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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변죽 울리기[제13구간]
☞ 화매재-포산마을-포도산갈림길-명동산-봉화산-맹동산-울치재-창수령 ☜
- 정맥의 맛과 멋 : 창수령과 주실마을 조지훈 생가 -
♣ 산행개요 ♣
◆ 산행지 : 낙동정맥 제13구간[화매재-창수령]
◆ 일시 : 2006. 4. 21.(금)/22.(토)[무박산행]
◆ 날씨 : 흐림/바람/오전 늦게부터 맑음
◆ 종주경로 : ☞ 화매재(330m)/911번지방도 → 장구메기(570m) → 630.5m → 포도산(747m) 갈림길 → 명동산(812.4m) → 봉화산(733m) → 맹동산 상봉(807.5m) → OK목장 → 울치(490m) → 창수령(자래목이)(490m)/918번지방도 ◀
◆ 시간대별 산행코스 :
△ 03:50 화매재 출발
△ 04:20 송전탑
△ 04:28 철탑
△ 04:38 임도/5분 휴식
△ 04:50 포산마을 안길
△ 04:58 3거리/우측 흙길
△ 05:03 갈림길/좌측으로 내려가다 되돌아와 마루금으로 달라붙음
△ 05:25 정맥길 합류
△ 05:27 철탑/좌측 능선
△ 05:35 봉우리/좌능선
△ 05:48 송이모듬터
△ 05:54 3거리/직진오르막
△ 06:00 포도산 3거리/우 내리막
△ 06:05 포도산 4거리
△ 06:19 임도/박짐고개
△ 06:26 능선분기/우측 오르막
△ 06:42 꺾임봉/좌 내리막
△ 06:51 헬기장 터
△ 06:53 명동산(812.4m)/무인감시탑/삼각점(ROKA MS)/5분 휴식
△ 07:14 봉우리/우능선
△ 07:44 봉화대/20분 식사 및 휴식
△ 08:05 봉화산(733m)/헬기장
△ 08:19 임도-우측 임도3거리 좌측길
△ 08:23 임도4거리/[↑삼의, ↓대리6.5km, →마당두들 9.3km]/삼의방향 직진
△ 08:28 임도 우측 산길 진입
△ 08:36 봉우리/우능선
△ 08:38 임도/영덕국유림관리소의 잣나무숲 조림지대 오솔길
△ 08:55 맹동산 상봉/명동산산악회의 맹동산 표지석/산불감시초소/25분 휴식
△ 09:25 헬기장 지나 목장 울타리 통과
△ 09:38 목장길 끝
△ 09:50 OK목장 3거리/우측 포장도로에서 비포장으로
△ 10:41 완만한 오르내림의 봉우리 5개를 지나 당집
△ 10:46 봉우리/측량 삼각점
△ 10:52 울치재/[↑창수고개 4km, ↓OK목장 3.2km, ←(좌)양구리 1.5km, →(우)원창수 3.2km]/15분 휴식
△ 11:14 봉우리/좌 내리막
△ 11:29 인동장씨묘
△ 11:33 김해김씨묘
△ 11:38 우 꺾임봉
△ 11:44 묵묘/울진임씨묘
△ 11:57 능선분김점/우 능선
△ 12:14 창수령/산행종료
△ 13:00 자라목쉼터/점심식사 및 휴식
△ 15:10 주곡리 주실마을 조지훈 생가 탐방
△ 18:00 자래목이 자라목 쉼터/1박
◆ 산행거리 : 25.9km[『사람과 산』자료 참조]
☞화매재-8.6km-포도산3거리-3.7km-명동산-4.7km-맹동산상봉-2km-OK목장-3.3km-울치재-3.6km-창수령 ◀
◆ 산행시간 : 8시간 24분(아침식사 및 휴식 포함)
◆ 형태 : 덕칠이 합동산행[서훈식 고문, 夷希美 회장, 밤안개, 오르고파, 대왕, 윤비, 천사, 무흠, 뚜벅이, 돌범, 나푸른솔, 김수영, 김익수, 흑기사, 산정무한, 서송수, 범털, 록수, 토끼, 김진태, 주유천하 : 2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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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과 詩 ♥
사슴이랑 이리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 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가는 내 눈동자는
慈雲 피어나는 靑銅의 香爐
東海 동녘 바다에 해 떠오르는 아침에
북바치는 서름을 하소하리라.
돌부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로 가꾸어보자.
빛을 찾아가는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라.
- 조지훈, “빛을 찾아가는 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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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동정맥 변죽 울리기 제13구간의 포인트
낙동정맥 변죽 울리기 제13구간은 화매재에서 명동산, 봉화산, 맹동산, 울치재를 거쳐 창수령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이 구간 거리가 약 26km에 이르는 다소 긴 구간이나 어프로치의 편의상 이 정도의 구간획정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지난 구간에 화매재에서 황장재까지의 4km정도를 줄여놓았기에 망정이지 황장재부터 시작하는 경우에는 30여km에 육박하는 거리가 될 뻔 했다. 그러나 이 구간은 길이 좋아 거리에 비해 산행시간은 그리 많이 걸리지 않는다.
