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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의 역사와 현황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후한(後漢) 영평(永平) 10년(A.D 67년) 대월씨국(大越氏國)으로부터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에 의해 처음 전해졌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대체로 대승계통이었다. 중국은 대승불교의 이론체계를 완결시키면서 어떤 의미로는 발상지 인도보다도 뛰어난 불교의 역사를 창조해 갔다. 중국불교의 역사는 대체로 5시기로 크게 구분된다. 제1기는 전한(前漢)으로부터 동진(東晋) 초까지에 이르는 전역(傳譯)시대, 제2기는 동진(東晋) 초에서 남북조(南北朝)에 이르는 연구시대, 제3기는 수당(隋唐)의 건설시대, 제4기는 오대(五代)로부터 명말(明末)에 이르는 계승시대, 제5기는 청(淸) 이후의 쇠퇴시대이다. 제1기 전역시대는 불교가 전래되어 안세고(安世高)ㆍ지루가참(支婁迦懺)ㆍ강승회(康僧會)ㆍ지겸(支謙)ㆍ축법호(竺法護) 등 많은 역경승(譯經僧)들에 의해 경전이 전래되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오로지 번역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아직 불교의 연구나 보급은 활발한 편이 아니었다. 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은 연구시대로 교의연구가 매우 활발했고, 일반에게도 신앙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동진(東晋)시대의 불도징(佛圖澄)ㆍ도안(道安)ㆍ혜원(慧遠)ㆍ각현(覺賢)ㆍ법현(法顯)ㆍ담무(曇無) 등은 이 시대 불교연구의 중심인물이었다. 이 시기의 인물로는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을 들 수 있다. 그는 《법화경》을 비롯해 《중론(中論)》ㆍ《대지도론(大智度論)》 같은 무수한 대승경론을 번역하고 강술(講述)하여 중국불교 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 이 시기에는 중국승려가 직접 인도로 가서 교리를 배우고 경전을 가지고 오는 ‘입축구법(入竺求法)’이 행해졌다. 동진(東晋)의 법현(法顯)은 399년 육로를 거쳐 인도로 갔다가, 414년 해로로 귀국하여, 유명한 《불국기(佛國記)》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제3기 건설시대에 이르면 불교는 중국에서 완전히 난숙(爛熟)해진다. 수대(隋代)에는 지의(智顗)의 천태종(天台宗), 길장(吉藏)의 삼론종(三論宗), 신행(信行)의 삼계교(三階敎)가 일어났으며, 당대(唐代)에는 도작(道綽)ㆍ선도(善道)의 정토종(淨土宗), 도선(道宣)의 율종(律宗), 혜능(慧能)의 선종(禪宗), 현장(玄奘)ㆍ자은(慈恩)의 유식종(唯識宗), 법장(法藏)의 화엄종(華嚴宗), 선무외(善無畏) 등의 진언종(眞言宗) 등이 일어나 교학(敎學)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중국불교의 제종분립(諸宗分立)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여러 가지 경전 중에 어떤 것을 중시해야 하는가 하는 우열론(優劣論)에 기인한 것이다. 이 시대 불교도들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경전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각종 교설을 통일 정리했다. 이를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한다. 이 교판론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파의 불교가 성립했다. 인도불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인격을 중심으로 전개된 데 비하여 중국불교는 어떠한 진리를 설했는가로 관심이 바뀐 것이다. 수ㆍ당대의 백화난만했던 종파불교 가운데 가장 중국적인 것은 선불교(禪佛敎)의 발흥이다. 선종(禪宗)은 북위(北魏)시대 보리달마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중국 선종의 기초는 6조 혜능(慧能:638~713)에 의해 확립됐다. 혜능은 이른바 ‘교외별전 불립문자(敎外別傳 不立文字)’라는 선종교의(禪宗敎義)에 입각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뒤를 이은 마조(馬祖)와 석두(石頭)는 이 같은 교의를 더욱 강화했고, 뒤에는 임제(臨濟)ㆍ조동(曹洞)ㆍ운문(雲門)ㆍ법안(法眼)ㆍ위앙(潙仰)의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발전하여 남종선(南宗禪)의 주류를 이루었다. 