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와 히브리서에 나타난 이단(벧후2:1-22)
I.베드로후서에 나타난 사상(벧후2:1-22)
i.거짖 교사(僞師){2:1-22}
여기 베드로 당시에 위사들은 당시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창세 이래 참과 거짓은 시작되었다. 가인과 아벨 때부터 시작된 위사는 선지자 시대에도 있었다{렘6:13, 겔8:9, 사9:15, 28:7, 렘14:14, 겔13:3}.
1절의 {있으리라}는 미래사의 동사가 있는 이유는 교회에 거짓 스승들이 늘 있다는 상칙을 말하는 미래사이다
또한 사도시대에도 있었다{요일4:1, 마7:15-23}.
*.이단자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
(1).에비온 주의 {2세기 중엽에 나타남}.
유대주의 교훈이다. 이들은 성경관에 대하여 신구약에 아무런 연락이나 근거를 가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구약을 문자적으로 신약에 인용한 것도 많거니와 사상적 인용도 많으니 이 학설은 잘못된 것이다.
(2).)그노시스주의 {사도시대}
지식주의{고전1:19-21}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요한이서 7절}자들이다.
(3).모나키안주의 {2세기말-4세기초)
삼위일체의 교리에 이설{異說}을 가졌던 것이다.
(4).아리우스의 이단{안디옥에서 공부한 장로, 256-336}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자이다.
(5).펠라기우스의 이단{360-420}
구원론에 대하여 이설을 말하였다.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미치지 아니했으며 구원은 인간이 협조해야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은{롬9:16} 이를 반박한다.
1.이단의 근본
1).무지함
2).본래 잡혀 죽기 위해 난 이성없는 짐승(12)
거짓 선지자들을 짐승에 비유한 것은 계시록에도 있다{계13:13}
3).저주의 자식{14}
{καταρασ τεκνα} 이 말은 {그러니까 저주를 상속받는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멸망의 자식}(살후2:3) {진노의 자식}{엡2:13}등이 있다.
2.이단자들이 끼치는 해독
1).이단을 가만히 끌고 들어옴(1)
이단{αιρεσισ} 이 말은 자의(自意) 선택함을 의미한다. 즉 정통 교리에 불합한 의견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멸망케 할{απωλειασ} 이 말은 이단의 두려움을 지적하여 그것에 대한 신자들의 주의 깊은 방어를 그윽히 역설한다. 이단은 그 자체가 멸망하고 남을 멸망케 한다.
가만히 끌어들여{παρεισαξσυιν} 밀수입하다. 몰래 교활하게 가져오다란 뜻이다.
2).많은 사람으로 호색을 쫓게 함{2}
호색{ασελεγιαισ}은 각양의 또한 반복되는 호색적 행위를 가리킨다. 이 사본에는 {멸망하는 것:απωλειασ}으로 되어 있다.
이단자들은 호색을 서로 동반한다. 그 이유는
(1).성령이 안 계시니 남녀가 문란하고
(2).진리의 규모를 떠나서 정욕의 행위를 숨겨 주기 위해 모든 간사한 교훈을 세우기 때문이다.
3).진리가 훼방 받음(2)
이단자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불신자로부터 교회가 훼방을 받게 된다.
4).점과 흠이 됨{13}
교회의 오점이 된다는 뜻이다 .
3.이단자들의 행위
1).사신 주를 부인{1}
사신{αγαραζω} 이 말은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사는 것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는 것을 표시한다.
2).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10}
호색하는 것 같은 것을 의미한다.
3).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10}
주관하는 이 {κοριοτησ}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이나 그 밖에 모든 인간적 주권자들을 가리킨 듯하다.
4).담대하고 고집하여 영광있는 자 훼방하는{10}
담대하고 당돌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천사와 충성된 사역자들을 훼방한다.
5).백주에 열락을 좋아하는{13}
낮에{εν ημερα}
(1).매일 {2).낮시간에 {3}.일시적인 등으로 해석된다. 즉 열락은 밤에 하는데 백주에까지 열락을 좋아한다.
열락{τρυψη}
좋은 정신적인 기쁨을 표시하기도 하나{창2:25, 3:23, 겔28:13}, 기쁘게 여김{ηδονη}은 쾌락주의의 어근으로서 감각적인 저급한 쾌락을 가리킨다.
6).불의를 심고 불의를 거두는{13}
값{μισθοσ}은 삯 또는 보응의 뜻이다.
