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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노동자의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공무짱
자본주의와 고용불안
1. 들어가며
1997 대 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 두 자리 숫자 4개를 맞혀야 하는 로또복권 4등 당첨확률 733 대 1보다 세 배나 더 낮은 확률이다. 이것은 무슨 인기아파트 분양경쟁률이 아니라, 작년 하반기에 치러진 어느 9급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이다. 7명 모집에 자그마치 14,000명 가까이 몰렸다. 이렇게 공무원 시험에 열풍이 분 것은 극심한 취업난과 고용불안 탓이다. 공무원처럼 월급이 많지 않더라도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된 일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노동자 2명 가운데 1명이 ‘고용불안’을 느낄 정도로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서울에 있는 제조업체 노동자 500명을 대상으로 2005년 4월에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46.2%가 ‘매우 심각한’(11.4%) 또는 ‘약간 심각한’(34.8%) 고용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지금까지 최근 몇 년 동안 ‘일자리’가 최대의 화두가 되어 왔다.
그런데 고용불안은 단순히 고용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업자들은 생계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낙담하고 좌절하며, 가족 관계, 친구 관계까지 망가지기 쉽다. 半실업 상태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조건 때문에 신음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임금을 좀 더 받고 일자리가 안정되어 있다는 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전반적인 고용불안 시대에 자본으로부터 고용, 임금, 복지 등 다방면에서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용불안은 ‘일단 일자리는 유지하고 보자’며 임금, 복지 등에서 양보하는 수세적 태도, ‘일할 수 있을 때 많이 벌고 보자’는 편협한 실리주의,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가 사는 게 중요하다’는 소심한 개인주의, ‘물량이 안정되고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노예적 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다. 그리고 자본과 정부의 교활한 공작과 맞물려 고용불안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실업노동자와 취업노동자, 심지어는 같이 일하고 있는 노동자 사이를 갈가리 찢어 원수처럼 충돌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마디로 고용불안은 노동자들을 노예의식으로 찌들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가련한 노예들로 전락시키고, 노동자운동의 꿈과 패기를 모두 앗아가는 괴물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극심한 고용불안은 노동자계급에게 위기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고용불안은 노동자계급에게 자본주의 사회가 왜 이토록 야만적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곱씹어볼 수 있게 하며, 정규직만의 단결, 비정규직만의 투쟁을 넘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의 장벽을 넘어 모든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해서 자본주의 체제의 심장을 겨냥하며 싸울 수 있는 계기 또한 제공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고용불안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신, 고용불안이 불러일으키는 기회를 정확히 붙잡기 위해서는 고용불안이 도대체 얼마나 심각하며, 그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고용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전진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2. 고용불안, 얼마나 심각한가?
일자리가 없다
실업 급여를 신청한 노동자가 10년 만에 최대치다. 그만큼 실업자가 많이 늘어났다는 증거다. “2006년 1~11월 실업급여를 새로 신청한 사람은 2005년 같은 기간에 비해 8.8% 늘어난 56만여 명으로, 연말까지는 61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듯 많은 이웃[자본가언론이 노동자들을 ‘이웃’이라고 부르는 건 웃기는 위선이다]이 갑자기 직장을 잃고 이곳저곳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다. 구조조정[정리해고]이 극에 달했던 1998년에도 43만여 명이더니 노무현 정부 들어 2004년에는 그 수준조차 넘어섰고[47만 명] 이후 줄곧 같은 추세로 늘고 있다. 특히 20~30대가 60%에 육박한다.”(1월 2일 ≪문화일보≫)
지금 공식 실업자만 82만 명에 이른다. 하지만 자본가 정부의 공식 실업통계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일주일에 한두 시간만 일해도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자리를 구하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 포기한 ‘실망실업자’도 빼버린다. 일자리를 얻어 가정생계에 보탬도 되고 사회활동도 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어 가사노동만 하고 있는 주부들도 수두룩하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실제 실업자 수는 훨씬 더 불어날 것이다. 특히 청년실업률은 8%대에 이른다. 군 입대자와 대학원 진학자를 제외하면, 대졸자의 실제 실업률은 40% 정도까지 올라간다.
오랜 동안의 경제침체로 새로운 일자리가 별로 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회사가 성장했음에도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지난 5년간, 고용노동자 수가 1,000명 이상인 기업 세 곳 가운데 한 곳은 이익이 늘었지만 오히려 고용은 줄었다. 가령 기록적인 흑자경영을 거듭해온 현대자동차는 국내 정규직 고용을 거의 늘리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은 대규모 흑자로 전환하고 업종이 호황인데도 5년간 노동자 수를 계속 줄였다. 기아자동차는 5년 간 2배 넘게 이익을 내고도 고용은 9.9% 늘리는 데 그쳤다. 이런 결과는 몇몇 기업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다. 1,000명 이상 대형사업체의 노동자 수가 96년의 145만에서 80만으로, 8년 만에 절반 정도로 뚝 떨어졌다. 이것은 자본가들이 항상 늘어놓는 ‘성장이 일자리 늘린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일 뿐임을 잘 보여준다.