이 구간의 정맥길은 좌측(서쪽)으로는 경북 영양군 석보면과 영양읍을, 우측으로는 영덕군 영해면과 창수면을 가르며 지나간다. 낙동정맥 종주를 통해 영덕군에 나의 이름과 똑 같은 지명을 쓰고 있는 창수면 창수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경기도 포천시에도 창수면이 있다.
그리고 이 구간 정맥길 좌측의 영양군은 청송, 봉화와 함께 경북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오지지역에 속한다. 전라북도에 ‘무진장’(무주-진안-장수)이 있다면 경상북도에 ‘BYC’(봉화-영양-청송) 트라이앵글이 있다. BYC 중에서도 더 으슥하고 궁벽한 오지는 바로 Y, 영양이다.
청송에는 주왕산국립공원이 있고, 봉화에는 청량산도립공원이 있으나, 영양에는 영양고추 이외에는 영양가가 거의 없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영양에 경북에서 제일 높다고 하는 일월산(日月山, 1,219m)이 있기는 있으나 그리 많이 알려진 산은 아니다. 그러나 영양은 조지훈, 오일도, 이문열 등 이 나라 문단의 거목들을 배출한 文鄕의 고장이다. 문명의 영양가는 없다고 하더라도 문화의 영양가가 농축되어 있는 청정 오지마을이다. 『변경』과 『영웅시대』, 『선택』 등 이문열의 소설에는 영양이 많이 등장한다.
영양군의 인구가 2만명을 밑돌아 전국 234개 지자체 중 섬지역인 인천 옹진군(1만5천명)과 경북 울릉군(9천명)을 제외하면 인구가 제일 적은 기초 지방자치단체이다. 인구 2만명은 면이 읍으로 승격하는 기준인데 면단위도 안 되는 인구로 군정을 꾸려간다. 영양군이 인구 2만명을 지키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인구가 1만 9천명대로 줄어들고 말았다. 이 나라 농촌의 해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영양이다.
이번 구간의 날머리인 창수령은 영양과 영덕을 이어주는 고갯길로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주인공 ‘나’가 유서와 독약을 품에 안고 바다에서 죽기 위하여 걸어 넘은 고갯마루이다. 창수령은 가을이나 겨울에 넘어야 제대로 운치를 느낄 수 있을 터이지만 나의 정맥일정에 맞추어 봄이 무르익는 계절에 창수령의 정취를 맞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창수령 인근의 자라목쉼터에서 여장을 풀고, 시간을 짜 맞추어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있는 조지훈 생가를 찾아보는 문학탐방도 염두에 둔다.
2. 낙동정맥 제13구간 들머리 : 다시 화매재로
2006. 4. 21. 금요일 밤 예정대로 낙동정맥으로 떠난다. 이번에는 창수령에서 1박을 하고 연달아 2개 구간을 답파해보기로 한다. 창수령 인근에 자라목쉼터가 있으므로 이곳에서 숙박을 하기 위하여 관련 정보를 확보해두고, 백암온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차편도 알아두었다.
마침 같은 날 산울림산악회에서 토요무박으로 창수령-백암온천 구간을 계획하고 있어 빈 자리가 있다면 이 산악회에 의탁하여 산행을 할 수도 있겠다. 산악회 회비가 35,000원이고, 백암온천(온정리)에서 동서울터미널까지 편도 버스요금이 27,000원으로 소요시간은 5시간20분이다.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는데 산정무한님으로부터 이번 구간에 화매재에서 아랫삼승령까지 진행하고, 다음 날 아랫삼승령에서 한티재까지 진행하여 1타 3피로 끝내자는 전화가 온다. 나는 일단 백암온천까지 가는 자료만 있으니 애랫삼승령에서 숙박할 민박집과 한티재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있는 교통편을 알아두기를 부탁하고 현지상황을 보아 1타 3피든, 1타 2피든 결정하기로 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 11시 양재동 서초구민회관 앞에서 우리들의 버스를 탄다. 김진태님이 처음으로 낙동정맥팀에 합류하였고, 허공대장님이 집안행사로 불참하는 바람에 선두 길잡이는 산정무한님이, 명목상의 대장직무대리는 돌범님이 맡기로 하였다.
2006. 4. 22. 토요일 새벽 2시 버스는 안동에서 청송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가랫재휴게소에 들어선다. 버스에서 잠을 자다보면 어느 고속도로의 어느 곳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그만 시골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아침식사 대용의 김밥 두 줄과 삶은 계란 등을 구입하였다.
황장재에서 김수영님과 김익수님을 내려주고, 버스는 새벽 3시 30분 지난 구간 들머리였던 화매재에 도착한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새벽어둠 속에 고추와 사과가 그려진 영양군 안내판이 세워진 곳이다. 별도 보이지 않고 밤하늘은 캄캄하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에 따라 우의와 우산을 준비했으나 비가 내릴만한 상황은 아니고, 바람만이 세차게 불어댄다.
3. 서둘러 달려가나 에둘러 돌아가나
[화매재 → 포도산 3거리 : 8.6km//2시간10분]
건성건성 체조를 마치고 새벽 3시 50분 화매재를 출발한다. 지난 구간에도 방향만 다르고 새벽 3시 50분에 출발했었다. 이번 구간 초입의 장구메기 구간(지도상의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은 빙 둘러가는 길이고, 그곳을 밤에 지나가 봐야 특별히 볼 것도 없으므로 포산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가로질러 송전탑까지 진행하기로 한다.