선종은 소의(所依)경전을 갖지 않고 독자의 사상을 전개했으며,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으로써 공안(公案)을 채택하여 불교적 전통에서 볼 때는 오히려 이단이라고 생각될 만큼 독특한 면이 있었다. 중국에서 선종이 발흥된 배경은 고도로 심화(深化) 발달된 교종(敎宗)불교에 대한 반성과 중국 재래의 노장철학과의 영합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특히 선가(禪家)의 교가(敎家)에 대한 비난은 마치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소승불교의 소극성을 비난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선종은 그 발생배경이 중국적인 토양인데다가 지나치게 출세간적(出世間的), 은둔적이어서 오히려 깨달음의 보편성을 특화(特化)시켰다는 약점도 함께 가지고 있다. 화엄철학과 같은 현란한 교종불교의 이론체계가 지나치게 사변(思辨)중심인 데 대한 반동으로 제시된 것이 선(禪)의 직관적 행동철학이었다. 그러나 방법에 있어서 은둔성을 고집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교종보다 더 사변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국불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제4기 계승시대에 생기는 중국적 사고의 투영과 이에 따른 불교의 변모다. 중국불교는 전래초기에 당시 성행하던 노장사상과 갈등과 조화의 역사를 전개했다. 특히 현실도피적인 노장사상과는 공(空) 또는 무상(無常)에 대한 소극적 해석과 맞아떨어져 대승불교의 능동적, 진취적인 성격을 많이 약화시켰다. 이러한 중국불교의 성격은 당말(唐末)이후 송대(宋代)에 크게 부흥한 유교에 의해 비판되었다. 유자(儒者)들은 출세간과 세간의 윤리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불교를 맹렬히 비난했다. 또 만민평등(萬民平等)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의 사상은 유교적 신분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중국사회 윤리와 필연적인 대립을 가져와 마침내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을 겪게 된다. 삼무일종의 법난이란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446), 북주(北周)의 무제(武帝:574), 당(唐)의 무종(武宗:834), 후주(後周)의 세종(世宗:955)때 일어난 폐불사태(廢佛沙汰)를 말한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국왕의 권위에 굴복하고 만다. 물론 법난(法難)과정에서 수많은 호법승이 목숨을 걸고 항거했지만, 권력자들의 강압은 불교를 어용화시켜 ‘백성과 국토를 수호하고 그럼으로써 불법을 수호한다’는 호국사상을 낳게 했다. 또 윤상(倫常)에 대한 맹렬한 공격은 《부모은중경》ㆍ《우란분경》과 같은 중국 찬술(撰述)의 경전을 만들어냈다. 당말(唐末)로부터 오대(五代)에 걸쳐 매우 쇠미해진 불교는 송(宋)의 통일과 함께 국왕의 불법외호에 힘입어 다시 흥기되는 듯 했다. 하지만 송대(宋代)의 불교는 수ㆍ당대처럼 활발한 것이 아니라, 다만 현상을 유지하고 계승하는 모습이었다. 교단이나 경제적 규모는 늘어났으나, 불교 자체의 사상적 발전은 보이지 않았다. 과거의 발랄하던 기풍은 사라지고 일종(一宗)을 독립할 기개도 없어진 이 시대의 불교는 자연 제종(諸宗)이 융합하고 조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한족(漢族)이 최초로 타민족(他民族)의 지배를 받던 원대(元代)에는 라마교가 도입돼 중국불교를 일변(一變)시켰다. 원조(元朝)는 티베트의 라마승 파스파(八思巴)를 제사(帝師)로 삼아 원제국 내의 모든 불교를 장악케 했다. 파스파에 대한 절대적인 귀의는 그가 죽자 사방에 제사사(帝師寺)를 지을 만큼 열광적이었다. 이에 따라 라마승들의 권위도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도에 지나친 라마승 보호는 결과적으로 이민족(異民族)에 대한 한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원제국이 멸망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원대의 라마교 숭상은 중국불교가 불교특유의 독자성을 잃고, 민간화로 이행하는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수ㆍ당대의 교리연구가 송ㆍ원대에 와서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정체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말기적 징후가 라마교라는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더욱 뚜렷해진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명ㆍ청대가 되면 더욱 표면화된다. 