대부분의 일자리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자본주의의 생리상 항상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운동이 급성장하자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분할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정규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IMF 위기’라는 공황을 맞아 자본가 정부가 98년 2월에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같은 노동시장 유연화제도들을 도입하자 비정규직이 대폭 늘어났고, 정규직은 빠르게 비정규직으로 대체됐다. “96년 이후 2005년까지 피고용자는 약 198만 명이 늘어났지만, 이 가운데 정규직은 41만 명에 불과한 반면 임시직과 일용직은 각각 약 115만 명과 42만 명 늘었다. 정규직은 전체 피고용자의 58.1%에서 52.1%로 줄었고, 임시직은 27.9%에서 33.3%로, 일용직은 14.0%에서 14.6%로 늘어났다.” 비정규직은 이제 850만 명에 이르러 1,400만 노동자의 60%나 차지하고 있다. 신규 고용의 70%는 비정규직이다. 아예 관리자들을 빼고는 거의 90~100% 가까이 비정규직으로 채우고 있는 공장들도 많다. 서산의 파워택이나 동희오토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단기계약직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11개월, 6개월, 3개월 단기 계약직은 물론이고 1개월짜리 초단기 계약직까지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다. 자본가들이 ‘후’ 불면 꺼져버릴 수밖에 없는 바람 앞의 촛불 신세다. 그리고 2년 동안 계약을 여러 차례 갱신해 계속 고용이 된다 해도 그 뒤에 정규직이 되는 건 절대 아니다. 이미 경총에서 설문조사한 결과, 약 90% 정도의 자본가들이 기간이 지난 다음 해고하겠다고 밝혔다. 어느 자료에 따르면, 2006년 2월 현재 기간제근로와 장기 임시근로를 합친 임시노동자는 462만 명에 이른다. 그리고 이 중 2년 이상자는 119만 명이었다. 따라서 2007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비정규악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많게는 119만 명이 해고될 확률이 크다. 또한 당시 462만 명의 평균 근속연수가 약 1.78년이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이 대거 해고될 수 있다. 비정규직 대량해고가 불을 보듯 훤한 것이다.
이미 이것은 서서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2006년 연말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재계약을 앞둔 자본가들이 계약기간을 단기간으로 조정하거나 해고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가령 서울대병원에서는 계약기간이 3년이던 비정규직을 2년 이하로 줄여, 2년 미만 비정규직을 해고할 명분을 마련했고, 2년 미만 1년 이상 비정규직 180명에 대해 갑자기 계약해지 통보를 했다. 이 때문에 자본가언론들조차 올해 가장 큰 ‘노사불안’ 요소는 비정규직법에 따른 ‘노사 간 충돌’일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심각한 고용불안을 겪는 노동자들은 말 그대로 ‘현대판 노예’에 다름 아니다. 다음 자료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불안정노동자 고용 사업장 절반이 임금체불에 최저임금미달. 노동부는 올해 1∼5월 장애인, 기혼 여성, 외국인, 비정규직 등 불안정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전국 3,786개 사업장을 지도 점검한 결과 46%가 넘는 1,753개 사업장에서 3,481건의 법 위반사항을 적발했다고 6월 29일 밝혔다. 이번에 적발된 기업들 중에는 최저임금 미만 지급, 임금 상습체불 등 생계를 위협하는 고용주들이 많았다. 울산 울주군의 한 의료용품 회사는 재직 노동자 8명의 4∼5개월 치 임금을 주지 않았고, 전남 순천의 한 업체는 노동자 9명에게 하루 2만 4,800원 미만의 급여를 지급하고 이를 시정해달라는 요구도 무시해 입건됐다. 이밖에 노동자들에게 야간노동을 시키고도 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대전 서구의 한 업체도 입건 조치됐다.”(2006년 6월 29일자 ≪문화일보≫)
끝을 모르는 자본가들의 무한탐욕이 모든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돌리려고 하고, 비정규직의 삶을 밑바닥까지 추락시키려 하면 할수록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투쟁을 선택해야만 한다.