화매재에서 창수령 직전의 봉우리까지는 정맥길이 영양군과 영덕군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이 구간 정맥이어가기는 왼쪽 발은 영양 땅을, 오른쪽 발은 영덕 땅을 밟으면서 진행하는 형국이 될 것이다.
화매재 둔덕으로 올라 숲속으로 진입하는데 어둠 속이지만 낙엽송 같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무 사이로 달무리진 모습이 들어오고 사위는 고요하다.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평탄한 산길이 우측으로 휘어져 나아가다가 좌측으로 휘어지면서 내려서는 느낌이 든다.
초장에 새벽어둠이 풀리기까지는 랜턴불빛을 따라 그냥 묵묵히 가는 길이고,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다. 걸음이 빠른 일행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이곳저곳 포인트를 제대로 확인할 여유도 없다. 모두들 근래 들어 걸음이 무척 빨라졌다.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다. 바람 때문에 추울 것 같아 알고 껴입었던 자켓을 벗어야 되는데 벗을 틈을 주지도 않는다.
하긴 삼/관/청/광이나 불/수/사/도/북은 기본이고, 마라톤 풀코스 완주자도 여럿이 있고(서브쓰리 기록 보유자도 있다), 100km 울트라마라톤을 12시간에 주파한 준족에다 다음달에는 무박으로 한숨에 80km 지리산 태극종주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여럿이 있을 정도로 괴물클럽으로 바뀌고 있다. 이거 뭐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제 덕칠이는 땡칠이가 아니다.
화매재를 떠난지 30분 만에 송전탑이 있는 곳에 도착하고, 다시 5분 만에 철탑이 나타난다. 야트막한 봉우리 하나를 넘어 사면으로 내려서서 진행하다보니 임도가 나온다. 이곳에서 쉬자마자 선두가 길을 재촉하는 바람에 선두와 후미가 일체가 되어 길을 떠난다. 포산마을 갈림길에서 포산마을 안길로 들어서서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휘어져 들어간다. 그 흔한 개소리도 들리지 않고 마을은 조용하다.
어떤 농가주택을 끼고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포장도로가 비포장도로로 바뀐다. 흙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표지기가 걸려있는 3거리 지점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길로 들어서서 5분쯤 진행하니 다시 갈림길이 나오고 선두가 여기서 좌측으로 들어간다. 우측으로는 정맥길 마루금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일정거리를 유지하고 같이 가는 느낌이 든다. 새벽 5시 10분이 되어가면서 사방이 훤해지고 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선두들이 뒤돌아오고 있다. 물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이제는 山自分水嶺이 확실하게 각인되었는지 물소리만 들리면 길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차린다. 되돌아와 좌측의 산길로 내려서서 마루금으로 달라붙으려고 하는데 기어코 조그만 물길을 건너고 만다. 지도를 보니 포산마을 안길에서 송전탑까지 가는 길에 흐릿한 물길이 흐르고 있다. 당초부터 가로질러 가는 길에는 물길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약간 찝찝하지만 이 물길은 정맥이 생긴 후에 태풍 등 자연재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자위하며 물길을 튀어 넘어 정맥길과 합류한다. 그러고 보니 꼭짓점처럼 툭 튀어나온 부분을 생략하기 위하여 서둘러 달려가는 길이나, 원래의 길대로 에둘러 돌아가는 길이나 그게 그거라는 사실. 여기서도 갈길 대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세상사의 철리를 배운다.
정맥길은 송전철탑에서 좌측능선으로 이어진다. 이제 5시 30분이 되어가면서 완전히 날은 밝아 잠에서 깨어난 대지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시간이다. 주위의 산들도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솔숲 오르막을 올라서니 정맥길은 봉우리에서 좌측능선으로 이어진다. 이름모를 새소리만 들려올 뿐 호젓한 첩첩 오지의 산중이다. 송림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니 지도상의 송이모듬터라는 지점을 지난다.
계속 낙엽길 오르막을 가다보니 오르막 우측으로 길이 나 있는 3거리 지점이다. 직진하면 포도산 갈길길로 오르는 길이고, 우측 사면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포도산 3거리에서 내려오는 길과 결국 만나게 된다. 오르막을 올라서면 좌측으로 포도산으로 가는 능선이 뻗어있는 포도산 3거리이다. 시간은 아침 6시, 오늘 구간의 1/3을 마치는 시점이다.
4. 명동산이나 맹동산이나
[포도산 3거리 → 맹동산 : 8.4km//약 2시간50분]
포도산 3거리에서 포도산을 바라보니 별 모양도 신통치 않고 특별히 가보고 싶은 충동도 생기지 않아 사진 한 장만 박고 포도산 3거리에서 우측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밑으로 내려서니 바로 사면으로 오는 길과 만나고 참나무 지대를 지난다. 진달래가 다소곳하게 피어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임도로 뚝 떨어지는데 박짐고개이다. 지도를 보니 좌측의 영양군 석보면 삼의리에 박짐이라는 지명이 있다.