7).성도의 연회를 향락으로 끌고 가는{13}
거짓 교사는 성도들과 같이 애찬에 참석해 있으면서 사랑의 정신은 없고 쾌락에만 잠기는 때문에 그 신성한 애찬식의 점과 흠이 되는 것이다.
8).음란한 행동을 하는{14}
음심{μοιχαλισ}은{마12:39, 16:4} 또한 음녀{롬7:3, 약4:4}이다. 그들의 눈은 음녀로서 가득하였다.
9).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14)
연단된{γεγυμνασμενην}은 탐욕에 단련된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는 완료형 분사로서 그들의 탐욕 행각이 습관화한 것을 표시한다.
4.이단자들의 미혹
1).지은 말을 가지고{3}
거짖 교사들은 그들의 제자들을 달콤한 말로써 속이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제자들을 이용하여 그 욕망을 만족시킨다. 그들은 종교 상매인, 매승{賣僧}에 불과하다.
2).굳세지 못한 마음을{14}
1:12절의 진리에 {섰으나}의 반대로서 진리에 깊지 못하고 믿음이 약한 자를 꾀어 같이 범죄한다는 것이다{잠7:22}.
3).자랑과 정욕으로(18)
허탄한 {υπερογκα}은 {지나치게 부풀은}것을 의미한다. 즉 내용이 없으면서 말만 크게 하는 것이다. 말이 많으면 내용은 빈약한 법이다.
겨우{ολιγωσ}는 {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의 뜻이다.
4).자유를 준다고{19}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갈5:1, 요8:32}를 오해하고 남용하였다. 신앙자는 율법과 육체에서 자유를 얻었음으로 엄격한 도덕 생활에 구애될 것이 없다고 선전한 듯하다. 그들은 자유와 방종을 혼돈한 것이다.
멸망{ψθορα}은 {부패}를 뜻하는 바 도덕적 부패를 가리킨다. 그 부패의 결과는 멸망이다.
5.발람을 들어 증거
1).바른 길을 떠나 미혹{15}
유다서 11절에 발람의 예를 들어 거짖 교사를 경계한다. 민22:1-41에 의하면 발람은 큰 보수에 탐이나 발락에게로 가려 했다. 그는 하나님을 보는 눈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귀로 하여금 그에게 말하게 하셨다. 이 욕심에 눈이 어두워 옳은 길을 좇지 아니하는 거짓 교사의 말로도 역시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나귀와 같은 짐승으로 하여금 그들을 심판하게 할 것이다.
2).불의의 삯을 좋아하는{15}
하나님의 뜻보다 물질을 더 사랑했다. 물질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얻는 물질은 불의의 삯이다.
3).미친 길을 행하는 자(16)
미친 것{παραψρονια}은 {마음}{ψρην} {곁}{παρα} 자기 마음을 떠난 것을 표시한다.
6.이단자들의 가증한 일
1).물 없는 샘{17}
성지에는 물 없는 샘이 많다{창37:24, 렘14:3} 깊기만 하고 물 없는 샘이 갈한 길손을 실망시키는 것처럼 진정한 지식이 없는 거짓 교사들은 순수한 구도자를 실망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물이 없는 것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렘2:13, 요7:38}.
2).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17}.
(1).확고한 신념 없이 세상 풍조, 사상을 좇고 혹은 움직이고 혹은 소멸된다.
(2).비를 얻으려는 기대를 뒤집는다.
(3).냉기를 얻으려는 기대를 뒤집는다.
(4).바람은 해를 주고 안개는 아무 이도 주지 못한다 등 여러가지 해석 중에 2번을 택한다. 이는 거짓 교사들은 자신 없는 신앙과 행동으로 빛되신 주님을 가리우는 존재들이다라는 뜻이다.
7.이단자들의 결과
1).속히 멸망을 자취함{1, 3}
이 말씀은 배교자의 죄가 심히 큼에 따라 그 받을 벌이 극히 엄할듯이 무섭게 느껴지는 것을 표현한다{히 10:25}.
2).타인을 멸망케 하다가 자신도 물론 멸망함{12, 19}
거짖 교사들의 태도는 뒤죽박죽으로 이성 없는 동물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그 운명도 동물과 같이 멸망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동물의 경우는 그것이 그들의 타고 난 운명이지만 거짓 교사들의 경우는 그것이 불의의 보응이다.