3. 왜 고용이 이토록 불안한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불안은 필연이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적대적이다.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면 자본가의 이윤은 줄어든다. 노동자의 임금을 깎을 때만 자본가는 이윤을 늘릴 수 있다. 이 점을 많은 노동자들은 날카로운 계급적 직관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적대적인 노동자와 자본가는 자본주의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생산을 하려면 노동력(생산의 주체적 요인)과 기계, 공장, 원료 같은 생산수단(생산의 객체적 요인)을 결합시켜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때만 생산할 수 있다. 노동력의 주인인 노동자들은 자본가들한테 고용될 때만 생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에만 노동자들은 먹고 살 수 있다. 전체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노동해방 사회가 오기 전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이 작업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회사를 안정화해서 고용안정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량과 회사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안정이란 (공기업의 특수한 경우 등을 예외로 한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이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 사적 이익(돈벌이)을 위해 무한경쟁을 벌이며 생산하는 체제다. 그렇기 때문에 한 기업 차원에서는 완벽할 정도의 계획화가 가능하지만(일 단위, 주 단위, 월 단위 생산계획이 대부분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그 점을 보여준다), 사회 전체 차원에서는 초보적인 계획화도 불가능하다(가령 자동차산업의 과잉생산이 심하다고 해서 현대-기아, GM대우의 생산 물량을 사회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자본주의 사회 전체는 본질적으로 무계획적이고 무정부적이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은 호황, 불황, 공황을 반복하는 경기순환에서 잘 드러난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고 시장을 좀 더 빼앗기 위해 맹렬하게 투자하고 생산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이에 따른 호황은 곧 공황을 낳는다. 호황의 정점에서 발생하는 완전 고용에 가까운 상태는 자본가들에게는 임금 부담을 높여 이윤율을 저하시키기 시작한다. 게다가 호황의 기회를 붙잡으려는 자본가들의 정열적인 투자는 전체 투자자본의 구성 비율이 기계와 원료 등의 불변자본 중심으로 급속도로 재편되도록 만들어, 이윤율을 저하시킨다. 이런 가운데, 절대적으로는 늘어나는 소비보다 더 큰 규모로 생산이 확대된다. 호황 시기에 지속적으로 투자된 자본은 생산의 효율성을 크게 높여 놓고, 호황기의 정점에는 공장 가동률이 최고치에 달해서 엄청난 양의 생산물을 토해놓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생산과 소비 사이의 격차가 극대화되고(전반적 과잉생산), 생산품을 제대로 팔지 못한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고 대개의 기업들이 공장가동률을 급격하게 낮추기 시작한다. 결국 공황이 닥친다. 노동자들을 덮치는 해고와 임금 하락은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소비능력을 급격하게 약화시킨다. 위험을 깨달은 은행들은 빌려준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고, 금리는 높아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황이나 공황은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어날 수밖에 없는 기본 생리현상이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은 고용불안으로 직결된다. 자본주의는 호황기에는 노동자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가 불황기, 공황기에는 노동자들을 마구 토해낸다. ‘IMF 위기’로 불리는 97~98년 한국공황 때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등이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정리해고했다가 그 이후에 다시 흡수했으며, 최근 다시 배출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심각한 불황과 공황의 시기가 아닐지라도 자본들 사이의 첨예한 경쟁은 항상 기업을 불안정하게 만들며, 그 결과 노동자들의 고용도 항상 불안정하다. 한쪽에서 잔업, 특근을 밥 먹듯이 하며 과도노동에 시달릴 때, 다른 한쪽에서는 일자리가 없어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일이 흔하며, 자본주의 시장의 불안정성과 예측 불허성 때문에 얼마 전까지 장시간노동으로 혹사당했던 노동자들이 어느새 일거리가 턱없이 부족해 생계가 위협당하고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노동자착취가 핵심인 자본주의에서 고용불안은 피할 수 없다
사기업에 비해 일거리가 좀 더 안정적인 공기업(철도, 통신, 전력 등)에서는 고용이 안정적일까? 공기업을 선호하는 현상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공기업도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기업이며 돈벌이(수익성)를 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착취해야만 한다. 그래서 KT(구 한국통신)는 97년부터 2001년까지 4년 동안 총인원의 25%에 해당하는 1만 5천 명을 짤랐다. 그 이후에는 공기업이라는 옷을 벗어던지고 아예 민영화되어 다른 통신업체들과 필사적인 이윤경쟁을 벌이고 있다. 철도공사 역시 KTX와 새마을호 승무업무의 외주화 정책 강행에서 드러나듯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뒤흔들고 있다.
휘청거리는 회사에서는 고용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나마 성장하는 회사에서는 고용이 안정적일까? 현실을 엄밀히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이 말하는 성장이란 ‘이윤극대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윤은 노동자들을 더 강하게 쥐어짤 때만 늘어난다. 가령 자본가들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노동자의 숫자를 대폭 줄인다. 이렇게 더 적은 인력으로 공장을 돌리는 것은 곧장 자본가의 돈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든다. “2001년 2월 영국의 철강업체인 코러스가 전체 노동자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6천 명을 짤랐을 때, 이 기업의 주식 가격은 9%나 치솟았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맨얼굴이다.