박짐고개 임도를 가로질러 둔덕으로 올라선다. 지도를 보니 이곳에서 울치재 직전까지 임도가 이어지고 있다. 5분쯤 산길 오르막을 올라서니 능선분기점이고 이곳에서 우측능선 오르막을 오른다. 바닥에는 늦가을마냥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고, 샛노란 양지꽃이 곳곳에 피어있다. 오르막에서 내려서서 다시 오르막을 오른 봉우리에서 조금 진행하면 마루금이 좌측으로 확 꺾이는 지점이 나온다.
꺾임봉에서 좌측 내리막으로 내려선 후 완만한 산길을 따라가는데 마루금이 오른쪽으로 휘어지고 다시 왼쪽으로 휘어지면서 나아가다가 헬기장터에 이르고 바로 오르막을 치고 오르면 명동산(明童山, 812.4m)이다. 무인감시탑이 있고, 이상한 삼각점(ROKA MS)이 있다. 육군(Army)에서 박은 삼각점 같은데 MS가 Micro Soft도 아니고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명동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동해쪽
명동산은 산 밑에서 신동이 났다고 하여 명동산(明童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명동산 정상에서 사방으로 확 트인 조망을 즐길 수 있다. 멀리 평해쪽을 바라보나 동해바다는 가물가물하다.
명동산 정상에서 김진태님과 함께
너무 바람이 세차게 불어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할만한 형편이 되지 아니하여 봉수대쯤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선두는 서둘러 봉화산 방향으로 향한다.
명동산에서 봉화대까지 40여분간은 마루금이 좌, 우로 휘어지는 형세를 취하기는 하지만 오르내림의 편차가 크지 않은 완만한 참나무 숲길을 걷는 길이다. 중간 중간에 겨우살이와 진달래가 정맥꾼들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준다. 수명을 다한 것인지, 태풍에 넘어진 것인지 이상하게 고꾸라져 넘어진 덩치 큰 소나무도 본다.
무슨 사연으로 넘어졌을까?
오지 정맥길에서 보기가 쉽지 않은 봉화(수)대가 나타난다. 사람의 발길과 동떨어진 곳에서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모습이 왠지 생경하게 다가온다. 이끼 낀 돌들과 기왓장까지 보인다. 선두가 이곳에서 바람을 피하며 식사를 하고 있어 같이 합류하여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고 김밥을 꺼냈으나 차가운 날씨로 먹기가 싫다. 날이 더울 줄 알고 식수도 꽁꽁 얼려왔으나 완전히 헛발질을 한 셈이다. 이런 날에는 따끈한 물이 그립다. 대충 떡과 과일 등으로 요기만 해둔다.
식사를 하며 휴식을 취하는 사이 후미도 모두 도착하여 방을 빼주고 맹동산 방향으로 떠난다. 록수님은 처음으로 선두들의 얼굴을 보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까지 한다. 그런데 후미들이 식사를 하는 것 까지는 잘 보았는데 나중에 이들은 목장길에서 알바 아닌 조난(?)을 당하여 창수령 자라목쉼터에서 존안들을 뵐 수 있었다.
봉화대 군상들
봉화산(733m)은 봉화대에서 3분 정도 올라서면 바로 나온다. 봉화산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으나 잡목으로 둘러싸여 조망은 없다. 옆에 봉화대가 있어 봉화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얻었으나 산이름이 붙을 만한 산봉우리는 아니다. 봉화산에서 우측 내리막으로 내려서서 약간의 오르막을 오른 후 좌측으로 구불구불 임도가 지나는 것을 보면서 내리막을 내려서니 목장길 임도로 떨어진다.
임도 우측으로 내려가면 임도길이 좌우로 갈리고 왼쪽 길을 따르면 바리케이드를 지나 임도 4거리가 나온다. [↑삼의, ↓대리6.5km, →마당두들 9.3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있는데 삼의방향으로 직진하는 임도를 따른다. 2000국유임도 표석이 세워져 있는 임도를 따라 가는데 좌측으로는 고랭지단지 비슷한 농토지대를 지난다. 참나무 가지에 걸려있는 검정색 비닐들이 나풀거리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치고 있다.
임도4거리에서 임도를 따라 5분쯤 진행하다 우측 산길로 접어든다. 오르막 봉우리에서 우측 능선을 따르다 내려서니 다시 임도가 나온다. 좌측으로 영덕국유림관리소 표찰이 붙어있는 곳으로 잣나무 조림지대가 나타난다. 잣나무 숲 오솔길을 오르는데 진한 초록색 잣나무숲이 운치를 자아낸다. 임도를 따라 쭈욱 올라가는데 멀리 봉우리위에 산불초소가 보인다.
임도를 따라 오르막을 오른 지점의 좌측에 어떤 무인시설이 있고 그곳 철망에 807.5m(맹동산 상봉)이라는 표찰이 붙어있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로 올라가보니 이곳에 명동산산악회에서 맹동산 표석을 세워두었고, [맹동산 812m]라는 길쭉한 각목도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대간길 대관령의 목장지대와 같은 풍경을 목도할 수 있다.
