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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기씨 인물 골격
행주기씨! 고려조에 무공을 떨치고 ---------------------------------- 행주기씨 1세조 순우의 손자 윤위는 고려 고종조에 상장군으로 거란의 여러 차례 침입을 막았으며 이장대, 이당필의 반란 잔당을 체포, 평정했다. 아들이 없어 사위 재신 손정렬이 가계를 계승했다.
윤위의 동생 윤숙은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이다. 의종, 명종, 신종 3대에 영상으로 봉직하고 의종 말에 "권신 정중부를 설득하여 왕정을 회복시킨 공이 크다"고 이규보가 평했다. 윤숙의 동생 필선, 필준 역시 상장군으로 거란의 칩입을 막아 무훈을 떨쳤다.
윤숙의 둘째 아들 기홍영[일명 연]은 고려 경군의 낭장을 지냈다. 홍영은 딸을 여산송씨 시조 5세손 송염에게 출가시켰다. 홍영의 딸 행주기씨는 손자 송선을 두었다. 송선의 딸이 여흥민씨 좌의정 민제[부친 태종국구 원경왕후]에게 출가했다.
홍영의 둘째 아들 관은 응양군 상호군을 지냈다. 관의 아들은 자오이다.
기황후! 행주기씨 고려조 영화의 절정기 주도 ------------------------------------------- 자오의 막내 딸이 기황후이다. 기황후는 기윤숙의 현손녀가 된다. 기황후의 등장으로 행주기씨 고려조 후기 200여년 간 영화는 절정에 이르렀다. 기황후는 천품이 영명하고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으며 품위가 고상했다. 16세에 원나라 순제의 궁녀로 들어가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 22세에 태자를 낳고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그 태자는 후일 황통을 이어 등극했다. 그이가 소제이다. 기황후의 아버지 자오는 영안왕에 봉해지고 오빠 철은 원조의 요양성평장사, 여조의 도첨의사사가 되었다. 이로써 고려조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뒤 주원장이 명나라를 일으키면서 원이 쇠퇴하고 공민왕이 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대개혁을 단행하므로 행주기씨 일문은 큰 수난을 당하면서 침체기로 접어 들었다.
순우의 9세손 기면은 홍영의 형 홍수의 6세손이다. 기면은 가선대부로 공조전서를 지냈다. 기면은 기건을 낳았다. 기건은 침체기에 빠진 행주기씨를 조선조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중흥조이다.
세조 때 절신 기건! 청맹 가장하여 세조에게 출사 거절, 행주기씨를 중흥시키다 ---------------------------------------------------------------------------- 생졸년; 1390년-1460년. 호는 현암 혹은 청파이다. 공조전서를 지낸 면의 아들이다. 기건은 성품이 맑고 검소하였다. 늘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청파 만리현에 살면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대학],[중용]을 외웠다. 세종조에 포의로 발탁되어 지평을 제수받았다. 그뒤 연안군수가 되었는데, 군민들이 붕어를 잡아 바치는 일로 고충이 심한 것을 보고 재임 3년 동안 붕어를 한 번도 먹지 않았다. 돌아올 때에 부로들이 전송하며 공덕을 칭송했다. 조정에 돌아와 집의,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448년 전라도 관찰사 겸 전주부윤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1449년 호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종이 승하하자 고부사의 부사로서 중국을 다녀왔다. 이어서 1451년[문종 1]에는 개성부유수가 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먼저 승정원 승지들의 권력 농단을 탄핵했다. 그 다음 " 의정부는 황표정치로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대신들의 자손들에게 벼슬을 내리는 폐단이 있으니 이를 즉시 중지시키시오"라고 황보인을 공격했다.