노동자들이 정년퇴직해 숫자가 줄어도, 공장과 설비가 늘어나도 인력은 결코 쉽게 늘어나지 않는다.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을 노동자들이 죽기 직전까지 높이고 늘리는 것이 사장들의 이윤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쩔 수 없이 인력을 늘리더라도, 신규인력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이른바 인건비가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고용불안은 자본가들에게 짭짤한 ‘경제적 이익’만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갈가리 찢어 무력화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분할통치 수단이다. “2005년 6월 기아차 광주공장 신규채용 때 취업원서를 받으려는 긴 줄이 1km를 넘어 장사진을 이뤘다. 이처럼 수많은 청년들이 ‘공장노동’을 원할 정도로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노동자들의 경쟁은 격화되고 있다.”(2006년 9월 19일자 ≪한겨레21≫) 이렇게 실업노동자들이 공장 바깥에서 긴 줄을 형성하고 있을 때, 자본가들은 이들을 이용해 취업노동자들의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투쟁을 억누른다. 자본과 정권은 대공장 정규직을 노동귀족이라고 매도하며 사회로부터 고립시킨다. 이렇게 해서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 간의 대립이 강화된다.
이런 분열과 대립에 길들여지게 되면, 정규직이 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을 ‘고용의 방패막이’로 이용하기도 한다. 현자 정규직 노조가 사측과 체결한 고용안정협약서는 비정규직 확대를 인정하고, 회사가 어려울 경우 비정규직을 우선 해고한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회사가 어려울 때 비정규직을 짤라서 정규직의 고용을 보장받겠다는 것이다. 정규직의 일거리가 없어질 때,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자리를 빼앗고 비정규직을 해고시키는 것을 합의해주는 경우도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비정규직은 정규직에게 강한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분열과 대립이 강화된다.
하나로 단결한 노동자는 강하지만, 둘로 여럿으로 쪼개진 노동자는 약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들은 모두 무기력해져 자본과 정권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한다. 그것이 바로 자본가계급이 고용불안을 통해 핵심적으로 노리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고용불안도 커진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초기 영국에서 면방직업의 발달로 양털의 수요가 증가했을 때, 양을 많이 길러 돈을 벌려고 지주들이 농민들을 쫓아냈던 것을 비꼬았던 말이다. 지금은 ‘로봇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공장자동화, 사무자동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말이다.
자본가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기계를 쓴다. 다른 자본가들보다 더 좋은 기계를 사용하면, 더 낮은 비용으로 물건을 생산할 수 있어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이를 경제학에서는 ‘특별이윤’이라 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한 자본가가 사용했던 기계가 점차 보편적으로 사용됨에 따라 특별이윤은 사라진다. 계속되는 경쟁은 더 나은 신기계를 사용하도록 자본가들을 밀어붙인다. 그에 따라 자본가들은 가령 과거에 10명이 했던 일을 5명에게 시키며, 나머지 5명을 ‘잉여인력(과잉인구 : 이것은 자본가들이 이윤을 늘리는 데 필요하지 않은 인구라는 뜻이다)’으로 간주해 정리해고하려 한다. 이런 일이 지금 많은 현장에서 아주 자주 일어나고 있다.
“<현대차 아산공장 ···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현대차의 주력 차종 쏘나타와 그랜저가 생산되는 충남 아산공장. 2일 오후 아산공장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한적했다. 널찍한 공장에 근로자의 모습을 찾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57초당 1대 꼴로 차량이 생산된다’는 현대차 관계자들의 사전 설명을 들은 터라 프레스 공장, 차체 공장, 도장 공장, 조립 공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공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 완성되지 않은 앙상한 차체가 이동하는 소리만이 공장 안을 가득 채웠다. 1만평 규모의 프레스 공장에서는 전구를 갈아 끼우는 근로자 2명과 다른 근로자 2명 등 총 4명만이, 바로 옆에 위치한 1만평 규모의 차체 공장에서는 불과 10여명의 근로자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렇지만 공장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공장 내부 한 라인의 모니터가 보여준 가동률은 오후 4시 26분 현재 99.6%. 아산공장 설립 이후 100%의 가동률을 기록한 게 2번뿐이라고 하니 높은 가동률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지난 7월 한 달 동안의 파업에 따른 생산 차질을 만회라도 하듯 현대차 아산공장은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그 비결은 근로자들의 ‘목표 생산량 달성’ 의욕과 함께 ‘자동화’에 있다는 게 현대차의 설명이다. 실제로 프레스 공장은 가장 많은 330여대의 로봇이 투입돼 96%의 자동화율을 기록하고 있었고, 도장 공장에는 62대의 로봇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70%의 자동화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차체 공장 내 한 부분인 용접 공정의 경우에는 100% 자동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작업 특성상 대부분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의장 공장의 경우에도 30여 대의 로봇이 투입돼 앞좌석 투입, 스패어 타이어 투입, 워셔액 주입 등의 작업과정에서 근로자들을 돕고 있었다. 엔진공장을 제외한 이들 4개의 공장에 투입된 전체 로봇은 450대 가량. 특히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이곳 공장에서 가동되고 있는 로봇의 90% 이상은 현대중공업의 로봇사업부가 제작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AGV(Auto Guided Vehicle), LGV(Laser Guided Vehicle) 등이 각각 철심 및 레이저를 통해 무인으로 이동하며 무거운 자재를 실어 나르고 있었으며, 각 차의 지붕에 붙어있는 RFID(무선인식)는 다양한 옵션에 따라 만들어지는 차량들의 생산 흐름을 자동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줬다.