맹동산 상봉
『사람과 산』의 지도를 보니 맹동산(萌動山, 756m)은 마루금을 벗어난 곳에 있고, 조선일보의 『실전 종주산행』에는 맹동산이 마루금상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어 헷갈린다. 명동산과 맹동산, 비스무리한 봉우리가 인근에 있어 더욱 헷갈린다. 맹동산이 별도로 있어 이 봉우리를 특별히 ‘맹동산 상봉’으로 붙인 것인지도 모른다. 맹동산은 6ㆍ25전후를 통하여 국군이 이 산에 주둔하여 맹렬한 활동을 하여 맹동산(萌動山)이라고 한다.
명동과 맹동을 보면서 우스개 이야기를 해본다.
손명순과 손맹순이 어떻게 다른지 아시나요?
손명순은 김영삼의 마누라고, 손맹순은 김영샘의 마누라다.
명동이나 맹동이나, 영삼이나 영샘이나 그게 그거다.
맹동산 상봉에서 내려와 선두를 보내고 과일을 먹으며 쉬고 있는데 김수영님과 김익수님이 올라온다. 이 분들이 워낙 걸음이 빠른 분들이라 이곳에 오는 동안 이 분들이 우리가 장구메기 구간에서 헤매는 동안 우리보다 먼저 길을 갔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리고 이어서 후미대장인 흑기사님이 올라온다.
그런데 후미가 없다. 흑기사님은 후미들 6명이 먼저 앞서 간 것으로 알고 제일 뒤로 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들은 봉화산을 내려와 임도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는 터. 그런데 산행 중에 하는 알바라는 게 참으로 재미있다. 그리고 대부분 알바를 할만한 곳이 아닌데서 알바를 한다. 산행의 묘미를 더해주는 게 바로 알바인데 그것도 남이 할 때 재미있는 것이지 본인이 할 때에는 재미고 뭐고 열불만 난다.
5. 목장길 따라 울고 넘는 고개를 지나
[맹동산 → 창수령 : 8.9km//약 3시간]
오전 9시 15분 흑기사님이 후미를 기다려보기로 하고 울치재를 향하여 출발한다. 알바조 중에는 탈출에 일가견이 있는 분들도 있고, 알아서 탈출하거나 뒤쫓아 오거나 나름대로의 노하우는 있으니 큰 걱정거리는 되지 않는다. 돌범님은 알바조에 끼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하면서 연신 싱글벙글이다. 역시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목장 초원길을 따라 걷는 길은 확 트인 공간만큼이나 시원하고 청량하다. 이렇게 빈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이다. 채움보다 비움에서 얻는 충만함이다. 목장길을 따라 진행을 하다 목장철망을 통과하여 헬기장을 지난다. 다시 울타리를 통과하여 임도로 들어선다.
임도끝 초원지대
목장길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측의 철망을 끼고 초지지대로 들어선다. 멀리 좌측으로 아득하게 높이 솟아있는 일월산이 보이고 우측으로 백암산을 가늠해본다. 일월산(1,219m)은 경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해(日)와 달(月)의 정기가 모인 接神의 산으로 알려진 산이다. 목장길 초지지대를 따르다 우측의 철망을 통과하여 초지지대를 가로질러 내려서니 다시 임도이다.
우측으로 목장길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가 OK목장 3거리에서 우측으로 포장도로는 비포장 흙길로 바뀌고 밭길 언덕으로 올라선다. 참나무뿐이다.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선 봉우리에서 내려서서 다시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앞서 가던 김수영님이 더덕줄기를 발견하고 더덕을 캐보려고 하지만 실패. 더덕에 눈이 멀어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제대로 된 더덕은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통과한다. 간혹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홍송들이 눈요기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춘정
봉우리 두개를 넘어 내려서니 안부상에 당집이 있다. 금줄이 쳐져 있는 당집 정문으로 들어가 안을 보려고 했으나 태극문양이 그려진 대문이 잠겨져 있다. 당집에서 오르막을 오른 봉우리에는 삼각점 위에 측량용 깃발이 꽂혀있다.
이곳에서 우측 내리막으로 내려서면 울치재이다. [↑창수고개 4km, ↓OK목장 3.2km, ←(좌)양구리 1.5km, →(우)원창수 3.2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울치재에서 흑기사님과 함께
지도에 따라 이 고개를 율치라고 적고 있는 것도 있는데(사람과 산의 지도에도 율치재로 되어 있다) 율치라면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栗峙일 것 같으나, 울고 넘는 고개라고 해서 울치(泣嶺)이다. 이정표에도 울치재로 되어 있다. 치(峙)라는 말에 이미 재(고개)라는 뜻이 들어있어 울치재라면 역전앞과 같은 말이 되어버리는데 사람들은 강조의 의미에서 같은 말을 두 번 쓰는 예가 많다. 대관령을 대관령고개로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흑기사님은 후미를 기다리다 오지 않아 그냥 뒤따라 왔고, 통화불통지역이라 휴대폰이 터지지 않아 그들과 연락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목자를 잃은 길 잃은 양들이 아니니 그리 걱정할 일은 없다. 울치재에서 15분간 남은 떡들과 과일과 함께 휴식을 취한다.
울치재 한 켠에 RV 차량이 한 대 서있는데 울치재로 내려오면서 어떤 젊다기보다는 어리게 보이는 남녀가 올라가는 것을 봤는데 그들이 타고 온 차 같다. 일행 중 누가 한 마디 “걔들 깔판도 없던데…” 이에 더해 “옷만 벗으면 깔판이지 무슨 소리여!” 누군지는 모르지만 알 수 없는 말들만 한다.