그런 일로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이 전복을 잡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겨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고, 부모가 죽으면 들에 버리는 제주의 풍속을 교화시켰다. 그뒤 인순부윤,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당시 수양대군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단종은 말뿐인 임금이 되었다. 이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분출하였다. 눈은 뜨고 있으나 볼 수 없다는 청맹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어느날 수양대군이 기건의 집을 찾았다. "멀쩡한 두 눈으로 병을 칭탁해야 되겠오"라며 자기에게 협력할 것을 종용했다. 기건은 눈을 뜨고는 있으나 눈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기건의 행동이 너무 태연하여 수양대군은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 갔다. 그 뒤 며칠이 지나 수양대군이 다시 찾아와 조정에 나올 것을 강권했다. 청맹을 칭탁하며 거절하는 것이 처음과 똑같았다. 이번에도 수양대군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세 번 네 번 찾아와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자 수양대군은 격노했다. 다섯 번 째는 거짓으로 청맹을 칭탁하는 기건의 버릇을 고치려고 가슴에 품고 있는 바늘을 꺼내서 금방 눈을 찌를 듯이 위협을 거듭했다. 그러나 기건은 눈을 똑바로 뜨고 조금도 깜박거리지 않았다. 결국 수양대군은 어쩔 수 없어 그냥 돌아가 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절개를 기렸다. 생육신의 일인에 비견되는 인물로 칭하기도 한다. 공주 동학사 숙모전 및 전라남도 장성의 추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무이다.
기건의 둘째 손자가 찬이다. 찬은 문과하여 응교를 지냈다. 배위는 첨추 윤준원의 딸 파평윤씨이고 계배는 사의 김수형의 딸 안동김씨이다, 수형의 손녀는 안동권씨 좌의정 권람에게 출가했다.
기건은 아들 축과 손자 다섯을 두었다. 그들은 유, 찬, 저, 주, 정이다. 그 중 기찬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형, 원, 괄, 진, 준이다.
기형 가문 =================== 기형은 초휘가 매이다. 자는 자고이다. 1501년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516년[연산군7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과 경연시독관을 지냈다. 학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아우 준과 함께 당세에 쌍벽이라 일컬었다. 기형의 딸은 안동김씨 현감 김석[조부 충무공 김시민]에게 출가했다. 김충갑, 효갑, 우갑, 제갑, 인갑은 기형의 외손이다. 이 중 충갑, 효갑, 제갑은 3형제 문과 급제로 충청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충갑은 을사년에 정치를 바로 잡으려다 삭탈관직되고 천안 충렬사에 주향되었다. 충갑의 아들 김시민은 임진왜란에 3만여 명의 적병을 맞아 불과 3천 8백명으로 7일간 공방전을 벌리다가 순국한 선무공신 2등의 충신이다. 김제갑은 역시 임란에 왜장 모리의 군사와 싸우다 죽고 아들 시백도 죽고 부인도 순절했다. 인갑의 아들 김시양은 청백리에 녹선되고 회령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이외에도 행주기씨의 훌륭한 외손들이 많이 배출되어 충청도를 울린 명문을 형성하여 외가 행주기씨의 명예를 크게 빛냈다.
기형의 아들은 대복이다. 대복은 자가 용휴이며 증이조참판이다. 배위는 충의위 이세호의 딸 전주이씨이다. 후배는 화천군 이량의 딸 전주이씨이다.
대복의 둘째 아들 기령은 문과하여 양호 관찰사를 지냈다. 기대복의 손자 만헌[난의 아들, 기령의 조카]은 문과하여 사간을 지냈다. 기령의 아들 홍헌은 순천군수를 지냈다. 홍헌의 딸은 장흥고씨 판결사 고용후[부친 의병장 충렬공 고경명]에게 출가했다. 기대복의 증손 협은 문과하여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선천부사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 수성장으로 싸우다 순국했다. 배위는 신일의 딸 평산신씨이며 계배는 좌의정 홍섬의 손녀 남양홍씨[부친 기영]이다. 기협의 손자 정은 자가 성중이다. 배위는 김홍량[동생 감사 김홍욱, 종증손 영의정 김흥경]의 손녀[부친 석진] 경주김씨이다.
기원-대익 가문 ================ 기원은 1519년 기묘사화 때 아우 준이 귀양을 가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동생 진과 함게 호남 장성으로 낙향하였다.
기원의 아들은 대익이다. 대익의 증손 기진갑은 용력이 뛰어나 민진원의 천거로 찰방이 되었다. 기진갑의 손자 학은 자가 문옹이다. 학의 동생 미는 학행이 있다. 대익의 손자 정헌은 무과하여 수문장을 지냈다. 정헌의 후손 기영도는 광주서중 학생독립운동 거사를 주도했다.
기원-대유 가문 =================== ****학행이 뛰어나다.*******
성리학 6대가의 일인 기정진[다음 장 학자군 참조] --------------------------------------------------- 대유는 대익의 동생이다. 대유 아들 효간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 추산서원에 제향되었다. 효간의 동생 효근은 선무공신 3등이며 도산사에 제향되었다.