동시에 작업자들의 편의를 위해 작업자의 위치, 키에 따라 조립을 기다리고 있는 차체의 높이가 조절되는 라인, 50%에 달하는 모듈화 등도 현대차 아산공장이 ‘57초당 1대’의 차를 생산하는 힘이었다.”(2006년 11월 2일자 연합뉴스)
연합뉴스 같은 자본가언론은 자동화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짤려 나갔는지,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자동화가 더 확대될수록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게 될지도 얼마든지 헤아려볼 수 있다.
선진 자본주의일수록 고용불안이 심하다. 왜 그런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생산력이 발전해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력의 비율이 아주 낮기 때문이다. 선진 자본주의에서는 아산공장의 상황이 더 빨리, 더 광범위하게 실현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자동화의 확대는 로봇제조공장 같은 새로운 산업의 확대를 요구한다. 하지만 자동화로 인해 쫓겨나는 노동자가 새로운 산업에서 일자리를 얻는 노동자보다 더 많다. 왜냐하면 로봇제조공장 같은 새로운 산업일수록 높은 자동화로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력의 비율이 낮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은 평균 10%대로 실업률이 아주 높다. 미국이 5~6%의 실업률로 상대적으로 낮다고 하지만(골이 빈 자본가 경제학자들은 5~6%의 실업률이면 ‘완전고용’ 상태라고 우기기도 한다), 그것은 해고가 아주 자유롭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율이 아주 높기 때문일 뿐이다. 선진국의 사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생산성이 높을수록 노동자의 고용불안이 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아주 반동적임을 뜻한다. 전체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장악해 사회적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노동해방 사회라면, 노동생산성이 높아져 과거에 8명이 8시간씩 하던 일을 4명이 8시간만 해도 될 때, 8명이 4시간씩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사회봉사를 하거나, 정치에 참여하고, 시를 쓰며 그림을 그리는 등 더 창조적이고, 더 고차원적인 노동, 놀이와 결합된 즐거운 노동,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결국 자동화가 원인이 아니다. 자본주의 초기에 사람을 잡아먹었던 것은 양이 아니라 토지 주인들이었고, 더 나아가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자본주의 사회였다. 지금도 노동자들을 차가운 길거리로 내모는 것은 기계(자동화) 자체가 아니라 기계를 오직 돈벌이만을 위해 사용하는 자본가들이다. 원인은 이 자동화의 성과를 노동자들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자본주의의 착취적 속성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생산성이 높을수록 자본가들은 더 많은 노동자들을 실업자로 전락시킬 뿐이다. “향후 30년 이내에 세계 전체 수요에 필요한 모든 재화를 생산하는 데 현 세계 노동력의 단지 2%만 필요하게 될 것이다.”(제레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다면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우리 노동자들은, 그리고 후손들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큰 고용불안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릴 것이다.
해외공장 증설과 공장이전이 고용불안을 가중시킨다
자본가들은 아주 값싼 임금, 무노조에 고분고분한 노동자들, 현지 시장에 가까운 장소를 찾아 중국으로, 동남아로 공장을 이전한다. 특히 섬유, 신발, 가죽, 완구, 식품 등 노동집약형 산업의 이전이 두드러졌다. 2002년부터 2년 동안 노동자 300인 이상인 대규모 공장만 해도 1,930개에서 1,587개로 343개나 줄었다. 이틀에 한 개 꼴로 대규모 공장이 문을 닫은 셈이었다. 그에 따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그냥 실업자로 머물거나 비정규직이 됐다.
자본가들이 해외공장을 새로 짓거나 늘림에 따라 국내고용은 줄이고 해외고용을 확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가령 현대자동차는 미국, 인도, 중국, 터키 등 국외투자에 치중해 해외공장 인원이 2000년 약 3천 명에서 2006년 10월 현재 1만 3천 명으로 1만 명 가량 더 늘어났다. 전자업계는 최근 몇 년 사이 해외공장이 빠르게 증설돼 전체 해외인력이 국내인력보다 많은 ‘고용 역전’ 현상도 일어났다. 가령 LG전자는 지난해 전체 해외인력이 3만 3천 명에 이르러 2만 7천 명 수준의 국내인력 규모를 앞질렀다.