3).나귀에게 책망을 받음{16}
거짓 교사는 짐승 같고{12} 오히려 더 못한 것이다. 선지자는 원래 사람을 가르치는 자이지만 거짓 선지자는 오히려 짐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4).예비해 둔 곳에 감{17}
하나님의 계시로서 일하지 않고 마귀의 사자로 일한 그들은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해 예비된{마25:41} 어두움으로 운명된 것이다.
8.이단자들의 멸망의 확실성
1).범죄한 천사를 용서치 아니함을 보아서{4}
인간보다 뛰어난 천사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면 인간이 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면 할 수는 도저히 없다.
{지옥에 던져}{ταρταρωσασ} 이 말은 신약이나 70인역에서 다시 보이지 않는 낱말로서 (ταρταροσ에 던졌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보통.(γεεννα)를 사용한다{마5:22, 29, 10:28, 막9:43, 45}. 아마 {게엔나}의 일부는 그 가장 깊은 곳으로서 마귀의 처소로 볼 것이다. 이들은 대심판 때 끌려 나와 일반 불신자의 심판에 앞서 정죄를 받아 영원한 불못에 던지운다{계20:7-10}.
2).노아 당시 범죄를 용서치 아니한 것 보아서{5}
두 번째 예로는 노아 홍수로서 구원받을 자와 엄연히 구별되었다.
3).소돔, 고모라의 범죄를 용서치 아니한 것 보아서{6}
불로 인한 심판이다{창19:}
{멸망}{καταστροψη}은 뒤집히는 철저한 멸망을 말한다. 화산이 폭발로써 잿더미가 되어 버리는 멸망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9.심판의 공평
1).경건한자 구원{9}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시험 밖에서 보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험 속에서 보존{연단}하시고 거기에서 건지시는 것이다.
2).불의한 자 형벌{9}
{불의한 자}란 불신, 불의한 세상 사람을 가리킨다.
{심판날}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한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
{지키시며}는 현재 분사로 현재에 다 이미 하나님의 벌을 받아 고통하고 있다.
10.성도들의 생활
1).의를 전파하는{5}
세상이 불의하면 할수록 타협치 말고 불의를 대항하여 싸우며 나가서는 의를 전파해야 한다.
2).음란한 행실을 보고 고통하는{7}
사람은 남들의 불의와 음란에 감염되기 쉽고 또 표면으로 그 같은 일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중심으로는 그것에게 끌려 복종의 충동을 받기 쉽다. 그러나 롯은 남들의 죄악을 봄으로 심령에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 사회의 죄악에 미혹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들의 범죄를 걱정하는 높은 성결이다.
{무법}{αθεσμοσ}은 도덕을 짓밟고 선량한 풍습과 습관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3).불법한 행실을 보고 듣고 심령이 상하는{8}
{불법}{ανομοσ}은 율법에 배반되는 것으로 부도덕 상태를 가리킨다.
{상함}{βασανιζω}은 {고문을 당한다}라는 뜻으로{마8:6, 계9:5} 양심의 극한 고통을 표시한다. 아마 롯의 고통은 타인의 범죄와 자신의 물질에 치우친 결정의 자책에 대한 일이었을 것이다.
11.주의
1).위사가 일어났음을(1)
{민간}{λαοσ}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르쳤고{벧전2:9} 이방인에 대해서는 {γενοσ}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민간에는 신탁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예언한 거짓 선지자가 많았고 그들에 대한 비난도 준렬하였다{왕상22:6, 렘23:16, 겔13:1}.
2).거짓 선생이 들어왔음을{1}
{거짓선생}{ψευδοδιδασκαλοσ}
여기에만 보이는 낱말이다. 선지자는 하나님께로 직접 신탁을 받아 이를 백성에게 전파하였고 선생은 율법을 공부하여 이를 가르쳤다. 이 두 직의 차이는 신약시대에도 있었으나{고전12:28} 본문의 의하면 점차적으로 동일시된 모양이다.
3).배교자가 처음보다 더 악해짐{20}
주님의 일곱 마귀의 비유{마12:43-45}를 방불케 한다. 처음이란 믿기 전을 가리킨다. 거기에서 믿고 주를 알게 되어 일단 죄의 길을 떠났다가 타락하여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면 처음 믿지 않을 때보다 악해진다. 일곱마귀가 더 들어갔기 때문이다.
