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 천탑. 탑과 부처가 지천이다. 그냥 많다고 생각했을 뿐, 정말 천 개일까 결코 물어보거나 헤아려 보는 일은 없었다. 논에 서 있는 부처는 그저 일하는 아저씨로, 밭에 기대어 누워있는 부처는 밭일을 하다 잠시 쉬고있는 아주머니 정도로 여겼다. 산 속과 바위 밑의 부처는 나무를 하는 아낙이나 소풍을 온 가족이려니, 숲 속이나 암반 위의 우뚝 솟은 탑은 나무이거나 그냥 나무처럼 서 있으려니 했다. 하늘의 성좌를 닮았다거나 배치가 일정하여 우주의 신비를 품었다거나 행주형국(行舟形局)하는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와불(臥佛)을 향하여 몇 발자국 옮기면 마당만큼이나 넓고 평평한 바위를 만난다. 마당 바위다. 그 오르는 길목 좌우에 돌탑이 수두룩하다. 작은 돌멩이 몇 개를 얹은 것에서부터 제법 튼실하게 쌓은 탑까지 바위 위와 틈새에, 소나무 곁이나 숲 언저리에까지 난장이라도 펼친 듯하다. 정말 천탑을 쌓고 싶어서일까? 도란도란 혹은 외로이 쌓은 사람들의 마음만큼이나 다양하다.
누구일까?
언제부터일까?
운주사는 우리 고장(전남 화순군 도암면)의 명물이었다. 그래서 내가 도회지로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까지 운주사는 줄곧 한 철도 거를 수 없는 소풍 장소였다. 즉, 도암면에 있는 천태초등학교, 중앙초등학교 그리고 화순도암중학교의 오직이자 유일한 소풍장소였다. 한가위와 설에 성묘하듯, 우리는 유년시절부터 봄가을 운주사를 찾았다. 투덜대는 친구들도 많았다. 으레 소풍 장소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었으니 식상하지 않았겠는가.
운주사는 마을 뒷산과 약간 다를 뿐, 역시 우리들의 놀이터에 불과했다. 우리들은 운주사 논밭을 배경 삼아 공도 차고 닭싸움과 기마전도 했다. 그러다가 숨바꼭질을 할 때는 부처와 탑들이 아버지의 등이자 어머니의 품안처럼 작은 우리들을 숨겨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보물은 늘 부처나 탑 주변에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쩔 때는 우리들의 모습이 천불이고 천탑이었을 때도 있었다. 나무 하나 돌 하나 손길 닿지 않는 곳이 없었던 운주사였다. 기실 운주사에 돌탑은 없다. 성황당이나 아기 무덤에 돌을 던지며 기원을 했을 지는 모르나 고을 사람들은 돌을 쌓으며 소망을 빌지는 않았다. 소망이 없었겠는가마는 천상의 석공들이 이루어 놓은 작품에 돌 하나 더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누가 그런 발상을 했을까?
하루가 다르게 수북히 쌓여 가는 돌탑. 누구의 소망이 탑으로 솟아오른단 말인가? 저 무수히 많고도 다양하게 쌓여 가는 탑들은 어떤 이들의 소망이란 말인가? 무너지고 넘어져 하루하루 다른 형태로 쌓이는 돌탑. 필경 천불 천탑의 숫자에 연연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제 돌탑이 오히려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타탕 탕탕탕! 드르륵 드르륵!
타탕 탕탕탕! 드르륵 드르륵!
1980년 5월.
나는 광주에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 때문에 떠난 운주사를 다시 찾는 때는 그로부터 오래되지 않은 2학년 때였다. 2년만에 다시 내 발로 스스로 다시 고향 땅을 찾았다. 빛고을 광주가 철철철 피를 흘릴 때, 선량한 광주의 생명들이 무차별 총성을 맨 가슴으로 막아내며 동지를 부르고 있을 때, 나는 그 팽팽한 사선을 등지고 허덕허덕 광주를 벗어나기 바빴다. 나는 왜 그랬을까? 나를 폭도라며 내 가슴을 과녁 삼아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기던 그 얼룩무늬들의 말을 따라 고분고분 광주를 벗어났을까? 그때 왜 고향이 생각났을까? 왜 하필 고향이 그리웠을까? 나만 살겠다며 고향으로 내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집으로 가는 황톳길 길목마다 그들의 피보다 더 진한 발자국이 총총 찍혀지는 것을 마음에 고이 세기고 돌아온 나는 몇 날 며칠을 앓아 누웠다. 내 내부에 끓어오르는 살아있음에 대한 비겁한 분노로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불면의 눈동자를 이끌고 무작정 내친 곳이 바로 운주사. 한 나절을 허위허위 걸어 운주사에 나는 서 있었다. 목만 덜렁 남은 불두, 코와 귀가 떨어져나간 석불들이 금남로 위에서 쓰러져갔던 사람처럼 눈을 부릅뜨고 나를 응시했다. 고등학교 2학년 봄날 운주사는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1982년 5월
애당초 도시 생활은 내게 어색했다. 낮에는 교정(校庭)과 도로에 터지는 화염으로, 밤에는 흙벽 사이로 주인집 부부의 숨넘어가는 소리로, 백열등 불빛 밑에서 하는 공부는 늘 허기에 찼다. 대학 새내기 시절이었던 나는 글을 써야한다는 압박감과 취업 공부를 해야 한다는 페르소나 사이에서 적잖은 고민을 했고 그 갈등은 술만 취하면 집요해지는 주인집 아저씨의 야성과 달빛처럼 높이곰 올라가는 아낙의 교성에 휘말려 힘겹게 80년대를 수음으로 달래곤 했다. 또 다시 2년 뒤 나는 운주사에 있었다. 반달골 자락 방죽골 가파른 언덕길을 헉헉거리면서 천형(天刑)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운주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영귀산에 나는 서 있었다. 거기 영귀암 공사 바우(工事岩에)서 바라본 운주사는 숨막힐 듯 고요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온통 진초록 빛깔의 운주사. 경내 커다란 수양버들은 치렁치렁한 초록 색소를 가지런하게 빗어 내렸고, 점심 공양을 위한 쌀 뜬물 넘치는 냄새와 함께 몽실몽실 하얀 연기가 요사체 뒤란으로 피어올랐다. 무논에는 모내기를 서두르는 아저씨의 논물 가두기가 한창이었고, 주변 산자락 언덕배기에는 아직도 보리가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운주사를 내려보는 순간 답답하고 숨막혔던 가슴이 잔잔해졌다. 가슴이 풀리면, 허위허위 산자락에 남겨진 옛 허물을 더듬으며 산벚나무 꽃 그림자에 졸기도 하고, 채석장 패인 곳에 나란히 누워도 보다가 결국은 내세(來世)의 희망을 간직한 영원한 몽상가, 미륵(彌勒)의 어깨를 기대고 그가 애타게 꿈꾸는 꿈속 세상에 잠기고 말았다.
