 정치·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돈이] 1017 중국 도주(道州) 영도(營道)~1073 남강군(南康軍).중국 송대(宋代)의 철학자. 자는 무숙(茂叔). 시호는 원공(元公). 주염계(周濂溪)라고도 한다. 중국의 사상 가운데 거의 1,000년 동안 국가의 이념으로 자리잡았던 이학(理學)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또한 부분적으로 신도가(新道家)를 기초로 하여 유교를 다시 체계화했다. 그는 고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고위관직에 몸담았다. 장시[江西]의 남강군 지사(知事) 등을 지내다가 만년에는 루산 산[盧山] 롄화 봉[蓮花峯] 밑에서 은거했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늘 철학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유교사상을 재구성하면서 도가의 교의와 〈주역 周易〉에 바탕을 두었다. 2권의 주요저서 가운데 하나인 〈태극도설 太極圖說〉은 전체 250여 자로 된 짧은 책인데, 여기에서 "만물의 근원은 태극이며, 태극이 실제로 만물을 형성한다"는 사상에 근거한 일종의 형이상학을 제시했다. 우주에 대한 도교의 설명을 창조물의 진화적 과정을 설명한 〈주역〉의 개념과 결합시켰다. 즉 태극(이것은 동시에 無極임)으로부터 음(陰)과 양(陽)이 생겨나고,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5행(五行:金·木·水·火·土)이 일어난다. 음양과 5행이 합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건(乾)과 곤(坤), 즉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생겨나고, 바로 여기에서 차례로 만물이 발생·진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음양5행의 과정에서 사람만이 '가장 빼어남'(秀靈)을 얻는다. 그리고 사람이 외부의 대상에 반응할 때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서 선악의 구분이 생겨난다. 총 40장으로 이루어진 〈통서 通書〉는 유교 교의를 다시 해석하여 성리학의 중심사상인 이학의 바탕을 마련했다. 그에 의하면 성인(聖人)은 외부의 대상에 반응할 때 5상(五常:仁·義·禮·智·信)과 주정(主靜)에 따라서 행한다. 사람의 도덕성의 기초는 신중함(愼)에 있고, 신중함을 통해 사람은 선악을 구분하며 자신을 완전하게 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간단명료하고 체계적인 형이상학을 통해 유교 이학의 기초를 세웠는데, 이는 이후 성리학을 소생시키고 체계화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은 이후 주희(朱熹:1130~1200)가 보다 체계적으로 성리학을 전개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그의 영향으로 〈주역〉은 이후 주희와 그밖의 남송(南宋) 성리학자들에 의해 위대한 유교 경전으로 존중받게 되었다. [백이정] 1247(고종 34)~1323(충숙왕 10).고려 후기의 문신·유학자. 본관은 남포(藍浦).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彛齋). 아버지는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문절(文節)이다. 1275년(충렬왕 1) 문과에 급제해 첨의평리(僉議評理)·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거쳐 뒤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당시 원(元)에서는 남송(南宋) 때 일어난 성리학이 세조(世祖)의 유교숭상정책 이후 급속히 보급되어 발전하고 있었다. 백이정은 1298년 8월 충선왕이 원나라로 불려갈 때 따라가 수도인 연경(燕京)에서 약 10년 동안 머무르며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정주(程朱)의 서를 연구했다. 그후 고려에 들어올 때 정주의 서적과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가지고 와 이제현·박충좌 등에게 전했다. 안향이 주자학 도입에 힘썼다면, 그는 주자학의 기초를 세우고 많은 문인을 배출해 고려말 주자학을 심화·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의 학통은 이제현을 통해 이색에게, 이후 권근과 변계량 등 조선 초기 성리학자에게까지 이어졌다. 남포 신안원(新安院), 충주 도통사, 진주 도통사(道通祠), 남해 난곡사(蘭谷祠)에 제향되었다. 유고로 〈연거시 燕居詩〉·〈영당요 詠唐堯〉·〈한벽루 寒碧樓〉·〈여홍애집구 與洪厓集句〉 등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안향] 1243(고종 30)~1306(충렬왕 32).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안향 /안향 영정안향 /안향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직접 주자서(朱子書)를 베껴오고,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는 등 성리학의 도입과 보급에 힘썼다.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 '향'(珦)자가 조선 왕조 문종의 이름자와 같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모두 초명으로 불렀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관직생활 아버지는 밀직부사 부(孚)이며,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여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었으며, 그후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이 되었다. 1288년 우사의(右司議)·좌승지를 지내고, 1289년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었다. 11월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가 되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했고, 이어 밀직사사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올라 관제를 개혁할 때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었다. 그해 8월 왕을 따라 다시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렬왕이 복위된 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올랐다. 1303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성리학의 도입과 문교진흥 고려는 고종말에 원과 화친을 맺은 이래 대대로 몽고의 간섭을 받아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이 손상되었다. 그러나 종전(終戰)에 따른 평화의 회복은 학문과 문교(文敎)의 재건을 가능하게 했다. 충렬왕 때는 이러한 문교부흥의 기운이 소생하기 시작한 시기인데, 특히 원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원나라는 이미 남송(南宋)을 멸하고 명유(名儒)를 초치하여 유학을 장려하던 시기로서 정주학(程朱學)이 북방에서도 행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안향은 이러한 시기에 원나라를 왕래하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이를 국내에 들여온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였다. 그는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를 직접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眞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으며, 1297년에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모셨다. 또한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신서(朱子新書) 등을 구해오게 했다. 아울러 문교진흥을 위해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그 이자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했다. 1304년에는 섬학전을 설치하여 박사(博士)를 두고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다. 섬학전은 일종의 육영재단으로 당시 국자감 운영의 재정기반이 되었다. 학풍 안향이 전한 성리학은 당시 원나라의 학풍을 주도한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이기(理氣)보다는 심성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의 도는 일용륜상(日用倫常) 속에서의 충(忠)·효(孝)·신(信)·경(敬)·성(誠)이라는 실천덕목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를 경시하고 의리에서 벗어났다고 배척했다. 〈회헌실기 晦軒實記〉의 "내 일찍 중국에서 주회암(朱晦菴:주자)의 저술을 얻어보니 성인의 도를 발명하고 선불(禪佛)의 학을 물리친 것으로, 그 공이 족히 중니(仲尼:공자)에 비할 수 있다. 중니를 배우려면 먼저 주회암을 배우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자가 저술을 통해 불교를 배척한 공이 높으며 공자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주자를 경모하여 주자의 화상을 벽에 걸어두었으며, 자신의 호도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의 '회'자를 따서 회헌이라 했다. 안향으로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한국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고려의 불교세력과 대항하고 나아가 그것을 압도하면서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으로까지 성장했다. 그가 죽자 충렬왕은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명으로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그 모사본이 현재 전하고 있다. 1319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 순흥에 그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그밖에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이색] 1328(충숙왕 15)~1396(태조 5).