4).거룩한 명령 버리지 말 것을{21}
진리를 안 후에 이어서 떠나가는 모습처럼 비참하고 가련한 것은 없다. 거기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강퍅한 마음과 영원히 닫혀 열지 않으려는 양심과 하나님을 적으로 대적하려는 악마적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히 6:4-6, 10:26-31}.
5).죄악을 반복함을{22}
{잠26:11}에서 인용한 바 베드로가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토로한 비난은 여기서 그 절정에 달하고 있다. 곧 베드로는 그들을 개, 돼지에 비교하고 있다. 이 비교는 꼭 들어맞는 비교이다. 왜냐하면 일단 구원에 들어온 자는 개, 돼지가 아니라면 옛 더러운 그 속으로 도로 들어가는 그러한 일은 감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ii.재 림{3:3-10}
예수께서는 자신이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세대에 재림하신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을 말씀했다{마16:28, 23:34}. 사도들은 주님의 나타나시는 것이 접근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을 사용했다{롬13:12, 히 10:25, 약5:8, 계1:3}. 그러나 예수께서는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 자신의 재림은 {오랜 후}일 것이라고 암시했다{마25:4}. 바울은 주님이 곧 돌아오실 것을 지나치게 확신함을 경계하고 {배교} 후가 아니면 재림이 없을 것이라고 명백히 서술하였다{살후2:2-3}.
본서에서 베드로는 인간적 기대에 있어서는 1000년이 하루 같을 것이며{8}를 아마 재림은 아직 수 천년의 장래일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시간을 계산하지 않는다.
이상 여러 성구들을 종합하면 성도는 언제나 주의 재림을 대망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1.기롱자
재림 전에 기롱하는 자가 출현한다.
1).출현 때
(1).말세에{3}
{말세}{εσχαταισ ημεραισ}는 문자적으로 {끝날들}이다. 이 구절은 유대인의 말세론을 반영하는 것으로 메시야의 날인 것이다{사2:2, 미4:1, 호3:5, 엡3:1, 암8:11, 9:11, 스8:5, 딤후3:1, 행2:17}.
2).기롱하는 방법
(1).자기 정욕대로 행하면서{3}
정욕을 좇아 생활하는 하는 잡념{雜念}의 소유자들은 교리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기롱할 뿐이다.
3).기롱의 내용
(1).주의 강림은 없다고(4)
주의 재림은 예수께서 확신하신 바요{막13:26, 8:38, 9:1, 요14:3} 사도들의 증거이다{고전15:51, 살전4:15, 약5:7}. 그러나 배교자들은 사탄의 힘으로 이를 부인한다.
(2).조상들이 죽은 후에 부활이 없다고{4}
{조상}은 인생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3).만물이 창조 때와 같다고{5}
고대로 우주는 아무런 심판받은 사건도 없이 그냥 무변동했고 또 앞으로도 무변동하리라는 우주 영원설이다. 이것은 범신론 사상이다.
4).기롱하는 이유
(1).하늘이 옛부터 있는 것을 잊으려고{4}
{잊으려}{λανθανω}는 '숨기려'{막7:24, 눅 8:47} '부지중에'{히 13:2}등의 뜻이다. 기롱자들은 창7:에 노아 홍수 심판을 일부러 모르는 척하려고 한다. 만약 이 기사를 인정한다면 인류 종만 심판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2).물과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신 것을{5}
창 1장의 천지 창조의 기사를 부인하는 행동이다.
5).기롱자에 대한 답변
(1).물로 세상 심판{6}
창7:11에 노아 홍수의 물 심판이 있었으니 앞으로 이런 심판이 없다고 부인할 자 없다.
(2).하늘과 땅도 불사름{7}
대 종말적 심판에는 땅만 아니고 하늘도 참여한다. {그 동일한 말씀} 곧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고 홍수 심판을 땅에 내린 그 능력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면 만물은 영원 자존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와 심판 아래에 있는 것이다{시97:3, 사66:15, 16, 단7:7-10, 말4:1, 살후1:8}.
(3).불경건한 자 멸망 때까지 보존{7}
지금은 하나님의 인내로서{롬2:4} 그 존재를 계속해 갈 뿐이다. 이윽고 그 심판을 받아 불신자의 멸망의 때는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오래 보존됨은 창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멸망도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오게 되는 것이다.
2.주의 재림
1).한 가지 잊지 말것
(1).하루가 천년 같음을{8}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존재로서 우리와는 그 시간 관념이 다르시다. 영원도 지금의 한 순간이요 한 순간도 영원이다{시90:4}.