효간 후손에 기정진이 있다.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성리학 6대가의 일인으로 고산서원에 제향되었다. 기정진의 손자 우만은 의병활동을 하여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독립운동가 겸 석학 기우만 ------------------------------- 학행[하기 인물 행적은 다음 장에서] 기양연, 기우승, 기정진, 기노선, 기노장, 기우만, 기양연, 기우채, 기재선, 기봉진, 기광도, 기재, 기삼연, 기정익, 기홍연, 기정규, 기익, 기범동, 기태협
기양연은 자는 덕수이다. 생부는 봉진이다. 양연의 아들 우정은 무과하여 선전관에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다. 배위는 이조참판 이재학의 손녀[부친 도정 이경현] 용인이씨이다.
*****독립운동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의병대장 기산도 ------------------------ 건국공로[하기 인물 행적은 다음 장에서] 기우만. 기경, 기삼연, 기산도 기산도 산도는 초명이다. 본명은 경이다. 배위는 장흥고씨 고광순이다.
서원,사우 등 향사 기효간, 기정진, 기우만, 기효근, 기삼연, 기정익
시호; 기정진
기괄 가문 ================= 기괄은 대관과 대정 두 아들을 두었다. 대관은 자가 사빈이며 별좌를 지냈다. 배위는 익주군 이지[임영대군 증손]의 딸 전주이씨이다.
기진-대림 가문 ====================== 기진은 자가 자순이며 호는 물재이다. 경기전 참봉의 벼슬이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동생 준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다가 준이 기묘사화를 당하므로 형 원과 함께 낙향하여 그 후손이 450년 간 광주에 세거하며 명문을 이루었다. 배위는 사과 강영수[조부 좌찬성 강희맹, 숙부 우의정 강구손]의 딸 진주강씨이다.
기대림은 진의 맏아들이다. 대림의 아들 효분은 어모장군에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다. 효분의 둘째 아들 창헌은 호가 만수재이다. 창헌의 배위는 좌랑 박희수[조부 눌재 박상]의 딸 충주 박씨이다. 눌재 박상은 기준, 양팽손, 박세희, 최산두와 함께 교유했으며 모두 기묘명현이다.
창헌의 동생 의헌은 병자호란 때 창의하였다. 의헌의 자매 중 하나는 제주양씨 승지 양철용[증조 학포 양팽손]에게 출가했다.
의헌의 아들 침은 문과하여 부정자를 지냈다. 배위는 참판 정만종의 현손녀 광주정씨이다.
침의 손자 정룡은 외조부 박상현에게 글을 배웠다. 박상현은 충주박씨로 평양군 지의정부사 박석명의 후손이다. 박석명은 태종에게 황희를 승지로 천거하여 유명하다.
기진-대승 가문 ================ 호남을 대표하는 석학대덕 중 일인 기대승[다음장 학자군 참조] ------------------------------------------------------------- 기대승은 진의 둘째 아들이며 대림의 동생이다. 기대승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하고 대사간, 이조참의, 부제학 등을 지냈다. 학문이 깊어 퇴계 이황의 예우를 받았다. 시호는 문헌공이다. 배위는 장양공 병마절도사 함성군 이종생 증손녀 함평이씨이다.
기대승의 아들 효증은 연은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창의했다. 고향에 칠송정을 지어 놓고 시문을 음영하며 여생을 보냈다. 배위는 김석옥의 손녀[부친 김점] 부안김씨[부령]이다. 김석옥의 동생 석홍은 조광조, 김식과 함께 기묘명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김석옥, 석홍 형제의 아들들은 정철, 기대승과 함께 김인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기대승의 딸은 울산김씨 찰방 김남중[조부 문정공 하서 김인후]에게 출가했다.
효증의 아들 정헌은 자가 덕회이다. 현풍현감을 지냈다. 효증의 맏딸은 한양조씨 승지 조찬한에게 출가했다. 둘째 딸은 청주한씨 좌의정 한효순의 손부가 되었다.
기효증의 아들 정헌은 자가 덕회이며 현풍현감을 지냈다. 배위는 교리 정희렴의 손녀 서산정씨이다. 정희렴의 부친은 정형[판의금부사 충순위겸 사직]이며 조부는 정이득으로 이조판서 정순의 자손 중에서 가장 현달한 계파이다. 정헌의 맏딸은 효령대군 후손인 훈련대장 이척의 손부가 되었다. 네째 딸은 전의이씨 우의정 이행원의 4촌인 이조참판 행진[증조 평간공 이제신]에게 출가했다.