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아버지는 찬성사 곡(穀)이다.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가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아버지가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조관(朝官)의 아들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이색은 이제현(李齊賢)을 좌주(座主)로 하여 주자성리학을 익혔고, 이 시기 원의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수학하여 주자성리학의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1352년(공민왕 1) 아버지가 죽자 귀국해 토지문제·왜구대책·학교교육론·이단배척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53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에 가 회시(會試)·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이어 고려에 돌아와 전리정랑(典理正郞)·내서사인(內書舍人)을 지냈다.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시정8사 時政八事〉를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방(政房)의 혁파였다. 이 일로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文武)의 전선(銓選)을 장악하게 되었다. 신흥유신으로서 현실개혁의 뜻을 가진 이색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영시키는 가운데 순조롭게 출세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색의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오히려 현실개혁의지를 약화시키고, 자신과 관계를 맺은 부류와 타협하게 되었다. 1357년 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 등과 더불어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지를 논했다. 새로이 별감을 파견하면 이배(吏輩)들이 농간을 부릴 것이며 별감은 세포(稅布)를 많이 거두어서 왕의 총애를 받으려 하기 때문에, 일반 민은 소금을 받지도 못하고 포만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색은 왕이 재추(宰樞)와 대성관리(臺省官吏)를 모은 가운데 별감 파견의 가부를 물으려 하자 병을 칭하여 피했다. 이는 염제신과 같은 권세가가 별감 파견을 주장한 것에 대한 이색의 타협으로서, 다른 간관(諫官)이 이 일로 좌천된 것과 달리 이색은 중임되었다. 또한 1362년 성균시의 합격자를 뽑던 중 왕이 환관(宦官)을 보내어 벽승(嬖僧)의 사패(賜牌)에 어보(御寶)를 찍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색은 처음에 신하들과 의논할 일이라 하여 반대했지만 이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찍었다. 사패는 국왕이 충성의 대가로 공신이나 기타 사원에게 설정해주는 토지의 증빙문서였는데, 당시에는 권세가의 토지확대방법으로 이용되어 토지겸병과 수취체계 중첩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이색은 국왕의 힘에 의해서 자신의 뜻을 계속 관철시키지 못하고 이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1359, 1361년 홍건족이 침입했을 때 왕을 시종하여 호종공신 1등에 책봉되어 전(田) 100결(結), 노비 20구(口)를 받았다.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토지·노비와 관직을 통해 얻은 수조지, 그리고 공신전으로 중앙정계에 정치적 지위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반도 마련하고 있었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될 때 이색은 대사성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더불어 정주성리(程朱性理)의 학문을 부흥시키고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유신들을 길러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고 이어 공민왕이 죽자 그의 정치활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그후 1375년(우왕 1)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판삼사사를 역임했다. 1386년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해에 판문하부사 조민수(曺敏修)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동지공거 염흥방(廉興邦)이 그를 합격시킬 것을 청했으나 거절했다. 그는 1377년 장경(藏經)을 인성(印成)하고, 1387년 서보통탑(西普通塔)의 탑기(塔記)를 짓는 등 주자성리학자이면서도 불교를 선호하며 긍정하고 있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고려왕조의 존립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개혁정치를 희구한 이색은 1389년(공양왕 1) 도평의사사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이숭인·변안렬(邊安烈) 등과 같이 옛 법은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불법적인 대토지소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사전개혁과 같은 급격한 전제개혁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위화도회군을 군령을 위반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로 이해했으므로 그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위화도회군의 중심인물과 동조세력은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색과 같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정도전(鄭道傳)의 상소로 인하여 그는 장단으로, 아들 종학(種學)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김저(金佇)의 옥(獄)과 윤이(尹?)·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는 이숭인·변안렬·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투옥되거나, 금주·여흥 등지로 유배당하는 등 고려 말기의 정치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색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말에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자로 지목되어 우현보 등 56명과 더불어 논죄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장흥에서 석방된 그는 3년간 한산에서 지내고 1394년(태조 3)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1396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색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이제현을 통하여 이 시기 선진적인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에 대처하면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원의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이(理)·기(氣)·태극(太極)과 같은 주자학의 핵심개념을 사용하여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했고, 주자학의 수양론인 성학론(聖學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양론과 달리 죽음과 인간적 고뇌와 같은 초인간적·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 의존했다. 또한 송대의 혈연·의리·도덕·윤리 등을 말하는 도통론(道通論)을 전개한 것이 아니고 원의 형세론적 도통론을 전개했다. 즉 그의 주자성리학의 발원지인 원의 영향과 불교의 영향 속에서 송대의 주자학과 구분되는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저서로 〈목은유고〉·〈목은시고〉 등이 있다.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정몽주]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고려 말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영일정씨세보〉에 의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산직(散職)인 동정직(同正職)과 검교직(檢校職)을 지냈는데, 이는 그의 집안이 지방에 거주하는 한미한 사족이었음을 보여준다. 1360년(공민왕 9) 김득배(金得培)가 지공거, 한방신(韓邦信)이 동지공거인 문과에 응시, 삼장(三場)에서 연이어 첫자리를 차지해 제1인자로 뽑혔다. 1362년 예문검열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가 친원파인 김용(金鏞)의 계략에 빠져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과 함께 상주에서 효수당했는데 그는 스스로 김득배의 문생(門生)이라 하고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장사지내주었다. 1364년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삼선(三善)·삼개(三介)를 쳤다.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임명되었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 사대부들도 100일만 지나면 상을 벗었는데 그는 부모상 때 분묘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이 극진했으므로 왕이 그의 마을을 표창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면서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 朱子集註〉뿐이었는데 정몽주는 그것을 유창하게 강론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뛰어났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많이 의심했다. 