울치재에서 창수령까지는 3.7km이나 이정표에는 4km로 되어있다. 1시간 10여분이면 오늘 구간의 종착점인 창수령까지는 갈 수 있는 거리다. 처음에는 창수령 넘어 아랫삼승령까지 11km를 더 진행해 볼 생각을 했으나, 일요일 저녁에 한티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것이 영 자신이 없어 오늘은 창수령에서 구간을 끊기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리를 할 필요도 없다.
울치재에서 창수령까지는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여러 개 오르내리는데 고도차가 심하지 않아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는 구간이다. 갈수록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인동장씨묘와 김해김씨묘를 지나 능선길이 우측으로 꺾이는 봉우리에 오른다. 이곳에서 우측 내리막으로 내려선 후 10여 분간 꽤 경사가 심한 오르막을 오른다.
중간에 다 헤진 울진임씨묘를 지나 능선분기점에서 우측 능선을 따르다 좌측 내리막으로 내려서는데 창수령을 지나는 구불구불한 918번 지방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달래와 멋진 장송이 한껏 운치를 자아내는 길을 따라 내려서면 바로 오! 창수령이다.
창수령 이정표
창수령 도착시간이 12시 14분이니 화매재를 출발한지 8시간 24분이 걸린 셈이다. 창수령에는 낙동정맥 5구간 지도와 맹동산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율치재까지 4km로 표시되어 있는 창수고개 이정표도 있다. 그런데 사진에서 본 창수령 표석은 보이지 않는다. 창수령 고개의 형상이 자라의 목 같이 생겼다고 해서 자래목이라고도 부른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계곡에서 씻고 있어 내려가 보니 범털님은 차가운 물에 알탕을 서슴지 않고 있다. 급히 카메라셔터를 눌러보긴 했는데. 양말을 벗어 탁족을 하는데 물이 차가와 몇 초 발을 물에 담그지도 못하겠다. 오르고파님이 일행들을 어이하고 홀로 창수령으로 내려왔으나 나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6. 창수령(蒼水嶺)과 ‘젊은 날의 초상’
영양출신의 작가 이문열은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창수령을 넘어가면서 분출하고 있는 젊음의 열병을 그리고 있다. 고개를 넘는 일은 인생의 한 고비를 넘는 일. 누구나 젊음의 열병을 앓아본 기억이 있다. 괴테의 말대로 “노력하는 자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 그것은 젊음의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원래 젊음과 청춘에게 희망도 있지만 절망도 있다. 그러나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출발이다.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주인공 ‘나’가 유서와 독약을 품에 안고 바다에서 죽기 위하여 걸어 넘은 창수령을 묘사한 대목을 보자. 창수령을 수채화처럼 묘사한 아름다운 문체, 이문열은 이 소설로 한국의 헤르만헤세라는 별칭을 얻었다.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물은 오래오래 기억 속에 보존된다. 물론 그때의 창수령은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러나 왜곡되고 과장되기 쉬운 것 또한 우리의 기억이다. 나는 차라리 그 위험한 기억에 의지하기보다는 서투른 대로 그 날의 기록에 의지하련다. 문장은 산만하고 결론은 성급하다. 거기다가 그 글은 전체적으로 흥분해 있지만, 그리고 그쪽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므로.
<창수령, 해발 칠백 미터 ㅡ.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오, 그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그 눈 덮인 봉우리의 장려함, 푸르스름하게 그림자진 골짜기의 신비를 나는 잊지 못한다. 무겁게 쌓인 눈 때문에 가지가 찢겨버린 적송, 그 처절한 아름다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눈 녹은 물로 햇살에 번쩍이던 참나무 줄기의 억세고 당당한 모습, 섬세한 가지 위에 핀 설화로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서 있던 낙엽송의 우아한 자태도 나는 잊지 못한다. 도전적이고 오만하던 노가주나무조차도 얼마나 자그마하고 겸손하게 서 있던가. 수줍은 물푸레 줄기며 떡갈 등걸을 검은 망사 가리개처럼 덮고 있던 계곡의 칡넝쿨, 다래넝쿨, 그리고 연약한 줄기 끝만 겨우 눈 밖으로 나와 있던 진달래와 하얀 속새꽃의 가련한 아름다움.
수십년생의 싸리나무가 밀생한 등성이를 지날 때의 감격은 그대로 전율이었다. 희디흰 눈을 바탕으로 선 잎진 싸리 줄기의 검은 선, 누가 하양과 검정만으로 그 화려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고고하면서도 삭막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하늘도 어느새 개어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현란한 빛으로 그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엷어서 오히려 맑고 깊던 그 겨울 하늘. 멀리 보이는 태백의 준령조차도 일찍이 그들의 눈으로 유명했던 세계의 그 어떤 영봉보다 장엄하였다.
나는 산새도 그곳을 꺼리고, 불어오는 바람조차 피해 가는 것 같았다. 오직 저 영원한 우주음과 완전한 정지 속을 나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며 걸었다. 헐고 부르튼 발 때문에 그 재의 태반을 맨발로 넘었지만 나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나는 나를 둘러싼 장관에 압도되어 있었다.