(2).천년이 하루 같음을{8}
기롱자들의 오류는 하나님의 위대에 대한 그들의 불찰과 하나님께서 그 본질에 있어서처럼 그 행사에 있어서도 인간의 도량보다 훨씬 초월하시는 사실에 대한 그들의 불찰이다.
2).재림이 더딘 이유
(1).아무나 멸망치 않게 하기 위해{9}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려는 것이 주의 절실한 소원이다.
(2).다 회개하기에 이르기 위해(9}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참고 계시는 것이지 약속을 지연시키는 일은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마음에 눈을 돌려야 하지 시간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주는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속히 오기를 원하신다{계22:20}. 그러나 멸망 당할 영혼들을 보시고는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참고 계시는 것이다.
3).주의 재림의 형편
(1).도적같이{10}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마24:43, 눅12:39} 바울도{살전 5:2} 요한도{계3:3, 16:15} 이를 기록하고 있다.
'주의 날'{행2:20, 엡3:4, 고전5:5, 살전 5:2} '하나님의 날'{3:12} '그리스도의 날'{빌2:16}, '심판의 날'{2:9}과 같은 것으로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
{도적같이} 이 말은 도적은 예고 없이 온다. 도적은 해를 끼치려고 온다. 그러나 살전 5:4에 성도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2).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게{10}
주님이 재림하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는 낡은 하늘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만다. 이 말은 화살이 공기 속을 꿰뚫고 날아갈 때 발하는 소리를 말한다.
(3).체질이 풀어짐{10}
체질{στογεια} 원소, 초보, 소학 등의 뜻이 있다. 여기서는 {원소}라고 하는 번역이 유력하지만, 원소 속에는 불도 내포되어 있다는 관계에서이다. 또한 전후의 배열상 천체 곧 일월성신으로 보는 것이 낫다.
{풀어지고} 이 말은 분해되는 것을 의미한다.
(4).땅에 있는 것도 다 드러나게{10}
하늘 자체 천체뿐 아니라, 땅과 그 속에 있는 천연적 또는 인공적인 모든 것이 다 없어질 것이다. 이땅의 아름다움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움에 비할 수 없으며 어떠한 인공의 아름다움도 그 추악상을 드러낼 때가 올 것이다.
iii.심판을 앞둔 성도들의 태도{3:11-18}.
1.마땅한 사람이 될 것
{마땅하니}{δει} 이 말은 장래 두려운 심판 광경, 앞에서도 안심을 주기에 필요한 현재 생활 태도를 묻는다.
1).거룩한 생활과 경건하므로{11}
이는 둘 다가 복수명사들이니 생활의 각 방면에 거룩하며 경건해야 될 것을 가리킨다.
2).하나님의 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므로{12-13}
{하나님의 날}은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
{바라보고}는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유유히 모든 고난과 시험을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간절히 사모함}{σπευδοντοσ}은 서두른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긴장하여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로 초조하게 일하는 태도이다.
2.힘쓸 것
1).흠 없이 평강을 나타냄{14}
신자가 현재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살며 안식하여 영혼이 평강을 누린다.
2).오래 참음이 구원될 줄 알고(15)
주의 관용의 덕택으로 구원받게 되는데 비웃는 자들은 이 관용을 재림의 지연으로 생각하고{9} 비웃음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거짓 교사의 그릇된 자유 방종에 화를 입지 말고 그 구원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3.주 의
1).억지로 해석하다가 멸망함을 {16}
{억지로 푼다}{στρεβλοω} 이 말은 {비틀다}의 뜻이다. 우리 말로 아전인수격의 강인부회를 가리킨다. 교리적으로 잘못되고 도덕적으로 방종한 자들이 성경을 비뚤게 해석하여 자기들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다가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2).미혹받아 믿음 떨어질까{17}
{미혹}{πλανη} 이 말은 미혹한 결과의 잘못을 말한다.
{이끌려}{συναπαχθεντεσ}는 {함께 그 편에 이끌려}의 뜻이다{갈2:13}.
{굳센 데}는 튼튼한 기초, 튼튼한한 지위 등의 뜻이다.
{떨어짐}{συναπαγω}은 일정한 장소에서 떨어지는 것을 뜻한다. 갈 2:13에서 베드로 자신이 바나바와 함께 유혹에 떨어진 것을 기록하고 있다.
4.자라갈 것
{자라가다}{αυξανετε}는 성장하다. 발육하다의 뜻이다.