그뒤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을 얻어 참조해보니 그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탄복했다. 당시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던 이색(李穡)은 정몽주가 이치를 논평한 것은 모두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하여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했다. 1372년 서장관으로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난징[南京]에 가 촉(蜀)을 평정한 데 대하여 축하하고 돌아올 때 풍랑을 만났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1375년(우왕 1)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임명되었다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전임했다. 이보다 앞서 명나라가 처음 건국되었을 때 그가 힘써 요청하여 국교를 맺었는데, 당시 공민왕이 피살되고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인 일로 국내가 뒤숭숭하여 명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리게 되자, 사신을 보내 사정을 고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얼마 후 북원(北元)에서 사신이 오고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사신을 맞이하려 하자,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에 반대했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이당시 왜구가 자주 내침하여 피해가 심하므로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 화친을 도모했는데 나흥유는 투옥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 이에 정몽주를 보빙사(報聘使)로 일본에 보내 해적을 금할 것을 교섭하게 하자 이웃나라 간의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하여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이어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당시 명은 고려에 출병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켰으며 5년간에 걸쳐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신 홍상재(洪尙載) 등을 유배보냈다. 이때 사신을 보내 명 태조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사람마다 가기를 꺼려했으나, 정몽주는 사신으로 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홍상재 등도 풀려나 돌아오게 했다. 1385년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했다. 1386년 명에 가 명의 갓과 의복을 요청하고 해마다 보내는 토산물의 액수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여 밀린 5년분과 증가한 정액을 모두 면제받고 돌아왔다. 우왕은 이를 치하하여 옷·안장 등을 주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했다. 1388년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되었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는데, 같은 해 도당(都堂)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이듬해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지고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양왕 옹립에는 정도전(鄭道傳)·이성계 같은 역성혁명파와 뜻을 같이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했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배웅하러 나갔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준(趙浚) 등 역성혁명파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이방원(李芳遠)이 이성계를 급히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고, 이어 정세를 엿보기 위해 이성계를 찾아가 문병을 하고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고려 말기에 들어서 법의 자의적 운영에 대한 폐단을 시정하고자 통일된 법전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는데, 정몽주는 〈지정조격 至正條格〉·〈대명률 大明律〉, 그리고 고려의 고유형법을 수집·연구하여 왕에게 바쳤다. 또한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했다. 한편 당시 풍속에 불교의 예법을 숭상하는 것을 비판하고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의거해서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 제사지내도록 했으며, 개성에 5부학당(五部學堂), 지방에 향교를 두어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비롯하여 많은 한시가 전하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한다. 조선시대에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도통(道統) 중심의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때 도통의 기준을 주자학의 학문적 공적으로 한 공적론(功積論)과 의리명분으로 한 의리론(義理論)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결국 주자학의 학문적 성숙이 심화되면서 후자를 대표하는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1517년(중종 12)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굉필] 김굉필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노불(老佛)을 사도(邪道)라 하여 배격하고 유학의 도통(道統)에 참여할 때 참다운 진리를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수기(修己)의 대요(大要)는 언행을 삼가는 것[謹言行]과 위의를 바르게 하는 것[正威儀]에 있으며, 수기의 근본이 정심(正心)·성의에 있으니만큼 수기를 위한 궁행(躬行)의 요체는 경외를 숭상하는 것[崇敬畏]과 일욕을 경계하는 것[戒逸慾]에 있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수기의 행(行)이 있은 다음에야 도술을 밝히는 것[明道術], 인재를 가리는 것[辨人才], 정치의 대체를 파악하는 것[審治體], 인정을 살피는 것[察人情] 등의 치인(治人)의 대요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수기의 궁행을 의리실천의 필수 전제조건으로 여기는 점이 학문은 〈소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 〈소학〉이 제시하는 생활규범을 실천하는 데 힘썼던 까닭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조선 주자학의 기본문제였던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문제가 아직 논의되고 있지 않았으나, 그는 이미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간략하나마 다루고 있었다. "천하의 만물은 이(理)가 있고 분(分)이 있으니, 이(理)는 만가지 것이 모여 하나가 된 것이고 분(分)은 가지로 나뉘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하여 보편과 특수의 일체성을 강조했다. 한편 "작은 털에도 태극이 갖추어져 있으며 태산이 크다고 하지만 그 역시 하늘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形而上)으로 보면 천지도 또한 일물(一物)이 되고 형이하(形而下)로 보면 사물마다 무극(無極)이 된다"고 이일분수설을 설명했다. 그의 학문은 조광조·김안국(金安國) 등에 전해져 뒷날 지치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김안국·이장길(李長吉)·윤신(尹信)·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 등이 있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이황은 그를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으로 칭송했다. 아산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 화곡서원(花谷書院)·희천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 景賢錄〉·〈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인후] 김인후는 학문적으로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견해를 취했으며,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당시 이항과 기대승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반대하고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수양론에서는 경(敬)을 중시했다. 즉 본래 마음[心]이 일신(一身)을 주재(主宰)하지만 기(氣)가 섞여 유혹되면 마음이 외부로 치달려서 주재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경으로써 마음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했다. 그는 이황과 함께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조금이라도 주희(朱熹)의 학설에 따르지 않는 점이 있으면 이학(異學) 또는 이단(異端)으로 공박한 인물로 평가된다.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지만, 그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밖에 천문·지리·의학·점서(占筮)·산수·율력(律曆)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서예에도 능했다. 1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되었다.