기정헌의 현손 언관은 문과하여 헌납, 사간을 거쳐 형조와 호조의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불취했다. 향리에 집을 짓고 국천이라 편액하고 은거했다. 언정은 문과하여 동부승지,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1795년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청렴하여 벼슬아치의 기강을 바로 잡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기로소에 들었다. 시호는 정간이다. 언정의 자매 중 하나는 수원백씨 백인걸 후손 백상희에게, 또하나는 연일정씨 정철 후 정익환에게 각각 출가했다.
기언관의 아들 학경은 문과하여 수찬, 교리 등을 지냈다. 기언정의 딸은 진천송씨 공조판서 송창의 현손 송문환에게 출가했다.
기학경의 후손 우현은 문과하여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기언정의 후손 문현은 문과하여 수찬, 교리 등을 지내고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서원 사우 등 향사; 기대승, 기효증, 기언관, 기언정
공신; 기대승
시호; 기대승, 기언정
기준 가문 ====================
기묘 명현 기준 --------------------
생졸년;1492년-1521년. 자는 자경, 호는 복재 또는 덕양이다. 응교 찬의 다섯째 아들이며 정암 조광조 문인이다. 151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 홍문관 정자를 거쳐 초계문신이 되었다. 박사를 역임한 뒤 호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하였다. 사경으로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효제의 도리를 다할 것을 건의하였다. 검토관, 수찬, 검상, 장령, 시강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스승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식, 한충, 김정, 박훈 등과 함께 전래의 규범과 제도를 개혁하여 이상정치를 실현하려고 크게 노력했다. 이로 인해 훈구파인 남곤, 심정 등으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네 사람에게는 사약이 내리고 나머지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기준은 아산으로 귀양을 갔다가 함경도 온성으로 이배되었다. 1521년에 송사련의 무고로 신사무옥이 터져 유배지에서 죽었다. 1545년 인종은 이언적, 송인수, 김인후 등 사림을 중용하면서 조광조 , 김정, 기준 등을 신원했다.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기묘 명현으로 추앙되고 있다. 성리학에 정통했으며 시문에도 능하여 해동시선, 대동운부군옥 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다. 온성의 충곡서원, 고양의 문봉서원, 아산의 아산서원, 종성의 종산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민이다. 기준의 배위는 우찬성 파성부원군 헌의공 윤금손의 딸 파평윤씨이다.
한성판윤 기대항 ---------------- 생졸년;1519년-1564년. 자는 가구이다. 복제 준의 아들이다. 154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46년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직을 두루 역임하고, 1551년 평안도암행어사로 나갔다. 1552년 이조정랑을 거쳐 헌납, 사간, 전한 등을 지내고 직제학이 되었다. 1556년에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와서 1557년 용양위대호군에 임명되었다. 1561년 대사간으로서 재변소 6조목을 올렸다. 1563년 홍문관 부제학이 되어 당시 권신이던 이량이 사화를 일으켜 새로 등용된 사류들을 숙청하려 하였다. 심의겸으로부터 이량 일파에 의한 사류 일망타진 음모를 전해 들은 기대항은 이량의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조판서 이량은 권세를 남용하여 사류를 무더기로 해치고 있습니다. 또한 사류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이양과 그 무리들을 그냥 두면 후일에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고 탄핵했다. 이때 윤원형 일파가 가세하여 이량을 궁지로 몰아 넣고 귀양 보냈으며 그 무리를 몰아내 사림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뒤 대사헌, 이조와 공조의 참판을 거쳐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견이다.
기대항의 아들 응세는 1539년에 태어나 1585년에 죽었다. 자는 경우이다. 선조 때에 효행으로 정문이 섰으며 삼강록에 기록되었다. 배위는 좌의정 괴마 임백령의 딸 선산임씨이다.