자동차산업은 10년 넘게 공급과잉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전 세계 자동차 생산설비 규모는 연간 8,600만대 수준이다. 반면 시장수요는 중국 등 신흥시장 성장세를 감안하더라도 6,200만대에 불과하다. 2,400만대 규모의 생산설비는 그대로 놀려야 하는 힘겨운 상황이다.”(2005년 11월 ≪매일경제≫) 그렇기에 자본가들은 시장을 한 뼘이라도 더 쟁탈하기 위해 치열한 판촉 전쟁을 벌이는 한편,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저렴한 해외고용은 더 확대하고 국내고용은 대폭 줄이려 할 것이다. 그에 따라 98년 현대자동차, 2000년 대우자동차 대량해고 사태보다 훨씬 더 큰 대량해고 사태가 들이닥칠 것이 예견되고 있다. 고용을 지키기 위한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능력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4.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가?
물량 확보, 회사 살리기가 고용을 보장하는가?
자본가들과 ‘신노동연합회’ 같은 그 똘마니들은 경쟁력을 강화해야 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회사의 경쟁력은 노동자들을 적게 쓰고, 많이 부려먹을 때 강화된다. 따라서 경쟁력을 강화해서 일자리를 늘리자는 주장은 ‘자본가의 이익’과 ‘노동자의 이익’은 화해할래야 화해할 수 없다는 점을 모르거나 무시한 주장이다.
지금 많은 노동자들이 회사에 일거리가 부족할 때 고용불안을 느낀다. ‘이러다 일자리 잃는 거 아니냐’라는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게 고용을 안정시키는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즉 ‘물량유지(확대) = 고용안정’이라는 환상을 품는 것이다. 그 결과 물량을 잘 확보하는 대의원과 노조 간부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물량을 놓고 다른 부서, 다른 공장 노동자들과 경쟁을 벌이며 분열하기도 한다. 하지만 물량이 고용을 보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는 논리의 연장인 ‘물량 = 고용’이라는 등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즉 노동자계급의 독립적 이해를 철저히 추구하지 못할 때, 그리고 노동자의 단결투쟁력이 무너져 있을 때, 자본가들은 이 빈틈을 이용해 외주화, 비정규직 확대, 정리해고를 포함해 노동자들을 가차 없이 공격한다. 고용안정의 최대 보루는 노동자의 날카로운 계급의식과 강력한 단결투쟁력인데, ‘물량 = 고용’이라는 환상에 빠져 단결투쟁을 방기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을 더 심각한 고용불안의 수렁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두 가지 점에서 ‘물량 = 고용’이란 등식은 허구적이다. 하나는 ‘현재’ 물량이 풍부하더라도, ‘미래’에는 결코 그것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끊임없이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패자가 되는 것이 허다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다른 하나는 ‘풍부한 물량’을 기대하면서 신차종을 유치하더라도, 그것이 기대치를 충족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이유에서다. 자동차산업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신차종의 성공 여부는 누구도 모른다!’ 일부러 성공 가능성이 없는 신차종을 내놓는 기업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신차종 중 실제로 성공하는 모델은 손에 꼽히는 것이 현실이다.
‘회사가 있어야 노동자도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회사가 어려울 때 회사 살리기에 동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사를 살린다는 것은 곧 노동자들 자신의 임금을 삭감하고, 복지를 축소하며, 비정규직을 짜르고 더 나아가 정규직의 일부까지 짜르는 데 동참한다는 것을 뜻한다. 회사 살리기는 자본가 살리기이지 노동자 살리기가 아닌 것이다. 설사 회사 살리기 캠페인을 통해 회사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성장가도에 들어섰다고 해보자. 자본주의에서는 같은 업종의 회사들이 치열하게 경쟁한다. 따라서 한 회사의 노동자들이 팔을 걷어붙여 회사 살리기에 나서면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도 위기의식을 느껴 경쟁력 강화에 나서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받을 것이다. 자본가들은 “저 회사를 봐라. 이대로 가다간 우리 회사가 망하게 생겼다. 우리 공장 노동자들이 허리띠를 더 꽉 졸라매야 한다.”며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기 손발을 묶고 고통을 떠안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경쟁업체에서 생산이 확대되면, 과잉생산과 무정부성은 더욱 커져 팔리지 않는 물건들이 쌓이고 회사가 더 큰 위기에 부딪혀, 더 빨리 파산할 수 있다. 결국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 극에 이르고 있는 지금과 같은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회사를 살리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맹렬한 캠페인은 과잉생산에 따른 파국을 더 키우고, 더 빨리 앞당길 뿐이다. 회사를 살려 고용을 보장받겠다는 순진한 환상이 오히려 고용불안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개인 경쟁력을 강화하는 게 대안인가?