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 노봉서원(露峰書院), 옥과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 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 西銘事天圖〉·〈백련초해 百聯抄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성혼] 1535(중종 30)~1598(선조 31).조선 중기의 학자.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성리학).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 아버지는 조광조의 문인인 수침(守琛)이다. 10세 때, 기묘사화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를 따라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다. 1551년(명종 6)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梁)의 딸과 결혼했다. 같은 해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는 응하지 않았고,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 들어가 〈상서 尙書〉 등을 배웠다. 20세에 한 살 아래의 이이와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을 만났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내섬시첨정, 1583년 이조참판,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정철(鄭澈)에게 구원해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1591년 〈율곡집〉을 평정(評定)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어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유성룡·이정암(李廷?)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이에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듬해 파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송시열] 1607(선조 40)~1689(숙종 15).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 출신 및 관직생활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甲祚)이고,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거 정계에 진출해 산당(山黨)이라는 세력을 형성했던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26세 때까지 외가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살다가 회덕(懷德)으로 옮겼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 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도 장령에 등용되어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이때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다가,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에 밀고함으로써 다시 물러났다. 그뒤 충주목사·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1658년(효종 9)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기년복(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하면서 3년복(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던 남인의 윤휴(尹?)와 대립했다. 예송은 〈대명률 大明律〉·〈경국대전〉의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결국 1년복으로 결정되었지만 이 일은 예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둘러싼 당쟁으로 파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송을 통해 남인을 제압한 송시열은 효종에 이어 현종이 즉위한 뒤에도 숭록대부에 특진되고 이조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한 데 이어 좌참찬에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짓는 등 현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다. 그러나 이때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돌아갔다. 그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으나,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막후에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제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 :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 실각당했다. 이듬해 앞서의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옮겨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뒤 서인 내부에서 남인의 숙청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겼을 때, 강경하게 남인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을 지지했다. 이로써 서인은 1683년 윤증(尹拯)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학문경향과 정치사상 송시열은 젊은 시절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는데 그의 학문은 바로 이러한 기호학파의 학맥을 근간으로 형성되었다. 이기론(理氣論)에서 그는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는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또한 정통 성리학자로서 그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다. 〈주자대전 朱子大全〉·〈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긴 것은 이같은 그의 학문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학풍은 기본적으로 양란 후의 사회적·정치적 동요를 수습해서 양반지배체제를 재건하고 나아가서는 조선과 명(明)의 '원수'인 청을 물리치고 중화적 세계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현실인식의 반영이었다. 곧 주자학의 명분론인 삼강오륜을 사회운영의 원리로 파악하여, 청에 대한 복수의 근거를 명에 대한 강상(綱常)·군신(君臣)의 관계에서 찾았다. 이같은 북벌론은 당연히 조선왕조의 부국강병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정치적·사회적인 측면에서 송시열이 강조했던 것은 '세도정치론'(世道政治論)이었다. 이는 강상윤리를 기초로 하는 사회기강의 확립과 주자학적인 의리(義理)·도학(道學)의 실현에 목표를 두는 것이었으며, 또 이의 실현주체로서 성학(聖學)의 수양을 쌓은 성인(聖人)으로서의 군주를 상정하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군주가 없을 경우에는 현인(賢人) 재상(宰相)이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현실적으로는 세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군자당(君子黨)은 노론뿐이라는 당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주자의 교의에서 벗어나 본래의 공맹(孔孟)에서 유학을 재정립하고 군주 중심의 정치운영방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허목(許穆)이나 윤휴 등 남인의 학자들과 커다란 차이를 드러냈던 것이다. 복상을 둘러싼 2차례의 예송에 깊이 간여하면서 남인과 대립했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송시열의 이같은 정치운영론은 일단 실패했으나, 18세기 후반 이후 노론의 일당전제정치 확립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체계로서 정치와 학문 양 측면에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했다. 지주제유지론과 부세제도개혁론 송시열은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여 명에 대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에 대한 복수설치가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것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임과 동시에 양란 이후 국가재조(國家再造)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국가기강의 확립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강력한 통치이념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국가재조의 방향에 있어서 그는 봉건국가의 틀을 유지·강화하는 가운데 그 운영을 개선하여 양란 이후의 사회적 모순에 대처해나가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송시열은 이 시기 정전론(井田論)·기전론(箕田論)으로 집약되던 토지개혁론에 대해 반대했다. 곧 그는 주자의 정전제난행설(井田制難行說)에 따라 정전제는 토지가 적고 인구가 많은 시기에는 실현할 수 없으며 병란을 거치고 인구가 감소한 뒤가 아니면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양란 후의 사회경제 재건을 위해 내놓은 대책은 부세제도(賦稅制度)와 재정제도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이었다. 즉 부세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문란해진 농민수취 질서를 재정비하여 농민부담을 경감시키는 한편 국가재정을 강화한다는 것이 그 주요내용이었다. 