수ㆍ당시대에 극성(極盛)을 이루었던 중국불교는 명ㆍ청대에 이르러 쇠퇴기에 접어든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수와 당의 불교에서 볼 수 있던 찬란한 교학(敎學)의 전개가 끝나고, 관음신앙이나 염불회(念佛會) 또는 방생회(放生會), 수계회(授戒會) 같은 의례(儀禮) 중심으로 변해간 데 있었다. 물론 이 같은 신앙의례 자체가 불교를 쇠퇴시킨 것은 아니지만, 유구필응(有求必應)이라는 현세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불교신앙이 도교나 민간신앙과 습합하여 고유성을 잃어간 때문이었다. 특히 명대 중국불교의 승도(僧徒)는 경학(經學)을 외면하는 경향이 높아 그 자질은 날이 갈수록 저열해졌으며, 그 중 일부는 사도비적(邪道匪賊)이 되기도 했다. 이에 명조는 엄격한 승관(僧官)제도와 도승법(度僧法)실시로 불교를 통제하고 승려수를 제한하려 했으나, 나중에는 기아(飢餓)구제를 이유로 매첩(買牒:도첩을 팔아 僧尼의 자격을 주는 것)을 하여 승니의 자질저하와 타락을 부채질했다. 형편이 여기에 이르자, 유자(儒者)들 사이에서는 배불론(排佛論)이 고개를 들었으며 주굉(株宏)과 지욱(智旭)은 이에 대항해 유ㆍ불조화론을 펴기도 했다. 청대의 불교는 초기[康熙帝]에 다소 활기를 찾는 듯했으나, 건륭제(乾隆帝) 이후 불교교단의 통제가 가해져 청조말기의 불교는 거사(居士)들에 의해 주도된 느낌이 짙다. 중국에서 거사(居士)란 사관(仕官)의 뜻을 끊고 독서와 청한(淸閑)으로 사는 사대부를 지칭하는 말이다. 청대의 유명한 거사로는 팽소승(彭紹升)과 양문회(楊文會)가 있다. 특히 호를 인산(仁山)이라 했던 양문회는 남경(南京)에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를 설립하고 불전의 간행과 보급에 힘써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란(太平天國亂)으로 명맥이 끊어질 뻔한 근세 중국불교 중흥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몇 사람의 노력으로 기울어져 가는 중국불교가 쉽게 소생하기는 어려웠다. 건륭제 이후 각 지방에서 함부로 행해진 도승(度僧)으로 무뢰배조차 승려가 됨으로써, 그 타락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의 유행하던 ‘지옥문 앞에 많은 것은 승려다(地獄門前僧徒多), ‘중이 돈을 보면 불경도 판다(和尙見錢經也賣)’와 같은 속담은 승도(僧徒)의 타락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불교가 이처럼 극심한 타락의 양상을 보인데 반하여 청말 중국은 각성한 지식인들에 의해 이른바 묘산흥학(廟山興學)운동이 일어났다. 광서(光緖)24년 장지동(張之洞)이 제창한 이 운동은 ‘중국의 학(學)을 체(體)로 하고, 서양의 학(學)을 용(用)으로 한다’는 기본방침아래, 사찰재산의 10분의 7을 몰수하여 학교교육에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중국 전토에 확산되어, 사찰은 태평천국의 난에 이어 철저하게 핍박을 받았다. 불교의 존립을 위협하는 묘산흥학(廟山興學) 운동에 대하여 불교계는 일치단결할 필요가 생겼다. 민국원년(民國元年:1912), 절강(浙江)의 천동사(天童寺) 경안(敬安)대사는 동지를 규합해 상해(上海)에서 중국불교총회를 조직하고 사찰재산 보호를 임시정부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분사(焚死)하고 말았다. 하지만 경안(敬安)의 불교중흥운동은 그의 제자 태허(太虛)에 의해 계승됐다. 태허는 불교계 내부의 정리를 계획하고 《각사총서(覺社叢書)》를 창간하여 《정리승가제도론(整理僧伽制度論)》을 발표했다. 민국 13년에는 중국불교연합회를 새로 발족시켰으며, 같은 해(1924) 7월 여산에서 세계불교연합회를 개최했다. 그는 또 인재양성을 위해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을 개설하고 청년승려들을 교육했다. 1949년 10월 장개석 정부를 구축(驅逐)한 중국공산당은 중국사상 최초로 공산당 정권을 수립했다. 