고개를 다 내려왔을 때 나는 하마터면 울 뻔하였다. 환희, 이 환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미학자들이 무어라고 말하든 나는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였다.
아름다움은 모든 가치의 출발이며, 끝이었고, 모든 개념의 집체인 동시에 절대적 공허였다. 아름다워서 진실할 수 있고 진실하여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선할 수 있고, 선해서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성스러울 수 있고 성스러워서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모든 가치를 향해 열려 있고, 모든 개념을 부여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 거기에 아름다움의 위대성이 있다 ㅡ.
이번의 출발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격은 미처 그 재를 벗어나기도 전에 돌연 암담한 절망으로 바뀌었다. 내 모든 외형적인 방황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나를 사로잡고 있는 예감 중의 하나는 내가 어떤 예술적인 것 ㅡ 아름다움의 창조와 관련 있는 삶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입으로야 무어라고 말하든 아름다움은 내가 마지막까지 단안하기를 주저하던 가치였다.
그런데 그 감격에 뒤이어 돌연히 나를 사로잡은 아름다움의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이 어떤 신적인 것, 인간은 본질적으로 도달이 불가능한 하나의 완전성이란 것이었다. 인간은 한 왜소한 피사체 또는 지극히 순간적인 인식주체에 불과하며, 그가 하는 창조란 것도 기껏해야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모상리 뿐 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예감하는 삶의 형태는 처음부터 불가능을 향해 출발하는 셈이었다. 그런 삶을 채워가야 한다는 것은 그때의 나에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다.
7. 자라목쉼터
처음에 우리는 창수령계곡에서 삼겹살파티를 하려고 준비를 하다가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고, 기온도 내려간다고 하여 삼겹살파티를 취소하고 자라목쉼터에서 점심을 시켜먹기로 하였다. 우리들의 버스는 창수령에서 영양쪽으로 500여m 내려간 지점의 오른쪽에 있는 자라목쉼터로 간다.
나는 처음에 창수령에서 구간을 끊고 다음 구간을 이어가기 위해서 어디서 잘 곳을 알아보다가 사다리의 하늘재님 산행기에서 자라목쉼터가 있는 것을 알고 인터넷 민박정보를 통해 이곳의 상황을 알아두었다. 자라목쉼터의 박사장님은 부모님을 모시고 이곳 쉼터를 운영하고 있는 34세의 성실한 노총각이다[전화 : 054-733-1788, 054-732-6418, 017-527-7576].
총무님이 이미 예약해둔대로 닭도리탕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하산주도 한잔씩 돌린다. 음식을 먹는 중에 알바조들이 합류하여 마무리 회식자리를 갖는다. 흑기사님의 제의로 6월 셋째 주에 비박이나 1박을 하면서 마지막 2구간[답운치-석개재, 석개재-피재]을 함께 몰아쳐 장마 전에 낙동정맥종주를 마치기로 합의를 본다.
자라목쉼터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2시 50분 버스는 서울을 향하여 출발한다. 나푸른솔님이 나와함께 이곳에서 1박하고 다음날 백암산 구간을 이어가기로 했는데, 1타3피를 계획하고 있던 산정무한님이 요리조리 재다가 결국 우리와 1타2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8. 주곡마을 조지훈 생가
배낭을 쉼터에 맡겨두고 우리들의 버스에 동승하여 영양에서 내려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로 가보기로 한다. 나푸른솔님과 산정무한님 등 셋이서 영양읍내에서 버스를 내려 터미널로 가면서도 너무나 한적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나로서는 80평생 처음으로 영양 땅을 밟아보는 것이다. 읍내는 텅 비어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한적하고 적적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처음에는 택시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택시는 보이지 않고 영양터미널에 가서 안내원에게 주곡리로 가는 버스편을 물어보자 바로 출발한다고 하여 1매당 850원짜리 표를 끊어 버스에 오른다. 영양읍내에서 주실마을이 있는 일월산 자락의 주곡리까지 918번 지방도를 따라 10여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주실마을 입구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가면서 보니 기와집 등 고택들이 즐비한 전통한옥마을이다. 도로포장 등 마을정비사업이 한창이다. 귀가 먼 할머니에게 물어 조지훈 생가 앞으로 가보니 ‘조지훈 생가’ 안내판이 서있고, 대문은 닫혀있다. ‘壺隱宗宅’이라는 맷돌 표석도 세워져 있고, 한국문인협회가 1996년 한국현대문학표징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芝薰 生家’ 동판도 있다.
조지훈 생가
본명이 동탁(東卓)인 조지훈은 유명한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1920년 이곳에서 태어나 1968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니 요새 같으면 너무 젊은 때 세상을 떴다.
생가 대문이 잠겨있어 인근 사람에게 물어보니 열쇠를 가진 분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옆집으로 가보니 조지훈과 8촌간이라는 분이 열쇠를 가지고 와서는 해설을 해줄 분이 밭에 가서 해설을 해줄 수 없다고 한다. 그 분의 안내를 받아 대문 옆의 쪽문을 통해 마당 안으로 들어가 본다. 안동 하회 마을에서 볼 수 있는 고택이다.