내수사(內需司) 혁파, 궁방전(宮房田) 억제, 군영(軍營) 감축, 호적법·호패법·향약·사창법·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대동법·호포법 등의 재정비·실시 등 송시열이 제기한 구체적 방책들은 농민의 각종 세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세를 부담하는 양민층을 확대하고 국가의 재용(財用)을 절감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통해 민산(民産)을 안정·발전시키는 것이 강력하게 요구되는 시점에서 송시열의 부분적인 제도개선책으로서는 점차 높아가는 사회불안과 체제동요를 막을 수 없었다. 송시열이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던 것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화양동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약 70여 개 소에 이르는 서원이 세워졌다. 1716년(숙종 42)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을 통해 그의 학문적·정치적 권위가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영조·정조 이후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사상적 지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구축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지문 문제로 노론·소론으로 분당되어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가 나왔는데 이들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주자학적인 정치·경제·사회 사상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정통적 흐름이자, 가장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 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 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 經禮疑義〉·〈심경석의 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 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 朱文抄選〉·〈계녀서 戒女書〉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1717년(숙종 43) 교서관에서 간행된 〈우암집〉 167권과 1787년(정조 11) 평양감영에서 출간한 〈송자대전 宋子大全〉 215권이 있다. 그뒤 9대손 병선(秉璿)·병기(秉夔) 등이 〈송서습유 宋書拾遺〉 9권, 〈속습유 續拾遺〉 1권을 간행했다. [이언적] 1491(성종 22) 경북 경주~1553(명종 8).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성리학의 이설(理說)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사마방목 /사마방목, 1513년 사마시 합격자 ...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로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 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왕필] 226~249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철학자. 자는 보사(輔嗣). 산양(山陽) 고평(高平 :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진샹 현[金鄕縣]) 사람이다. 상서랑(尙書郞)을 지냈다. 왕필은 24세의 나이로 죽을 때 이미 도교경전 〈도덕경 道德經〉·〈노자 老子〉 등과 유교경전의 〈주역 周易〉의 탁월한 주석가였다. 이러한 주석서들을 통해 중국 사상에 형이상학을 소개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성리학 저작의 전조가 되었다. 하안(何晏)·하후현(夏侯玄) 등과 함께 현학(玄學)의 청담기풍(淸談氣風)을 창시함으로써 '정시지음'(正始之音)으로 일컬어졌다. 왕필에 따르면 모든 현상의 기초가 되면서 이를 통합시키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의 원칙에 지배받지만, 모든 사물을 통합시키는 하나의 궁극적인 원칙이 있다. 이 궁극적인 원칙이 '도'(道)이며, 그는 이것을 '무'(無)라고 해석했다. 초기의 도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무'를 '유'(有 : 현상·존재)와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개념으로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존재의 최종점이자 본체(本體)라고 여겼다. 왕필은 자신의 감정론에서 인간이 감정을 통제할 필요성을 다루었다. 한때 그는 공자가 커다란 기쁨과 슬픔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그를 낮게 평가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감정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며, 성인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과 똑같이 반응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성인은 감정에 유혹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고 보았다. 저서로 〈주역주 周易注〉·〈주역약례 周易略例〉·〈노자주 老子注〉·〈노자지략 老子指略〉·〈논어역의 論語繹疑〉가 있다. [박세당] 1629(인조 7)~1703(숙종 29).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경학에서부터 경세론에 이르기까지 반주자학적인 유학사상을 전개하여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체계화하는 데기여했다. 출신 및 관직생활 본관은 반남.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서계초수(西溪樵?)·서계(西溪). 할어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양반가문 출신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곤궁한 환경에서 자랐다. 홀어머미 밑에서 원주·안동·천안 등지로 떠돌아다니다가 10세 때 비로소 글을 배웠는데도 재주가 뛰어나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7세 때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가를 왕래하며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등과 함께 학업을 계속했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을 하고 성균관전적이 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병조정랑, 홍문관교리 겸경연시강관, 함경북도평마평사를 두루 지냈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오고, 1670년에는 잠시 통진현감을 지냈다. 만년 그는 소론계열로서 노론계의 송시열과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특히 당시 정치상의 주요사안이었던 대청(對淸) 문제에서 온건론자로 간주되어 송시열을 비롯한 강경론자들로부터 '오사'(五邪) 가운데 하나라고 지탄을 받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당대의 대학자·대정치가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자 정치인으로서 그 뜻을 펴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양주 석천동에 퇴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강학과 연구에 몰두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서인이 다시 득세를 하자, 사실상 야인이었던 그에게 호조참판·공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이조판서·지중추부사 등 요직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1702년(숙종 28)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 비문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노론계를 자극하여 거센 반발을 일으켜 결국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를 위시한 김진옥(金鎭玉)·정호(鄭澔) 등과 성균관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 180여 명의상소로 삭탈관직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다. 이탄(李坦)·이익명(李翼明)·이인엽(李寅燁) 등 박세당의 문인들의 소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반주자학적 경학사상 박세당은 당시 통치이념으로서 확고한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독창적인 학문세계를전개했다. 그의 반주자학적인 경학사상은 만년에 14년에 걸쳐 저술한 〈사서사변록 四書思辨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대학〉·〈중용〉·〈논어〉·〈맹자〉에 대한 주자의 주해에 반기를 들고, 주자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자기 나름의 주해를 붙인 것이다. 반주자학적 경전 해석의 주요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자가 '인물일체관'(人物一體觀)을 기초로 '천인상감'(天人相感)을 믿었던 데 반하여, 그는 '물아이분관'(物我二分觀)을 기초로 의인화된 하늘과의 상감(相感)을 부인했다. 인간과 분별되고 오직 인간의 역량으로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연을 말함으로써, 일종의 '물리학적인 자연관'을 공고히 했다. ② 본성(本性=天理)의 선험적 본구(本具=天命)를 믿음으로써 윤리 도덕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주자와는 달리 본성의 본구를 부인하여 윤리 도덕의 가변성·선택성에 대한 각성의 길을 열어놓았다. ③주자의 현실재론적(現實在論的) 시각을 배격하고 '주기적(主氣的) 경험주의' 철학을 견지했다. ④ 도심(道心) 못지 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했다. 