영의정 기자헌 ------------------------- 기응세의 아들 자헌은 1562년에 태어나 1624년에 몰했다. 초휘는 자정이다. 자는 사정이며 호는 만전이다. 1582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9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3년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검열이 되었다. 이어 정언, 집의, 부교리, 보덕, 사간, 사인, 동부승지, 좌승지 등 청요직을 두루 지냈다.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와서 부제학, 대사헌 등을 지냈다. 1602년 왕세자의 우부빈객이 되고 병조와 예조의 판서, 대사헌을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1605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1614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대북의 전횡이 지나치자 사직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를 폐할 때에 적극 반대하였다. 폐모에 반대하던 기자헌, 이항복, 정홍익, 김덕함 등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 기자헌은 문외출송되고 홍원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길주로 이배되었으며, 강릉에 방귀되었다. 1620년 덕평부원군에 봉해졌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 이귀 등이 모의에 가담할 것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다. 또한 능양군이 왕위에 올라 선왕의 옛 신하들을 불렀을 때에 나가지 않았다. 인조 2년 이괄과 그의 아들 및 한명련, 기자헌 등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이 있었다. 국청에서 기자헌 등 40여 명을 잡아다가 문초했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런 일로 역모죄에 몰려 처형되고 그 일족도 몰살당했다. 1627년 신원되었다. 배위는 덕흥대원군 아들 하원군 이정의 딸 전주이씨이다.
기자헌의 동생 윤헌은 1573년에 태어나 1624년에 몰했다. 초휘는 충헌 또는 내헌이며 자는 경이이다. 1605년 현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 공조정랑 등을 지냈다, 1614년 군기시정에 승진되고, 이어 세자시강원 문학, 안악군수를 지냈다. 1617년 형 자헌이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유배될 때 관직을 삭탈당하고 그도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했다는 혐의로 온 집안이 추국을 받다가 죽었다. 윤헌의 자매 중 하나는 연안이씨 감사 이홍로에게, 또하나는 광산김씨 김신[좌의정 김국광 5대손]에게 출가했다.
기자헌의 아들 준격은 1594년에 태어나 1624년에 몰했다. 초휘는 수격이며 자는 붕만이다. 1615년 진사시에 장원하고, 1616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정언을 거쳐 예조좌랑을 지냈다. "허균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여 1618년에 처형되게 하였다, 그러나 고변을 늦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자신도 강릉에 유배당하였다. 1621년 기용되어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고, 다시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에 내응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했다.
준격의 동생 순격은 생년은 미상이며 1624년에 죽었다. 자는 수립이다. 161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619년에 음보로 해남현감이 되었다. 1620년 장흥부사를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23년 아버지 자헌이 역모죄로 몰리자 함께 관직이 삭탈되어 유배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내응하려는 혐의가 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처형되었다.
기자헌의 딸은 여주이씨 이지선[부친 좌찬성 이상의]에게 출가했다.
기윤헌의 아들 수발은 1596년에 태어나 1624년에 몰했다. 자는 자산이요 호는 창랑정이다. 16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검열을 거쳐 1622년 정언에 이르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김의민, 이유림 등의 역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처형되었다.
현대인물 ======================= 기세욱 인천제철 이사, 기세풍 국회의원, 기우종 동아일보 전무, 기의식 박사 육군병원장, 기천식 동대문 구청장, 기희성 상원실업 사장, 기상도 강남전기 사장 한국전기공사 협회장, 기우증 교육감, 기형섭 고흥경찰서장, 기우홍 서울중앙체신국장 광주체신청장, 기양도 교수 전남체신청장, 기우진 철도청국장, 기노석 의학박사 교수. 기우항 박사 경북대 수학과 교수 동대학 과학교육연구소장, 기우종 수원지법 판사, 기우탁 라이프주택 이사, 기정도 원국 사장, 기승준 한국시스템산업 사장, 기세갑 준장 현대광업 회장, 기노을[1936년생] 민추협 운영위원 기노창 중앙일보 이사, 기준 현대석유화학 대표이사 사장, 기춘석 박사 한양의대 내과과장, 기백석 중앙의대 정신과 교수.