1).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18}
구속의 은혜에 깊이 체험함이다.
2).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18}
{지식}{γνωσει}은 신앙의 성장에 필요한 지식이다.
3).영원한 날까지
(영원한 날){ημεραν αιωνοσ}은 영원까지도라는 말과 같다. 영원한 날에는 밤이 없다{계22:5}
II.히브리서에 나타난 이단사상
.이단을 피하라{13:7-9}.
이단이란 종파 혹은 당파를 가리킨 말{행24:14, 갈5:20, 딛3:10, 벧후2:1}. 교회 안에서의 당파, 건전한 복음에서 이탈된 자를 의미한다.
1.이단자의 출현 방법
1).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7}
{하나님의 말씀을}{τον λογον του θεου}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행4:29, 빌1:14, 벧전4:11}.
이단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타나서 다른 복음을 전한다.
2).여러 가지 다른 교훈으로 끄는{9}
당시에 많이 나타난 유대인의 율법주의와 동방의 신비주의와{그노시스} 이단과 헬라인의 철학사상과 같은 것을 총칭한 것이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한 편지와 디도서에서 여러번 언급하였다{딤전1:3, 19, 20, 4:1-3, 6:3-5, 20, 딤후2:16-18, 23, 3:7-9, 4:4, 딛3:9-11}. 사도 요한도 언급한 바가 있었다{요일2:26, 4:1, 2. 요이7-12}.
{여러가지}{ποιχιλαισ}는 잡색의
이 {여러 가지 교훈}이란 유대인이 구약의 교훈과 실천과 신약과의 결합을 기도(企圖)하여 만든 교리 같은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한 기도(企圖)였다{엡4:5, 골2:8}.
{바른 교훈}{딤전1:10, 4:10, 딤후1:13, 4:6, 딛1:9, 13, 2:1, 딤전6:3}에 비하여 하는 말인데 바른 교훈은 예수의 참 복음을 가리킴이요 다른 교훈은 복음이 아닌 이단을 말하는 것이다.
2.이단을 피하는 법
1).인도자를 생각해 보아야(7)
{인도하던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 유력자들에 대한 보통 칭호로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막연한 권위가 주어져 있었다. 공식 신분은 아직 결정되지 않고 공식 직명은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고}는 오래 지내보고, 모든 것 살펴보고의 의미이다.
2).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믿음을 본 받음으로{7}
{행실의 종말}{την εκβασιν τησ αναστροψησ} 이 말은 이 세상에서의 {생활 태도 의 종국}의 뜻으로 주로 순교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휼륭한 생애와 평안한 승리의 죽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의하여 보고}{αναθεωρουντεσ}는 잘 생각하라. 주의 깊이 관찰하라. 연구를 거듭하라는 뜻이다.
{믿음을 본 받으라}는 제자가 스승을 모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듯:왕하2:}.
3).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하므로{9}
종교의 신앙은 신령한 은혜에 의지할 것이요, 세상 물질이나 법칙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3.이단을 피하여야 할 이유
1).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니{8}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성품을 가르침으로 지도자를 본 받으라는 교훈에 굳건한 기초를 제공한다. 지도자는 모두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는 과거나 현재나 앞으로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다.
{영원토록}{εισ τουσ αιωνασ}은 하나님에게 대해서만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영원한 신이시요, 중심이시다{고전10:11, 계5:1-6:17, 사9:6}.
2).이단에 끌려 가게 되니{9}
이단은 자석과 같아서 가까이 가면 끌려간다. 인사도, 영접도 하지 말고 멀리 해야 한다{요이9-11}.
3).식물로는 유익을 주지 못하니{9}
부정한 고기{레11:}, 우상 제물{롬14:, 고전8:, 골2:16, 23, 딤전4:3-5, 8, 딛1:15}은 쓸데 없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성도는 세상에 물질 문제로 신앙의 동요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물질 문제{식물}로 유혹을 많이 한다.
4.이단을 대하는 자세
1).한 두번 훈계하고 멀리하라(딛3:10)
결론
각교회에 나타난 위사들
(행15:23-24)의 안디옥 교회의 미혹자
고린도의 자천자(고후11:16)
갈라디아의 요란한 자(갈1:7)
에베소의 한 이리(행20:29)
빌립보의 십자가 원수(빌3:18)
골로새의 철한(골2:4,8,18)
버가모의 발람의 교훈 (계2:13-14)
두아디라의 이세벨 유혹(계2:20)을 경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