이는 백성들의 안정을 위하여 명분론보다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그의 실학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사서주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반주자학적 경전이었으므로 그의 학문은 당시 노론계열로부터 "위로는 주자를 모멸하고 아래로는 송시열을 욕되게 했다"는 강한 비판을 받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반주자학적인 경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에게 이어져 다산경학(茶山經學)의 연원적인 역할을 했다. 노장사상 그의 반주자학적인 사상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대한 관심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노장이 말한 '수신'과 '치인'이 유학에서의 의미와 같은것으로 보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언설의 간결함과 의미의 심오함이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유학의 입장에서 노장을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을 끌어내고자 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노장의 용어를 유학의 용어로 대치하여 설명하는가 하면 사상의 내용까지 유학의 의미로 해석했다. 예컨대 노자의 '도'를 '무'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또 '이'(理) 즉 '태극'(太極)으로 설명하는 해석이라든지, '자연'이 '본성(천성)대로 하되 지나침이 없는 의미'라는 〈중용〉식의 해석 등이 그것이다. 그는 노장사상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해 문(文)보다 질(質)을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노장사상의 성격에 호감을 갖고 그것을 유학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특히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해석에 집약되어 있는데, 〈도덕경〉의 근본정신이 치자의 지배욕구 포기에 있다고 보고, '무위' 또는 장자의 '무위자연'이란 치자가 사사로운 지배욕구에 얽매이지 않고 무욕의 정치, 곧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개혁사상 이러한 실제성 추구의 경학사상은 경세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일종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정치·경제·국방의 문제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핵심은 무위도식하면서 당쟁에만 매달려 있는 지배세력인 양반들에게 일반 백성이 수탈당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왕이나 대신들이 먼저 성실하고 근검해야 백성들이 살기 좋다는 전제하에서 횡렴(橫斂)의 방지와 조세의 균등화, 병제의 일원화 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항시 '허문'(虛文)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실효를 거두는 '무실'(務實)의 정책으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현실 개혁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농서 편찬이었다. 그는 조선 전기와는 다른 새로운 농서의 편찬이 요구되던 17세기의 상황에서 한전농업(旱田農業) 중심의 농서 〈색경 穡經〉을 편찬했다. 이 책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과 여타의 농서를 토대로 저술한 것인데,구체적인 작물의 재배기술 면에서뿐만 아니라 농업·농학을 보는 안목에 관해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에서 18세기 농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농학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으로 대표되는 주자학적인 사유체계와 지주제 중심의 농업·농학을 벗어나 소농층이 위주가 되는 농업·농학을 수렴하고자 했다. 한편 대외정책에서도 당시 주자학자들이 주장하던 숭명배청론(崇明排淸論)과 대립하는 입장에서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역사 속의 예로서 현실주의적인 외교 정책으로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 망하지 않은 것과, 고려말 원·명 교체기에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한 것을 들어 이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당시 숭명배청론자들이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연호란 왕조가 바뀌면 으레 변하게 마련이므로 청나라의 연호인 '강희'(康熙)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학통의 계승과 저서 박세당은 노론에 사문난적으로 낙인 찍히면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고를 지녔던 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남인성·남구만·최석정(崔錫鼎) 등 소론계열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쌓아올린 그의 학문적 업적은 조선 후기의 혁신적인 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제자들로는 이익명·이인엽·이탄·이덕수(李德壽)·조태억(趙泰億) 등이 있으며, 소론의 거두인 박태보(朴泰輔)가 그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사변록〉·〈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색경〉 등이 전한다.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윤휴] 1617(광해군 9)~1680(숙종 6).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주자학이 지배하던 17세기 사상계에서 주자의 학설·사상을 비판·반성하는 독자적 학문체계를 세웠다. 예송(禮訟) 때 남인으로 활동하며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계와 맞섰으며, 숙종 즉위 후부터 경신대출척 때까지 많은 개혁안을 제기하고 실행하려 했다. 서인계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받고 끝내 처형당했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 초명은 정(?)이었으나 25세 때 휴로 고쳤다. 아버지는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효전(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627년(인조 5) 후금의 침략이 있자 보은 삼산(三山)에 있는 외가로 피난하여 외할아버지 김덕민에게서 학문의 기초를 익히고, 조식(曺植)과 학문적으로 가까웠던 성운(成運)의 서실(書室)에서 독서했다. 이때 〈황극경세서 皇極經世書〉를 접했다. 이후 이수광(李?光)의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와 이원익(李元翼)에게서 배웠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치욕을 씻을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과거 준비를 포기했다. 1639년 공주 유천(柳川)으로 내려와 지내면서 〈논어〉·〈맹자〉 등 사서(四書)와 시·서·삼례(三禮)·역(易) 등 경서 학습에 몰두했다. 이때 권시(權?)·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 등과 막역한 관계를 맺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했다. 1656년(효종 7) 세자시강원자의로부터 1659년 사헌부지평까지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1660년(현종 1)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송시열 등 서인이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여 시행하자, 삼년상을 지내자는 참최설(斬衰說)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 기해예송).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국에서 참최설은 남인의 서인 공격에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는데, 기년복제는 왕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사대부의 예(禮)를 왕에게 잘못 적용하여 '왕의 지위를 낮추고, 왕의 법통을 둘로 나누어버리는'(卑主二宗) 논리이므로 어떤 경우든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675년(숙종 1)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일어난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한 뒤,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자,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을 이끌며 활동했다. 이해 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헌·성균관좨주 등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했다. 이후 대사헌·좌참찬·우참찬·형조판서·우찬성 등을 번갈아 역임했다. 1680년 영의정 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여했다고 하여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5월에 처형당했다. 재직중 지패법(紙牌法)·호포법(戶布法)·상평법(常平法) 등 부세제도 개혁안을 여러 번 제기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지패법을 변형한 호패법(戶牌法)만이 시행되어 개혁의 뜻이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한편 도체찰부(都體察府) 설치와 무과인 만과(萬科)의 시행을 주장하여 북벌을 위한 준비를 주도했다.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간관(諫官)과 과거제, 그리고 비변사를 혁파해야 한다고 보고, 〈주례 周禮〉를 원용한 〈공고직장도설 公孤職掌圖說〉을 숙종에게 올려 그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경학] 경전의 내용을 연구하고 밝히는 학문. 