공산당은 중국인민공화국 헌법 제88조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公民)은 종교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고 규정했고, 또 1952년 10월 모택동(毛澤東)은 티베트 문제에 관한 연설에서 ‘공산당은 종교에 대해 보호책을 취할 것이며, 신앙을 존중한다’고 말함으로써 중국정부가 종교활동을 공인하는 근거를 마련하는 듯했다. 공산정권 수립직후 중국에서는 거찬(巨贊) 등의 노력으로 《현대불학지(現代佛學誌)》가 간행됐고 향달(向達), 조박초(趙樸初) 등에 의해 1953년 5월 중국불교회(회장 圓瑛)가 설립되어 불교권을 대상으로 화려한 외교협력자로 활동했다. 또 불교사원이나 문화에 대해서는 수리 복구하도록 원조가 이뤄져 산서성(山西省)의 현중사(玄中寺), 서안(西安)의 대자은사(大慈恩寺), 항주(杭州)의 영은사(靈隱寺), 북경(北京)의 광제사(廣濟寺), 낙양(落陽)의 백마사(白馬寺) 등이 복구되었으며, 운강ㆍ용문ㆍ돈황석굴 등이 보호되었다. 공산정권 아래 중국불교는 존립을 위한 자기변모를 강요당했다. 그들은 불교의 교의가 공산주의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예를 들면 불교와 공산주의는 모두 신이나 개인의 영혼을 부정하고 있으며, 논리는 변증법적 방법을 따르고 있다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또 승가의 일원은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며, 정신적 진리를 찾는 데 스스로를 바치는 동안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에 의해 이루어지며, 협동적으로 사는 공산주의의 원시적 형태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산치하의 중국불교는 ‘마르크스ㆍ레닌주의의 학습, 제세무아(濟世無我)의 적극적 정신을 실행하여 노동의식을 확립, 봉건적 미신적 사상을 숙청하여 사회의 진화에 보조하여 인간낙토(人間樂土)를 완성’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밀월관계도 1966년 8월 18일, 북경의 천안문(天安門) 광장에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신혁명의 기동타격대인 홍위병(紅衛兵)들은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이른바 4가지 낡은 유물(낡은 이념ㆍ문화ㆍ관습ㆍ습성)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낡은 풍습의 상징’인 사원을 무차별 파괴했으며, 불구(佛具)와 책, 심지어는 불상(佛像)까지 불 질러 버렸다. 그들의 공격은 폭력적이고 극단적이지만, 체계적이기보다는 특발적(特發的)이었다. 이런 모습에 신심(信心)깊은 중국의 불자(佛子)들은 분개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주민과 경찰이 나서 사원파괴를 저지하려 했으나,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홍위병을 지도한 임표(林彪)조차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머리를 흔들며 ‘이성적 투쟁을 수행하고, 강압이나 폭력으로 인민을 해치지 말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이 광적(狂的)인 불교박해는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수천 년의 긴 역사를 가진 중국불교는 1978년 이후 다시 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비록 관광목적이긴 하지만, 중국정부는 문혁(文革)기간 중 파괴된 사찰을 재건했으며, 강제 환속시켰던 승려를 다시 모아 승려증을 발급하고 있다. 현재의 중국불교는 중앙기구로 중국불교협회를 북경(北京)에 두고 있으며, 여기서는 기관지 《법음(法音)》을 발간하고 있다. 또 각 지역별로도 불교협회 지회가 결성돼 있다. 승려의 현황은 1930년대 통계인 ‘267,000개 사찰과 70만 명의 승려’에는 절대적으로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60대 이상의 노승(老僧)과 20대의 젊은 승려들이 상당히 많다. 40~50대 승려는 문혁(文革) 때 사찰폐쇄의 공백으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1980년대 들어 중국에는 5개의 불교전문교육기관이 문을 열었고, 상해의 옥불사(玉佛寺)는 지난 1986년 9월 문혁 후 처음으로 4년제 강원 졸업생 22명을 배출했다. 현재 문을 연 사찰 중에는 700명의 승려가 상주하는 곳도 있으며, 웬만한 절이면 대체로 선원(禪院)ㆍ강원(講院)ㆍ율원(律院)을 갖춘 총림형태를 하고 있다. 절 주변에 있는 수십 개의 암자는 비구니가 운영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