자본가들은 경쟁 이데올로기로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세뇌시킨다. 그래서 경쟁에서 살아남은 유능한 노동자만 고용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고, 경쟁에서 도태된 노동자들은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리거나 언제든지 짤릴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런 자본가의 논리에 세뇌당한 노동자는 개인 경쟁력을 강화하는 게 고용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라고 믿는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고용불안은 자본주의에서 피할 수 없다. 고학력 실업자들이 수두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무리 개인의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용불안을 피할 수 없다. 설사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개인의 실력을 키워 상대적으로 고용불안을 덜 겪는다 해도, 그것은 아주 일시적일 뿐이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 경쟁력으로 고용안정을 지속적으로 보장받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환상이다. 만약 그것이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이는 다수의 동료 노동자들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노예의 길이지, 노동자의 길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이런 개인 경쟁력 강화 이데올로기는 노동자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림으로써 단결을 파괴하고, 그 결과 고용불안을 더욱 가중시킨다. 자본가들은 굳게 단결해 투쟁할 수 있는 노동자는 쉽게 공격하지 못하지만, 모래알처럼 흩어져 무기력한 노동자는 얼마든지 쳐내버릴 수 있다.
창업은 더더욱 대안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소기업이 거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산산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객관적 운명이다. 대기업에서 명예퇴직한 다음 호프집이든 뭐든 창업을 한 수많은 노동자들의 쓰라린 경험담이 그 점을 잘 말해 준다. 정리하자면, 고용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개인적 탈출구는 전혀 없다.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해결책만 가능하다.
5. 진짜 대안은 무엇인가?
노동해방만이 일자리를 확실히 보장한다
노동해방 사회에서만 노동자는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 노동해방 사회에서는 전체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장악해 사회적 필요를 위해 계획적으로 생산한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의 과잉생산, 무정부성, 무한경쟁은 사라진다.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사회 발전과 자아실현을 위해 기쁘게 노동할 수 있다. 노동해방 사회에서는 생산력이 발전해 과거보다 소수의 노동자가 일을 해도 그 전만큼(또는 그 전보다 더) 생산할 수 있을 경우, 여유로워진 노동자들에게 곧바로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며, 새로운 일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과 훈련도 사회가 책임질 것이다.
노동해방 사회에서는 모든 노동자가 가령 하루 4시간만 일하고도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사회에서는 ‘한쪽에서의 과도노동’, ‘(실업에 따른)다른 한쪽에서의 강요된 나태’라는 불구 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만약 어떤 사람이 두 손으로 들면 부담스러울 게 없는 물건을 한 손은 비워둔 채, 한 손으로만 들고 끙끙대고 있다면 그는 바보 멍청이가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들의 무한한 탐욕 때문에 그처럼 멍청한 짓을 계속 저지르고 있다. 노동해방 사회는 ‘노동자 민주주의에 입각한 사회적 계획화’를 통해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것이다. 일자리 찾기를 포기한 실망실업자, 주부들을 포함해 모든 실업자들은 모두 안정되고 좋은 일자리를 얻을 것이다. 그 반대편에서 취업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지금까지 노동자를 착취하기만 했던 자들, 놀고먹었던 사회적 기생충들에게 반드시 일을 시킬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철의 규율을 그동안 노동자의 피땀을 빨아 살았던 자본가 흡혈귀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셋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거대한 낭비(국방비, 자본가들과 부자들의 사치 향락비, 광고비, 중복투자에 따른 낭비 등)를 말끔히 없애버릴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고용불안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해방 쟁취’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한다.
고용불안에 맞선 당면 투쟁강령
노동해방만이 고용불안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안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고용불안에 맞선 투쟁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안에서일지라도 노동자계급은 고용안정을 위한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계급이 굶주림과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고, 노동자해방으로 전진하는 데 필수적인 계급적 각성과 단결투쟁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계급적 요구를 내걸고 투쟁할 것인가? ‘비정규직 철폐’, ‘외주화(비정규직화) 저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은 가장 기본적인 요구다. 이와 함께 ‘모든 형태의 해고 금지’가 전면에 제기되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단결 투쟁을 가로막고, 그럼으로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끔찍한 노예의 처지에 머물게 만드는 위력적인 제도가 바로 ‘계약해지’다. ‘비정규직보호법’이란 이름의 비정규직 대량생산법이 만들어져 비정규직들이 2년마다 대거 길거리로 내몰리게 됐다. 이미 이 악법의 시행을 앞두고 비정규직을 해고시키는 짓들이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 미국발이든, 중국발이든 세계대공황이 닥치면, 아니 한국경제가 더 깊숙이 위기의 늪에 빠지면 정규직도 대량 정리해고의 칼날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은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IMF 위기 때 정리해고를 직접 당해봤거나 두 눈 뜨고 똑똑히 지켜봐 왔던 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몸을 잔뜩 움츠려 왔다. 이런 불안감을 확실히 떨쳐버려야 노동자들은 투쟁에 광범위하게 나설 수 있다.