중국유학사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하여 발달하였고, 유교문화권인 한국·일본 등에서는 중국의 영향 속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경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올바르게 배우고 실천하기 위하여 경전의 내용을 제대로 해명하고 그 내용을 전수하는 것을 영역으로 했다. 연구대상은 각 시기마다 양상을 달리하여 중국의 경우 한·당(漢唐)시대에는 〈역 易〉·〈시 詩〉·〈서 書〉·〈춘추 春秋〉·〈예 禮〉 등 5경에서 송(宋)나라 초기에는 13경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연구 방법과 연구 내용도 시대별로 각기 다르게 나타나 특정의 학파 및 사상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경전의 내용이 인간사회를 운용하면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는 절대 무오류(無誤謬)와 자기 완결적인 성인의 가르침, 곧 도(道) 또는 진리로 여겨지면서 그 전해지는 텍스트가 다양했던 까닭으로 이해와 해석도 연구자의 입장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며, 또한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함에 따라서 요구되는 사상의 역할이 변함으로써 그 해석의 내용 및 중심 경전에도 차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경학은 유학사상의 변화·발전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특정 사상에 규정되어 그 내용과 범위도 달라졌다. 경전 해석 형태로는 주(注)와 소(疏) 2가지 경우가 있다. 주는 경(經)의 자구(字句)를 충실하게 해설하는 1차 주석으로 전(傳)·전(箋)·집(集)·해(解)·해고(解?) 등으로 나누어지며, 소는 주의 권위를 인정하고 주를 더욱 상세하게 해설한 것으로 주석의 주석 또는 2차 주석이라 한다. 중국의 경학은 한나라 때 유학이 국정교학으로 성립되면서 형성된 이래 한·당시대, 송·명시대, 청대의 3시기를 획기로 하여 변화했다. 한·당시대의 경학은 훈고학(訓?學)으로 통칭되며, 유학이 사회의 지배이념으로서 성립되는 과정 속에서 각 경전에 대한 주석이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이 시기에는 각 경전 주석의 결정판이 만들어졌고, 경서의 수도 5경에서 13경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가운데 한나라의 경학은 이후 중국경학사의 흐름을 기본적으로 규정할 만큼 다양한 모습을 띄었는데, 금고문경학(今古文經學)의 형성 및 대립과 통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금문경학(今文經學)은 당시 널리 활용되던 금문, 즉 예서(隸書)로 쓰여진 경전을 연구대상으로 한 것으로 한의 관학(官學)으로 기능했다. 복생(伏生)이 찬술한 〈서 書〉, 고당생(高堂生)의 〈예 禮〉, 공양씨(公羊氏)의 〈춘추공양전 春秋公羊傳〉 등이 그중 중요한 것으로, 이들 경전은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로 정하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면서 '경'으로서의 절대적 지위를 부여받고 국가 통치이념을 제공하였다. 금문경학에서 중요한 것은 경문(經文)의 대의(大義)를 발휘하여 국가의 대일통(大一統)을 확고히 하려는 것으로 특히 〈춘추공양전〉이 중시되었다. 이에 반해 고문경학(古文經學)은 진(秦)나라 이전에 고문(古文)으로 쓰여진 경전을 주 대상으로 하여 후한 초기에 성립되었다. 마융(馬融)·복건(服虔) 등 민간학자들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점차 관학인 금문경학을 누르고 당시 학계의 우위를 차지했다. 고문경학에서는 문자의 해석과 전장문물(典章文物)의 탐구를 중시했으며, 특히 〈주례 周禮〉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한대 금고문경학의 대립을 해소하여 고문경학 중심의 학풍을 이룬 학자는 마융의 제자인 정현(鄭玄)이었다. 그는 5경 전반에 걸친 방대한 주석작업을 통하여 경학의 근본문헌에 대한 종합적 해석을 확립하고 또한 경학의 전영역을 '예'(禮) 질서 중심으로 체계화했다. 정현의 업적은 이후에 계속되는 경전의 주석작업 속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한나라 이후의 다양한 주석작업은 당대에 이르러 공영달(孔潁達)의 〈오경정의 五經正義〉가 나옴으로써 일단락되고 통일되었다. 송·명시대의 경학은 이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 시기 경학은 송대 초기에 〈역〉·〈서〉·〈시〉·〈의례〉·〈예기〉·〈주례〉·〈공양춘추〉·〈곡량춘추〉·〈좌전춘추〉·〈논어〉·〈맹자〉·〈효경〉·〈이아〉 등 13경이 성립될 정도로 이전 시기와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래의 유학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성리학(性理學)이란 새 사상이 형성되면서 경학의 내용과 성격도 달라졌다. 경학은 성리학의 성립기반이면서 동시에 성리학에 의해 보증되었다. 이(理)와 기(氣) 두 철학적 범주에 바탕하여 자연과 인간, 사회질서를 체계화하고자 했던 성리학이 종래 〈예기〉 속에 포함되어 있던 〈중용〉과 〈대학〉을 독립적인 경전으로 내세우고, 여기에 〈논어〉와 〈맹자〉를 더함으로써 5경을 대신하여 4서(四書)가 경전의 기본이 되는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났고, 5경의 해석도 성리학의 이론체계 속에서 일관되게 이루어졌다. 주자학을 비판하여 형성된 양명학의 경우도 경전에 대한 의존은 주자학보다 감소했지만, 경학에 대한 입장은 주자학과 동일했다. 이와 기로 사상체계를 구성하면서도 세계를 보는 시각과 방법이 차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경전에 대한 주자와는 다른 재해석, 특히 〈대학〉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청대의 경학은 송·명시대의 경학을 지양하고 한대 경학의 전통을 복원하였다. 고문경학파와 금문경학파로 크게 나눌 수 있는 이 시기 경학의 흐름은 전자의 경우 건륭(乾隆:1735~95)·가경(嘉慶:1796~1820) 연간에 활발했고, 후자는 도광(道光:1821~50) 연간 이후 등장했다. 고문경학파의 경학은 고증학(考證學)으로도 불리는데, 후한의 허신(許愼)·정현 등 고문경학가의 훈고방법을 계승하면서 이론과 체계성을 추가하여 옛 경서의 정리와 언어학, 문자의 연구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중 주요학파로는 혜동(惠棟)을 중심으로 하는 오파(吳派)와 대진(戴震)을 우두머리로 하는 환파(晥派)의 양대 갈래가 있었다. 금문경학파는 청말의 격동기에 고증학을 대신하여 학계의 주류로 등장하며, 〈춘추공양전〉을 중심으로 학문체계를 재구성하였다. 이들은 금문경(今文經)이 경세를 위한 공자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기록했으며, '탁고개제'(托古改制:옛 것에 의거하여 제도를 고침) 정신을 핵심으로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봉건체제의 비판·공격을 위한 이론적 근거로 활용하였다. 이 가운데 캉유웨이[康有爲]는 〈신학위경고 新學爲經考〉·〈공자개제고 孔子改制考〉·〈예운주 禮運注〉 등의 저술을 지어 금문경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무술변법(戊戌變法)을 통하여 그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다. 한국의 경학은 삼국시대 이래로 유학이 수용되었음에도 중국과 같이 풍부하고도 오랜 역사는 갖고 있지 못하나, 주자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던 조선시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되었다.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의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는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유학의 수용과 학문적 적용면에 치우쳐 경전의 내용이나 문장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5경을 중심으로 강론(講論)에 머무르는 수준이었다. 조선시대 경학의 단서를 연 학자는 권근(權近)이었다. 그는 사회의 안정과 사상의 통일을 희구하는 대일통(大一統) 사상에 기반하여 5경과 4서를 연구했는데, 특히 5경에 역점을 두었다. 〈시서춘추천견록 詩書春秋淺見錄〉·〈주역천견록 周易淺見錄〉·〈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 등 5경에 대한 연구서에서 그는 각 경이 체용(體用)의 관계로 하나로 묶이며, 동시에 각각의 경은 그 자체로 체용구조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경전연구는 이후 주자학을 비롯한 성리학의 이론 심화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풍부히 계승되지는 못했다. 주자가 〈대학〉을 주석하면서 경문(經文)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전(傳)으로 지은 〈격물보전 格物補傳〉이 필요하지 않음을 논증했던 16세기의 이언적(李彦迪) 정도가 있었다. 17세기에 들어 조선의 경학은 주자 도통주의에 근거하여 주자학을 절대화하고자 하는 기호학파와 주자학을 반성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학파와의 학문풍토 속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다. 특히 남인과 소론의 학풍이 추종한 후자의 경우는 종래의 4서와 5경에 대한 주자학적 이해로부터 벗어나 양명학·한당유학·청대고증학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 경전의 재해석 작업을 활발하게 했다. 조선후기 실학은 새로운 경학의 산물이었다. 17세기의 윤휴(尹?)와 박세당(朴世堂), 18,19세기의 이익(李瀷)과 정약용(丁若鏞)은 새로운 경전해석의 단서를 열고 확대한 주요 인물이었다. 윤휴는 〈중용〉·〈대학〉·〈시경〉·〈서경〉·〈예기〉·〈춘추〉·〈효경〉 등 주요경전에 대해 편차를 재구성하거나 주해를 새로 하면서 당시 주자학 일변의 학문풍토를 벗어나고자 했다. 〈효경〉·〈대학〉·〈중용〉을 중시했던 그는 인간의 본원적 도덕성 함양이 유교의 본래 가르침이라 인식하고 개인의 도덕수양과 정치를 통일하는 방법으로 이를 성취하고자 했다. 박세당은 〈대학사변록〉 등 사서사변록(四書思辨錄)과 〈상서사변록 尙書思辨錄〉·〈시경사변록 詩經思辨錄〉을 저술했다. 