기용숙 생졸년; 1905-1974. 황해도 송화군에서 출생하였으며 1925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미생물학을 연구하였으며, 1932년부터 만주의 일본인 회사인 대련만철 부속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1943년 만주의과대학에서 논문 [페스트균의 항원 분석]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학 교수로 재임 중 면역학 분야 발전에 끼친 공로로 1968년 대한민국 학술원상과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기세훈 1914년에 태어났다. 자는 덕흥이고 호는 서봉이다.1939년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고등문관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45년 서울과 광주 지법에서 판사를 지냈다. 1949년 광주지검 차장검사를 하고 1953년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초대 학장, 1961년 청주지법원장, 1963년 서울 가정법원 초대 원장, 1969년 서울 고등법원장, 1970년 사법연수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1973년 변호사를 개업하고 1977년 동아일보 감사, 1982년 성균관 부관장을 거쳐 1991년 고봉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기창덕 1924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48년 서울대 치대를 졸업했다. 1960년대 가톨릭의대 치과학과장을 지낸 뒤 67년부터 종로구 필운동에서 기치과의원을 운영했다. 그는 의학사의 지침서인 [한국근대의학교육사]를 썼다. 개화기 의료문화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 개화기 의문화연표 제2권]을 완성했다. 서적 9천여 권을 1999년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에 기증했고, 서울대병원은 이를 토대로 [소암 의문화사 연구소]를 개설했다. 그는 조남호 서초구청장과 함께 96년 3월 서초구 보건소에 국내 최초의 장애인 치과를 개설했다. 그는 치과의에게 수여하는 엘마 베스트 상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받았다. 2000년에 별세했다.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다.
기노을 1926년 7월에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조선대 전문부를 졸업하고 1966년 전북일보에서 시 [서글픈 역정]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이어 [시인과 공동묘지]로 제4회 [신문예] 시 문학상을 받았다. 1975년 월간문학76에서 [시원의 숲길], 1982년 시문학에서 [무명초 외], 1984년 현대문학에서 [정자 나무여], 1989년 월간문학에서 [철조망] 등의 시를 발표했다. 1975년 [부활], 1985년 [세월을 갈아서] 등의 시집을 발간했다.
기병태 1933년 인천에서 출생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1982년 매일경제신문 판매국장을 지냈다. 1988년 오공산업[주] 사장, 1991년 극동철강[주] 사장을 거쳐 1997년 대한공조[주] 사장이 되었다.
기우식 1932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1961년 미크라크대를 졸업하고 1964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 미웨스트버지니아대 경제학 교수, 1971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경제학 교수, 1984년 럭키금성상사 부사장, 1986년 럭키금성경제연구소장을 거쳐 1993년 세종연구소연구위원이 되었다.
기세익 1939년 3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1971년 제10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1979년 전남 영광 경찰서장이 되었다. 1983년 서울 성동 경찰서장, 1989년 치안본부 보안부장을 거쳐 제주도경 국장이 되었다. 1991년 전남지방 경찰청장을 거쳐 1994년 경찰종합학교장이 되었다.
기준서 1941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1970년 연세대 신과대를 졸업하고 1976년 미국 테네시신학대를 졸업하고 1990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미국 뉴욕그리스도교회 담임목사, 1988년 그리스도신학대 부교수, 1988년 동학장을 거쳐1997년 동대학원장이 되었다.
기용주 1941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조선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병무청 동원과장을 거쳐 1998년 대전충남지방병무청장이 되었다. 1999년 광주전남지방병무청장으로 옮겼다.
기대현 1942년 전남에서 태어났다. 1982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하고 1992년 매일경제신문 광고부 국장을 거쳐 1994년 매일경제TV 이사가 되었다. 1999년 동상무대우 영업본부장을 거쳐 2000년 상무이사가 되었다.
기연수 194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1961년 광주고를 졸업하고 1966년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를 나왔다. 1984년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1년 육군사관학교 러시아어과 교수, 1980년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조교수, 부교수 동소련문제연구소장, 1986년 미국 일리노이대 러시아 센터 연구교수를 지내고 1990년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교수가 되었다.
기주연 1945년 경기도 안산에서 출생했다. 1969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8년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강사, 1992년 세명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부교수 1995년 동학생처장을 거쳐 1998년 대원과학대 학장이 되었다. 1991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순홍 1946년에 태어났다. 1964년 광주제일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상학과를 나왔다. 1986년 조흥은행 종합기획부 차장, 1998년 동부장을 거쳐 2000년 동신탁산업 본부장[상무이사]이 되었다.
기형도 1960년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재학 중 문학 서클인 [연세문학회]와 안양의 문학 동인 [수리]에서 시작 활동을 했다. 1985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사에 들어가 일하며 작품을 발표하였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문단에 공식 데뷔했다. 1989년 시집을 출간 준비 중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으며 만 2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5월 유고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으며 사후에 기형도 전집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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