따라서 ‘단 한 명의 해고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약한 고리라고 할 수 있는 한시하청, 단기계약직 등의 해고(계약해지)부터 분명히 반대하고 저지하는 투쟁부터 제대로 전개해야 한다. 만약 노동자들이 한시하청이나 2․3차 하청노동자, 단기계약직, 아르바이트의 해고를 인정하면, 그 다음은 1차 하청노동자나 장기계약직이 해고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정규직의 해고를 순순히 받아들이면 자본은 정규직을 거침없이 해고시켜 버릴 것이다. ‘단 한 명의 해고도 인정할 수 없다’, ‘모든 형태의 해고 금지’를 내걸고 싸워야 한다. 이것 또한 자본가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이기에 자본가와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무겁게 뒤덮고 있는 고용불안의 먹구름은 오로지 자본가들을 상대로 한 비타협적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걷어낼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기본급으로 생활임금 쟁취’, ‘노동강도 완화’도 한국노동운동이 전면적으로 내걸어야 하는 투쟁강령이다. 한쪽에서는 하루 12시간, 주 60시간 가량 중노동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거리가 없어서 고통을 받는 상황에 맞서려면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진심으로 이런 요구를 내걸고 투쟁한다면, 일자리를 얻지 못해 신음하고 있는 실업노동자들은 그 요구를 자신들을 향해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라고 느낄 것이다. 하루 12시간 1,000명이 일했다면, 6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할 경우 2,000명으로 고용인원을 늘릴 수 있다. 물론 새로운 인원은 모두 정규직으로 충원해야 한다.
단, 이 경우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실질임금 삭감이 없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급만으로도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생활임금을 쟁취해야 한다. 이것 또한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노동자계급이 지속적으로 제기해야 할 요구다. 노동시간을 단축하더라도 그만큼 노동강도가 강화되면 새로 인력을 충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강도 강화 반대, 더 나아가 노동강도 완화를 동시에 요구해야 한다. 그럴 때만 기존 노동자는 건강을 해치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고, 실업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물량확보’ 경쟁 대신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투쟁’을! 노동자들이 ‘물량 = 고용’의 관점을 갖고, 물량 싸움을 벌이면 노동자의 단결은 철저히 파괴된다. 회사는 이 점을 잘 알기에 물량 문제로 장난을 치며 노동자들을 농간한다. 노동자들은 물량확보 대신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이란 대안을 확고하게 움켜쥐어야 한다.
그렇다면 해외공장을 증설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대자동차노조처럼 ‘불가피할 경우 해외공장 노동자들부터 정리해고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회사는 세계경제의 불황 등으로 국내외 자동차시장에서 판매부진이 계속되어 공장폐쇄가 불가피할 경우 해외공장의 우선 폐쇄를 원칙으로 한다.” 현자노조 단협 제32조 7항). 그것은 정규직의 고용안정을 위해 비정규직을 우선 정리해고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노동자적인 요구다. GM, 르노 등 다국적기업의 노동자들이 국경의 장벽을 넘어 계급적으로 단결해서 싸웠던 것에서 배워야 한다. 노동자들은 이제 더욱더 한 나라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국제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민족적 이기주의, 일국적 조합주의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노동자 국제주의로 철두철미하게 무장해야 한다.
노동해방 현장 정치활동을 전면화해야 한다
맑스는 이미 160년쯤 전에 이렇게 말했다. “자본가들은 더 이상 사회를 지배할 능력이 없다. 그 까닭은 자신의 노예들[노동자들]에게 노예 상태에서의 생존조차 보장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공산당 선언) 나날이 더 심각해지고 있는 고용불안은 낡고 반동적인 이 체제를 하루빨리 매장해달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우회적 고백에 다름 아니다. 노동자계급은 이런 고백을 정확히 알아듣고, 한줌 자본가들의 천국을 압도적 다수 노동자들의 해방사회로 바꿔야 할 자신의 역사적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심각한 고용불안이 자본가들의 착취와 억압, 기만을 강화하는 데로 귀결되느냐 노동자의 날카로운 계급적 각성과 굳센 단결, 노동해방을 향한 힘찬 전진으로 귀결되느냐는 전적으로 노동해방주의자들과 노동자 투사들의 분투 여부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해방 현장 정치활동의 전면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현장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상투쟁에 긴밀히 결합하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중요한 쟁점들을 노동자계급의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정치적으로 선동하고, 조직하는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고용불안 앞에서 거듭 되풀이되고 있는 노동자운동의 위기, 정체, 혼란은 노동해방 현장 정치활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그것을 통해 노동해방 정당 건설의 굳건한 토대를 만들지 않고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