양명학의 경전 이해방식과 가까웠던 그의 경학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유학의 입장에서 재해석하여 주자학에서 이단으로 배척했던 이들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이익은 윤휴나 박세당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주자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학문을 개척한 인물이었다. 〈맹자질서 孟子疾書〉·〈논어질서 論語疾書〉 등의 저술을 통해 정약용으로 직접 계승되는 실학 기풍을 마련하였다. 정약용은 이전의 경학적 업적을 집대성하여 4서6경 전반을 포괄하는 방대한 규모의 경전 주석작업을 수행했다. 〈논어고금주 論語古今注〉·〈맹자요의 孟子要義〉·〈중용자잠 中庸自箴〉·〈중용강의보 中庸講義補〉 등과 〈서경〉의 〈매씨상서평 梅氏尙書平〉·〈상서고훈 尙書古訓〉·〈상서지원록 尙書知遠錄〉, 〈시경〉의 〈모씨강의 毛氏講義〉, 〈예〉의 〈상례사전 喪禮四箋〉·〈사례가식 四禮家式〉, 〈주역〉의 〈주역심전 周易心箋〉·〈주역사전 周易四篆〉, 〈춘추〉의 〈춘추고징 春秋考徵〉, 〈악경〉의 〈악서고존 樂書孤存〉 등이 주요한 저술이다. 정약용은 이러한 경학적 기반 위에서 〈경세유표 經世遺表〉 등 일표이서(一表二書)에 체계화된 그의 사회변혁론과 천인분리(天人分離)적 사유와 평등적 인간관으로 특징지워지는 주자학을 벗어난 그의 사상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경학에 주요한 업적을 낳은 학자로는 이들 외에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을 절충하여 경전을 연구한 성해응(成海應), 〈춘추집전 春秋集傳〉·〈춘추익전 春秋翼傳〉 등을 지어 〈춘추〉 연구에 몰두한 이진상(李震相), 한학과 청의 고증학을 숭상했던 김정희(金正喜) 등이 있다. [체용론] 사물을 체와 용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그 각각의 의미와 상호 연관성 속에서 사물을 이해하는 사고방식. 체는 사물의 본체, 근본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용이란 사물의 작용 또는 현상, 파생적인 것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체용론의 연원은 멀리 한대(漢代)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 정현(鄭玄)은 〈예기 禮記〉 서(序)에서 "마음을 통제하는 것을 체라 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행하는 것을 용이라 한다"고 하여 체용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체용론적인 사고방식이 제대로 정립된 것은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하안(何晏)·왕필(王弼) 등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비록 체용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사용한 본말(本末)의 개념은 체용론의 중국적 원형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들은 도가의 무(無)와 유(有)에 관한 설명을 본말론으로 체계화하여, 변화가 무궁한 천지만물에 대해 그 본체인 '무'는 적연부동(寂然不動)하다고 하며, 본체가 있어야만 개개의 현상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러한 본말론이 뒤에 불교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체용론으로 발전했다. 불교에서 체용의 논리는 인과의 논리와 대비되는 것으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바람과 파도의 관계로 비유된다면, 체와 용의 관계는 물과 파도의 관계이다. 따라서 인과론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별개의 것이지만 체용론에서는 체와 용이 서로 다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송대에 성립된 성리학은 이 불교적 체용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이론체계를 구축하는 데 사용했다. 특히 주희는 이 체용론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자신의 이론체계를 수립했는데, 그는 "형이상(形而上)인 것으로부터 말한다면 아득한 것(沖漠者)이 체가 되며, 그것이 사물 사이에서 발현하는 것이 용이 된다. 형이하인 것으로서 말한다면 사물이 또 체가 되고 그 사물의 이치가 발현하는 것이 용이 된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형이상을 도의 체라 하고, 천하의 달도인 5가지를 도의 용이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이황은 이를 해석하여 "체와 용이라는 것은 2가지가 있는데, 도리에 대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아득하여 조짐이 없으나 만상(萬象)이 빠짐 없이 갖추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요, 사물에 나아가 말한 것이 있으니 배는 물에 다닐 수 있고, 수레는 육지에 다닐 수 있다는 것과 실제 배와 수레가 물과 육지에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주희의 체용론은 어떤 대상을 고정적으로 체와 용에 분속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상으로는 분리될 수 있으나 실제는 분리될 수 없는 모든 합일적 존재를 설명하는 추상적 범주였다. 주희가 이 체용론의 범주로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 대표적인 분야는 심성론이다. 그는 심을 체와 용으로 구분하여, 발(發)하기 전을 심의 체로, 이미 발한 때를 심의 용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심의 미발(未發)을 가리키는 성(性)과 심의 이발(已發)을 가리키는 정(情) 역시 체와 용의 관계로 설명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체용론은 중요한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았으며, 이 체용론을 이용해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한 대표적 인물은 이황이다. 이황은 기대승과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을 벌이면서 사단은 이의 발(發)로, 칠정은 기의 발로 설명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다. 심성론에서의 이발설은 그의 사상체계에서 우주론에서의 이동설(理動說), 인식론에서의 이자도설(理自到說)과 함께 성리학의 이기론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원래 성리학에서는 동정(動靜)하는 것은 기이며, 이는 그 동정의 소이(所以)일 뿐 그 자체가 동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는 정의(情意)와 조작(造作)이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황의 이발설·이동설·이자도설은 분명히 성리학의 이에 대한 설명과는 배치되었다. 이때 이황이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체용론이다. 그는 이를 체로, 이가 상(象)으로 드러난 것을 용으로 파악하는 주희의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자체를 체와 용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대개 정의가 없다고 운운한 것은 본연의 체요, 발하고 생(生)할 수 있는 것은 지묘(至妙)한 용이다"라고 하여 이에 정의와 조작이 없다는 것은 이의 체를 말하는 것이며, 이가 발동하고 생한다는 것은 이의 용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통철학에서 중요한 범주로 사용되던 체용론은 19세기 이후 서양세력의 침략을 받으면서 그들 기술문명의 우월성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중국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우리나라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붕당]
1575년(선조 8년) : 사림이 동인(김효원), 서인(심의겸)으로 갈라짐(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일어난 분쟁
1591년(선조 24년) : 동인, 정철 유배, 동인 유세, 동인이 남인(유성룡과 우성전)과 북인(이발과 이산해)으로 갈라짐, 북인 유세, 북인이 소북(홍여순과 정창연)과 대북(이산해)으로 갈라짐
광해군 때 : 대북 유세, 대북, 영창대군 살해, 외척 김제남 일족 처형, 인목대비 폐모, 서인, 인조반정을 일으켜 이이첨, 정인홍 등의 대북파 수십명이 처형하고 수백명이 귀양보냄
현종 즉위 후 : 남, 서인 대립, 효종이 죽자,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상복 문제를 둘러싼 1차 예송 일어남(서인 : 1년복, 남인 : 3년복), 서인 주장 채택
1674년(현종 15년) :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2차 예송 일어남(서인 : 9개월복, 남인 : 1년복), 남인 주장 채택, 송시열 처리 문제를 둘러싼 남인 분리(청남파 : 척화론자, 탁남파 : 주화론자)
숙종 즉위 후 : 서인,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남인 추방, 서인, 노론(송시열, 김석주, 김익훈)과 소론(윤증, 조지겸)으로 갈라짐
1689년(숙종 15) : 남인, 기사환국을 일으켜, 송시열을 사약형에 처함, 장희빈, 중전으로 승격, 인현왕후 폐위
1694년(숙종 20) : 갑술옥사로 인현왕후 복귀, 중전 장씨는 희빈으로 돌아감(장희빈), 죽은 송시열, 김수항, 김익훈의 관직 복구, 신임사화로 노론의 김창집, 이건명 등이 처형됨
경종 때 : 노론의 연잉군(영조) 왕세제 즉위 주장, 소론 반발, 소론의 노론 대공격, 4대신 처형
영조 즉위 후 : 영조, 탕평책 실시, 노론 유세, 노론이 시파와 벽파로 갈라짐
1762년(영조 38) : 사도세자 사건을 둘러산 시파(주화론)와 벽파(척화론)의 대립, 남인, 소론도 시파와 벽파로 갈라짐
1801년 : 노론의 벽파, 신유박해 일으켜, 천주교인 대거 처형(300명 이상),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그 후 : 풍양 조씨의 세도 정치(헌종 때), 안동 김씨의 세력 만회(철종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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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올챙이의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올챙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