마당을 통해 다시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조지훈이 출생한 태실과 조지훈이 공부했다고 하는 공부방을 들여다본다. 조지훈은 여기서 태어나 17세때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8촌간이라는 분도 조지훈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 분은 우리가 서울에서 왔다고 하여 이것저것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원래의 생가는 6ㆍ25전에 빨치산들이 불태워 없어진 것을 1963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안채를 구경하고 나오는데 마침 해설사가 밭에서 일을 하시다가 장화를 신은 채로 들어와 20여 분간 이 동네와 조지훈 가족의 내력 등에 상세한 설명을 해준다. 경주에서 온 아줌마들이 단체로 조지훈 생가가 어떤 곳인가 하여 들른 참에 같이 설명을 들었다.
해설사로부터 마을 내력과 조지훈 일대기를 듣고
주실마을은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이 마을 사람들은 정암 조광조의 후예답게 지조가 강한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러면서도 공리공담이 아닌 실용과 실천을 숭상하여 100여년 전에 이 시골마을에 교회가 들어섰고, 우리나라가 1968년 가정의례준칙을 공포하기 전인 1963년부터 삼년상 중 大喪을 없애고, 제사도 4대봉사가 아니라 조부까지만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살아있을 때 증조부를 본 사람은 증조부까지).
조지훈의 부친은 제헌의원을 지낸 조헌영이고, 지훈은 차남이고 장남은 東振(필명 : 世林으로 역시 시인이었으나 21세에 요절하였다). 지훈의 누이가 구 정객 박준규(공화당의장 등을 정계거물이었는데 김영삼 정부 초입에 재산문제로 정계에서 물러난 사람)의 부인이라고 한다. 조지훈은 단순한 시인이 아니라 ‘한국문화사서설’, ‘지조론’ 등을 쓴 선비이자 지사였다.
조지훈문학관은 담당자가 없어 내부를 구경하지 못했고, 도로로 나오는 길에 시비가 있어 가보니 조지훈의 형인 조동진시비이다. 이 시비 뒷면에는 지훈이 형을 그리며 쓴 글이 음각되어 있다.
세림 조동진시비
조지훈 시비는 마을 입구 영양군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는 길가의 울창한 팽나무 숲 속에 있다. 시비의 형태가 금남정맥 종주를 하면서 금강가에서 본 신동엽시비와 비슷하다. 1982년 세워진 시비에는 “빛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시 전문이 새겨져 있고, 후면의 비문은 조지훈의 제자인 홍일식 전 고대총장이 썼다.
지훈 시비
조지훈의 시 중에는 고등학교 때 배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는 승무(僧舞)(승무시비는 경기도 화성 융건릉 옆의 용주사에 있다)와 “꽃이 지기로서니/바람을 탓하랴”는 낙화(落花)가 유명하다. 완화삼(玩花杉)[꽃(花)을 완상(玩)하는 선비의 도포(杉)]도 빼뜨릴 수 없는 지훈의 대표작이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 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조지훈, “완화삼” 전문
조지훈으로부터 “木月에게”라는 헌사가 붙은 이 시를 받아 박목월은 유명한 “나그네”로 화답하였다. 오히려 사람들은 박목월의 “나그네”를 더 많이 기억한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을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로 답한 것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 “나그네” 전문
9. 내일을 위하여 : 자라목에서 1박
조지훈 시비를 보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4시 40분에 온다는 버스는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영양택시(011-828-2338)로 전화하여 택시를 부르자마자 버스가 오는 것이 보여 택시를 취소하고 버스에 오르니 승객은 우리뿐이다. 이곳 시골버스는 승객이 없어 시간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영양읍내에 들어서서 터미널에서 기다리다가 오후 5시 40분 자라목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타고 자라목쉼터로 돌아오니 오후 6시경이다. 2층 방으로 올라가 따끈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내려와 된장국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점심 때 먹다 남은 막걸리와 맥주도 곁들이면서 인적이라고는 뜸한 정맥 언저리의 정취를 만끽한다.
이 휴게소는 숙박손님이 거의 없는지 2층의 보일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아니하여 1층의 식당바닥에서 자기로 한다. 우리 세 사람이 먹고 자면서 비용은 도합 5만2천원이니 싼 비용으로 하룻밤 지낼 수 있고 내일 바로 이곳에서 창수령 들머리로 이동할 수 있으므로 나로서는 대만족이다.
나푸른솔님과 산정무한님과는 작년 1월인가 2월에 한강기맥 1,2구간 연속종주를 하면서 동숙한 일이 있다. 그 때 양수리 양서고등학교에서 농다치고개까지 1구간을 마치고 한화콘도로 내려왔으나 방이 없어 인근 마을의 식당으로 가서 1인당 만원씩을 주고 넓은 빈집에서 함께 잠을 자고 다음날 농다치고개에서 용문산까지는 잘 갔는데 용문에서 문례봉쪽으로 가지 못하고 용문봉쪽으로 빠지는 바람에 된통 알바를 하고 그냥 용문사쪽으로 내려간 씁쓸한 추억이 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주인인 박사장님과 사장님 어머님과 이 동네의 실상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일 여정을 위하여 이른 시간이지만 밤 9시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따끈한 온돌방의 온기가 오늘 산행의 피로를 화끈하게 녹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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