1984년 5월.
그로부터 또 다시 2년 후, 나는 또 다시 운주사를 찾았다. 이번에는 입영 영장을 들고서였다. 언덕처럼 줄곧 찾은 이곳으로 걸음을 내친 것 또한 마음이 유순하지 못함이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명분에 가슴도 저몄지만, 무사 귀환을 스스로 바라는 점도 없지 않았다. 동시에 삶에 대한 나름의 구체적인 방향을 찾아가고 있음도 느낄 때였다.
발길 닿는 대로 항아리탑 자락으로 내려오면서 흙담 너머 아담한 대웅전을 훔쳐보았다. 섬돌 위, 몇 켤레 고무신이 하얗고 정갈하게 여승의 맑고 고운 마음인양 석양에 반짝였다. 목탁 소리, 풍경 소리 가득한 경내를 가로질러 석탑과 석불을 지나서 가장 낮은 자리로 향했다. 가장 낮은 자리,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놓은 듯한 앙상한 송장탑(거지탑)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핏줄을 거슬러 상처 입은 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천(母川)을 회귀하여 온 연어처럼, 이곳이 내 문학과 삶의 산란을 해야 할 곳임을 막연하게 그려보았다.
운주사는 없다.
이제 우리 곁에 운주사는 없다고들 말한다. 어느 때부턴가 나를 포함한 고향 몇몇의 선후배들은 그렇게 말을 했다.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무당개구리와 맹꽁이가 영역을 다투며 목청껏 울어대던 무논과 연노랑 다래꽃과 하얀 미영꽃을 피워냈던 목화밭은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공원과 쉼터로 바뀌었다. 자연 부모 같고 아제 아짐 같았던 석불도 범접 못할 부처님이 되었다. 갈겨니 산메기 퉁가리 종개 그리고 미꾸리가 살던 실고랑은 수많은 탑신과 불두를 먹어 삼키고서 제법 틀을 갖추었다.
운주사 경내도 바뀌었다. 요사체와 본체 달랑 두 채였던 운주사, 경내를 두르고 있던 담쟁이 우거진 돌담, 그리고 그 돌담에서 주런히 경내를 지키던 늙은 감나무들의 원무도 사라졌다. 요란한 기계음과 망치소리가 이어지더니 어느 덧 여느 절에서 볼 수 있었던 우리를 압도하는 우람한 사찰이 들어섰다. 우리들의 집과 진배없었던 아담한 절은 간데 없고 입구에 우람한 일주문도 세워졌다. 새롭게 치장과 채색을 하고 단청도 했다. 참으로 우리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관광객들이 모여들어서 도량을 신축했는지, 신축을 하고 나니 관광객들이 더욱 모여들었는지는 모른다.
모년 모월 모시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즈음이었다. 사찰 곳곳에 돌탑이 쌓아졌다. 운주사 돌탑의 주인은 그들의 흔적이고 그들의 소망의 용솟음이었다. 사찰을 개보수 및 신축하는 일에 대해 달가워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다할 지역 주민들도 아니다. 우리의 것을 우리들의 것으로 생각하여 우리의 것을 우리들에게 빼앗겼다는 것 또한 싫어하거나 슬퍼할 사람들도 아니다. 천상의 석공들이 천불을 쪼듯 지상의 장인들이 정성스럽게 새롭게 역사를 창조한다는 데 어찌 왈가 불가하랴.
2004년 5월.
20년이 지난 오늘 또 천불동에 나는 서 있다. 80년대 광주에서 수없이 들어 던졌던 돌멩이 대신 관광객들이 들고있는 돌멩이를 들고 있다. 누구를 위해 발원을 할 것인가. 20년 전, 불의에 항거하며 정의의 이름으로, 자기를 버리고 타인과 국가를 위해 처절하게 싸웠던 그 발원이 담긴 돌멩이와 늙은 부모나 처자식 그리고 자신의 영욕을 위한 발원이 담긴 돌멩이, 세월의 변화만큼 견고한 울타리를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고있다. 돌탑. 돌탑에 내 모습을 비춰본다. 그리고 욕심이겠지만 새삼 와불이 일어서기를 발원한다. 국가과 민족을 위한 발원을 해 본다. 다시 운주사를 운주사이도록 하고싶다. 평온한 와불처럼 와불이 꿈꾸는 용화세계 가, 미륵 전설처럼 와불이 미소짓는 평온이 널리널리 퍼지길 기원하며 돌탑 위에 돌을 하나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